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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책방 이창우 북클럽 <책방, 눈 맞추다>

 

 

 

 매일 사용하는 같은 뜻이라 해도 말에는 다른 의미로 특별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내게는 ‘벗’이 그렇다. 입말이 건네는 울림에 가끔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순간도 있으니 말의 힘이란 이런 것이겠지 싶다. 영혼이 함께 전해지는 말. 한국사회에서는 말의 남용으로 진정성이 사라지고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나만의 말’로 그치는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너는 친구 같다고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너는 나의 벗이라고 하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제는 생활에서 자주 쓰이기보다 문학에 남은 언어로 접하기도 하는데 그 문학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은 벗이 가슴 울리는 말이라는 것을 어찌 알아차릴까 싶기는 하다.

 

『우리말 분류 사전(남영신/성안당)』에 의하면 벗은 명사형으로 3가지의 뜻이 있다. 먼저 서로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는 한자어 ‘친구’이다. 우리말의 시대가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지금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두 번째는 불을 피울 때 불씨에서 불이 옮겨 닿는 장작이나 숯을 가리킨다. 이 뜻을 들여다보면 말의 쓰임새가 어찌 이리 오묘할까 싶다. 불씨를 옮겨줄 벗은 다양하게 다를 수 있으니까.

 

세 번째는 소금밭(염전)에 걸어 놓고 소금을 굽는 가마를 말하는데 벗의 의미가 어떠할지를 말의 쓰임에서 절로 느껴진다. 우리말의 쓰임이 적절하게 멋스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말이다.

 

'벗'의 멋스러움을 문학에서 발견하는 기쁨은 오래간다.. 작가 설 흔의 『왕의 자살』은 조선의 12대 임금 인종의 죽음을 문헌의 기록을 추적하며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500년 이상 지속한 조선 왕조에서 8개월 며칠을 재위했던 임금이다. 작가 설 흔이 아니라면 그의 존재는 후세에 드러날 인물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조선의 역사에서 ‘인종’을 기억해 내기는 쉽지 않다.

 

영의정 윤인겸 등이 대행 대왕의 묘호를 인종이라고 의정했는데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일컬어 인이라 했다고 ‘명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역사 관련 책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그의 재위 기간이 조선 역사에서 가장 긴 26년의 세자 시절과 가장 짧은 여덟 달의 왕좌를 지킨 병약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작가는 중종의 아들로 개혁 세력의 피바람을 부른 사화(士禍)의 중심에 선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가 결국 죽음을 가져왔다는 소설로 그를 드러냈다.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아닌 한 개인 ‘이 호’의 선택을 주시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잘못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아들 이 호(인종)의 몸부림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양할 것 같다. 이 호에게는 살아있는 벗이 없었다.

 

개인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 있는 행위는 책임지지 않는 자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런 포기에 용기라고 하거나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결혼으로 평생의 동반자를 얻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니 대부분이 그런 의미로 결혼하지 않나 싶다. 그다음은 각자 알아서 생각하고 판단할 문제이지만 남편과 아내, 삶의 동반자라 한다. 그 시간을 대부분 함께 나누는 평생 친구 같은 존재이다. 가족들도 공동체의 동반자로 살아가게 된다. 내가 있고 가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한 공동체에 주목하고 싶지만.

 

여기서 혼자서도 잘 살거든. 일침을 가하고 싶은 개인이 있을 거다. 그래 나도 혼자서 잘 살아왔고 현재도 잘 산다. 하지만 더 잘 살아내고 싶은 욕망으로 벗이 필요하다고 하면 당신도 끄덕이지 않을까. 그런 순수한 욕망은 사회에서 주입하는 허위 욕망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던가.

 

음악을 들으며 옆에 있는 벗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순간이면 충분한 삶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어떤 의미로든 벗이 있다는 것은 삶에 기쁨을 건넨다. 당신을 초대한다. 벗이여, 언제든 오시라. 나의 공간에 널브러진 자유로.

 

 

[붙임] 2020년 4월, 코로나 19로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책방이 장항읍으로 공간 이동을 했습니다. 궁금하다면 하나 더, 열어 놓은 <책방, 눈 맟추다>를 둘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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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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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기를 맞아 출간한 <17자 詩로 세월호 품다>

프롤로그 전문입니다.

