세상 이야기/*말 건넴*~

 

 

협동조합 붐이 내게로 밀려왔던 몇 년 전 품었던 설렘으로 지금 서 있는 분명한 이유를 다시 생각하며 <가장자리>라는 협동조합으로 세상 읽기를 시작하는 아침이다.

 

대통령 탄핵 인용 선고를 하루 남긴 오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4년을 협동조합 <가장자리> 조합원으로 있었다. 이젠 과거의 일로 되었다. 이사장으로 자리를 지켜낸 홍세화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희망을 품고 달려오던 시간이었다.

 

자주 만나거나 조합원으로 활동은 게으른 자의 변명으로 남았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가장자리에서 보내준 <말과 활>이란 잡지와 어느 때부턴가 잡지가 멈추고 책 한 권이 오기 시작했어도 변화를 감지하지는 못했다. 다음 카페 활동도 있었고 사유의 공간도 있다.

 

나는 마음만 있었다. 혼자서 책 읽고 조합비를 내는 것 말고는 협동조합을 위한 구체적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나마 변명으로 삼고 싶은 것은 꾸준한 책 읽기와 작은 모임을 하고 있다는 정도일 게다. 경제활동을 전제로 하는 협동조합이기에 가장자리가 추구하는 목적과는 결이 달랐다는 현실의 문제가 충분히 이해된다.

 

다행스럽게 홍세화 선생님은 그 마음을 지켜 임의단체인 <소박한 자유인>으로 전환을 했다.

 

<소박한 자유인>의 발기인 홍세화 선생님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소박한 자유인이기에 편지 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짓다라는 한국어 동사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습니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식의주가 모두 짓다의 목적어가 됩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 중 아무도 부족함이 없도록 잘 짓고 잘 나누어야겠지요.

 

제가 느닷없이 짓다라는 동사를 꺼낸 것은 우리 각 개인에게 주어진 과제가 나를 잘 짓는 데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 태어나 되돌릴 수 없는 나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는 결국 각자의 몫입니다. 긴장이 필요합니다. 그 증거로서 책과 함께 사는 것만한 게 없다고 믿습니다.

 

<소박한 자유인> 발기인 홍세화

 

내가 걸어오고 선택한 여러 갈래의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내가 가는 길은 늘 마음이 먼저 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할 사람이 늘 그리웠다. 사람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고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존재와 두루 관계를 갖고, 그들을 깊이 느낌으로써 삶에 참여하고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겠지. 아름다운 동행에는 우리가 수없이 있다.

 

경제 조건이 악화하고 정치가 불안해지고 절망적 분위기가 만연해지면 사회적 신뢰는 사라진다. 우리가 정서적으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어느새 우리는 이 사회를 잠식한 모든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사람보다는 효율을 앞세워 숨을 헐떡거린다. 이 노동의 가혹한 현실과 부정의를 물리칠 때 우리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할 이유가 사라진다.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신나게 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 나라의 말로 책을 읽고 수다를 떨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때 우린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영어 몰입 교육으로 음악 대신 영어 듣기 파일을 안 들어도 되고, 성형으로 동글납작한 얼굴을 깎아 낼 이유도 사라진다. 그저 나답게 생긴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도 될 세상이면 싶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내는 일. 우등과 열등 인간의 구분으로 진행되는 사회는 전체주의를 자각하는 일이 필요했다. 국가권력이 공인으로 자격 없는 이들의 손에 쥐어졌을 때 국민은 기만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는 그들에 손에 놀아나지 않을 공정한 언론이 필요하다. 공영방송의 역할을 바로 세우고 국민을 대의 하는 국회의 책임을 요구하며 너무도 당연한 알 권리가 보장되어야 했다.

