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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방송 듣기

 

 5월 12일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분과 첫 만남은 인터넷을 통해서 <이승로그>라는 팀 블로그에 합류하면서였지요. 그 후 제 공간으로 초대해 좋은 만남을 시작했습니다. 그 날 이후 낮은 언덕을 뒤로 한 것처럼 무척 든든했습니다. 갑작스런 비보가 들려오고 그분의 암투병기를 읽으며 한 구탱이가 스러져내리는 감정에 스스로를 추스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분의 부고는 제가 그동안 버틴 최근의 피로와 위경련으로만 알고 있던 고통을 감당하지 않도록, 제 정신력을 발휘할 수 없게 한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왕좌의 게임이었죠. 그분의 방송을 들으며 몇 해 전 겨울, 며칠을 정 주행하던 시간이 스르륵 밀려옵니다.

응급실에 누워 간헐적으로 달려드는 죽음같은 어두움을 헤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 낫 투데이!! 지금은 아니다. 그분의 발인 참가를 하루 앞 둔 일요일 새벽이었죠.


이제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세상을 향해 소리를 냅니다. 내 눈에 다른 글쟁이들과 달라보이던 특별한 그분, 그대가 추구하던 아름다운 가치를 기억하고 지켜가도록 힘을 모으겠습니다. 물뚝심송 박성호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5월 4일 방송 이후 5월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입니다. 달라 보이는 세상이야기,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를 풀어볼까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최근 작품으로 『엄마는 페미니스트』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입니다.


굳이 엄마에 국한된 이야기라기보다는 모든 어른들이 읽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내 엄마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말. 모든 어머니의 자식들이 듣게 될 이야기였으면 합니다.

 

첫 번째 제안 - 충만한 사람이 될 것.

두 번째 제안 - 같이할 것.

세 번째 제안 - ‘성 역할’은 완벽한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

네 번째 제안 - ‘유사 페미니즘’의 위험성에 주의할 것.

다섯 번째 제안 - 독서를 가르칠 것.

여섯 번째 - 흔히 쓰이는 표현에 의구심을 갖도록 가르칠 것.

일곱 번째 제안 - 결혼을 업적처럼 이야기하지 말 것.

여덟 번째 제안 - 호감형 되기를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아홉 번째 제안 - 민족적 정체성을 가르칠 것.

열한 번째 제안 - 우리 문화가 사회규범에 ‘근거’를 들 때 선택적으로 생물학을 사용하는 것에

                      의구심을 가르칠 것.

열두 번째 - 일찍부터 성교육을 할 것.

열세 번째 - 사랑이 반드시 찾아올 테니 응원해 줄 것.

열네 번째 제안 - 억압에 대해 가르칠 때 억압당하는 사람을 성자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

열다섯 번째 제안 - 차이에 대해 가르칠 것.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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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방송듣기 




#미투시민행동은 출범선언문에서 “미투 운동은 성차별적인 구조와 문화를 바꾸자는 개혁 요구이자 시국선언”이라며 “여성의 일상이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천명했다.

 

“시민사회는 촛불 이후의 ‘새로운 세상’, ‘새로운 대한민국’에 더 이상 여성들의 경험이나 목소리가 삭제되지 않아야 한다”며 “권력구조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성차별과 폭력을 근절하고 성평등 민주주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2018년 4월 21일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바꾼다

#미투 운동과 함께 하는 시민행동을 이야기 나눕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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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oo#WithYou 세 번째 방송 [펭귄들의 반란]

 

 

2017년 그 겨울의 광장에서 울리던 함성을 기억하시죠? 촛불의 힘으로 현재 대한민국은 헌정사상 대통령 탄핵을 했고 46일 수인번호 503호에게 24년 징역 180억 벌금이란 1심 판결이 났죠.