세월호 참사 6주기를 맞습니다. 2014 4 16일 세월호 참사는 제 삶에 뜻하지 않은 공포를 주었습니다. 
저는 세 아이의 선택으로 일찍이 독립을 시키고도 단 한 번도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공포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각해보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세월호 참사에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만약 내 아이가 세월호에 있었다면 지금 나는 어찌 견디어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세월호 구조에 방관하고 있는 국가의 행위와 언론의 행태는 볼만 했습니다. 내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국가를 대신하고 있는 이 정부는 등가일 수 없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무엇이든 해야 했고 사회 참여라는 작은 일부터 했습니다.

 

4.16연대에 가입하고 후원금을 보내고 팽목항을 다녀오고 기억의 숲 조성에 힘을 보태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프로젝트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갑작스레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에 비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막연하게 내 삶을 갉아대는 공포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팽목항을 떠날 수 없는 마음, 304명의 생명을 구하지 못한, 아니 구하지 않은 국가의 폭력 앞에 저항할 수 있었기에 그 공포심은 조금 잦아들었습니다.

 

 가 잃어버린 생명들을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이 지나면서 받은 공포. 어떻게 지금까지 그대로인가... 진실이 침몰하고 한국사회는 어떻게 이리도 멀쩡한가... 
그 설움과 분노, 절망을 뒤로 하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 희망으로 세월호를 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6주기를 맞아 두 번째 시집을 펴냅니다. 충남 서천 동아리 상상테이블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같이 한 아름다운 동행은 사라진 진실에 힘을 더해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진실은 결코 제 힘을 잃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 6주기 304명을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붙임]

세월호 참사 100일부터 1000일 동안 그 순간을 담아 둔 마음에서 304편을 품었습니다. 6주기 세월호 추모 시집은 주로 2015년 일상을 담은 마음으로 두 번째 독립출판을 합니다. 인세 전액은 416연대에 기부합니다.

 

“세월호 기억하기. 아름다운 동행에 동참해 주세요”

 

구입처: [오프라인 서점] 책방, 눈 맞추다 (041-953-0916)

 

책방 고양이 우리씨.

 

 

[2020.7.12.]

문득.

막걸리를 낮부터 밤까지 들이붓던 날을 지나 비내리는 일요일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막걸리 후유증은 없네요.

 

이리갔다 저리 갔다.. 대체로 삶 전체를 들여다 보니 어리둥절합니다.

최근 현재 진행형으로 돌려놓으려고 들여다 보기는 했습니다만. 

 

내 블로그를 돌보지 않아 사실 막막합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날을 정리했습니다. 그날의 기록들은 어떤 형태로든 제대로 존재하고는 있으니까요. 

 

[세월호 6주기 기억하기] 팟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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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가 곧 역사의 한 장이라 생각합니다. 온전하게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기에 세월호참사 5년을 맞으며 그 흔적은 개인사 중심으로 돌아봅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거대한 사건을 기억하고 온전하게 추모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오늘도 품고 내일을 위한 한 걸음을 내딛어 봅니다.

 

[세월호 참사 5주기 추모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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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붐이 내게로 밀려왔던 몇 년 전 품었던 설렘으로 지금 서 있는 분명한 이유를 다시 생각하며 <가장자리>라는 협동조합으로 세상 읽기를 시작하는 아침이다.

 

대통령 탄핵 인용 선고를 하루 남긴 오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4년을 협동조합 <가장자리> 조합원으로 있었다. 이젠 과거의 일로 되었다. 이사장으로 자리를 지켜낸 홍세화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희망을 품고 달려오던 시간이었다.

 

자주 만나거나 조합원으로 활동은 게으른 자의 변명으로 남았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가장자리에서 보내준 <말과 활>이란 잡지와 어느 때부턴가 잡지가 멈추고 책 한 권이 오기 시작했어도 변화를 감지하지는 못했다. 다음 카페 활동도 있었고 사유의 공간도 있다.

