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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백소영



페미니즘이란 현 체제 밖의 시선이고 사유이고 언어이다. 5천 년 가부장 역사 가운데 가장 대규모로, 가장 지속적으로 시스템 안에 있었으나 현재의 시스템을 만드는 데 참여한 바 없고, 이 시스템 안에서 자기 위치 역시 스스로 결정한 바 없었던 여성들이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주의’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시스템을 옹호하며 개인으로서 ‘명예 남성’의 삶을 선택한 생물학적 여성들의 의미 추구는 ‘체제 안’의 사유와 행동이기에 페미니즘이 아니다.

 

또한 생물학적 남성 (그리고 그 어떤 자기 정체성을 가지든)이라 해도, 주체로서의 자기주장이 현재의 시스템을 만드는 데 반영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그 역시 은유로서는 ‘여성’이기에 그의 자기 해석은 페미니스트적 성찰에 포함되어야 한다. 

-본문 중에서-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방송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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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방송 듣기


 

『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혐오표현의 해악을 치밀하게 논증한 제러미 월드론은 혐오표현이 한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파괴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파괴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공공선’을 붕괴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혐오표현 규제가 “모욕, 불쾌감, 상처를 주는 말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의 공공선과 정의의 기초에 관한 상호 확신의 공공선”을 지킨다는 점에 주목한다.

 

월드론이 말하는 공공선은 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조건을 말한다. 각 구성원들은 자신의 속성이 무엇이든 적대, 배제, 차별, 폭력을 당하지 않고 여러 구성원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공존의 조건하에서 모든 구성원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상적인 자격“, 즉 존엄한 존재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데, 혐오표현은 이러한 ”포용의 공공선“을 파괴하는 것이다.

 

월드론은 혐오표현이 어떤 사회적 환경이나 상황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존 롤스의 정치철학에 바탕해 질서정연한 공정한 사회에서 각 개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우하고 대우받을지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모든 이들은 평등한 인간이고, 인간성의 존엄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정의에 관한 기초적인 권한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폭력, 배제, 모욕, 종속의 가장 지독한 형태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있음에 관한 확신”하는 것이 정의의 중요한 기초인데, 혐오표현은 이 기초를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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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방송 듣기


<말이 칼이 될 때>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글. 홍성수

 

소수자 차별의 맥락이 있는 한, 표현의 수위와 상관없이 혐오표현은 차별을 재생산하고 공고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혐오표현의 개념을 넓게 설정할 필요가 있고 동시에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혐오표현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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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방송 듣기

 

 5월 12일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분과 첫 만남은 인터넷을 통해서 <이승로그>라는 팀 블로그에 합류하면서였지요. 그 후 제 공간으로 초대해 좋은 만남을 시작했습니다. 그 날 이후 낮은 언덕을 뒤로 한 것처럼 무척 든든했습니다. 갑작스런 비보가 들려오고 그분의 암투병기를 읽으며 한 구탱이가 스러져내리는 감정에 스스로를 추스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분의 부고는 제가 그동안 버틴 최근의 피로와 위경련으로만 알고 있던 고통을 감당하지 않도록, 제 정신력을 발휘할 수 없게 한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왕좌의 게임이었죠. 그분의 방송을 들으며 몇 해 전 겨울, 며칠을 정 주행하던 시간이 스르륵 밀려옵니다.

응급실에 누워 간헐적으로 달려드는 죽음같은 어두움을 헤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 낫 투데이!! 지금은 아니다. 그분의 발인 참가를 하루 앞 둔 일요일 새벽이었죠.


이제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세상을 향해 소리를 냅니다. 내 눈에 다른 글쟁이들과 달라보이던 특별한 그분, 그대가 추구하던 아름다운 가치를 기억하고 지켜가도록 힘을 모으겠습니다. 물뚝심송 박성호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5월 4일 방송 이후 5월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입니다. 달라 보이는 세상이야기,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를 풀어볼까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최근 작품으로 『엄마는 페미니스트』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입니다.


굳이 엄마에 국한된 이야기라기보다는 모든 어른들이 읽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내 엄마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말. 모든 어머니의 자식들이 듣게 될 이야기였으면 합니다.

