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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시대의 '음서'가 현대에 되살아 나려 한다. 삼성자사고 개교의 소식에 더 큰 한숨과 한심한 정부에게  왜 그러니~ 하며, 목을 빼고 있는 다수의 민초에 속한 1인으로 몇 년 전 읽은 책을 부활시키며 곱씹고 있다. 부모가 잘나지 못하면 자식도 잘날 수 없다는 삼성판 '음서'는 다시 말해, 부모가 용기를 내면 자식도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겠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며 채워주고 잘못된 것들은 바로 잡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담긴 몇 해 전에 만난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학벌없는 사회)'를 떠올리는 시간이다.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들을 사유와 분석을 통해 쟁점화 하며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8명의 필진들이 쓴  이 책은 '학벌없는 사회'로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학교를 떠나라!" 진학을 앞두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어린 그들에게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말이다. 더우기 내 아이들에게도 건네기 어려운 말이다. 적어도 지금 이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학교 밖에서 만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기에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그 희망은 사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내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내용들이지만 과연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열릴 혼돈과 어지럼증은 어떤 마음의 변화를 오게 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만나는 시간 내내 '내 속에 웅크린 허무(dada)'를 불러내어 만났지만 내 생각이 크게 필자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삶으로 향한 전환을 건네는 것이고, 아주 특별한 기회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먼저, 돌을 막 지난 첫 아이의 '바람그리기'부터 시작된 그림에 대한 재능을 키우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일관성을 대학입학까지 유지했던 부모로서 삼성판 '음서'에 떠오르는 생각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다. 수요자의 거부만이 답이다. 허나 그 답을 낸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있겠다 정도일 것이리라.

내게는 오로지 제 삶에서 '그림'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아이가 스물이 되자 자신의 진로에 스스로 딴지걸기를 해, 저 스스로가 더 힘들고 막막할 인문학을 선택해 다시 시작하기를 선언한 첫째의 삶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 즈음엔 대한민국 고3, 둘째의 갑작스런 진로 변화와 이탈, 저항에 동조하고 수포자로서 선택의 한계를 넘으려고 매진하며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딸의 모습에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의 시간이 있었다. 둘째에게 그림을 접고 인문학으로의 선택은 수학을 하지 않았던 수포자의 한이 반영되기에 서울에 있는 대학진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도움과 서울특별시를 탈출한 내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의 시간들이라 여겼던 것들이 아이들의 선택과는 다름을 알아차리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위한 선택에 우선적으로 대응을 해왔다. 그들의 미래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내가 서울특별시를 벗어난다는 두려움을 넘어서면서 찾아낸 자유로움으로 채워지는 삶들을 생각하고 아이들의 정서적인 독립선언으로 열릴 고단할 시간에 응원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둘째는 제 언니와는 다르게 동양미술을 선택해 진행하던 고교과정에서 그 뜨건 고3 수시 기간 중에 돌연 전공을 인문학으로 바꾸어 차악의 선택을 향했다. 저 스스로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기에 타인의 시선을 벗어던지고 원하는 학문의 길로 여행을 찾아가는 시간들에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결코 늦지않은 오히려 적절한 시기, 그러나 타자의 시선에선 결코 현명하지 못한 둘째의 <선언>은 한 인간으로서 성장한 모습이었기에 그동안의 시간들을 뒤돌아 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일이. 그렇게 해서 얻을 명문대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외면하고, 그녀에게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고통이었음을 생각하면 미리부터 짐짓 건넨 진로에 대한 방향 모색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만 그녀가 그 길로 나아갈 때 온전하게 스스로를 느끼지 못한다면 대학 4년 내내 스스로 고통과 우울, 외로움과의 지난한 투쟁으로 패배의 감정을 만나기도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까지도 경험한 후에야 그녀는 진정한 스스로의 얼굴을 만들어 낼테지만 말이다.

이런 우려함도 이제는 치루어 내어, 둘째는 대학 입학 후 반학기를 다니고, 2년 휴학의 시간을 치루어 내더니 자신의 재능을 재발견하고 복학을 했다. 그녀는 지금 한 학기 중 얻을 수 있는 학점을 취득하기 보단 스스로채우지 못한 시간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란 것은 늘 내 가까이에 있었고, 이 저속한 사회가 끼친 영향력에서 자유롭기만 하다면, 매일이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리라. 또래들보다 2년이 뒤늦었다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를 인정했기에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스스로를 만나며 작은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며 살아질 것이다. 내가 누리는 이만큼의 풍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시간이 빠를수록 살아있는 동안 느낄 수 있는 행복한 마음은 일상을 채워 줄 것이다. 그 시간들로 이루어질 많은 감동들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라 내가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에 있건 학교 밖에 있건, 공간의 의미는 우리의 영혼을 방해하지 않는다. 내가 놓인 이 사회가 나의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주된 원인일 뿐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만이 필요하다. 이것이 늘 나에게로 던지는 물음이었고, 이렇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내 주변과 나눌 수 있는 이 마음이면 되었다고, 마음만 부자인 내게 늘 다독여왔다. 둘째의 분투가 통하여지기를 응원하면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말했다. 탐욕을 버리고 나를 통한 너를 인식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간들이 계속 열려질 수 있기만을, 간절하게 열망하는 내 안의 힘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기만을, 한 개인의 용기있는 선택이 '딴지 걸기'라고 말이다.

세째는 학교를 버렸다. 의무교육을 마치기까지 진심으로 고마운 것은 별 사고없이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다. 아직도 내겐 숙제이다. 세째가 학교밖에서 제 방식으로 사회와 교류 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학교'의 의미를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적어도 어린 세대들에게 내 방식을 강요하거나 삶의 잘못된 모습들을 각인시키거나 하지는 않을 듯싶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학교'가 한 몫을 단단히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변화의 가능성은 늘 내게 달린 문제였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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