 

나는 마음만 있었다. 혼자서 책 읽고 조합비를 내는 것 말고는 협동조합을 위한 구체적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나마 변명으로 삼고 싶은 것은 꾸준한 책 읽기와 작은 모임을 하고 있다는 정도일 게다. 경제활동을 전제로 하는 협동조합이기에 가장자리가 추구하는 목적과는 결이 달랐다는 현실의 문제가 충분히 이해된다.

 

다행스럽게 홍세화 선생님은 그 마음을 지켜 임의단체인 <소박한 자유인>으로 전환을 했다.

 

<소박한 자유인>의 발기인 홍세화 선생님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소박한 자유인이기에 편지 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짓다라는 한국어 동사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습니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식의주가 모두 짓다의 목적어가 됩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 중 아무도 부족함이 없도록 잘 짓고 잘 나누어야겠지요.

 

제가 느닷없이 짓다라는 동사를 꺼낸 것은 우리 각 개인에게 주어진 과제가 나를 잘 짓는 데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 태어나 되돌릴 수 없는 나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는 결국 각자의 몫입니다. 긴장이 필요합니다. 그 증거로서 책과 함께 사는 것만한 게 없다고 믿습니다.

 

<소박한 자유인> 발기인 홍세화

 

내가 걸어오고 선택한 여러 갈래의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내가 가는 길은 늘 마음이 먼저 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할 사람이 늘 그리웠다. 사람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고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존재와 두루 관계를 갖고, 그들을 깊이 느낌으로써 삶에 참여하고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겠지. 아름다운 동행에는 우리가 수없이 있다.

 

경제 조건이 악화하고 정치가 불안해지고 절망적 분위기가 만연해지면 사회적 신뢰는 사라진다. 우리가 정서적으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어느새 우리는 이 사회를 잠식한 모든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사람보다는 효율을 앞세워 숨을 헐떡거린다. 이 노동의 가혹한 현실과 부정의를 물리칠 때 우리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할 이유가 사라진다.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신나게 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 나라의 말로 책을 읽고 수다를 떨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때 우린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영어 몰입 교육으로 음악 대신 영어 듣기 파일을 안 들어도 되고, 성형으로 동글납작한 얼굴을 깎아 낼 이유도 사라진다. 그저 나답게 생긴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도 될 세상이면 싶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내는 일. 우등과 열등 인간의 구분으로 진행되는 사회는 전체주의를 자각하는 일이 필요했다. 국가권력이 공인으로 자격 없는 이들의 손에 쥐어졌을 때 국민은 기만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는 그들에 손에 놀아나지 않을 공정한 언론이 필요하다. 공영방송의 역할을 바로 세우고 국민을 대의 하는 국회의 책임을 요구하며 너무도 당연한 알 권리가 보장되어야 했다.

 

Pay it for world*~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실천을 했던 나눔 운동,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마음들이 모여 협동조합이 탄생했지만, 지금까지 온갖 어려움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감의 벽은 참으로 높다. 이 땅에 사람을 향한 가치가 넘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함께 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 참여는 아름다운 동행이다. 그 동행을 가능하게 할 순간의 선택은 늘 내 몫이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과제, 나를 잘 짓는 데 있다.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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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치를 공부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행복한 시간으로 내 삶을 채우기 위한 거다. 그래서 가장 궁금한 것을 먼저 알아가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거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학습된 내 머릿속에 있는 기존의 생각들을 좀 벗어나서 차근차근 진행해 보는 일은 꽤 재미있다. 그래서 개념부터 정리해 보고 키워드를 설정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내며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일이기도 했다.

 

정치(政治)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하나는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전략적으로 활동하는 일로 풀어 놓았다. 정치는 이사회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인 거다.

 

사회 분야마다 전문가들이 있다. 그들의 책이나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 보면 떠오르는 물음들이 있다. 주변에서는 유독 정치와 관련된 책들도 말들도 조심스럽게 꺼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사상에 대해서까지 조심스러운 말에 끼어들어 가버린 것 같은데 이런 일들이 꽤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내재하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검열이 자연스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특히 정치는 이상하리만치 멀리 있다.

