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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영화 <Dave>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의 일탈은 활력소가 됩니다. 그런 일탈로 세상을 바꿀 작은 시작의 순간이 내게 찾아온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의 주변 이야기가 뉴스를 차지하는 중에 이 영화는 의외의 기쁨과 모색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오늘로 455일을 넘어왔습니다. 그동안 진상 규명을 밝힐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대통령과 관련된 검색어는 점점 늘어납니다. 최근엔 현 정부의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재의결 되지 않아 국회법 개정안은 폐기됐어요. 현 정부에게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은 이미 훼손된 지 오래전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만 주시하고 있어야겠지요.

이영화에서 ‘데이브’는 볼티모어에서 직업 소개서를 운영하며 사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는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데서 즐거움을 찾지요. 그런 데이브에게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미국의 44대 대통령 빌 미첼과 똑같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돼지의 등에서 내린 데이브는 “자동차는 세보레죠.” 하며 대통령의 말과 행동을 흉내 냅니다. 데이브는 대통령을 연기하며 주변인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우리에게도 현 대통령과 관련되어 기억나는 관련 검색어만 채집해도 웬만한 소사전이 만들어질 수 있잖아요? 그 말들이 희망의 격언이 될 수 있다면 싶은데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을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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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영화 <Dave>

 

미첼 대통령은 볼티모어 방문 시 공식적인 행사에서 사적이고도 은밀한 시간을 가지려고 데이브를 잠시 내세우기로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공직자의 부정의 한 일들이 졸지에 ‘일탈’로 치부됐던 것처럼 대통령 개인의 일탈을 위해 자신을 똑 닮은 데이브를 대역으로 내세웁니다. 영화에서처럼 권선징악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불가능한 것 같은데 말이지요. 대통령은 뇌졸중으로 혼수상태가 되고, 데이브는 대통령의 역할로 그의 일탈이 시작됩니다.

 

미첼 대통령의 교활한 비서 실장 ‘밥’은 데이브에게 잠시 대통령 흉내만 내게 함으로써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유혹합니다. 애국심을 강조하며 데이브의 선량함을 이용해 대통령의 역할을 하게 하지요.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데 어쩐지 청와대와 관련된 입말들이 현실에서 넘치기에 예외성으로 유쾌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대통령의 역할을 대신하는 누군가가 있기는 했나? 하는 추측이 난무하던 지난해 이슈가 생각이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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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일보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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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영화 <Dave> 비서실장 밥이 대통령대신 법안 처리에 사인한다.

 

신영복 선생의 『담론』 중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은 그때 그곳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저자의 말은 ‘사실’이 ‘진실’이 될 수 없는 것을 다시 되새기게 합니다. 사실조차 개인의 편향된 시선에 따라 왜곡되기 일쑤인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무거운 일이던가요. 자기검열이 작동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가 두려운 사회, 시대를 뛰어넘기 어려운 정서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걸까 싶습니다.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들에 이러쿵저러쿵 춤을 추다가 제풀에 힘이 달려 그만 주저앉게 되고 말 것 같은 거지요.

 

이런 사회의 불안들은 삶을 절박하게 만들지 않던가요. 패배의 역사에는 서사가 꽤 낭만적으로 퍼집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패배를 치유할 자유로움과 창조성은 소멸했겠지요. 패배의 역사, 혁명이 글자로 박제된 지금, 저자는 ‘현실과 이상의 지혜로운 조화’를 담론으로 삼았습니다.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를 이룰 능력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분리된 힘이 아니라 유연함이며 이런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 하죠.

 

왜, 정치가 내 삶과 멀리 있어야 했지? 이 물음을 알아가는 과정의 시간에서 나는 또 다른 삶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내 머리가, 가슴이 생각하는 것들이 엉키다 보면 결국엔 내 세상 안으로 기어들어가 버리곤 하는데 그것은 나의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지독히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나를 다시 각성시키고 끄집어내 매번 기성세대의 나를 성찰하게 하는 청년들의 작은 웃음이, 눈빛이 늘 성가시게 하곤 합니다. 이제 나를 위해 민주주의가 자명성을 얻어야 한다는 거지요. 나의 자유를 위해서 말입니다.

 

데이브예산

 

 

“차 구매자에게 신뢰 홍보비로 4천7백 만 불을 쓰고 있소.”

“네, 자동차를 구매한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요.”

“차 산 사람의 신뢰감을 얻기 위해 아이한테 길에서 자게 하라 한다? 그럴 수 있소?”

“못 하죠. 그럴 수 없죠.”

 

대통령 미첼은 볼티모어 연설을 끝으로 그의 개인적 일탈이 그를 영원히 잠들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데이브에게 그 역할이 맡겨집니다. 대통령의 비서와 측근에 의해 움직이던 데이브에게 영부인은 하나의 계기를 주게 됩니다. 그녀가 원했던 “무주택자 법안”을 정부가 예산 부족으로 거부하면서, 문제를 의식하게 됩니다. 데이브는 정부 예산안을 검토하기 위해 친구의 도움으로 공부를 합니다. ‘사실’과 ‘진실’에 대해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무주택자 법안’을 살릴 예산안 재검토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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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 그렇겠지요, 뇌졸중으로 쓰러진 대통령 대신 데이브는 진실을 담아 기자회견을 합니다.

 

나는 오늘 아침 비서실장에게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 나라에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더는 못 참아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있는데 못 본 척 한 거죠. 그런데 이제는 점점 더 커져서 누구도 손을 못 대죠. 그뿐 아닙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이죠. 정말 비극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어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몰랐다면 시작할 일은 제가 제안하죠. 오늘부터 정부는 일을 원하는 시민에게 직업을 찾아줄 책임을 질 겁니다. 일자리 얻은 사람의 얼굴은 하늘을 날 것 같죠.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뜻있는 일을 한다는 기쁨을 한 사람씩 느끼게 되면 다른 문제의 해결도 불가능은 아닙니다.”

 

권위에서 나오는 힘이 권위주의로 둔갑, 권력을 악용하는 정치인들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데 전력 질주했던 무리가 벽을 쌓고 있습니다. 이미 해체된 이념을 들먹이며 국민을 호도합니다. 보수와 진보, 그 둘의 협력으로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말의 진정한 힘이 사라져 사람들을 혼동하게 합니다. 영화에서는 선한 인성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바른 정치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 집단 이기주의가 적다면 정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바람직한 파수꾼이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이 망국으로 가는 역사의 혼란한 시간을 멈추게 할 힘이 있어야 하고, 정치만큼이나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개인들도 그 책임을 함께 지고 가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키는 그의 평전에서 “하나의 일관된 전략이 없으면, 그 집단은 살 수도 없고 숨 쉴 수도 없다.”고 말하더군요. 전략은 적중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전략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한 명의 리더십이 작동될 수 없다면 진보의 결집이 필요하고 그것이 전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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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혁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총과 폭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혁명이란 사고의 전환이다. 유교나 기독교도 당시에는 혁명이었다.” (호세 무히카)

 

투쟁에는 후퇴할 시간이 있어야 하고 힘을 유지한다는 것은 후퇴했다가 다시 모으고 조직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지나간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하게 맞닥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호세 무히키의 말은 한국사회에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선거의 결과에 따른 치밀하고 비전의 아젠다를 재창출할 수 있는 전략가들이 힘을 합쳐야만 하겠지요. 계파의 늪에서 언제까지 허우적거리며 책임 전가를 하려는 것일까요. 현실의 벽 앞에 언제까지 무릎을 꿇고 국가의 미래를 팔아먹는 행태에 손가락질만 할 것인지 답답합니다.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키는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자신의 급여 대부분의 90%를 자선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지만 가장 존경받고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우루과이는 현재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평균성장률을 웃도는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퇴임 당시 무히카 대통령 지지율은 당선 때(52%)보다 훨씬 높은 65%였다는군요.