 

첫 번째 제안 - 충만한 사람이 될 것.

두 번째 제안 - 같이할 것.

세 번째 제안 - ‘성 역할’은 완벽한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

네 번째 제안 - ‘유사 페미니즘’의 위험성에 주의할 것.

다섯 번째 제안 - 독서를 가르칠 것.

여섯 번째 - 흔히 쓰이는 표현에 의구심을 갖도록 가르칠 것.

일곱 번째 제안 - 결혼을 업적처럼 이야기하지 말 것.

여덟 번째 제안 - 호감형 되기를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아홉 번째 제안 - 민족적 정체성을 가르칠 것.

열한 번째 제안 - 우리 문화가 사회규범에 ‘근거’를 들 때 선택적으로 생물학을 사용하는 것에

                      의구심을 가르칠 것.

열두 번째 - 일찍부터 성교육을 할 것.

열세 번째 - 사랑이 반드시 찾아올 테니 응원해 줄 것.

열네 번째 제안 - 억압에 대해 가르칠 때 억압당하는 사람을 성자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

열다섯 번째 제안 - 차이에 대해 가르칠 것.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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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방송듣기 




#미투시민행동은 출범선언문에서 “미투 운동은 성차별적인 구조와 문화를 바꾸자는 개혁 요구이자 시국선언”이라며 “여성의 일상이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천명했다.

 

“시민사회는 촛불 이후의 ‘새로운 세상’, ‘새로운 대한민국’에 더 이상 여성들의 경험이나 목소리가 삭제되지 않아야 한다”며 “권력구조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성차별과 폭력을 근절하고 성평등 민주주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2018년 4월 21일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바꾼다

#미투 운동과 함께 하는 시민행동을 이야기 나눕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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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유명인이 아닐 경우 미투 고백은 알려지지 않고 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 속에서 성폭력에 노출돼 있지만 호소할 곳조차 마땅치 않았던 것이 현실입니다.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시민들이 모여서 322일 오전부터 23일 오후 7시까지 '2018' 34시간 동안 MeToo 이어 말하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2018분 MeToo 이어 말하기 #WityYou (2) 방송 듣기

 

청계광장에 마련된 2018분을 함께 할 타이머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손에서 손으로 검은 매듭이 이어집니다.

#MeToo에 지지와 연대를 의미합니다.

2018년에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과 성폭력을 끝내자는 의미입니다.

 

 

#MeToo에 나선 분들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리면 광장에 서 있는 내 마음도 아파서 소리를 냅니다.

그들의 숨소리가, 목소리가 무겁게 광장을 파고 듭니다.

 

성폭력과 공포는 일상 곳곳에 있었고 피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동시에 겪는 이주 여성들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발언대에 나서지 못한 시민들은 하고 싶은 말을 적어 25m 길이 대자보 광장을 꾸몄습니다.

 

12일에 걸친 이어말하기 행사가 끝나고 저녁 7시부터 촛불 문화제가 열렸던 곳,

불어오는 바람 앞에 촛불이 흔들리며 #WithYou로 함께 하는 마음들이 장을 밝게 비춥니다.

 

이렇게 삶을 이어온 수많은 성폭력과 공포로 숨죽이며 살아야했던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온 세계로 울렸으면 합니다.

 

성폭력이 멈출 수 있기를,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을 담아 함께 한 #WithYou운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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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MeToo에 #WithYou (1)

 

 

성범죄는 개인이나 한 집단만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바로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공소시효라는 장벽. 현재까지도 수많은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경찰을 통하여 제대로 된 사건의 해결을 받아내지 못하자 이러한 범죄들을 대중에게 폭로하고 이슈를 만들어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운동인 “MeToo”

 

그에 응원을 보내는 “WithYou”가 지속되는 가운데 근원적인 문제들을 풀어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으로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가 반드시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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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그럼에도 페미니즘 (1)

 

<그럼에도 페미니즘> 20171월 출간. 윤보라 외 / 은행나무

-일상을 뒤집어 보는 열두 가지 질문들-

 