 

나의 시선을 끈 관심사는 선거 개표이다. 20121219일 대선이었다. 그때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선거 결과였다. 이 대선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은 그때까지만 해도 순전히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개인의 몰이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87항쟁 이후 한국적 민주주의는 그 명을 다했다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명박 정권을 지나오면서 선거를 통해 그 정권이 연장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5년을 겪고도 이런 대선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언론의 불공정함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진행된 것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것도 한몫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뜬구름 같다는 공자의 말에 위안으로 삼을까.

 

그렇게 현 정부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탄핵의 헌재 판결을 앞두고 특검이 진행 중이다. 여전히 언론은 그 모양으로 있고 가짜 뉴스들은 그칠 줄 모른다. 삼권 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은 박근혜 정부에서 상징적인 단어 블랙리스트로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은 고사 직전에 놓여 있다. 적어도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없어야 하기에 현재의 정치를 주시한다.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사회, 민주주의는 비틀거리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유일하게 평등한 11표로 다수의 유권자가 행사한 투표가 개표 과정에서 부정된다면 결과는 늘 같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겠다. 공정한 선거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선거 개표 과정이 투명하게 진행되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유권자의 다수가 선출한 대통령이니 다수결의 오류라 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더 있나. 문제는 투명성이 없어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과에 승복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는 점이기도 하다.

 

개인의 일이야 나 홀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이지만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널린 의문들은 사회 안에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 의문들을 무시하거나 왜곡해 버린다면 쌓인 물음표들은 결국, 이 사회를 둘러쌀 거대한 장벽이 되고 만다는 거다. 정치는 정치인만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정치가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바로 내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서 공생하는 것을 말하지 않던가.

 

정부가 현 사회의 제 문제들을 다루는 능력의 한계가 클수록 정치는 현실을 외면하는 개인들을 확산하는 시작이 된다. 내가 아무리 기를 써도 현재의 삶에서 나아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짙어질 때가 있다. 하루의 노동이 내일의 하루를 따라갈 수 없다면 그다음 날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내일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과연 노동은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일까.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존재로 머물 뿐이라면 인류는 이렇게 긴 여정을 이어오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선택한 삶의 첫울음은 아니었어도 내게 주어진 삶은 적어도 내가 운영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삶을 누리는데 이 사회가 방해꾼이 된다면 그것을 물리쳐야 하는 것 아닐까. 생존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므로 먹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으로 좋은 삶을 누릴 이유는 충분하다. 정치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내 삶을 내가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정치인 거다. 끊임없이 나를 낯설게 만나기 위함이다. 너무도 익숙해진 시간에 정치로 딴죽을 거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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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밖으로 발을 밀어 보니 차가운 방 안 공기가 살로 파고든다. 어마나. 다시 발을 끌어당겨 두 장의 담요 속을 탐색하며 두 발로 잡으려고 해도 도무지 잡히질 않는다. 에이,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따습게 품은 담요를 젖힌다.

 

어이구. 창가로 바짝 밀쳐져도 헤 웃는 얼굴의 연한 갈색의 곰돌이 크눌프의 너부데데한 궁둥이 밑에 숨어 있다. 연한 초록과 노란색이 엇갈려 보기에도 따듯한 느낌의 수면 양말. 가능하면 살살 움직여야 한다. 먼지가 풀썩거리는 게 싫으니까.

 

무언가 입속에 넣긴 해야 할 것 같다. 참으로 귀찮지만 계속 들리는 꾸르륵 소리가 그리 예민하지도 않은 신경 줄을 건드린다. 커피 필터가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가득 쌓여있다. . 12개군. 12잔을 마셨다. 블라인드 사이로 하얀 별 뽁뽁이가 드러나는 걸 보니 아직 낮이다.

 

새벽에 잠시 오줌이 마려워 일어났다가 뭣이든 밖의 소음을 막아줄 소리를 컴퓨터에서 찾다가 메일이 왔다는 알림 소리를 듣는다. 그래그래, 미리 설정해 놓기를 정말 잘했어. 크크크. 셜록 시즌 4가 드디어 업로드되었다는 은밀한 소식이었다. 아이 신나라.