 

현대인들의 망각 속에서 공화국의 정신은 왜곡되고 붕괴하여 가고 있습니다. 공화국들은 봉건적 향수 때문인지 혹은 소비주의 문화 때문인지 ‘부유하게 살기’를 그들이 나아갈 방향으로 수용했고, 보통사람들의 삶과 꿈, 생활의 요구들을 외면해버렸습니다. 정부는 결국 자기 국민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호세 무히카)

 

호세 무히카 대통령의 2013년 9월 24일, 유엔 총회 연설의 내용은 ‘현실’에서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크고 절망스럽게 다가옵니다. 분명 동시대를 살고 있는데 정반대의 철학과 행동을 보여주는 대통령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국사회, 그 현실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그의 말대로 한 사회의 실패는 정치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정치가 실패하는 것은 삶을 부의 축적보다 우위에 두는 철학적 시야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새겨 봅니다.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영화 같은 상황을 바라기보다는 공정한 선거를 통해 데이브 같은 대통령으로 바꾸는 일이 더 현실적이겠죠.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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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2013년 손태경, 김태희 감독의 <미생 프리퀄>

 

 

하루아침에 뒤집히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해마다 이맘때면 최저임금의 협상이 쟁점으로 떠오릅니다. 지난해에도 올 해의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반영은 찾을 수가 없었지요. 2015년 적용 최저임금 시급 얼마라고 결정되면, 그것이 시장을 규제하는 기준이 됩니다만 올해 최저임금은 시급 '5,580’입니다. 내년도 최저임금은 6,030원으로 결정되었구요. 최저임금 1만 원은 그야말로 높은 장벽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희생의 대가는 늘 노동자의 몫이었음을 기억해 봅니다.

 

주변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이십 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부분이 실제로 최저임금도 받지 못합니다. 임금에 대한 불만은 차치하고 처지에 대한 고통을 토로합니다. 법으로 보장된 최저임금제가 실제로는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도 정작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체들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애초에 노동력 공급이 넘치는 상황에서 그나마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겨우니까요. 최저임금이 최고 임금으로 둔갑해 있는 현실에서 최저임금을 높이기 위해 정부의 조정 능력은 기대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노동의 현실은 참혹합니다. 인간의 기본권이 무시되는 것은 다반사이고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것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더 악랄하지요. 아예 무노조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기업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 이름도 찬란한 삼성.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현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정치를 하려는 정치인들의 입말들은 허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헛공약이 남발하고 공약을 지키려는 공직자로서 윤리의식은 찾아볼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최저임금, 말 그대로 최저 기준이 돼야 할 임금이 다수 노동자에게는 곧 실질 임금입니다. 시민사회와 노동계에서 최저임금 현실화를 외치는 이유입니다.

 

''에 대한 인식이라곤 연봉으로 받는 돈의 많고 적음일 뿐이고 일을 통한 성취감이나 자긍심은 개의치 않는다는 거죠. 그런 가운데 어릴 적부터 사회에서 요구하는 개인으로 교육되고 학습해 왔습니다. 하지만 일의 발견은 삶의 질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생존에 급급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유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노동자 없이 자본가는 존재할 수 있을까요? 노동 탄압에서 인권 탄압으로 이어지는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외면하게도 만듭니다. 현실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졸지에 서로 적이 되기도 합니다.

 

 

2014년 다큐멘터리 홍리용 감독의 <탐욕의제국>

 

 

세계는 탐욕으로 야만의 시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업의 야만스러움은 한국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대기업만을 키워주는 정책과 무역협정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노동환경과 기업의 무책임, 그것을 방관하는 정부, 이런 세계의 노동 현실에 무관심하게 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한국사회는 한강의 기적을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러 왔고 현재진행형입니다.

 

노동자들의 생명으로, 내 삶의 미래를 위한 현재를 희생으로 '내일을 위해서'라는 의미였지만 실상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 같은 내일이 진행될 뿐이죠.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없는 대기업이 가능한 한국사회는 민주 공화국으로 포장된 탐욕의 제국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잊도록 하는 수많은 방해물이 많지만,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버리는 개인들의 무의식도 한몫을 합니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이념, 반공과 노동조합의 몰이해는 노동을 현실에서 멀리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일한다면 우리는 모두 노동자입니다. 노동의 환경이 다를 뿐인데 직업 분류로 명칭을 달리하는 거죠. 아버지의 직업을 노동자로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노동은 어떤 모습인가요. 내가 하는 일이, 노동이 부끄럽도록 하는 것은 내가 받는 돈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으니 말입니다.

 

 

카트 2014년 부지영 감독의 <카트>

 

미래에는 달라질 대안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 달이 지나면 들어올 돈이 없다고 무작정 겁을 집어먹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는 없을 거야!" 바티스트 밀롱도의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정부가 매월 지급하는 약간의 기본소득이 있어서 해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요. 일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동은 삶이니까요.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일이 없으면 진정한 자유도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삶에서 진정한 일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일'이라 하더군요. ,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더라도 '논다'는 의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한국사회에서 일은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장시간의 노동시간에서 자부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노동하는 시간은 지옥과 같은 것으로 변질하지 않던가요. 노동의 가치는 결과로 쥐어지는 돈이 아니라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조건 없이 기본 소득'이 제도로 현실화 하는 데 노력할 수 있는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기까지는 노동자의 현재가 문제로 인식되어야 하고, 스스로 주저앉히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해야만 합니다. 연대의식은 이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으로도 가능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둔다면 그에 따른 변화는 더디지만, 반드시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같아선 꿈만 꿀 일 같지만, 세계는 달라지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도 극단으로 치닫게 될 부조화는 어느 정도 상쇄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업의 성장만이 국부(國富)라는 전제로 달려온 산업사회의 기만적 믿음은 노동의 현장에서 증명됐으니까요. 바티스트 밀롱도의 말처럼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막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재 기득권자들의 자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한국의 사회제도에서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헤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당신은 어떠신가요?

 

[출처] http://murutuku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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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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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렇게 선언했던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의식을 갖춘 성숙한 한 인간’을 기억해내려 하는데 도무지 내 기억력이 달려서 기억해 낼 수가 없습니다. 혹시 이런 분이 계시긴 했던가요? 물론 이 인용문조차 인터넷에서 찾았다는 거 아시겠지만, 공인으로서 말장난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여기에서야 뭐, 별거 아니겠죠.