책을 읽고 일상에서 발견하는 페미니즘을 같이 이야기 나눕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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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에서 못 다한 이야기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충남도의회는 2일 제2차 본회의를 열고 ‘충청남도 도민 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 폐지 안’을 가결했습니다. 인권조례는 인천시를 제외한 전국 16개 시·도가 제정해 시행하고 있으며 인권조례 폐지안이 가결되기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인권조례를 만든 자유한국당(당시 새누리당) 소속 도의원들이 스스로 폐지에 앞장섰습니다. 인권 조례 폐지안은 자유한국당 김종필 의원이 대표 발의했는데 이날 표결에 앞서 2시간 동안 벌어진 토론에서 한 말은 반지성주의에 대표적인 사례더군요.

 

그들이 내건 인권 폐지의 주장 근거는 도민 인권선언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가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무지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인권 조례를 폐지하는 발상 자체부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호하려고 만든 인권 조례이기도 하니까요.

 

다양한 사람이 모여 다름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공동체를 만들어 나누기 위해 충청남도에는 인권 기본 이해 교육이나 관련 문화 행사가 많습니다. 인권조례가 폐지됨에 따라 그동안 도민의 인권 개념 이해 및 관심 유도 등을 위해 진행한 인권에 대한 활동들이 어려워집니다. 활동 지원에 어려움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일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일상에서 인권 교육의 필요성입니다. 부족한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서 지역 사회를 이끌어갈 도의원들이 이 정도이니 말문이 막힙니다. 일부 개신교도의 무논리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말입니다. 종교가 정치에 영향을 준다는 일이 현대에도 가능한 일이라니 참으로 한심한 거죠.

 

인권 교육이 제도로 정착하지 못한 현실에서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는 더 자유롭고 평등한 학교를 만드는 열 개의 목소리로 그 시작을 알려줍니다. 사회를 변화하게 하는 힘은 개인에게서 나옵니다. 인권 감수성이 발휘되는 사회는 페미니즘에서 지향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성이 평등해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에 공감하게 됩니다. 성 감수성은 다른 성별의 입장이나 사상 등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이기에 여성이나 남성에 대한 고정되고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줍니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선언만을 원하는 게 아니죠.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일이 먼저라는 겁니다. 페미니즘은 ‘미래인’에서 출간한 「여성학」을 보면 서구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여성의 권리에 대한 옹호’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군요. 페미니즘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나 실체를 가진 것이기보다는 다양한 갈래의 이념적 토대와 관점을 견지하는 사상, 이론, 행동주의(또는 운동)로 구성된 묶음이기 때문이죠.

 

교육만 바뀌면 제도, 법률만 잘 만들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일은 아닙니다. 필요한 일이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바로 지금, 나부터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대체로 알지 못할 때 가장 크게 나를 휘어잡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공부하는 일은 경험하는 것만으로 너무 부족합니다. 그 부족한 경험을 대신할 수 있는 일이 공부라고 생각해요. 덜 불안해질 수 있거든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이런 선언이 필요한 시기, 페미니즘이 보편성을 획득하기까지 과정이라 생각해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산다고 해서 “나는 민주주의자입니다!”라고 선언하진 않잖아요. 보편으로 인식되고 있는 개념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늘 위기에 봉착합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그 사실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거죠.

 

그 많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현재 한국에 있는 대학에 여성학과는 어떨까 궁금해서 찾아봤죠. 여성학과를 폐지하는 대학이 늘어났어요.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한국의 대학은 오히려 순수 학문을 외면하는 정책을 우선으로 하더군요.

 

나는 ‘인간’ 보다 ‘자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더 크게 사람들을 끌어당긴 것으로 생각해요. 인간보다 자본이 우선되다 보니 자본주의가 강성해진 것을 사회 각 분야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대학의 기업화가 진행되면서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대학의 역할은 찾아보기 어려워진 겁니다. 교육이 변하는 사회속도는 아주 느립니다. 그러니 나부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힘, 통찰할 수 있는 앎이 필요합니다.