 

메리의 죽음과 이어지는 에피소드의 두 번째였다. 왓슨과 셜록의 관계를 떠올린다. 메리는 삼각형을 잇는 한 점이었는데 그 점이 사라져 왓슨과 셜록은 직선이 된다. 그들의 관계는 메리가 남긴 영상으로 회복되어 가는 상태였다. 세심한 관찰과 논리적인 접근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셜록이 사랑스러운 것은 그만이 만드는 관계의 독특함에 있다.

 

너무 성급하지도 속단하지도 않을 인간의 관계에는 전제되는 것이 딱 하나. 시간이다. 관계를 이어 줄 시간을 넘나듦이다. 2016에서 숫자 하나를 바꾸어야 할 순간에 끓어오르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다른 세계에 있는 자들을 향한 아직 거두지 못한 눈 맞춤이다.

 

시간에 숨겨진 은밀함. 그것을 나누는 것이 관계였다. 더는 나눌 수 없을 때 관계는 끝이다. 예전에는 일방적인 공들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한쪽만이 공들이는 시간은 그 대상의 받아들임이 가능한 시간만큼만 유효한 관계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마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해도 관계의 대상이 주파수를 맞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기운이 이어주리라는 것은 분명 망상에 가깝다. 살아있는 것들에서는 그렇다. 생명이 사물로 전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주 명료하다.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 그대가 기억하는 것이 있다면 관계는 다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작은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니까. 피아 소야의 리베르 탱고, 한 곡만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순간이랄까. 안절부절못하던 마음을 이 곡만큼 잘 표현한 것은 적어도 내게는 없었다.

 

리듬을 따라가는 숨 막히는 몸짓과 허덕이는 마음의 흐름이 진정되는 순간은 리베르 탱고가 끝났을 때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이다. 숨 쉴 새도 없이 그 곡에 맞춰 숨가쁘게 시간을 마주한다. 그 시간을 뛰어 넘으려면 정지 버튼을 누르면 된다. 하지만 오늘은 내버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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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현악 4중주에 대해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비유했다. 1 바이올린은 언제나 화제를 제공하며 대화를 이끌어 가는 재치 있는 중년, 2 바이올린은 소극적이고 양보하는 친구, 비올라는 대화에 꽃을 피우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주는 여성, 그리고 첼로는 학식이 많으며 대화를 조정해 주는 중후한 신사라며 음악의 조화를 말했다. 음악에 깊은 조예가 없는 나도 귀로 들려오는 좋은 음악에 마음을 열게 되고, 그 안에서 내면의 조화를 도모하기도 한다. 이런 삶의 구석구석에서 찾아드는 조화로움에 우리는 감동의 시간을 만난다.

 

대화가 없는 나라에서 이 비유로 얻는 불편한 진실들의 불협화음은 삶을 참으로 고단하게 한다. 역설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오면서 선의의 왜곡과 이념의 틀을 끊임없이 곧추 세우려는 세력이 있다. 그들의 흑역사는 권력의 사유화로 얻어 챙긴 부의 축적이다. 1세기를 넘어 끄트머리의 사실들이 겨우 새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삼권 분립의 민주 공화국은 안타깝게도 분립보다는 통합으로 점철되어온 시기가 압도적으로 길었다. 독재를 미화해온 한국적 민주주의, 권력의 부역을 포장한 세계화의 신자유주의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을 시청광장에 서게 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그는 국가 에서 정의로운 국가를 주제로 삼았다. 유토피아 같은 국가를 구상한 이유는 당시의 아테네가 몰락과 타락의 과정으로 가고 있어 이를 극복해보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정치적 앎은 공동체 전체를 고려하는 앎으로서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동굴에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동굴이 아니다.

 