 

Pay it for world*~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실천을 했던 나눔 운동,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마음들이 모여 협동조합이 탄생했지만, 지금까지 온갖 어려움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감의 벽은 참으로 높다. 이 땅에 사람을 향한 가치가 넘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함께 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 참여는 아름다운 동행이다. 그 동행을 가능하게 할 순간의 선택은 늘 내 몫이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과제, 나를 잘 짓는 데 있다.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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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Essay

사회학자 필립 페셀은 여성과 남성의 특성을 네 가지 성향으로 말했다. 여성은 어머니, 애인, 전사, 선생님이고, 남성은 농부, 유목민, 건설자, 전사로 나타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든 이 네 가지 성향이 다 있거나 그중 한 가지, 또는 복합적으로 있을 수 있다. 그중 어느 것이 더 발달하는 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가 자기에게 부과한 역할에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할 때 생긴다. 때로는 강요 때문에 격렬한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의 특성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목표를 이루어내는 것은 아닐지. 그런 세상은 영화 속에서나 열린다 해도 미리부터 포기할 일은 아니다.

과연 보이는 것만큼 행복할까. 1998년 게리 로스 감독의 영화 <플레전트빌>의 중심엔 TV 프로그램 '플레전트빌'이란 시트콤이 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인기 프로그램은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른 저녁,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여보, 나 왔어!”라고 말하면,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반갑게 맞는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들로 채워진 저녁 식탁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이 시트콤을 시청하는 열혈 데이비드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이혼한 부모님은 헤어진 이후에도 전화로 서로 싸우고, 하나뿐인 쌍둥이 여동생과는 서로 관심도 없다. 집에 와도 차가운 냉동식품을 데워 홀로 끼니를 때운다. 영화에서 데이비드가 플레전트빌시트콤에 빠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시트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각 에피소드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어 어떤 퀴즈를 내도 그것에 관한 한 척척 맞춘다. 드라마 덕후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쉽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괴짜에다 소심한 남자아이일 뿐이다. 반면에 여동생 제니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책이라곤 읽어본 적도 없지만, 학교에서 소위 잘 나가는 소녀들중 하나다. 어쩌면 방탕하다고 할 만큼 연애도 거침없이 자유분방하다 

정작 영화나 텔레비전 안의 인생이 보이는 것처럼 행복할까? 아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삶은 보이는 게 전부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그럴듯한 세트 안의 인생은 조명이 꺼지면 더는 그곳에 없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드라마가 종영되고 나면 사라지는 이미지와 비슷하다. 

나도 드라마에 푹 빠질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배우 박신양을 좋아하다 보니 그가 출연한 드라마는 DVD도 소장하고 며칠 낮과 밤 동안 그의 세상으로 떠난다. 또 좋아하는 영화 속으로 긴 시간 여행도 한다. 우리는 왜, TV 속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가 되는 것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 데이비드를 통해 현실에선 가능하지 않은 일상의 판타지를 경험하고 싶은 것일 이유가 가장 클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는 영상으로 고정해 놓은 이미지로 있을 뿐이다. 보여주기 위해 만든 삶이기에 그것으로 끝이다. 그다음은 보는 이들의 감정에 남아있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 분노일 수도 때론 낭만적으로 로맨틱하게 내 안에서 작은 미소를 한 두 번 짓게 해 줄 수는 있다 

학수고대하던 학교 킹카와의 데이트가 있는 제니퍼와 시트콤을 봐야만 하는 데이비드의 금요일 저녁이다. 둘이 리모컨을 서로 가지려다 박살이 나고, 때맞춰 등장한 심히 수상쩍은 TV 수리공 할아버지가 시트콤 '플레전트빌'에 데이비드가 척척박사라는 걸 알고 신기한 리모컨을 건넨다. 둘은 리모컨 작동과 동시에 촌스러운 복장에 흑백의 몸으로 시트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인 화목한 가정의 아들과 딸로 변해 그 안에 있다 

시트콤의 플레전트빌은 현실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들이 교묘하게 비껴가는 곳이다. ‘기쁨이 있는 동네이기에 불도 날 수 없고, 비도 나리지 않고, 농구부 선수들이 넣은 슛은 무조건 들어간다. 소방관들은 출동하여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고양이를 구조하는 것이 가장 큰 업무이다. 한마디로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렇다. 웃음과 교훈을 주는 시트콤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곳의 사람들은 실제의 인간이 아닌, 허구로 꾸며진 반쪽짜리 존재들이니까. 이 이상적인 세상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방송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이 작은 도시에 걸맞은 등장인물인 것이다.