 

국민 여러분 저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첫 번째로 선택한 개인적인 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저는 오늘, 아버지의 왕국에서 누렸던 삶을 청산하며 한 인간으로 독립했음을 선언하려 합니다. 지나온 시간 동안 일어났던 내 아버지의 과오로 인해 희생당한 이들에게 고인을 대신하여 머리 숙여 사죄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18년 간 대통령 자리에 있었던 대통령의 딸이 아니라, 자의식을 갖춘 성숙한 한 인간으로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의무를 성실하게 해 나갈 것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요.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중심으로 기억하게 되니까요. 개인의 선택으로 마음껏 누릴 자유의지입니다. 개인이 모여 있는 공동체는 어떤가요? 작은 공동체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때의 상황과 진행 과정, 결과, 그것으로 끼친 영향력 등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없었던 일로 될까요? 게임처럼 한 판 끝나고 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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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이 사건은 기억하실까요? 세월호 시행령 개정 촉구를 위한 ‘40만 서명’을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시민들이 청와대 민원실에 전달하려 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찰 10명에게 제지당해 가로막혀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종로경찰서에서는 이 말만 반복했다고 합니다.

 

 

미신고 불법집회 중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불법행위를 전부 채증하겠습니다. 채증자를 바탕으로 사법처리 하겠습니다. 아울러서 대기 경찰관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몸싸움을 시도하거나, 멱살을 잡거나, 밀칠 시에는 폭조법 위반으로 현행법 체포하겠습니다.”

 

 

내 나름대로 기억의 장을 열어 보니 아주 멍청한 일도 생각이 나는군요.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잠시 어린애처럼 상상했더랬죠.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던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을 데려간 유령들이 부디 그녀를 잠시 여행시켜 주진 않을까? 혹시 개과천선(改過遷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상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늘 동화의 세계였죠. 크리스마스, 어린 시절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억하기도 하잖아요. 이래서 잠시 웃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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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4.16km 떨어진 곳으로 팽목항을 오고 가는 방문객들이 쉬어가는 길목에 첫 번째 나무를 심었고 이후 이 숲에는 천 년을 넘게 살 수 있는 울창한 은행나무 숲이 조성됩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오드리 헵번 가족이 한국을 방문해서 제안한 프로젝트입니다. 세월호 기억의 숲 조성에 나서는 이유는 가족 대 가족으로서 비극적인 사건을 접하고 마음을 같이 나누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The family of late Hollywood actress Audrey Hepburn unveiled plans for a memorial forest in South Korea to remember the 304 victims of last year’s Sewol ferry disaster. Sean Hepburn Ferrer, the eldest son of the Hollywood icon and chair of the Audrey Hepburn Society, has initiated the project.

 

“A year has passed and instead of sending flowers to the families, we wish to create something beautiful. We want to create a platform that will bring some feelings of hope and comfort,” Sean Hepburn Ferrer said. “We will create a place from which everyone can work toward the future where a tragedy like this will not repeat itself,” he told reporters in Seoul.

 

Ferrer, along with his wife and eldest daughter, will plant the first trees on Friday that will eventually form the “Sewol Memorial Forest.”

 

 

할리우드 여배우인 故 오드리 헵번의 가족이 지난해 일어난 세월호 참사의 304명 피해자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한국에 기억의 숲을 만드는 계획을 발표했다. 오드리 헵번의 장남이자 ‘오드리 헵번 재단’의 이사장인 션 햅번 페러가 이 프로젝트를 발족한 사람이다.

 

션 헵번 패러는 “참사로부터 1년이 흘렀는데, 우리는 유가족들에게 헌화하는 대신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희망과 편안함을 가져다줄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싶었다.”며 “우리는,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미래를 위해 모든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고 서울의 기자들에게 전했다.

 

그의 아내, 첫째 딸과 함께 페러는 “세월호 기억의 숲”을 형성할 나무들을 돌아오는 금요일부터 심기 시작할 예정이다.

[기사 번역 / 비더슈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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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에 오드리 헵번 가족과 함께 심은 30그루의 은행나무가 모두 건강히 자라고 있다.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따뜻하고 의미 있는 ‘세월호 기억의 숲’은 지난 5월 15일까지 참여자 2,972 명, 참여금액은 212,296,010원으로 숲 조성기금을 달성해서 현재 진행 중입니다. 1억 원 이상의 조성기금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커다란 숲이 조성되며, 세월호 희생자 및 실종자 가족과 생존 학생들의 메시지가 각인된 아름다운 숲 기념물이 만들어집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들어가는 말입니다. 아마 이 말이 건네는 의미가 너무 달콤해서는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가진다”를 의미하더군요.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죠. 현대에서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말인 거죠.

 

 

하지만 나는 반드시 이 말이 사회지도층에만 해당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평범하게 보통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발적인 나눔은 흔하니까요. 다만 굳이 사회지도층을 겨냥하는 것은 반어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주 드문 한국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나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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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프로젝트가 외국의 한 사람에 의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가능해졌다는 현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물론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많은 일이 곳곳에서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죠. 작든 크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자연스럽게 작동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거대한 집단의 문제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축적된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삶의 가치’의 문제는 아닐지요.

 

돌봄의 공동체를 향한 마음, 그 선함과 진실이 진도 앞바다 그 깊은 바다의 세월호처럼 깊숙이 갇혀 있습니다. 오늘은 당신과 함께 그 기억의 숲으로 가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사람’이 있음을 다시 느껴볼 수 있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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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이 영화에서 용주의 엄마는 홀로 아들을 키우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비혼모로 당당합니다. 아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기웅은 엄마와는 단절된 채 직장에서 해고되고 복직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갔다 와 숨어 사는 아빠를 찾아다닙니다. 기웅의 모습과 다를 수 있었던 용주의 내면에 쌓인 힘은 가정환경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지요. 영화에서는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다면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강제 전학을 시킵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한다면 상관없는 일이 되기도 하죠. 학교는 학생이 아니라 ‘서울대’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용주의 성 정체성의 다름을 무시해 버리죠. 아주 쉽게.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성적 1등급의 우등생 용주와 학교 내 폭력서클의 우두머리가 된 일진 기웅이 선택한 방법은 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친구’였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절친했던 두 친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로 엇갈린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지요. 함께 중학교에 다닌 기택이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자, 기택을 감싸고 여전히 가까이 지내는 용주와 달리 기웅은 이들을 지켜보기만 하죠.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선택한 기택의 제보로 용주는 학교에서 졸지에 추락하여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런 거 다 상관없어. 서울대만 가!”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학교 벽에 자신을 남기고 떠난 용주.