앞만 보도록 하여 동굴의 벽면에 비추는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방이 열려 눈에 보이는 미디어들로 벽을 만든 동굴이다. 플라톤은 동굴 안의 가시적 현상의 세계에서 동굴 밖,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실재의 세계를 향해 나서려는 험난한 노력을 요구한다. 정치적인 일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정하게 전해지고 있는 지를, 스마트폰 시대의 스마트한 개인들의 손에 들린 놀라운 기계가 정보의 공유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과연 그 기다림에 응답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볼 일이다. 그리고 그 정보들이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것인지를 따져 볼 일이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를 위한 이성적 판단이 요구되는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철인정치를 요구하지만 그 철인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교육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보고,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철인정치는 꿈꿀 수도 없도록 하는 불가능한 교육의 현장들이 우리의 현실을 말해 주고 있다. 신화는 우리에게 상징을 통해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시시포스의 바위를 다시 산 위로 올리려 하지 않는 것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온 인류의 나약함을 되물릴 수 없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나부터 시작해서 내 주변인들에게라도 함께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올려보자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내 앞에서 여전히 굳건하고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세계의 야만스러움과 탐욕에 순응한다면 내가 마주 하는 이 세계가 더 가속화될 것이고 인류의 적은 바로 내가 되는 것이다. 정상에서 굴러 내려오는 이 거대한 바위를 피하기에 급급한 개인의 나약함이 원인이 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공감과 나눔, 함께하는 협력만이 이 지속적인 악의로 넘치는 현실을 선의로 바꾸어 나갈 수 있으리라 본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이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인간의 선의를 믿고 정치하는 날이 열리게 될 것을, 반어적 표현을 직설로 바꿀 수 있는 사회로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제 우리의 국가는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더 열렬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국가 안에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는지도 끊임없이 되물을 일이다.

 

5년짜리 대통령을 내세워 역사의 발전을 되돌이표처럼 반복하고 있는 삶이라는 절규하는 음악에, 나의 나약함을 던져 버리고 너와 나의 조화가 감동적인 삶을 연주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시간이다. 5년짜리 정부로 토막 난 대한민국은 그래도 5천 년을 지탱해 왔다. 그것이 선이다.

 

물론 역사인식조차 갖추지 못한 지도자가 아니었기에 일어난 대한민국의 현실, 이제 5년을 채울 수도 없는 너덜너덜해진 국정 운영을 위해 박근혜 씨는 대통령 직을 내려놓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이 그나마의 선의일 것이다. 그 선택조차도 스스로 결단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결국 탄핵으로 그 자리를 떠나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시민은 동굴에서 나와 광장에 서 있다. 그 민의를 거역할 역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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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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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과 자긍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시기에 아이들에게 자신을 마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학교생활과 사교육, 그 이외에는 개인들의 선택에 따라 작은 오락거리가 전부였습니다. 친구들과의 시간도 많이 가질 수 없는 한국사회는 참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책도, 운동도 할 수 없는 아이들부터 청소년, 거의 모든 세대가 저들만의 바쁨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왜 이리도 바쁜 거지? 문득, 떠오르는 질문에 정답은 물론 없어야 합니다. 세대별로 다르지만 꽤 타당한 이유는 있죠. 허나 그 이유들을 뒤로한 채 거부할 수도 있기는 합니다.

 

내가 머무는 이 사회는 어떤 곳인지 생각해보면 나라는 없고 만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리고 내 주변인들과 지인들,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을 나눌 수 있는 이들, 일과 관련된 이들도 있고요. 일이 삶을 위한 것인데 외롭고도 참으로 지독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한국인으로 나는 어떠한가. 당연히 누려야할 국가에 대한 그 느낌이, 그 절절한 마음이 없더라구요. 어떠신가요? 안타깝게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동안 조국에 대한 열렬함을 표출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포츠에서 활약하는 그 기간 동안을 빼면 자랑스러움이 없다 합니다. 작은 영웅들의 활약에서야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숲의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은 미처 알 수 없었던 내 나라, 대한민국을 다시 만나게 해 줍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지구상에서 탐험되지 않은 땅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세계 구석구석이 서구 팽창주의자들의 눈에 의해 샅샅이 탐지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는 서양에 의해 동양을 탐구하는 시기로 담론을 생산하는 쪽과 대상 간에 힘이 동등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주인과 노예같은 일방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이 저자의 말입니다. 한국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강자는 쓰는 자, 약자는 쓰이는 자로 말이지요. 나는 쓰이는 자일까요, 쓰는 자일까요. 쓰이기도 하고 쓰기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패권의 시대, 한국은 역사의 약자였죠. 구한국 조선은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에서 한때 흔적없이 지워진 나약한 종족이었던 것이지요. 한국은 부패해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때는 제국주의 시대였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패권적 논리에 부당한 게 너무 많아서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이 출판되었다고 스웨덴에서 유학을 하던 저자는 서문에서 밝힙니다. ‘민족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시민의식을 품어야 할 오늘날, 한 종족의 긍정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 아님을 전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 대에 놓여진 한국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은 오래 전부터 학습된 서구의 시각임을 말합니다.

