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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과 자긍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시기에 아이들에게 자신을 마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학교생활과 사교육, 그 이외에는 개인들의 선택에 따라 작은 오락거리가 전부였습니다. 친구들과의 시간도 많이 가질 수 없는 한국사회는 참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책도, 운동도 할 수 없는 아이들부터 청소년, 거의 모든 세대가 저들만의 바쁨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왜 이리도 바쁜 거지? 문득, 떠오르는 질문에 정답은 물론 없어야 합니다. 세대별로 다르지만 꽤 타당한 이유는 있죠. 허나 그 이유들을 뒤로한 채 거부할 수도 있기는 합니다.

 

내가 머무는 이 사회는 어떤 곳인지 생각해보면 나라는 없고 만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리고 내 주변인들과 지인들,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을 나눌 수 있는 이들, 일과 관련된 이들도 있고요. 일이 삶을 위한 것인데 외롭고도 참으로 지독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한국인으로 나는 어떠한가. 당연히 누려야할 국가에 대한 그 느낌이, 그 절절한 마음이 없더라구요. 어떠신가요? 안타깝게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동안 조국에 대한 열렬함을 표출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포츠에서 활약하는 그 기간 동안을 빼면 자랑스러움이 없다 합니다. 작은 영웅들의 활약에서야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숲의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은 미처 알 수 없었던 내 나라, 대한민국을 다시 만나게 해 줍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지구상에서 탐험되지 않은 땅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세계 구석구석이 서구 팽창주의자들의 눈에 의해 샅샅이 탐지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는 서양에 의해 동양을 탐구하는 시기로 담론을 생산하는 쪽과 대상 간에 힘이 동등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주인과 노예같은 일방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이 저자의 말입니다. 한국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강자는 쓰는 자, 약자는 쓰이는 자로 말이지요. 나는 쓰이는 자일까요, 쓰는 자일까요. 쓰이기도 하고 쓰기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패권의 시대, 한국은 역사의 약자였죠. 구한국 조선은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에서 한때 흔적없이 지워진 나약한 종족이었던 것이지요. 한국은 부패해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때는 제국주의 시대였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패권적 논리에 부당한 게 너무 많아서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이 출판되었다고 스웨덴에서 유학을 하던 저자는 서문에서 밝힙니다. ‘민족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시민의식을 품어야 할 오늘날, 한 종족의 긍정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 아님을 전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 대에 놓여진 한국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은 오래 전부터 학습된 서구의 시각임을 말합니다.

 

그들의 편에서 개인들의 탐욕에 불을 붙여온 자들의 한국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왜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지녀야 했을 자긍심을 가질 수 없었을까요. 오래 전에도 진짜 한국인의 얼굴을 본 서양인들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영국 정치인 조지 커슨은 하얀 옷이 매우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어 배 위에서 바라보면 백조들의 무리같다고 하며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자벨라 버드 비숍은 서구인들 중에서 한국인을 가장 열심히 탐구하며 긍정적인 면들을 발견해내기도 했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야 아무려면 어떤가요. 중요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진짜 한국인의 모습이겠지요.

 

스웨덴의 신문기자 아손 그렘스트는 1904년 한국을 다녀가고 나서 한국인과 교류했던 그의 시선으로 강자 위주로 흘러가는 세상의 조류에 대해 탄식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구한말, 한국인의 지나친 호기심에는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며 한국인들의 태도를 자유롭고 품위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군요. 그 당시에 한국은 세상에서 티베트 다음으로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으며 고작 알려진 것은 백의흑모뿐이고, 나머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고 말합니다. 19세기말부터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은 거의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에 깃든 한국정신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던 것만은 확실한 듯 합니다.

 

내가 의식하지 않는 한국정신은 때로 서구인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거나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에 맞게 재단되어 왔던 것이지요. 한국인만의 정서를 저자는 외국에서 살면서 찾아냈다고 합니다. 왜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저 멀리 있는 스웨덴에서 가능했던 것일까요. 한국사회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나 하는 역사의 현장들을 따르다 보면 그 해답이 보입니다. 한국의 풍습과 잠재력 있는 문화, 다양한 감각에 뛰어들었던 것을 애써 막지 않았던 합리적 이상주의자들의 면모들이 있습니다. 이런 한국인의 기질들이 다시 살아날 그 때, 공동체를 위해 쓰이는 자로 나의 필요에 의해 쓰는 자로 살아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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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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