나의 색깔은 어디 있을까. 플레전트빌에서 아이스크림집의 존슨은 데이비드가 오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의미하게 카운터 위나 닦으면서 데이비드가 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려야 한다. 그는 시트콤에 자주 등장하는 카페 주인의 역할이다. 언제나 카운터를 닦으면서 주인공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선량한 캐릭터이다. 식당 문을 열고 카운터를 닦고 메인 주인공이 등장할 때마다 가끔 비치는 조연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데이비드가 말한다 

존슨, 스스로 그 무엇도 할 수 있어요. 다음부턴 제가 오지 않아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는 거죠.

그 후, 작은 자유를 맛본 존슨은 더 큰 자유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고 이렇게 플레전트빌은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영화에서 색깔인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주민들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서 색깔을 찾는다. 여전히 마을의 배경은 흑백이지만 생생한 색깔을 찾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색깔을 찾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들을 유색인종으로 취급하며 단호하게 뭉친다.

1세기에 2년 남겨둔 3.1.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태극기 물결과 괴성들이 겹쳐진다. 나도 어느새 시트콤 같은 나라에 있는 것인가 싶어 섬뜩함을 만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마치 영화에 동원된 배우들로 기운을 빼게 하는 건 아닌지. 어쩌면 영화 속의 세계에서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끌려 들어온 관객들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본다 

플레전트빌은 그동안 지켜온 언제나 유쾌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나선다. 제니퍼의 극 중 아버지도 포함된다. 마치 우리들의 아버지들처럼 시대의 변화에 호들갑을 떨며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모습들이 연출된다.

그들이 어이없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내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거다. 저녁에 집에 들어왔을 때 당연히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 있어야 하는데, 색깔을 찾은 부인들이 그것을 거부한다. 도서관에는 책들이 글자를 채워 컬러로 빛을 내고 연인들의 호수에는 컬러의 세상이, 그들만의 자유로움이 자연스럽게 채색된다.

중년을 넘긴 그들은 플레전트빌의 기득권자이자 권력자, 그리고 지배자였다. 그들은 변화가 두렵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힘과 관련된 편리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이들이 방종하게 연애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책들을 강제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자유롭게 음악을 듣지 못하게 금지곡을 만든다. 시장은 선동하며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곳 주민들이 지켜야 할 법규들을 새로 만든다 

결정적인 해결책은 없지만 늘 새로운 시도는 가능하다. 우리들은 현실에서 얼마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걸까. 지금도 무언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텔레비전이나 재미난 영화에 빠져 세상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아닐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 사전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마주할 때의 두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대할 때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 그 미지의 것이 적대적인 존재일지라도 일단 정체가 밝혀지면 인간은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상상을 통해 두려움을 부풀리는 과정이 촉발된다. 그리하여 각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악마, 가장 위험한 존재가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미지의 존재는 무엇이든 인류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유발할 수 있다.

이 영화 속의 시트콤, 플레전트빌에서 사람들이 자각과 경이를 느끼면서 그동안 나릴 수 없었던 비가 내린다. 그 비를 보고 무서움에 떠는 그들의 표정은 우리 사회에서 한 개인이 나쁜 정부를 향해 저항할 때 만나는 두려움과도 비슷하다.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데 정작 실행하면 나만 다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는 이 사회도 제 색깔을 찾으려는 개인들이 있다 