 

그들의 편에서 개인들의 탐욕에 불을 붙여온 자들의 한국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왜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지녀야 했을 자긍심을 가질 수 없었을까요. 오래 전에도 진짜 한국인의 얼굴을 본 서양인들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영국 정치인 조지 커슨은 하얀 옷이 매우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어 배 위에서 바라보면 백조들의 무리같다고 하며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자벨라 버드 비숍은 서구인들 중에서 한국인을 가장 열심히 탐구하며 긍정적인 면들을 발견해내기도 했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야 아무려면 어떤가요. 중요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진짜 한국인의 모습이겠지요.

 

스웨덴의 신문기자 아손 그렘스트는 1904년 한국을 다녀가고 나서 한국인과 교류했던 그의 시선으로 강자 위주로 흘러가는 세상의 조류에 대해 탄식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구한말, 한국인의 지나친 호기심에는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며 한국인들의 태도를 자유롭고 품위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군요. 그 당시에 한국은 세상에서 티베트 다음으로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으며 고작 알려진 것은 백의흑모뿐이고, 나머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고 말합니다. 19세기말부터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은 거의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에 깃든 한국정신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던 것만은 확실한 듯 합니다.

 

내가 의식하지 않는 한국정신은 때로 서구인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거나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에 맞게 재단되어 왔던 것이지요. 한국인만의 정서를 저자는 외국에서 살면서 찾아냈다고 합니다. 왜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저 멀리 있는 스웨덴에서 가능했던 것일까요. 한국사회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나 하는 역사의 현장들을 따르다 보면 그 해답이 보입니다. 한국의 풍습과 잠재력 있는 문화, 다양한 감각에 뛰어들었던 것을 애써 막지 않았던 합리적 이상주의자들의 면모들이 있습니다. 이런 한국인의 기질들이 다시 살아날 그 때, 공동체를 위해 쓰이는 자로 나의 필요에 의해 쓰는 자로 살아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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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절대 하지 마! 과연 애정 어린 덕담일까. 정치는 사익 추구라는 생각으로 접근해 본다. 공익을 위한 정치는 이 나라에서 찾기 너무 어렵기에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선 잡기쯤으로 해 두려 한다. 정치는 뭔가? 그동안 막막하게 접근했던 시선을 현재 내 생각을 기준으로 해 본다. 나를 위해 정치를 한다고 말하니까 정치하게요? 하는 질문부터 정치인도 아니면서까지 다양한 말들이 들린다.

 

우선 를 위한 정치의 순서를 생각해 본다. 먼저 사회에서 이슈로 오르내리는 일들에서 스스로 분노 조절이 가능할 수 있는가이다. 불의에 들끓는 청춘도 아닌 시간대에 있는 인간에게 분노 조절이 안 된다는 의미는 일면 자기 분노조절 장애 같기만 하니까. 나이 들먹이며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으로 근거 있는 일에 분노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두 번째는 사회에서 덜 건드렸으면 하는 사생활 영역이다. 내가 무엇을 하건 내 자유 의지의 발동에서라면 그 책임도 내가 지겠다는 의미이다. 이 영역을 국가가 나서서 지나치게 법 조항으로 규정해버리면 개인의 자유권이 심하게 위축된다. 이 이유만으로도 나는 현 정부가 얼마나 시대 감각이 없는 집단인가를 주저 없이 따질 수밖에 없고 분노 조절에 심장이 벌떡거린다.

 

세 번째는 노동이다. 잘 누리며 살기 위해 일이 필요한데 그 일로 하여 내 삶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너무 부당하기에 그렇다. 내게 필요한 만큼 노동할 시간의 선택권이 당연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생존을 위해 일할 권리, 그 사회권은 자유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선 어림 반 푼도 없다. 나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 타인의 기득권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노동환경이다. 이 세 가지가 내가 정치를 하는 목적이다.