 

긴 터널을 지나 선생님이 된 세 청년에게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건네는 일로 2월을 열었습니다. 적어도 내 주변에 페미니즘을 공부해 청소년들과 유쾌함을 나눌 선생님이 있어서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를 계속할 이유는 늘어만 갑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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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에서 못 다한 이야기 <페미니즘은 예술 하기>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동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페미니즘은 예술 하기”라고요. 지금 이 마음을 담아 글의 제목을 만듭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살 수 있기에 더없이 멋진 일이 페미니즘 공부입니다. 호모 아르텍스가 되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와, 예술이다!”

 

이런 말을 하던 순간을 각자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지나쳐 왔던 그 많은 불평등과 차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 사회가 쌓아둔 채 거들떠보지도 않은 진실을 발견합니다. 대중문화로 반복된 획일화된 감각들은 아주 익숙합니다. 그 익숙함을 낯설게 만드는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저절로 내지르는 탄성이 그렇습니다.

 

2017년 12월 8일 한동대 ‘들꽃’에서 주최한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특히 주목한 점은 별 의식 없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개인을 향한 폭력입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권을 지나며 공동체에 골몰해 있었고 그 가능성으로 가까이 다가간 책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남기게 되는 경우를 보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알려줍니다. 내가 무엇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죠. ‘한동대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사건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 책의 기억을 꺼냅니다. 당시 책을 읽을 때는 크게 주목하지 못한 주인공들, 개개인에 내 마음이 다가가지 못했던 겁니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두 번째로 다가설 ‘폴리아모리’를 풀어갑니다. 이 용어에 집중하기로 한 것은 지난해 한 청년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에 답하기입니다. 내가 무척 아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와 인연은 20년 가까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1학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인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의 질문에 답을 글로 올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직도 나의 벗으로 동행중인 청년에게 건네는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열린책들. 상, 하 두 권인 이 책은 저자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가 수용소 생활 중 1863년 발표한 대표적인 사회·정치 소설입니다. '주인공들 베라 빠블로브나, 로뿌호푸, 끼르사나노프, 라흐메또프는 1840년대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새로운 도덕적 정열을 지닌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구시대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일치한다는 <합리적 에고이즘>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역자는 밝힙니다.

 

작품에서 인물들은 그 시대에서 접하기 힘든 ‘특별함’을 겸비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인물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그 특별함을 삶에 적용해 갈 수 있는 행운아들만이 누릴 수 있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행운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적잖이 행운아라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내게로 온 그 행운들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두의 ‘선’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특별함은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서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했기에 위대한 고전이라는 ‘스테디셀러’들의 힘은 역시 보편타당함을 지닐 수밖에 없구나 싶은 거죠. 그래서 우린 고전읽기를 멈추어선 안 되고 특히나 젊은 세대들에게 잔소리처럼 떠들 수밖에 없나 봅니다. 한국사회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보이는 원인은 책을 읽는 이들을 주변에서 찾기 힘든 것에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요. 부디 스스로 판단해 볼 일이겠지요.

 

소설에서 중심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유형들이기도 합니다. 그 인물들이 펼치는 대화는 개인의 삶과 결혼의 의미, 사랑과 자유, 가족과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공동의 선을 향한 이야기들로 그 방법론을 작가의 정신에 따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결혼은 형식에 맞추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내용에 있는 것인지를, 타자가 아닌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는지를 묻죠. 대부분 여성의 결혼은 그 시대의 사회 관습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지만 작가는 주인공 ‘베라’를 통해 주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합니다.

 

한 세기 반이 지난 우리 시대에도 베라와 같은 선택을 한다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남성도 포함된 것이지만, 주인공의 비중을 여성으로 잡은 것이 우선일 뿐, 그런 여성의 이상을 위해 그런 남성이 없었다면 가능하진 않았겠지요. 결국, 서로의 결이 맞아 이룰 결혼이 격식으로 전락한 결혼이었기에 낳게 된 혼란 같기도 합니다.

