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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밑에 열린 박근혜 대통령,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한길 대표의 3자 회담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회3자회담’이 별 내용도 결과도 없이 끝나는 것을 보며, 야당과 정국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야당의 장외투쟁을 거론하며 ‘국민적 저항’을 운운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이해가 안 된다.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민생을 거론하고 있지만 현재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급한 사안의 핵심을 회피하며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거나 자각능력이 부족해서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히려 광장의 소리와 야당의 행동들을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해석하며 이 사태를 공안정국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청와대의 의지만을 보여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확인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 나라에 작동되고 있는 ‘청와대 룰’이란 것이다.

 

 

[출처]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30510104604176&srchid=IIM%2Fnews%2F67626214%2F2f65476def26efc926a1632ec9dfdf30  

 

 

앤드루 바세비치는 ‘워싱턴 룰’에서 지난 60년간 미국의 군사정책과 실제 관행들을 관찰해 보고 국제평화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최소한 몇 가지 중요한 지속적인 요소들을 발견해 유지하기 위한 믿음으로 ‘성(聖)삼위일체’를 말했다. 첫째 미 군사력의 세계적 주둔, 둘째 이 군사력에 의한 세계적 힘의 투사, 셋째 현존하는, 또는 앞으로 예상되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세계적 개입주의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미국적 신조가 합해져서 하나는 목표를, 다른 하나는 실천을 규정하는데 이 두 가지가 그동안 미국의 세기를 통치하고 감시하기 위해 워싱턴이 시도해온 방식의 진수를 이룬다고 하며, 이 두 가지를 ‘워싱턴 룰’이라고 불렀다. 이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CIA(중앙정보부)’와 ‘SAC(전략공군사령부)’라는 조직을 만들어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으며, 그들 역시 미국 시민들을 비밀과 은폐로 몰상식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세비치가 말하는 ‘워싱턴’은 지리적 의미가 아니라 이러한 워싱턴 룰을 수호하고 집행하는 인물과 일련의 조직들로 행정, 입법, 사법부의 상층부를 비롯해 국가안보의 주요 구성원-국방부, 국무부, 그리고 최근 만들어진 국토안보부, 나아가 정보기관들과 연방 법집행기구들-이 포함된다. 또한 일부 싱크탱크와 이익단체들, 그리고 변호사, 로비스트, 해결사, 전직 관료, 예비역 군 장교 등 아직도 권력 핵심부와 끈이 닿는 사람들을 워싱턴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또한 거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 방위산업체와 대기업, TV방송국과 ‘뉴욕타임스’와 같은 고급신문들, 나아가 대외관계협의회나 하버드 대학 케네디행정대학원 같은 준학술 조직들도 포괄한다. 이들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워싱턴 룰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외는 없다고 이 책의 역자 또한 전한다.

 

 

정파를 넘어서서 정치적 협력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과거 식민세력에 협력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아니면 그들이 이미 누려오던 기득권을 보호받은 집단으로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그 연결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다. 경제적 성장만 되면 친일도, 독재도, '무조건 친미'도 좋다는 암묵적 정서가 그들에게 시민의 권력을 일임해 주었다. 우리들도 한 몫을 거들었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이미 그 힘을 잃은 ‘제국주의’나 ‘이념’들이 아직도 거론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5년간을 돌아보며 내가 생각하는 청와대 룰은, 첫째 분단국가를 앞세운 국가안보를 위해 민주주의 원리는 무시할 수 있다. 둘째 국가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사회적 약자에 놓인 국민들의 희생은 당연하다. 셋째 정치협력 집단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국가기관은 권력의 비호에 적극 협조한다. 현재 이렇게 작동되는 정황들에서 나오는 개인의 지나친 억측일까.

 

 

대한민국의 정치협력자들은 너무 뻔뻔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의 직속기관인 국정원의 맹활약과 집권당이 보여 주는 국민 기만 행위들, 독립적인 국가기관들의 대통령 예속화를 위한 검찰 흔들기, 저널리즘이 실종된 공영방송의 허황된 보도들과 보수 언론들의 불공정한 보도 등이 그것이다. 어디 정치 뿐 이던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단절된 소통은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감을 전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사회가 진행되는 그 이면을 철저히 들여다 볼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롤즈(J. Rawls)의 정의론(正義論)을 다시 떠올려 보자. 롤즈의 주장에는 "원초적 상황(original position)이라고 불리는 가상적 상태"로부터 출발해 "앞으로 사회가 어떤 기본 질서를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이뤄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다. 사회적 원칙에 관한 논의는 자신이 처하게 될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게 정상이라는 설명이다.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의외로 많이 있다.

 

 

정의는 어느 계층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들을 알고 개인의 자각과 사회의 성찰을 통해 국기문란에 앞장 서고 있는 정부와 그에 협력하는 집단들을 향해 끊임없이 요구해야만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시민은 정치적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다. ‘워싱턴 룰’의 저자 바세비치는 ‘미국시민들이 시민정신의 빈곤화와 약화에 따라 집단적 책임보다는 개인적 선택을, 장기적 웰빙보다는 즉각적인 욕망의 충족을 더 중요시 한다’며 정부가 그렇게 하도록 “우리가 허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한다. 사회적으로 강자들의 심기를 거스리는 순간 개인은 두려움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의가 통하는 사회는 좌도 우도, 부자도 빈자도 없으며, 나의 이익이 곧 이 사회 공동체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국민 일반의 이익과 의사와 감정을 무시한 채 속속 드러나는 정부의 무능과 속임수, 안이한 자세와 편협한 시각으로 야기되는 판단, 문제제기에 대한 봉쇄와 왜곡과 탄압으로 인해 쌓인 국민들의 뒤틀린 감정은 쉽게 사그라질 것이 아님을 현 정부는 직시하기를 바란다.

 

이 글은 http://news.kukmin.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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