 

이번에 이야기 나눌 #WithYou는

'함께 말하면 비로소 바뀐다' 지난 330일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펭귄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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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유명인이 아닐 경우 미투 고백은 알려지지 않고 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 속에서 성폭력에 노출돼 있지만 호소할 곳조차 마땅치 않았던 것이 현실입니다.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시민들이 모여서 322일 오전부터 23일 오후 7시까지 '2018' 34시간 동안 MeToo 이어 말하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2018분 MeToo 이어 말하기 #WityYou (2) 방송 듣기

 

청계광장에 마련된 2018분을 함께 할 타이머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손에서 손으로 검은 매듭이 이어집니다.

#MeToo에 지지와 연대를 의미합니다.

2018년에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과 성폭력을 끝내자는 의미입니다.

 

 

#MeToo에 나선 분들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리면 광장에 서 있는 내 마음도 아파서 소리를 냅니다.

그들의 숨소리가, 목소리가 무겁게 광장을 파고 듭니다.

 

성폭력과 공포는 일상 곳곳에 있었고 피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동시에 겪는 이주 여성들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발언대에 나서지 못한 시민들은 하고 싶은 말을 적어 25m 길이 대자보 광장을 꾸몄습니다.

 

12일에 걸친 이어말하기 행사가 끝나고 저녁 7시부터 촛불 문화제가 열렸던 곳,

불어오는 바람 앞에 촛불이 흔들리며 #WithYou로 함께 하는 마음들이 장을 밝게 비춥니다.

 

이렇게 삶을 이어온 수많은 성폭력과 공포로 숨죽이며 살아야했던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온 세계로 울렸으면 합니다.

 

성폭력이 멈출 수 있기를,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을 담아 함께 한 #WithYou운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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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MeToo에 #WithYou (1)

 

 

성범죄는 개인이나 한 집단만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바로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공소시효라는 장벽. 현재까지도 수많은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경찰을 통하여 제대로 된 사건의 해결을 받아내지 못하자 이러한 범죄들을 대중에게 폭로하고 이슈를 만들어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운동인 “MeToo”

 

그에 응원을 보내는 “WithYou”가 지속되는 가운데 근원적인 문제들을 풀어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으로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가 반드시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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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월 은행나무에서 출간한 그럼에도 페미니즘 두 번째 방송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5화. <그럼에도 페미니즘>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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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그럼에도 페미니즘 (1)

 

<그럼에도 페미니즘> 20171월 출간. 윤보라 외 / 은행나무

-일상을 뒤집어 보는 열두 가지 질문들-

 

책을 읽고 일상에서 발견하는 페미니즘을 같이 이야기 나눕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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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3화 <충남 도민 인권 조례 폐지>

 

자유한국당 소속 충남도의원들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넘어 모든 지역민의 인권을 강조한

충남 인권조례를 폐지하려고 한다.

폐지안을 표결에 부치는 본회의가 2월 2일 열려 현재 폐지 되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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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에서 못 다한 이야기 <페미니즘은 예술 하기>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동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페미니즘은 예술 하기”라고요. 지금 이 마음을 담아 글의 제목을 만듭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살 수 있기에 더없이 멋진 일이 페미니즘 공부입니다. 호모 아르텍스가 되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와, 예술이다!”

 

이런 말을 하던 순간을 각자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지나쳐 왔던 그 많은 불평등과 차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 사회가 쌓아둔 채 거들떠보지도 않은 진실을 발견합니다. 대중문화로 반복된 획일화된 감각들은 아주 익숙합니다. 그 익숙함을 낯설게 만드는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저절로 내지르는 탄성이 그렇습니다.