 

제정러시아시대가 지나고 볼셰비키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국가 소련이 성립되고 해체되고, 현재는 다시 러시아로 남은 일련의 역사적 흐름을 생각해 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개인의 선택과 투쟁은 참으로 지난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의 방향에서 각 개인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 소설이 그들의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점들을 우리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주인공 베라의 삶이 지나가는 과정에는 그녀의 선택과 그것이 가능하게 실현될 수 있었던 주변 인물인 두 남자의 존재를 주목해야 하거든요. 그들은 서로 친구이며 그녀의 두 남편이기도 하죠. "당신은 싫어요. 우리 헤어져요."라고 말할 권리를, 아내의 자유를 똑같이 인정한 두 남자의 선택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누구 하나의 선택만으로 시작되고 자신의 ‘선’을 향한 신념이 실현되는 사회는 어쩌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가능성은 여전히 남겨져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믿음’에 의해 남긴 실낱같은 빛에 스며듦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시작되어야만 하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는 겁니다.

 

‘공동체’에 대한 가치는 그 어느 때가 되면 반드시 열려야 할 세계라 믿고 있습니다. 베라의 선택은 두 번의 결혼으로 가능했어요. 사랑이 자신의 신념에 반할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이 물음에서 나는 그 해답을 이 소설 속의 여주인공 베라와 그의 남편 로뿌호프, 끼르사나노프를 떠올리며 만납니다. 두 남자는 베라의 갈등에 해답을 건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소설’에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가능성을 저자는 러시아의 사회에 이식시킬 수 있기를 부단하게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분명 러시아의 사회에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이 없죠. 볼셰비키 혁명에서 그 후 러시아는 레닌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으로 변화했으니 말입니다.

 

‘베라’는 비천한 집안의 예쁜 처녀이지만 자신의 환경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인간’이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것을 공동체와 나눌 것인가, 나의 것을 지킬 것인가에 ‘사회 지식인’의 선택이 있는 것이고,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죠.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나눔의 시작은 소수의 '위대한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기득권층의 변화를 기다리는 일보나 사회 다수의 개인이 삶의 변화를 위한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자연스러운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를 통한 ‘선’을 향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나아가는 시간에는 한 개인의 사랑과 신념에서 어떤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로써 ‘희망’이었거든요.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와 충돌하는 개인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작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그동안 놓쳤던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다시 기억해 내고 꿈꿀 수 있게 해 줍니다.

 

21세기에 살면서도 여전히 친일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한국사회입니다. 내 나라 지성의 역부족을 탓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현대를 살아가야 하는 남아진 자들의 선택에 의해 변화될 과제이겠지요. 한 개인으로 선택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의 시작은 가치 지향의 공감대로 형성된 자발적인 작은 공동체의 움직임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 믿음과 지속 가능한 행위들을 이 책을 읽으며 더 가다듬는 시간이었나 봅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것은 위대한 비밀이며 다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고.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기술 도 필요 없으며 오로지 순수한 마음과 정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의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그 이상의 비밀은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지금까지 글이 첫 번째입니다. 이제 시작할 글은 주인공 베라가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 ‘인간’이기를 원했던 것에 집중을 했습니다. 당시 나는 ‘폴리아모리’라는 용어를 몰랐습니다.

 

"폴리아모리(Polyamory)란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다자간(多者間) 사랑, 다자간 연애, 비독점적 다자 연애 등으로도 부른다. 폴리(Poly)는 ‘많은’이라는 뜻의 접두사이며 ‘아모리(Amory)’는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모르(Amor)’에서 온 말이다.

 

베라의 사랑이 가능했던 것은 남편의 보이지 않았던 배려였습니다. 나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로 단순하게 생각을 했던 거죠. 어차피 사랑은 개인이 선택하면서 만들어지는 관계이기에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레 도덕규범인 결혼제도를 의식합니다. 일부일처제가 전제되는 혼인제도에서 그 외 사랑은 법적으로는 허용하지 않죠.