 

정치 문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면 회피하거나 그건 정치인이 알아서 할 문제라며 외면하곤 한다. 아마도 피차 모처럼 만나서 열 내며 얼굴 맞대고 지껄일 노력의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그동안 어떻게 잘 지냈느냐고 묻는다. 못 지냈어, 열 받아서. ?라고 묻는다. 정치 때문이라 응수하면 에이, 그러니까 참 피곤하게 살아, 하며 웃어준다. 마주하지 않고 옆에 앉아 있다면 오른팔 뒤꿈치로 명치를 때릴 수 있을 텐데.

 

궁금하다. 어째 정치는 없고 정치인만 동동 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중은 왜 대표 정치인에게 해바라기를 할까. 선거는 이기는 게 목표니까 인물론으로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 거라고 누군가 말해주던데 그게 영 석연치 않았다. 그렇게 해서 계파 갈등이 생기고 그것이 분열이란 말로 부정적인 프레임을 만드는데 싶었다.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고 정치인이라는 말에 오랫동안 주입된 한국사회의 학습효과 결과물의 하나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정치인에게 속지 않으면 될 것 같다. 그러려면 정치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들의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을 지키려면 더 열심히 고민하고 나를 대신할 인간을 선택하게 될 테니까. 정치 집단이라는 관계에만 집착하게 되면 비판이 사라지지 않을까. 비판 없는 정치는 단절이다. 새누리당의 일관된 모습의 집단주의는 비슷한 견해를 지닌 인맥으로 벽을 친다. 그 벽에 무력해지는 건 야당의 몫처럼 되어 버렸다.

 

대체로 두 개의 프레임으로 가면 아주 쉽다. 오지선다형 시험이 쉽지 않은 것이 그렇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얼마나 산뜻한가. 확률도 높다. 자그마치 50%이다. 벼락치기로 절반의 행운을 늘 끌고 갈 재주만 있다면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제법 괜찮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니까. 그런데 정치는 시험 답안지처럼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지선다형쯤일 정당 선택 문제를 풀기 위해 나의 정치를 도와줄 정책과 책임감 있는 정당 찾는 일과 대의해 줄 국회의원을 이용해야만 가능하다. 내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투표는 지금을 바꾸는 것은 분명 아니다. 무엇이든 섣부른 기대와 너무 빠른 결과를 원한다면 다시 반복되는 정치 혐오와 냉소는 별 도움이 안 되며 오히려 원하지 않는 정치 환경을 제공해 주기도 하니까. 그동안 겪을 만큼 지나온 시간이 있으니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말의 힘은 사라졌다고 본다. 다만 그 말의 힘을 살리기 위한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아직도 진보와 보수가 균형을 이루는 정치판을 기대한다. 2016년 총선을 지나면서 지난 4년 간 국회의원으로 제 역할을 충실하게 해온 국회의원을 우선 선택했던 것일까? 나는 4선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부디 다음 총선에선 자발적으로 물러나서 젊은 정치인을 위한 아낌없는 노력을 해주었으면 한다. 자연스럽게 물갈이라는 말과 혁신이라는 말을 꺼내 들 필요도 없어진다. 그만큼 세대의 불협화음이라는 잡음이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국회의원 4번이면 충분한 기회의 시간이었고 그러고도 부족하다면 내 뒤에 서 있는 젊은 정치인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면 된다. 새로운 인재의 영입만이 부패하여 죽은 정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들의 역동성이 시스템의 고착화를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부평초 같은 민주주의를 걷어내고 생기 있는 건강한 묘목들을 정치판에 심을 노력이 요구되는 시대임을 모르지 않을 것 같다. 기성세대가 가르치기보다는 젊은 세대의 삶에서 배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에서 그 건강함은 위장이었고 땅속으로 들어가 불량한 뿌리 내림을 지금까지 키웠을 뿐이다. 그 썩은 뿌리를 캐내 버리고 새로운 뿌리 내림을 위한 자체 세력을 키우는 일과 텃밭을 내어주어 그 묘목을 지켜줄 바람막이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적어도 한 세대 이후에는 건강한 민주주의로 세대 간의 활기가 넘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는 그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시작이다. 나는 너무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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