 

2017년 12월 8일 한동대 ‘들꽃’에서 주최한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특히 주목한 점은 별 의식 없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개인을 향한 폭력입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권을 지나며 공동체에 골몰해 있었고 그 가능성으로 가까이 다가간 책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남기게 되는 경우를 보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알려줍니다. 내가 무엇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죠. ‘한동대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사건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 책의 기억을 꺼냅니다. 당시 책을 읽을 때는 크게 주목하지 못한 주인공들, 개개인에 내 마음이 다가가지 못했던 겁니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두 번째로 다가설 ‘폴리아모리’를 풀어갑니다. 이 용어에 집중하기로 한 것은 지난해 한 청년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에 답하기입니다. 내가 무척 아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와 인연은 20년 가까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1학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인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의 질문에 답을 글로 올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직도 나의 벗으로 동행중인 청년에게 건네는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열린책들. 상, 하 두 권인 이 책은 저자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가 수용소 생활 중 1863년 발표한 대표적인 사회·정치 소설입니다. '주인공들 베라 빠블로브나, 로뿌호푸, 끼르사나노프, 라흐메또프는 1840년대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새로운 도덕적 정열을 지닌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구시대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일치한다는 <합리적 에고이즘>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역자는 밝힙니다.

 

작품에서 인물들은 그 시대에서 접하기 힘든 ‘특별함’을 겸비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인물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그 특별함을 삶에 적용해 갈 수 있는 행운아들만이 누릴 수 있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행운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적잖이 행운아라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내게로 온 그 행운들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두의 ‘선’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특별함은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서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했기에 위대한 고전이라는 ‘스테디셀러’들의 힘은 역시 보편타당함을 지닐 수밖에 없구나 싶은 거죠. 그래서 우린 고전읽기를 멈추어선 안 되고 특히나 젊은 세대들에게 잔소리처럼 떠들 수밖에 없나 봅니다. 한국사회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보이는 원인은 책을 읽는 이들을 주변에서 찾기 힘든 것에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요. 부디 스스로 판단해 볼 일이겠지요.

 

소설에서 중심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유형들이기도 합니다. 그 인물들이 펼치는 대화는 개인의 삶과 결혼의 의미, 사랑과 자유, 가족과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공동의 선을 향한 이야기들로 그 방법론을 작가의 정신에 따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결혼은 형식에 맞추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내용에 있는 것인지를, 타자가 아닌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는지를 묻죠. 대부분 여성의 결혼은 그 시대의 사회 관습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지만 작가는 주인공 ‘베라’를 통해 주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합니다.

 

한 세기 반이 지난 우리 시대에도 베라와 같은 선택을 한다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남성도 포함된 것이지만, 주인공의 비중을 여성으로 잡은 것이 우선일 뿐, 그런 여성의 이상을 위해 그런 남성이 없었다면 가능하진 않았겠지요. 결국, 서로의 결이 맞아 이룰 결혼이 격식으로 전락한 결혼이었기에 낳게 된 혼란 같기도 합니다.

 

제정러시아시대가 지나고 볼셰비키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국가 소련이 성립되고 해체되고, 현재는 다시 러시아로 남은 일련의 역사적 흐름을 생각해 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개인의 선택과 투쟁은 참으로 지난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의 방향에서 각 개인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 소설이 그들의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점들을 우리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주인공 베라의 삶이 지나가는 과정에는 그녀의 선택과 그것이 가능하게 실현될 수 있었던 주변 인물인 두 남자의 존재를 주목해야 하거든요. 그들은 서로 친구이며 그녀의 두 남편이기도 하죠. "당신은 싫어요. 우리 헤어져요."라고 말할 권리를, 아내의 자유를 똑같이 인정한 두 남자의 선택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누구 하나의 선택만으로 시작되고 자신의 ‘선’을 향한 신념이 실현되는 사회는 어쩌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가능성은 여전히 남겨져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믿음’에 의해 남긴 실낱같은 빛에 스며듦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시작되어야만 하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는 겁니다.