 

학교폭력이 왜 발생하게 되는지, 아이들은 왜 서로를 깔아뭉개며 싸워야 하는 지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 문제를 의식하게 됩니다. 친구가 성적보다 중요하냐며 다그치는 학교 선생님까지 세상의 비틀어진 잣대와 어른들의 왜곡된 시선을 십 대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몸으로 은밀하게 제보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몸짓을 사회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거죠. 준비가 안 된 사회, 개인의 삶이 자유의지로 발휘되기 어려운 한국사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현실일까요. 부디 많은 어른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가 19금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문제가 바로 어른이 만들어낸 원인에 의해 나타나는 어두운 현상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기성세대의 은폐하고 싶은 욕구를 대변하는 것이라 여겨지더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교묘하게 금기시하는 나라, 그래서 더욱 어둡기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소수자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를 향해 말을 겁니다. 그들의 말에, 행동에 귀 기울이고 어울릴 수 있는 이 사회의 성찰과 격려, 응원까지 너무도 간절합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그들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성 소수자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란 먼 나라 얘기일 뿐이죠. ‘헌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헌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법치국가는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 나도 ‘국가’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깁니다.

 

 

 

지난 5월, 성 소수자 인권을 위한 비영리 단체가 법인 설립 신청 과정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법무부는 “한쪽에 치우쳐진 인권을 다루는 법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정식 절차조차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재단 허가 여부를 6개월 미루다 국내 최초 성 소수자 인권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법인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쪽에 치우친 결정을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묻고 싶습니다.

 

청소년기의 자아 정체성, 흔하게 들어왔던 말입니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없었습니다. 12년의 기초 교육과정을 지나오면서 ‘성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들어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 보시지요. 바꿔 말하면 개개인을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교육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인간을 여러 이름으로 나누는 일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어서 ‘LGBT’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느낌, 마치 번갯불에 잠시 감전된 듯한 느낌을 만났을 때가 있다면 조금은 알 수 있으시려나요. 굳이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이 내 관심을 더 끌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3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초저녁 무렵 ‘PO PO’라는 이름의 그곳에는 고양이가 무섭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죠. 아주 우연히 ‘성 정체성’에 관한 궁금증을 찾아가면서 나의 평소 습관이 나를 얼마나 안일하게 만들어 왔는가도 깨달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좀 더 활동적이고 폭넓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인생 후반기에 와서야 이 궁금증을 갖고 이리도 기웃기웃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A Denver bakery has found itself at the center of an LGBT rights controversy. A customer, identified as Bill Jack, told reporters this week that he believes Azucar Bakery “discriminated” against him “based on my creed,” which is Christian. Jack walked into Azucar Bakery last March and asked for two cakes, both in the shape of Bibles. That wasn’t a problem for Marjorie Silva, the bakery’s owner. It was what Jack wanted her to write on the cake: Anti-gay phrases including “God hates gays” and an image of two men holding hands, covered in a big, red “X.”

 

“It’s unfair that he’s accusing me of discriminating when I think he was the one that is discriminating,” Silva told NBC affiliate KUSA. She said she refused to inscribe the cakes with the requested messages. “All I did was stand up for what was right. Think of what a better place the world would be if we could stop all discrimination and hate! I will continue to stand up for what is right and I hope our experience is an inspiration to others who are also faced with injustice. Because, GOD LOVES EVERYONE!”

 

덴버의 한 베이커리는 LGBT 권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빌 잭이라는 손님은 스스로가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기독교라는 자신의 종교 때문에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잭은 지난 3월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성경 모양의 케이크 두 개를 주문했다. 여기까지는 주인 마조리 실바에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잭은 이 케이크에 “신은 동성애자를 증오한다”라는 반 동성애 문구를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두 남성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위에 크게 붉은 ‘X’자를 그려 달라고 했다.

 

실바는 KUSA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그의 차별적 행위를 거부했다고 해서, 나에게 오히려 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해요.”라고 말했다. 결국 실바는 잭이 요구한 메시지를 케이크에 새기는 것을 거절했다. “저는 그저 옳은 것을 위해 저항한 것 뿐이에요. 모든 차별과 증오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나은 곳이 될 지 상상해 보라구요! 저는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저항할 것이고, 저의 경험이 부당함을 마주한 다른 사람에게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뉴욕 타임스의 기사 번역/비더슈탄트]

 

“GOD LOVES EVERYONE!” 빵집 주인이 그의 주문을 거부한 이유입니다. 손님은 그것을 차별당했다고 한것이죠. 과연, 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것이 차별인가요?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차별’의 의미로 다가선다면 이해할 수 없지 않나요? 상식적으로 신(GOD)은 선(Good)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걸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요. 그러면서 한국 사회의 기독교단체의 동성애 혐오 발언이나 행태들은 신앙심을 이용해 또 다른 혐오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더군요. 이제 미국은 2015년 6월 26일로 세계사의 한순간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미국 연방 법원이 게이나 레즈비언 간의 동성결혼에 대해 합헌 판정을 내렸고, 미 전역에 적용될 예정입니다.

 

 

[출처] The White House Blog

 

한국의 성 소수자 차별 반대 무지개 행동은 6월 28일 제16회 퀴어문화축제 퀴어 퍼레이드를 시청광장에서 시작합니다. 이 축제는 전국 성 소수자, 인권,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는 행동이죠. 2004년부터 시작된 ‘국제 성 소수자혐오 반대의 날’은 세계 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 분류(ICD)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1990년 5월 17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5월 17일로 정했습니다. 현재 전 세계 130여 개국 주요 도시에서 아이다호를 기념한 다양한 캠페인과 액션을 펼치고 있는 거죠.

 

이제라도 당신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내가 왜 당신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지면 안 되는지를 말입니다. 무지개 행동은 오로지 ‘나’로서 살아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인류에게 남은 최후의 믿음은 사랑의 힘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렇기에 사랑하며 함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미국의 연방법원의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 낸 아름다운 결정문’에 가슴이 설레는 이유입니다.

 

동성 결혼 합법화 : 미 연방대법원 판결 [번역/요제프]

6월 26일 아침, 미 연방 대법원은 동성 결혼을 합법화 했습니다. 연방대법관 앤서니 케네디가 읽은 판결문 마지막 부분을 번역해 봅니다. (지나친 의역과 오역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No union is more profound than marriage, for it embodies the highest ideals of love, fidelity, devotion, sacrifice, and family. In forming a marital union, two people become something greater than once they were. As some of the petitioners in these cases demonstrates, marriage embodies a love that may endure even past death. It would misunderstand these men and women to say they disrespect the idea of marriage. Their plea is that they do respect it, respect it so deeply that they seek to finds its fulfillment for themselves. Their hope is not to be condemned to live in loneliness, excluded from one of civilization’s oldest institutions. They ask for equal dignity in the eyes of the law. The constitution grants them that right. The judgement of the Court of Appeals for the Sixth Circuit is reversed. It is so ordered.

 

결혼보다 심오한 결합은 없다. 그것은 가장 높은 이상의 사랑, 충실함, 헌신, 희생, 가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결혼 관계를 맺기 위해, 두 사람은 그들이 원래 그래 왔던 것 이상의 존재가 된다. 몇몇 진정인(연방 대법원에 상고한 동성애자들)이 밝히듯, 결혼은 죽음을 뛰어넘어서까지도 이어지는 사랑을 상징한다. 이들 남성과 여성이 결혼이라는 것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를 존중한다고 호소한다. 깊이 존중한 나머지 그들 역시 그들의 관계를 결혼을 통해 완성하고 싶다고 한다. 그들의 희망은 우리 문명의 가장 오래된 제도인 결혼에서 격리되어, 외로움 속에 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법 앞에서 동등한 존엄성을 확인받길 원한다. 헌법은 그들에게 그럴 권리를 허용하고 있다. 고로 Sixth Circuit(동성 결혼을 불법화 시킨 재판소 구역) 연방 고등법원의 판정을 번복한다. 이와 같이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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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헌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헌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법치국가는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 나도 국가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긴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비영리 단체가 법인 설립 신청 과정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법무부는 한 쪽에 치우쳐진 인권을 다루는 법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정식 절차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재단 허가여부 6개월 미루다 지난 5월 3일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인권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법인 설립을 불허했다.