 

사람이 살아가면서 법의 허용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법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허용범위가 달라지잖아요. 사실 양심의 문제로 해결해야 할 일이 일상에서는 더 많죠. 도덕적 해이가 넘치는 한국사회에서 법 때문에 개인이 추구하는 사랑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나는 폴리아모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내가 원하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런 나를 이해하거나 인정해주거나 배려라도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라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점도 지나칠 수는 없지요. 폴리아모리를 원하는 개인이 질 책임 문제인 겁니다. 문제가 된다는 것도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맡겨야지 사회에서 또는 집단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개인이 선택한 그 사랑이 사회를 와해한다거나 종교에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타자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한지요. 위험한 발상인가요? 내가 믿고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 사랑은 여러 형태로 가능합니다. 단 한 가지 유형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겁니다.

 

개인주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여전히 우리는 고착된 문화, 아비투스에서 빠져나오기를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문화가 자연스럽다고 이해되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흘러 당연시된 것은 아닐지요. 잘못된 문화라면 바꿔나가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류의 진보는 변화 가능성이지 고착은 아니니까요.

 

이번 한동대 사태는 교내 동아리가 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했다는 이유로 관련 교수와 학생들의 징계 절차에 착수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 개인의 사생활을 공공연하게 폭로한(학교 측은 폭로라고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의식이 없다고 봐야죠.) 것을 문제 삼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다수로 일반화되는 성 정체성과 소수로 일컬어지는 다른 성 정체성은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이블을 근거로 내거는 기독교 입장은 시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로 밖에는 볼 수가 없어요. 적어도 사랑을 떠벌이지는 말아야죠. 인간이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것을 싫어할 신이 있어야 하나요? 종교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나는 폴리아모리스트가 되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세 주인공으로 작가는 새로운 인류 모습을 찾았나 봅니다. 결혼하기 전에 그들이 한 세 가지 서약은 한국사회에서 하는 결혼 서약과는 다릅니다. 첫째, 사랑할 때 이외에는 각방을 쓴다. 둘째, 서로의 사생활을 방해하지 않는다. 셋째,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는다. 지난해 영화 <박 열>에서 동거 서약을 했던 연인, 후미코와 박열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공감했던 삶, 동료애는 가능합니다.

 

결혼 4년째, 베라는 남편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끼르사노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마음을 남편에게 고백하자 자살을 위장하여 종적을 감추고 남은 두 사람은 결혼을 합니다. 세 가지 서약은 이번 결혼 생활에서도 유지되고요. 여기서 현실이 개입되기에 작가는 결혼을 위해 가짜 죽음을 만듭니다. 결혼제도에 변화가 온다면 이런 고통도 필요 없겠지요.

 

죽은 줄 알았던 로뿌호프가 비몬트라는 이름의 미국 사업가가 되어 돌아오고 베라의 친구인 까쩨리나와 결혼합니다. 이후 두 부부는 하나의 공동주택에서 사이좋게 살게 됩니다. 소설이죠. 네, 그렇습니다. 나는 이상적인 결혼을 위해서도 폴리아모리를 존중합니다.

 

폴리아모리스트라는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는 대안 결혼을 제시하며 그것으로 가능한 미래 공동체를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동료애로 결혼할 수 있는 시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자,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가?”로 이해해 가는 과정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압니다. 1996년 ‘된장녀’라는 말부터 이어진 2012년 메르스 사태에서 다시 온라인상에서 뜨거웠던 메갈리아 미러링과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까지 ‘혐오’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랑하기를 방해합니다.

 

“여러 사랑을 포용할 수 있다면 왜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해야 하나요?”

 

체르니셰프스끼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류인 나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면 더 좋은 일이잖아요. 비 독점 다자 연애는 어려운 사랑입니다. 나 혼자만 일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죠. 내 애인을 ‘비 독점’할 수 있으려면 애인이 다자 연애 하는 것을 수용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죠. 그 둘 다 ‘다자 연애’에만 방점이 찍히면 이별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 책에서 남편이 비 독점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이별로 가능해지는 ‘순간’일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할 필요가 없다면... 독점과 소유욕이 낳은 집착. 전통 결혼 규범과 비 독점과 비 소유, 움직이는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도 존중할 수 있다면 개인의 선택이 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란한 성이 아니라 소유욕을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반드시 폴리아모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 중 하나가 집착이잖아요.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로 살아갈 아름다운 동행이면 합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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