 

‘공동체’에 대한 가치는 그 어느 때가 되면 반드시 열려야 할 세계라 믿고 있습니다. 베라의 선택은 두 번의 결혼으로 가능했어요. 사랑이 자신의 신념에 반할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이 물음에서 나는 그 해답을 이 소설 속의 여주인공 베라와 그의 남편 로뿌호프, 끼르사나노프를 떠올리며 만납니다. 두 남자는 베라의 갈등에 해답을 건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소설’에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가능성을 저자는 러시아의 사회에 이식시킬 수 있기를 부단하게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분명 러시아의 사회에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이 없죠. 볼셰비키 혁명에서 그 후 러시아는 레닌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으로 변화했으니 말입니다.

 

‘베라’는 비천한 집안의 예쁜 처녀이지만 자신의 환경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인간’이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것을 공동체와 나눌 것인가, 나의 것을 지킬 것인가에 ‘사회 지식인’의 선택이 있는 것이고,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죠.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나눔의 시작은 소수의 '위대한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기득권층의 변화를 기다리는 일보나 사회 다수의 개인이 삶의 변화를 위한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자연스러운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를 통한 ‘선’을 향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나아가는 시간에는 한 개인의 사랑과 신념에서 어떤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로써 ‘희망’이었거든요.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와 충돌하는 개인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작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그동안 놓쳤던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다시 기억해 내고 꿈꿀 수 있게 해 줍니다.

 

21세기에 살면서도 여전히 친일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한국사회입니다. 내 나라 지성의 역부족을 탓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현대를 살아가야 하는 남아진 자들의 선택에 의해 변화될 과제이겠지요. 한 개인으로 선택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의 시작은 가치 지향의 공감대로 형성된 자발적인 작은 공동체의 움직임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 믿음과 지속 가능한 행위들을 이 책을 읽으며 더 가다듬는 시간이었나 봅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것은 위대한 비밀이며 다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고.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기술 도 필요 없으며 오로지 순수한 마음과 정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의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그 이상의 비밀은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지금까지 글이 첫 번째입니다. 이제 시작할 글은 주인공 베라가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 ‘인간’이기를 원했던 것에 집중을 했습니다. 당시 나는 ‘폴리아모리’라는 용어를 몰랐습니다.

 

"폴리아모리(Polyamory)란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다자간(多者間) 사랑, 다자간 연애, 비독점적 다자 연애 등으로도 부른다. 폴리(Poly)는 ‘많은’이라는 뜻의 접두사이며 ‘아모리(Amory)’는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모르(Amor)’에서 온 말이다.

 

베라의 사랑이 가능했던 것은 남편의 보이지 않았던 배려였습니다. 나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로 단순하게 생각을 했던 거죠. 어차피 사랑은 개인이 선택하면서 만들어지는 관계이기에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레 도덕규범인 결혼제도를 의식합니다. 일부일처제가 전제되는 혼인제도에서 그 외 사랑은 법적으로는 허용하지 않죠.

 

사람이 살아가면서 법의 허용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법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허용범위가 달라지잖아요. 사실 양심의 문제로 해결해야 할 일이 일상에서는 더 많죠. 도덕적 해이가 넘치는 한국사회에서 법 때문에 개인이 추구하는 사랑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나는 폴리아모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내가 원하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런 나를 이해하거나 인정해주거나 배려라도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라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점도 지나칠 수는 없지요. 폴리아모리를 원하는 개인이 질 책임 문제인 겁니다. 문제가 된다는 것도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맡겨야지 사회에서 또는 집단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개인이 선택한 그 사랑이 사회를 와해한다거나 종교에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타자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한지요. 위험한 발상인가요? 내가 믿고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 사랑은 여러 형태로 가능합니다. 단 한 가지 유형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겁니다.

 

개인주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여전히 우리는 고착된 문화, 아비투스에서 빠져나오기를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문화가 자연스럽다고 이해되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흘러 당연시된 것은 아닐지요. 잘못된 문화라면 바꿔나가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류의 진보는 변화 가능성이지 고착은 아니니까요.