 

청소년기의 자아 정체성, 흔하게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없다. 아니 없었다. 12년의 기초 교육과정을 지나오면서 '성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들어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 보시라. 바꿔말하면 개개인을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교육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인생의 제3(생애 주기를 100세로 잡고 네 부분으로 나눈 것)에 들어서야 성 정체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십 대에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 여자 '전혜린'이 있었고 너무 이른 죽음으로 몇 권의 책만을 남기고 떠났기에 박제된 의식이었을 수도 있다.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에 굳이 이거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혼, , 통이다. 누군가의 책 제목 같지만 그 의미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 책은 사회 전반적인 것을 향한 것이니 말이다. 내게 '()'은 당신의 정신이다. '()'은 당신만의 것인 무엇이다. 개성일 수도 당신다운 것일 수도, 암튼 그건 당신의 몫이다. '()'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감이다.

 

 

 

 

인간을 여러 이름으로 나누는 일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LGBT'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은 맞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느낌, 마치 번갯불에 잠시 감전된 듯한 느낌을 만났을 때가 있다면 조금은 알 수 있으려나. 굳이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이 내 관심을 더 끌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3년 전 여름이었다. 초저녁무렵이었고 'PO PO'라는 이름의 그 곳에는 고양이가 무섭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고양이를 싫어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우연하게 '성 정체성'에 관한 궁금증을 찾아 가면서 나의 평소 습관이 나를 얼마나 안일하게 만들어 왔는가도 깨달았지. 내가 좀 더 활동적이고 폭 넓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인생 3기에 와서야 이 궁금증을 갖고 이리도 기웃기웃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지금까지야 성 소수자 인권을 위해 행동하는 단체에 후원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접적으로 열심히 알아가는 중이다. , 나에게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마주할 기회를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채 청년기를 지나왔다는 그 사실에 화가 난다. 자아정체성을 위한 그만큼의 노력이 성 정체성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런 생각들을 제대로 써보게 된 것은 지난 1월에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빵집에서 일어난 일인데 케이크를 주문한 사람이 빵집 주인에게 자신을 차별했다고 시작된 사건이다. 그가 원했던 케이크 위에 쓸 문구는 "Got hates gays"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종교를 믿건 그렇지 않건 이 문구를 쓸 자유도 있지만, 그 문구를 거부할 자유도 있다. 그것을 '차별'의 의미로 다가선다면 이해할 수가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신(GOD)은 선(Good)이다. 그걸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GOD LOVES EVERYONE!"

 

빵집 주인이 그의 주문을 거부한 이유이다. 과연, 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것이 차별인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미국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오는 516일 오후 2~8시 서울역 광장에서 ‘2015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아이다호 공동행동)을 개최한다. 전국 성소수자, 인권,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는 공동행동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517)을 기념해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경종을 울리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의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과 문화제를 연다.

 

2004년부터 시작된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은 세계 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분류(ICD)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1990517)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517일로 정하고, 현재 전 세계 130여 개국 주요 도시에서 아이다호를 기념한 다양한 캠페인과 액션을 펼치고 있다. 이제라도 당신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내가 왜 당신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면 안 되는 지를 말이다. 무지개 행동은 오로지 로서 살아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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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행동

Overdye*~ 2015. 6. 27. 00:08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헌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헌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법치국가는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 나도 국가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긴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비영리 단체가 법인 설립 신청 과정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법무부는 한 쪽에 치우쳐진 인권을 다루는 법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정식 절차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재단 허가여부 6개월 미루다 지난 5월 3일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인권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법인 설립을 불허했다.

 

청소년기의 자아 정체성, 흔하게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없다. 아니 없었다. 12년의 기초 교육과정을 지나오면서 '성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들어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 보시라. 바꿔말하면 개개인을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교육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인생의 제3(생애 주기를 100세로 잡고 네 부분으로 나눈 것)에 들어서야 성 정체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십 대에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 여자 '전혜린'이 있었고 너무 이른 죽음으로 몇 권의 책만을 남기고 떠났기에 박제된 의식이었을 수도 있다.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에 굳이 이거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혼, , 통이다. 누군가의 책 제목 같지만 그 의미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 책은 사회 전반적인 것을 향한 것이니 말이다. 내게 '()'은 당신의 정신이다. '()'은 당신만의 것인 무엇이다. 개성일 수도 당신다운 것일 수도, 암튼 그건 당신의 몫이다. '()'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감이다.

 

 

인간을 여러 이름으로 나누는 일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LGBT'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은 맞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느낌, 마치 번갯불에 잠시 감전된 듯한 느낌을 만났을 때가 있다면 조금은 알 수 있으려나. 굳이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이 내 관심을 더 끌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3년 전 여름이었다. 초저녁무렵이었고 'PO PO'라는 이름의 그 곳에는 고양이가 무섭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고양이를 싫어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우연하게 '성 정체성'에 관한 궁금증을 찾아 가면서 나의 평소 습관이 나를 얼마나 안일하게 만들어 왔는가도 깨달았지. 내가 좀 더 활동적이고 폭 넓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인생 3기에 와서야 이 궁금증을 갖고 이리도 기웃기웃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지금까지야 성 소수자 인권을 위해 행동하는 단체에 후원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접적으로 열심히 알아가는 중이다. , 나에게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마주할 기회를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채 청년기를 지나왔다는 그 사실에 화가 난다. 자아정체성을 위한 그만큼의 노력이 성 정체성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런 생각들을 제대로 써보게 된 것은 지난 1월에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빵집에서 일어난 일인데 케이크를 주문한 사람이 빵집 주인에게 자신을 차별했다고 시작된 사건이다. 그가 원했던 케이크 위에 쓸 문구는 "Got hates gays"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종교를 믿건 그렇지 않건 이 문구를 쓸 자유도 있지만, 그 문구를 거부할 자유도 있다. 그것을 '차별'의 의미로 다가선다면 이해할 수가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신(GOD)은 선(Good)이다. 그걸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덴버의 한 베이커리는 LGBT 권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빌 잭이라는 손님은 스스로가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기독교라는 자신의 종교 때문에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잭은 지난 3월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성경 모양의 케익 두 개를 주문했다. 여기까지는 주인 마조리 실바에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잭은 이 케익에 "신은 동성애자를 증오한다"라는 문구 등의 반 동성애 문구를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두 남성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위에 크게 붉은 X자를 그려 달라고 요구했다. 실바는 KUSA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그의 차별적 행위를 거부했다고 해서, 나에게 오히려 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해요."라고 말했다. 결국 실바는 잭이 요구한 메시지를 케익에 새기는 것을 거절했다. "저는 그저 옳은 것을 위해 저항한 것 뿐이에요. 모든 차별과 증오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나은 곳이 될 지 상상해 보라구요! 저는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저항할 것이고, 저의 경험이 부당함을 마주한 다른 사람에게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GOD LOVES EVERYONE!"

