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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media.daum.net 

삼성의 노조 탄압을 규탄하는 집회가 서울 서초동 삼성 본사 건물 앞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증인채택을 놓고 여야가 충돌해 3시간 동안 국감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가 세 시간 뒤에 속개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도대체 한국에서 ‘재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 본다. 자료들을 다시 찾아 보니 재벌의 출생은 민족자본 부재의 시대에 잉태되고 성장해 왔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즈음 이병철, 정주영 등 오늘날 재벌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태어났다. 1920년대에 회사령이 철폐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회사는 설립 되었다. 하지만 이 회사들은 1937년 일본의 중일전쟁 도발로 조선이 병참기지화되면서 일본 독점자본이 대거 몰려오고, ‘중요산업통제법’이 실시되자 몰락해 갔다.

다시 말하면 해방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친일·부일을 통해 일제 독점자본의 하위파트너로 기생했을 뿐이다. 8.15 해방과 함께 친일·부일에 자유롭지 못한 거부들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튼튼한 정치적 동아줄을 잡고자 움직였고 정경유착의 시대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레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튼튼한 동아줄을 잡은 이들은 독점과 특혜로 어떤 정부이던 그들과의 유착에서 성장한 것이라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 물론 재벌은 196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지만, 1950년대에 이미 그 단초가 시작되었다. 독점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실수요가제 공급, 원조물자의 할당 및 판매와 관련된 상업, 안정적인 자금 공급처 역할을 하는 금융업이 자본계열화하여 하나의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 이병철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재벌의 역사는 계속 되었고 급속한 재벌의 성장은 곧 가혹한 노동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대자본가들의 저급한 생산력의 기초를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보완했고 노동임금은 노동량에 비추어 터무니 없었으니까 말이다. 1960년대에도 노동자들은 기아임금에 허덕였고, 그 시기에 청계광장에 홀로 있는 ‘전태일 열사’를 만들어 냈다. 1970년대는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항거한 ‘아름다운 청년’의 분신에도 나아진 것은 별로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 재벌 지배체제는 공고하게 확립되었고, 높은 생산성은 여전히 저임금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재벌기업 노동자들은 노동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재벌기업들은 비정규직 노동력을 활용해 고용의 유연성을 확대하고 신기술을 도입해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자 했는데, 1997년 경제 위기는 이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즉 재벌 중심으로 성장해 온 우리나라 경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인 것이다. 주기적 공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는 부분도 있지만 재벌기업의 고부채 구조와 금융자유화 요구가 큰 요인이었던 것이다. IMF의 구제금융으로 위기를 수습해야 했던 만큼 한국경제는 IMF의 신자유주의 요구에 따라 재편되어 갔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정리해고제를 도입하여 대량 실업을 초래했다.


[출처] http://imgv.search.daum.net/ 뉴시스

사회운동단체들이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여성 노동자의 권리 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 단체는 요구안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취임 이후 첫 세계여성의 날이라 의미가 각별하다"며 "여성노동자의 가치를

인정하고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촉구했다. (참으로 각별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노동의 역사가 현재에까지 이르렀다는 것, 최소한의 변화에 시선 맞추기를 거론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국가의 성장 속에서 더욱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를 보면서 보다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경제는 왜 성장해야 하고, 성장을 했다면 우리는 왜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인가. 노동자가 더 많은 나라, 국가의 성장에 더 많은 희생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왜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피켓을 들며 광장에서 삶의 현장들에서 목소리를 내고 결연하게 주먹을 쥐어야 하는 것인가.

노동현장에는 더 이상 취재를 하는 기자들을 찾아 보기 힘들어졌다는어느 사진가의 인터뷰를 듣고 우리의 시선은 무엇을 향해 맞추고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했다. 재벌들이 부리는 끝없는 욕망의 기차에 편승하는 이들의 탐욕은 이제 야만스럽기까지 하다. 한정된 자원과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노동의 가치는 저하될 수 없는 고귀함이어야 한다. 특히나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노동 없는 임금이 가능한 것인지 정부에게 묻는다.

직업의 다양성만큼이나 노동의 모습은 다르다. 그 다름의 노동에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과학의 진보와 함께 문명의 이기가 노동의 종말을 가져올 수 없듯이 노동이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핍박한 사회에서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노동자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면 한 국가의 장래는 요원하다. 노동현장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을 외면하고 있는 재벌과 그에 동조하는 정부는 노동자의 임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리인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http://news.kukmin.tv/ 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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