 

이번 한동대 사태는 교내 동아리가 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했다는 이유로 관련 교수와 학생들의 징계 절차에 착수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 개인의 사생활을 공공연하게 폭로한(학교 측은 폭로라고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의식이 없다고 봐야죠.) 것을 문제 삼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다수로 일반화되는 성 정체성과 소수로 일컬어지는 다른 성 정체성은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이블을 근거로 내거는 기독교 입장은 시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로 밖에는 볼 수가 없어요. 적어도 사랑을 떠벌이지는 말아야죠. 인간이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것을 싫어할 신이 있어야 하나요? 종교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나는 폴리아모리스트가 되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세 주인공으로 작가는 새로운 인류 모습을 찾았나 봅니다. 결혼하기 전에 그들이 한 세 가지 서약은 한국사회에서 하는 결혼 서약과는 다릅니다. 첫째, 사랑할 때 이외에는 각방을 쓴다. 둘째, 서로의 사생활을 방해하지 않는다. 셋째,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는다. 지난해 영화 <박 열>에서 동거 서약을 했던 연인, 후미코와 박열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공감했던 삶, 동료애는 가능합니다.

 

결혼 4년째, 베라는 남편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끼르사노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마음을 남편에게 고백하자 자살을 위장하여 종적을 감추고 남은 두 사람은 결혼을 합니다. 세 가지 서약은 이번 결혼 생활에서도 유지되고요. 여기서 현실이 개입되기에 작가는 결혼을 위해 가짜 죽음을 만듭니다. 결혼제도에 변화가 온다면 이런 고통도 필요 없겠지요.

 

죽은 줄 알았던 로뿌호프가 비몬트라는 이름의 미국 사업가가 되어 돌아오고 베라의 친구인 까쩨리나와 결혼합니다. 이후 두 부부는 하나의 공동주택에서 사이좋게 살게 됩니다. 소설이죠. 네, 그렇습니다. 나는 이상적인 결혼을 위해서도 폴리아모리를 존중합니다.

 

폴리아모리스트라는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는 대안 결혼을 제시하며 그것으로 가능한 미래 공동체를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동료애로 결혼할 수 있는 시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자,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가?”로 이해해 가는 과정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압니다. 1996년 ‘된장녀’라는 말부터 이어진 2012년 메르스 사태에서 다시 온라인상에서 뜨거웠던 메갈리아 미러링과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까지 ‘혐오’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랑하기를 방해합니다.

 

“여러 사랑을 포용할 수 있다면 왜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해야 하나요?”

 

체르니셰프스끼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류인 나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면 더 좋은 일이잖아요. 비 독점 다자 연애는 어려운 사랑입니다. 나 혼자만 일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죠. 내 애인을 ‘비 독점’할 수 있으려면 애인이 다자 연애 하는 것을 수용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죠. 그 둘 다 ‘다자 연애’에만 방점이 찍히면 이별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 책에서 남편이 비 독점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이별로 가능해지는 ‘순간’일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할 필요가 없다면... 독점과 소유욕이 낳은 집착. 전통 결혼 규범과 비 독점과 비 소유, 움직이는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도 존중할 수 있다면 개인의 선택이 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란한 성이 아니라 소유욕을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반드시 폴리아모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 중 하나가 집착이잖아요.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로 살아갈 아름다운 동행이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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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1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못다한 이야기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소설가이며 1977년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자랐다. 열아홉에 미국으로 건너가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인종, 이민자, 여성에 대한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삼은 소설로 평단의 각광을 받으며 영미문학을 이끌 차세대 작가로 부상했다. 이 책의 원본이 된 TED강연은 유튜브에서 250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고, 팝스타 비욘세의 노래에 피처링되기도 했다. 스웨덴에서는 이 책을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 2학년에게 나눠주고 성평등 교육의 교재로 삼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만일 남자들만 계속해서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남자만 사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이 현실과 다르다고 알게 된 것은 십 대부터였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여자로 태어났지만 ‘나’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삶에서 선택은 문학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시몬 드 보봐르, 루이제 린저와 F. 사강,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으로 살았다.