빵집 주인이 그의 주문을 거부한 이유이다. 과연, 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것이 차별인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미국은

2015년 6월 26일로 세게사의 한 순간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오는 516일 오후 2~8시 서울역 광장에서 ‘2015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아이다호 공동행동)을 개최한다. 전국 성소수자, 인권,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는 공동행동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517)을 기념해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경종을 울리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의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과 문화제를 연다.

 

2004년부터 시작된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은 세계 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분류(ICD)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1990517)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517일로 정하고, 현재 전 세계 130여 개국 주요 도시에서 아이다호를 기념한 다양한 캠페인과 액션을 펼치고 있다. 이제라도 당신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내가 왜 당신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면 안 되는 지를 말이다. 무지개 행동은 오로지 로서 살아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이고 싶다.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아빠를 찾아 나서는 기웅.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성적 1등급의 우등생 용주와 학교 내 폭력서클의 우두머리가 된 일진짱 기웅이 선택한 방법은 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친구'였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절친했던 두 친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로 엇갈린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지요. 함께 중학교를 다닌 기택이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자, 기택을 감싸고 여전히 가까이 지내는 용주와 달리 기웅은 이들을 지켜보기만 하죠. 허나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선택한 기택의 제보로 용주는 학교에서 졸지에 추락하여 조롱거리가 됩니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용주의 엄마는 비혼모로 당당합니다. 아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기웅은 엄마와는 단절된 채 직장에서 해고되고 복직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갔다 와 숨어 살고 있는 아빠를 찾아 다니죠. 기웅의 모습과 다를 수 잇었던 용주의 내면에 쌓인 힘은 가정환경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지요.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다면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강제 전학을 시킵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한다면 상관없는 일이 되기도 하죠. 학교는 학생이 아니라 '서울대'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용주의 성정체성의 다름을 무시해 버리죠. 아주 쉽게.

 

"그런 거 다 상관없어. 서울대만 가!"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학교 벽에 자신을 남기고 떠난 용주.

 

학교폭력이 왜 발생하게 되는 지, 아이들은 왜 서로를 깔아 뭉개며 싸워야 하는 지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 문제를 의식하게 됩니다.

친구가 성적보다 중요하냐며 다그치는 학교 선생님까지 세상의 비틀어진 잣대와 어른들의 왜곡된 시선을 십대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몸으로 은밀하게 제보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몸짓을 사회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거죠. 준비가 안 된 사회, 개인의 삶이 자유의지로 발휘되기 어려운 한국사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현실인 것일까요. 부디 많은 어른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가 19금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문제가 바로 어른들이 만들어낸 원인에 의해 나타나는 어두운 현상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기성세대의 은폐하고 싶은 욕구를 대변하는 것이라 여겨지더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교묘하게 금지하는 나라, 그래서 더욱 어둡기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제보자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를 향해 말을 겁니다. 그들의 말에, 행동에 귀 기울이고 어울릴 수 있는 이 사회의 성찰과 격려, 응원까지 너무도 간절합니다.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그들 스스로의 몸짓으로 제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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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딩포레스터

Overdye*~ 2015. 6. 26. 10:24

사전적으로 ‘소수자’는 ‘적은 수의 사람’일 뿐이다. 허나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는 단지 그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다. 의미가 전복되는 경우는 넘친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 ‘소수자’라 하면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장애인, 성적소수자, 비혼모 등. 하지만 또 다른 소수자도 분명 있다. 청소년용으로 1등급, 분명 소수자이다. 대학생용으로 명문대, 직업별로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인 소수의 기득권자들까지. 그들도 분명 소수자이다. 그 다음은 너절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유추해 나갈 여지는 많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로 들어가 보기 위해 ‘소수자’로는 연관 검색어로 뜨지 않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를 통해 이어가려 한다.

 

 

▲ 2001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1. 과연 영화의 주인공은 소수자일까

 

2001년 개봉된 영화,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작품 <파인딩 포레스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소수자이다. 열여덟의 소년이 보여주는 농구와 문학적 재능, 은둔자로 살아가는 바로 50년 전 전설적인 데뷔소설을 발표한 후 모습을 감춰버린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

 

길거리 농구를 즐기는 고등학생 지멀 월러스와 그의 친구들은 동네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상한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호기심으로 지멀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하지만 뜻밖의 상황에 놓여져 가방을 놓고 나오고 그 집의 주인공 포레스터는 가방 속의 습작노트에서 평범함을 뛰어넘는 지멀의 수많은 글들을 발견한다.

 

다음 날 지멀은 그의 창문에 걸린 자신의 가방을 발견하지만 가방을 찾기 위해 아파트를 오르지는 못한다. 가방은 창 아래 길바닥으로 떨어지고 자신의 글들에 쓰여진 빨간색의 글씨를 발견하고 지멀은 포레스터를 다시 찾아가게 된다.

 

브롱스를 벗어나 스카우트되어 (지멀의 표현으로 콤마가 두 개인 상류층이 많은)사립고등학교의 농구 선수로 활약하게 되는 지멀은 그곳에서 낯선 자로 ‘소수자’이다. 이런 영화 속의 사회적 환경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게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실, 특목고와 자사고 등, 이미 고등학교에서 교육의 평등선은 사라졌다. 부모의 부(富)가 자식으로 대를 잇게 되는 ‘지배블록’이 굳건해 지고 있으니까. 최근에 언급되어 2014년에 개교를 앞둔 일명 ‘삼성고’라 불리는 자사고의 설립 과정과 개교에서 벌어질 기득권이라는 소수자가 누리는 시혜는 인권 침해라거나 생존 위협을 거론하는 ‘소수자’로서 만날 공포감은 결코 아니다.

 

지멀의 호기심으로 알게 된 은둔자 포레스터는 개인적인 상실의 아픔에서 스스로를 가두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저명한 작가로 그 또한 ‘소수자’이다. 그 둘의 만남은 서서히 진행되면서 때묻은 고전 서적들과 정적만이 가득했던 포레스터의 은둔지를 두 대의 타이프라이터의 소리와 웃음, 논쟁, 학문에의 열정으로 채워간다.

 

포레스터는 이 어린 소년을 따라 지난 40여 년 간 닫고 살아온 창 밖의 세상과 조금씩 조우하게 된다. 그 후 지멀은 포레스터에게 문학을 배우고 교감을 나누고, 포레스터는 지멀 덕분에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다.

 

 

▲ 지멀의 글쓰기를 위한 조언을 하는 포레스터

2. 소수자의 분류 기준은

 

이 영화에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답습되고 있는 많은 관습적 사고를 만났다. 소수자로 주류가 되는 인생들과 소수자이기에 비주류로 분류되는 삶은 어떤 기준이 있기에 가능하게 인식되어 왔던가에 주목하게 되었다.