나는 잘못된 일들을 저항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하고 나서 만날 내일이 덜 두렵다. 그렇기에 역사에 기록되어 후대에게 전해줄 광장의 소리, 98년이 된 3.1 만세 운동의 그 외침을 가슴에 새긴다. 21세기에 지난 세기의 유신 대통령 아바타가 성()을 달리하여 현란했던 시간은 끝났다. 새 봄날을 새 빛으로 채울 수 있게 될 것이기에. 광장은 색깔 있는 사람들로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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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말 건넴*~

 

 

 

 

내가 정치를 공부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행복한 시간으로 내 삶을 채우기 위한 거다. 그래서 가장 궁금한 것을 먼저 알아가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거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학습된 내 머릿속에 있는 기존의 생각들을 좀 벗어나서 차근차근 진행해 보는 일은 꽤 재미있다. 그래서 개념부터 정리해 보고 키워드를 설정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내며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일이기도 했다.

 

정치(政治)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하나는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전략적으로 활동하는 일로 풀어 놓았다. 정치는 이사회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인 거다.

 

사회 분야마다 전문가들이 있다. 그들의 책이나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 보면 떠오르는 물음들이 있다. 주변에서는 유독 정치와 관련된 책들도 말들도 조심스럽게 꺼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사상에 대해서까지 조심스러운 말에 끼어들어 가버린 것 같은데 이런 일들이 꽤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내재하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검열이 자연스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특히 정치는 이상하리만치 멀리 있다.

 

나의 시선을 끈 관심사는 선거 개표이다. 20121219일 대선이었다. 그때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선거 결과였다. 이 대선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은 그때까지만 해도 순전히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개인의 몰이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87항쟁 이후 한국적 민주주의는 그 명을 다했다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명박 정권을 지나오면서 선거를 통해 그 정권이 연장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5년을 겪고도 이런 대선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언론의 불공정함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진행된 것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것도 한몫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뜬구름 같다는 공자의 말에 위안으로 삼을까.

 

그렇게 현 정부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탄핵의 헌재 판결을 앞두고 특검이 진행 중이다. 여전히 언론은 그 모양으로 있고 가짜 뉴스들은 그칠 줄 모른다. 삼권 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은 박근혜 정부에서 상징적인 단어 블랙리스트로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은 고사 직전에 놓여 있다. 적어도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없어야 하기에 현재의 정치를 주시한다.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사회, 민주주의는 비틀거리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유일하게 평등한 11표로 다수의 유권자가 행사한 투표가 개표 과정에서 부정된다면 결과는 늘 같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겠다. 공정한 선거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선거 개표 과정이 투명하게 진행되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유권자의 다수가 선출한 대통령이니 다수결의 오류라 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더 있나. 문제는 투명성이 없어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과에 승복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는 점이기도 하다.

 

개인의 일이야 나 홀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이지만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널린 의문들은 사회 안에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 의문들을 무시하거나 왜곡해 버린다면 쌓인 물음표들은 결국, 이 사회를 둘러쌀 거대한 장벽이 되고 만다는 거다. 정치는 정치인만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정치가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바로 내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서 공생하는 것을 말하지 않던가.

 

정부가 현 사회의 제 문제들을 다루는 능력의 한계가 클수록 정치는 현실을 외면하는 개인들을 확산하는 시작이 된다. 내가 아무리 기를 써도 현재의 삶에서 나아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짙어질 때가 있다. 하루의 노동이 내일의 하루를 따라갈 수 없다면 그다음 날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내일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과연 노동은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일까.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존재로 머물 뿐이라면 인류는 이렇게 긴 여정을 이어오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선택한 삶의 첫울음은 아니었어도 내게 주어진 삶은 적어도 내가 운영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삶을 누리는데 이 사회가 방해꾼이 된다면 그것을 물리쳐야 하는 것 아닐까. 생존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므로 먹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으로 좋은 삶을 누릴 이유는 충분하다. 정치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내 삶을 내가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정치인 거다. 끊임없이 나를 낯설게 만나기 위함이다. 너무도 익숙해진 시간에 정치로 딴죽을 거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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