 

내가 자연스럽게 여기던 것들은 현실에서 부자연스러웠고 “여자인 내가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 익숙하게 될 즈음 부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일은 나를 드러내는 일보다 더 쉬웠다. ‘나’를 숨긴다는 의미는 이십대까지는 ‘세상 모르고 산다’는 것을 표현하는 일이고 친구들에게 아나키스트라 불리는 것에 더 익숙한 시절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세상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일보다는 ‘나’를 지켜내는 일에 몰두했다. ‘나’로 산다는 것은 ‘홀로 주체’가 된다는 일이고 혼자서 거의 모든 선택을 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오히려 동성 친구에게서 ‘나’를 존중받는 일이 고단했던 기억이 많다. “왜 화장을 안 하니?” 결혼식 당일까지 무던히도 들었던 대표적인 말이다.

 

남들과 다른 내 삶을 좀 더 객관화할 수 있던 시기는 결혼 후 사회 활동을 하면서였다. 아, 어떻게 남편이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삶에 적응하며 살 수 있는 거지? 결혼하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니. 자주 떠오르는 물음이었다. 이제는 나로 살아가는데 필요했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의지를 발휘하며 산다. 21세기에 서 있는 나는 이제 그렇다. 나와 교류하는 사람들에서 자연스럽다.

 

“그들에게 나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나도 똑같은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일이지만, 때로는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픈 법입니다.

 

직장인으로 살아보지 못한 내가 겪는 분노이기도 하다. 지난해까지 ‘을’이라 지칭되는 집단이나 개인으로 서 있던 시절이 거의 없는 셈이다. 나는 노동의 가치를 다르게 인식하며 살았기에 나에게 노동은 놀이와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고 자유롭다. 이 점에서 늘 나는 겸손해진다. 얼마나 큰 행운이던가. 그 행운은 ‘나’로 살아온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한 준비된 자에게 온 행운이기도 하다.

 

책을 좋아해서 쌓아둔 책이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을 할 것이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책을 읽는 일이 일상이고 밥벌이다. 그 자격은 사회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다고 여기는 내 취미활동으로 기록되곤 하던 독서였다. 이 사소하다 여기는 취미로 내가 가장 아팠던 일은 꽤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의 분서갱유다. 직접 진시황제처럼 책을 불질러버린 사건은 아니여도 내게는 가장 큰 아픔이었다. 집안에 있는 책들을 아파트 현관문 밖으로 다 내던지시며 시집이나 가라는 말씀. 당시까지 아버지는 개방적인 분이셨고 미래지향이셨던 분이기에 상처가 컸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더럽고 치사해서 결혼 한다 내가. 후후. 아버지는 그 후 1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뜨셨다. 어머님의 위안은 이렇게 이어지곤 한다. 다 네 아버지가 떠날 때가 돼서 마음이 급해서 막내딸 손잡고 결혼식장에 들여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라고. 내 어머니도 당시에는 드물게 맞벌이를 하며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이런 일들은 현실에서 늘 덜그럭거리는 불협화음이다.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한 세상을, 스스로에게 좀 더 진실함으로써 좀 더 행복해진 남자들과 좀 더 행복해진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 부분이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슬그머니 넘어갔다. 이 문장을 서 너 번 소리 내어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굳이 남자와 여자들이란 말을 하지 않고 싶다. 성별 구분 자체가 너무 오랜 시간 편리하게 사용된 관념 덩어리이기에 모두가 더 행복해진 세상을 상상하면서 지금을 살아나고 싶다.

 

한국사회는 여자 남자로 성역할을 고정시켜서 모두가 힘들다. 남자는 남자라서 여자는 여자라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선택과 가치는 제쳐두고 사회에서 원하는 이름에 종속되곤 한다. 개인의 행복이 사회에서 무시되는 일이 너무 흔하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타인의 행복을 말할 수 있는가.

