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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는다.’ 한 사람이 곁에서 멀어질 때면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도 용감합니다. 너덜너덜해진 몸이 푹 꺼진 낡은 소파 위에 누워도 편안합니다. 월말이면 세 자리 수 통장이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일 또 내게 소용될 만큼은 가능하겠지 하는 느낌입니다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에 용감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 순간 닥칠 고난에 미리부터 염려하지 않는 낙천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내 주변에서 이런 나를 대책 없다고 해도 난 웃을 수 있습니다.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내리고 나면 온전하게 나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행히도 나는 그 전차에서 내려 정착한 지 오래되어 기억에도 없습니다. 욕망이 요구하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충분히 나를 위해 사용해왔기에 내게 남은 시간은 충분합니다. 삶은 큰 요동침 없이 슬그머니 나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으며 살아온 행운아이기에 겁날 것이 없어졌나 봅니다 

  인생에서 남은 시간 온전하게 나를 지켜내며 떠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욕망이라면 그렇다고 해야겠지만요. 그 욕망마저 없다면 살아있음이 지루하겠지요. 지금도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지낼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함을 잊지 않습니다.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고 만나고 싶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놓치지 않으며 살고 있습니다 

다 내어 주면 비어 있어서 평온해집니다. 원망도 미움도 분노도 내어 주면 사랑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한 모든 것들에서 배웁니다. 내가 만든 처음 그 마음들을 지켜낼 수 있도록 나의 벗들이 속삭입니다. 나를 견디게 해 준 벗들, 뒤죽박죽 쌓여있는 책들이 소리 내며 한 줄로 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이 남아 있지 않아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십 대에 먹은 그 마음을 지켜내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도 많았고 잡을 듯 놓친 순간도 있습니다. 첫걸음을 잘못 디뎌 길을 헤맨 적도 많았습니다. 선택 앞에서 치우친 마음으로 눈물로 지난 아침이 무건 두 눈꺼풀을 깨우기도 합니다. 자기 합리화도 넘칩니다. 쏟아 부은 열정에 지쳐 좌절도 했나 봅니다 

  지금도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속삭입니다. 너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 시를 가슴에 와락 품습니다. 돈이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용감한 녀석이니 그리 살라 합니다. 나와 상관없이 지나가는 이 세계가 있습니다. 나는 홀로 밥을 먹다가 갑자기 찾아온 급성 위경련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이런 날들이야 눈에 띄는 세계의 부재입니다만 나의 세계에서 비껴난 그들의 세계도 있으니 피장파장 아닐까 합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탁하고 습한 역겨움이 가득한 통로를 지나면서 느끼는 감정 같은 걸까 싶습니다. ‘라는 존재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데 마치 없는 장소처럼 여기지 않는 순간도 있습니다. 열린 문으로 나서면 될 것만 같은 세계는 내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이 적어질수록 나의 세계는 견고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열어 놓은 문으로 이름 모를 벌레 한 마리가 나를 약오르게 하고 그의 희롱에 대꾸를 하다가 처박아둔 에프킬라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 텅 비어 있어서 그 벌레는 여전히 내 주위를 유영합니다 

  아, 그래서 나는 이 세계에서 에프킬라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내일 슈퍼를 가면 사올 물품 목록에 써 둡니다. 이런 세계를 외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시인의 말처럼 비겁한 짓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이 세계를 떠났다가 다시 시간의 문을 열고 여행하는 시간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판타지와 이별할 수 없는 나는 시인 황성희에게 들려줍니다. 내가 시인이라면 판타지 안녕이 아니라 판타지 사랑이라 하겠다고요. 시인의 일상이 나의 일상을 닮았다는 생각에 詩集을 덮고 어루만집니다. 와 마음껏 놀아보니 시인이 된 듯합니다. 아무렴 어떨까요. 나를 위한 시는 늘 읊조릴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지요 뭐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 우리말보다 한자어가 더 기분 좋게 다가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읊조리며 살고 있습니다. 꼬박 하루를 지켜보면서 검푸른 새벽을 지나 여명까지.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 밤이면 애써 자려고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이 세계를 향해 느낄 수 없는 불감증일까 생각했습니다. 

일상의 감동 없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여전히 나와는 상관없이 잘 돌아간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만들어진 불감증입니다. 그것이 불면증으로 이어져 몇 시간의 수면이어도 눈 뜨면 다시 아침입니다. 오늘 잠들고 다시 오늘 일어납니다. 내일 잠들고 또 내일 일어나겠지요.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창밖의 반짝거림으로 거리에 나 앉은 느낌입니다. 고동색 블라인드를 내리고 작은 조명등을 켜고 눕습니다. 

  깊은 밤입니다. 감기려 하지 눈꺼풀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눈을 꼬옥 감습니다. 역시 잠이 오질 않습니다. 내일은 커피의 양을 줄여야 할까 봅니다. 그런데 내일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커피를 십 대부터 마셔서 내 몸은 카페인으로 인한 수면 거부는 아니야. 이 불면증은 내 일상과 같아서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굳이 밤이어야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니까요. 잠이 오면 잘 수 있는 너절하게 늘어난 내 시간 덕분에 약간의 수면에 대한 강박도 없습니다. 습관처럼 마시는 커피가 나에게는 생명수인 까닭에 오늘처럼 내일도 커피를 마실 겁니다. 내 몸이 본능처럼 그 향기를 구걸하니까요. 향기로운 아침이면 족한 또 하루의 시작이면 됩니다.

내게 비늘처럼 깔린 불감증은 일상의 평온이고 세계의 몰이해를 향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이 세계의 소음과 상관없이 나는 나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불감증과 불면증이 아닌 이 세계의 부정의와 몰상식, 합리주의와 이성에 너덜너덜한 채로. 작더라도 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가치를 지켜내고 싶은 마음 하나로 다시 시를 품습니다.

 

 

이글은 [푸른비의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 https://brunch.co.kr/@overdye0714/149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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