 

주류와 비주류의 분류마저도 언제, 누가, 왜, 만들어 놓은 것인 지 출처는 분명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별 거부감 없이 사용되는 주입된 언어들로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위 1%의 부자들에게, 또는 1등급을 맞은 학생들에게 결코, 소수자라고 명명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다수에게 부정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소수자이기에 받아야 하는 부당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희생을 해야만 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빈번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의 소외는 공동체의 해체에 의해 야기되어 왔다. 기본 단위의 가족에서부터 친구, 직장, 학교 등의 공동체에서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음을 선택하고, 일상의 고통은 불편한 진실이 되어 암묵 속에 놓여져 있다.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지는 사회, 알 수 없는 공포에 자기를 추스르기 힘든 이 곳에서 나는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 참여연대,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공약파기 규탄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대선 당시 공약이 상당수 파기되거나 퇴행하고 있다며 애초 약속대로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뉴스1

3. 영화 속 인물과 대화

 

영화에서 포레스터는 지멀에게 묻고 답한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거지. 우린 이해가 안 되면 가정(假定)을 하게 된단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 개인이 놓인 사회적 환경에 의해 그를 판단해 버리는 오류를 아주 쉽게 저지른다. 오류의 면역력에 의해 진행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적 자아에 길들여지게 하고, 관계를 맺게 하여 그것만이 성공적인 삶인 것처럼 꾸며낸다는 것이다. 개인적 자아는 실종되어 ‘내가 누구지?’ 라는 끝없는 질문을 허공에 되뇌일 뿐.

 

더 이상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 자각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거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소수자는 구분되어 지는데 합리적 이성을 강조한 ‘공리’와 ‘편견’이 근거로 자리 잡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하게 만들어 왔다.

 

브롱스라는 지역의 나쁜 환경에 놓인 소년의 문학적 재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선생은 결국 지멀의 글에 문제 제기(포레스터의 글 제목을 도입으로 쓴 것)를 하고 지멀은 글의 출처에 대한 해명을 요구 받는다. 즉 스스로 쓴 글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려 한다.

 

▲ 지멀의 문학적 재능을 시기하며 문제 제기를 하는 문학선생 크로포드

“자네에게 제안을 하겠네. 이젠 모든 걸 잊고 내년에는 학업계획이 좀 느슨하게 짜여질 거 야. 자네가 할 일은 이번 토너먼트에서 승리를 안겨다 주는 거지. 그것만 해 내면 내가 알 아서 하마.”

포레스터의 글을 인용한 것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없는 지멀이 마지막 농구시합에서 우승하는 것만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시합이 종료될 시간에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자유투를 얻은 지멀은(의도적인 듯) 실수로 득점을 하지 못했다.

지멀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위해 그들이 원하는 승리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인생에서 마주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은 행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지멀은 자신의 성공보다는 ‘우정’을 선택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킴으로

포레스터가 세상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친애의 힘이다. 그런 지멀을 돕기 위해 학교로 나온 포레스터는 지멀이 그에게 건넨 글을 읽는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친구를 돕기 위한 포레스터의 선택이었다.

“가족을 잃게 되면 가족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됩니다. 피를 나눈 가족만을 의미하는 게 아 니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말하기도 하죠.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면 그들에게 품었던 소망...마지막으로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라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소수자의 친애가, 우정이 거둔 승리는 타자들에게 전해질 진심으로 충분히 감동적이다. 나도 지멀의 글을 들으며 친애하는 ‘나의 지멀’에게 전하고 싶다.

“너를 잃고 나서 후회의 마음에 시달리기 보다는 너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킬 수 있어 야 한다는 거. 너를 지켜줄 수 있음으로 나도 살아날 수 있다는 거. 그렇기에 너는 내가 부를 이름으로 온전한 ‘너’로 있으면 되었다.”

▲ 포레스터와의 친애를 선택한 소년 지멀

4. 소수자인 나와 너의 세계

다수에 속하지 않는 의미로 일반화 될 수 없는 이들을 내 나름대로 소수자라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분명 소수자인 거 맞다. 나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기에 소수자로서 이 사회에서 제도와 무지와 편견으로 요구하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히 거부한다. 그래서 나는 함께 나누고 싶은 너의 희생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상황에 놓인 부분의 이해는 가능하겠지만. 그 부분으로 한 개인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보기에 ‘느껴주기’로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대신할 수 있었다고. 그 느낌을 나눌 수 있는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친애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영화 속에서 지멀과 포레스터의 교감이 ‘우정’이라는 친애의 사랑을 쌓을 수 있게 해 주었고, 각자 스스로의 삶에 당당하게 맞서 나아갈 힘을 서로에게 준 것처럼.

▲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시작, 포레스터의 화려한 외출

인간의 다양성에서 시작되는 삶의 모습들, 또한 사회의 각 분야에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분되어, 늘 소수자로서 받아야 하는 부당함들이 있다. 그것들은 ‘나’에게서 시작될 수 있었고 ‘너’로 하여 이어지기도 한다.

소수자라는 ‘구분’이 사라질 때 우린 비로소 ‘인간’으로서 대등해 질 수 있을 거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는 나이기도, 또 너이기도 하기에.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나기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분명 적어질 것이다.

중증 장애인의 1인 시위, 세대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자살이 넘치는 사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어린이들이 많은 사회, 기계와 벗삼아 놀아야 하는 청소년, 철탑 위로 올라간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너가 같은 성(性)이라는 이유로 모멸의 대상이 되는 사회, 너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넬 수 없는 내가 있다.

▲ 지멀을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온 포레스터, 아름다운 우정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글이 훨씬 나을 수 있다는 포레스터의 말을 옮기면서 웃고 있다.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꿈을 꾸는 것을 잊지 않도록, 내게는 주인공 포레스터와 그의 친구 지멀처럼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에 꿈을 꾸고 있는 친애하는 ‘너’가 있다는 것이기에.

그래서 나의 세계는 이렇게 작동될 수 있는 것이라고.

‘협동조합’이라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확산된 여러 현상들을 도처에서 발견한다. 내 주변을 돌아 보며 나와 교감할 수 있는 너를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어쩌면 내 옆에서 웃고 있는 너가 있었음을 발견해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을 기웃거리며 함께 공감하는 우리는 소수자이다. 이 사회의 구분에 의해 명명된 소수자들이 자유롭게 소리낼 수 있는 사회는 개인의 시작에서 가능하다. 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되돌아 보며 내 옆에 있는 너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을지라도 너가 함께이면 가능하지. 그렇다고 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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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서, 돌봄의 배를 띄우자

 

세월호 참사 1년이다. 이 글은 지난 해 세월호 참사를 겪고 한겨레출판사가 기획한 <한국 사회의 길을 묻다>에 기고해 실린 글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가족들은 물론 국민을 기만하고 있는 뻔뻔한 정부가 더 강고하게 있을 뿐이다.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의 도덕적 해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묻는다.