 

나부터 행복해지기. 내가 웃을 수 있어야 당신도 웃을 수 있지 않은가. 같이 웃고 같이 울 수 있으면 된다. 페미니즘이 그 시작으로 된다면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보다는 안으로 채워진 나의 가치와 공감으로 변화 가능성이 지속되고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야망을 품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돼. 그러면 남자가 기가 죽을 테니까.

 

남자의 기를 살리기 위해서 야망을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된다는 말은 여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다. 한국사회에서 아들, 특히 장남을 위한 희생이 미덕처럼 여기던 시절을 지나온 현재까지도 가족에서 딸, 굳이 장녀를 위한 희생은 거론되지 않는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란 말을 종종 들으며 성장한 기성세대로서 남아선호로 인한 편애는 어머니 교과서의 한 부분이다. 어머니 교과서 개정판은 은밀하게 희생을 강요한 사회에 맞서는 일의 하나로 강한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져 오기도 한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는 말이 가슴 한 편에서 메아리칠 때가 있지 않던가. 강한 어머니는 당당하게 불릴 수 있어야 했던 이 땅의 페미니스트였다.

 

“다리를 오므리렴. 몸을 가리렴.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여자로 태어난 것부터가 무슨 죄를 지은 것인 양 느끼게끔 만듭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남자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대체로 타인의 시선에 몸을 사리고 방어막을 두르기 시작하면 소통할 수 없는 사회로 이어진다. 결국, 불통에서 생산된 말들이 모여들면 한 더미의 쓰레기 처리장처럼 냄새를 풍긴다.

 

‘혐오’라는 말로 ‘충’이라는 말로 인간임을 스스로 내던지는 일을 거침없이 하기도 한다. 유전자의 다름으로 구분하기 전에 같은 사람으로서 조화를 이루는 일은 유토피아처럼 여긴다. 이 문장들은 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나와 당신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가슴을 후벼 팠으면 한다.

 

여자와 남자가 사회에서 어떤 상황으로 위치해 있는가는 모두에게 새로운 시선을 갖는 기회를 준다. 내가 선택할 기회조차 없는 상태에서 강제된 것이기에 여자, 남자라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 폭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인류가 진보한다는 것은 어느 한 편으로 집중되는 발전은 아니다. 그런 사회구조에서 만들어진 문화가 변화하려면 주체로 선 내가 주체인 당신과 동행하며 얻는 가능한 변화이다. 페미니즘 공부는 가능한 변화를 위한 첫 걸음으로 좋은 선택이다.

 

“바로 그 점이 문제의 일부입니다. 많은 남자들이 젠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 말입니다. 겉보기에는 사소한 상황들에서, 남자들이 나서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 내는 일을 겁내지 않아야 한다. 그래, 말은 쉽다. 젠더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전 세대가 각자 의식하고 있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한국사회에서 ‘성sex’이란 말은 겉으로 편하게 주고받거나 나를 드러내는 말로 자리 잡을 수 없다.

 

‘금기’가 넘치는 사회라고 할까. 19금. 일상에서 자주 보이는 표식이다. 그것은 어쩐지 대상을 더 강조하는 표식이 되어 19금을 넘나드는 것도 일상이라 할 만큼 진부하다. 형식에 그치는 사회제도를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사회제도를 그게 현실이니까 어쩌겠냐는 말로 대신한다. 원래 인생은 부조리해!?

 

사회 강자로 살아온 사람들이 나서서 부당하다고 외칠 이유는 넘친다. 이젠 그런 남자를 만들어야 하는 일부터 해야 하는 걸까? 이 점에서 ‘나’를 성찰해야 한다. 과연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역꾸역 해올 수 있던 것은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멈출 수 없었던 이유가 크다.

 

페미니즘 공부는 나를 지금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데 아주 훌륭한 근거였다. 자유인으로 누리는 삶은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확실하게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만 자유로운 세상을 나는 결코 원하지 않는다. 당신도 자유롭기를 바란다. 그래야 서로 신나게 놀 수 있지 않은가.

 

“문화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문화를 만듭니다. 만일 여자도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우리 문화에 없던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문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안체 슈룹 글과 파투 그림의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를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그림과 글로 비교적 쉽게 페미니즘 역사를 보여주는데 ‘하나의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로운 제안, 연구 결과, 그리고 지식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나누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문화는 사회에서 약자들을 배제해온 문화였기에 모든 사람을 품어 향유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고 그 시작은 내가 먼저 첫 걸음을 떼면서 형성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동행이다.

 

인류 역사에 일방적으로 내린 전 세계로 뻗친 뿌리를 흔들어야 한다. 모든 가부장제에 합류해 강한 협력을 조장한 자본주의에서 배제를 더 이상 참아낼 이유가 없다. 자본주의에서 외면당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숨죽이고 있지 않던가.

 

“그 순간 나는 친웨 아줌마의 성격에 모난 데가 전혀 없는 비결을 알아차렸다. 아줌마는 그것들을 몽땅 뭉개고 있었다. 아줌마는 무한한 아량의 바다였다.

 

남편이 나만큼 행복하길 원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은 성장하면서 자기 안에 쌓인 분노를 풀어내는 일이다. 길을 걷는 만행이었다. 그는 인도로 명상의 길을 떠났고 자기와 마주함에 온전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와 동행하는 여행자들로부터 ‘부처’라는 허무맹랑한 호칭이 내게 붙었다.

 

내가 충분히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에 남편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결과. 남편의 길 떠남이 가져다 준 것은 가족 부양의 책임이다. 당시 나는 충분한 능력이 사회 분위기와 맞아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결핍은 아이들에게서 생겼다. 두 어른의 결정만으로 세 아이들은 각각 아버지 부재라는 일상의 결핍에 힘든 성장기를 거쳐야 했다. 특히 남자 아이가 겪어야 했던 결핍은 한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자신과 다를 때 혼란을 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부모라는 말로 가해지는 사회폭력은 얼마나 이기적이던가.

 

친웨 아줌마처럼 나는 무한한 아량도, 타인에게 말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의 불행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몰랐고 그 스스로 찾아내주길 바란 이기심이 먼저였다. 물론 나는 관용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 이면에는 ‘나’의 공감과 만족, 지금 이대로 행복할 수 있는가에 달린 점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나를 위해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나를 위해 가장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게 한 관용으로 덮은 자기애와 비슷하다.

 

“왜 아줌마는 단정하게 반응해야만 존경받을 수 있었을까? 왜 아줌마는 모욕에 직면하여 세상에 대고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을까? 왜 아줌마의 완벽함은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에 달려 있었을까?

 

사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관리를 필요로 하는 고된 일이다. 외모지상주의에서 학벌주의 등 나를 에워싼 사회에서 요구하는 나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나는 인정하는 일부터 하면서 비로소 ‘나’로 살아가는 시간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힘은 아무리 둘러봐도 평생의 벗으로 늘 곁에 있어준 책이었다. 문학에서 만난 여성들의 목소리는 나를 자연스레 “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선택 가능하게 해 주었다. 이제, 비로소 ‘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치기를 바라면서 2018년을 열고 있다. 그대, 함께 가시려나... .

 

[덧붙임]

팟캐스트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를 송출하고 못내 아쉬운 점들을 후기로 정리해 보니 마음의 무게가 덜해진다. 평생 공부를 하면서 남은 삶을 잘 짓고 싶은 마음. 이 방송을 듣고 이 글을 읽는 이들 모두가 페미니즘 공부 효과를 같이 나눌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삶은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스스로 한 걸음 딛고 걸어가는 ‘선택’이 연속되는 낯섦과 두려움에서 이어지는 거였다. 나는 노마드의 삶을 즐기는 중인데 그 가운데 함께 나눌 페미니즘 공부로 새로운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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