 

 

 

 

 

넋 빠진 대한민국이다. 홀로코스트는 계속 되고 있었다. 국가의 야만에 의해 파괴되어야 했던 소중한 목숨들이 바람처럼 불어오는 계절이다. 숱한 넋이 광장에서 내게로 달겨드는 오월을 지나 유월의 햇살이 너무 따갑다는 느낌으로 길을 걷는다. 내가 느끼는 세계와 거리에서 만나지는 일상의 모습은 혼란스럽다. 정오를 지난 시간에 하는 외출이 참으로 불편하다. 낯설게 존재의 위기감이 거친 숨과 함께 내부에서 스멀거리기 시작한 거다. 노동자들의 죽음, 세월호참사, 밀양사태, 정부의 인사참극, 전교조의 투쟁, 아무렇지 않게 또 7월이 열린다.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다시 빙 두리번거리며 겨우 도착한 그곳은 그 지역의 오래된 책방이었다. 그 책방 역시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채비를 하고 대형서점으로 변신 중이다. 책방의 이름은 옛 것이지만 이미 그 모습은 없다. 주변에는 이런 변신이 일상처럼 일어난다. 우리의 윤택한 삶은 사물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사물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나. 답답한 심정에 불러 세운 너마저 객기 넘치는 격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듯 술이나 한 잔 마시자며 날 더 아프게 한다.

 

도대체 이게 나라냐. 시궁창이지. 광화문 네거리에 늘어선 놈들을 봐.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더 나빠진 거겠지. 소용없어. 내가 광장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닐 때 늘 들었던 그 빨갱이라는 말을 이 나이 먹어도 집안 어른에게서 듣고 있거든. 희망 따위는 없어. 소용없다니까. 바라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힌다. 다 썩었어. 다 죽어야 돼. 나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 나이 먹은 인간들이 다 죽 으면 바뀔 거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 이 나라가 싫다.

 

내 기억 속에 너는 여전히 투사로 살아있는데 너는 자꾸 아니라고 한다. 술이나 퍼먹고 소리나 지르면 뭐하냐고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낸다. 너는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거였어. 청년시절 느끼는 사회에서 만나는 낯선 시선들을 지금도 마주해야 하는 고통에 화가 나는 거겠지. 조직의 존립을 위해 국가를 이용하는 패거리 정치, 각종 마피아들이 판을 치며 사람을 가라앉게 한 대한민국이다. 반세기 가까이를 뒷걸음질 치며 광장에서 사람들이 왜, 저항하고 있는 지 기억하면 돼.

 

정치는 나의 삶을 공동체와 더불어 향유할 수 있도록,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행위의 시스템이지. 나쁜 정부의 통치는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대의민주주의 시대에서 오로지 정치인들만이 정치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표에게 맡겨놓고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고대 아테네에 사는 노예와 다름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내게 화를 내는 대상이 많아지면 한국사회에 다른 가능성이 생길거야.

 

 

현재를 살아가는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할 책임감을 기억하고, 포기하지 말자고 토닥거렸지만 네 마음을 알 것 같다. 한국 사회에 국민은 있지만 시민은 없다. 국가는 사람이 없는 교육과 시장을 만들며 언론 장악으로 현실과 타협하게 해왔어. 시키는 대로 순응하며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배우게 만들었던 거야. 많은 신세대들이 자신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은 내가 누군가의 자식이고, 어딘가에 속해 있고, 어느 집단에서든 안전하면 된다는 거지. 자동적으로 학습되어 '?' 라는 말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나의 이해관계로 가장 편한 선택을 하는 것이 현실을 잘 살아가는 방법이란다.

 

이미지에 불과한 국가 정체성의 개념에 남아있는 나의 삶을 잃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역할은 있어도 주체의 존재감은 없어. 시민으로 존엄성과 의의를 찾아야 해. 내 나라, 나의 정원에 단 한 송이의 장미로 존재감을 뽐내고 싶다. 돌봄의 공동체에서 개별자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어야 한다. 현실을 초월하여 좀 더 고귀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체성, 자존감, 자부심이 중요한데 학벌사회에서 교육 과정을 무시한 채 존재감을 발휘할 방법은 흔하지 않잖아. 아이들은 학교를 거부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공교육의 위기는 공동체를 교묘하게 해체하는 결과를 빚어내어 왔다고 하면 지나친 걸까. 여기, 한국 사회에 교육은 없었다. 개인의 성공과 이해관계로 개인의 잠재력이나 상상력이 발휘될 가능성을 애초에 원천 봉쇄해 왔지. 아이들은 권위주의의 억압으로 자신의 몸 사리기 급급하고, 획일적으로 주입된 사회적 성공이란 허울 좋은 허위욕망으로 허덕거려야만 해. 비주체로 사는 것이 덜 두렵게 다가오기에 사육당하는 교육 환경에서 주체로서 철저히 배제의 대상일 뿐이었어. 그런 결과로 발생하는 일들이 사회에 넘쳐나고 있었지만 국가는 표면적 대응과 감추기, 책임 전가에 급급했지.

 

 

 

청소년의 자살과 학교 폭력, 인권의 부재에서 보여지는 권위의 추락에 사람은 없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너와 내가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은 동양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마음이었다. 이것이 서양과 다른 문화거든.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떨어져서도 잘 버티어나가는 사람보다는 함께 협력하려는 우리의 공동체 정서이지. ‘내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잖아. 강한 내가 약자인 너를 어깨동무하여 나아가는 것이 이 땅의 정서였다. 한국사회에도 우리만의 철학이 가능하다는 우리라는 시선을 찾아 가는 거지. '새로운 이념', '새로운 철학'이 나와 너에게서부터 마련되어 우리의 정서에 맞는 세상을 열어가야 해.

 

한국인의 기질 중에 가장 큰 특징은 '선함''강인함'이다. 절망적으로 학대 받지 않는 한, 늘 평화롭고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들로 고난의 역사를 보내 왔어. 착하고 순박하다가도 위험이 닥치면 무섭게 일어서는 용감한 사람들이기도 했지. 얼핏 바보 같지만 따뜻한 손을 옆 사람에게 내밀어 주는 좋은 사람들이 바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 수세기를 거쳐 이러한 문화적인 정체성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을 기억해 내야만 해. 우리 어머니들이 물려준 강인함은 한국인의 정체성에 근원이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돌봄의 공동체를 향한 우리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야.

 

2014년 대한민국은 사회적 약자들과 검은 바다 속에서 죽어간 영혼들의 원통함을 함께 가슴에 새기는 어머니들의 통곡들로 이어지고 있잖아. 가족에서 사회로 서로 돌봄의 공동체가 가능한, 인간적인 형상을 지켜내기 위한 철학이 내 안에서 꿈틀거려야 해. 민주주의가 삶과 공존하게 되어질 때,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이고, 정치는 비로소 권력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공론장이 될 거야. 친구야,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파괴된 인간성을 딛고 생물학적으로 견딜 수 있었던 기대는 삶의 의미를 기억하는 일이었어.

 

[416일의약속국민연대]를 소개하며 한국의 정서 돌봄의 공동체를 향한 당신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작은 행동이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기억하려 한다. 내가 치루고 있는 이 잔인한 사월의 봄이 다시 열리지 않아야만 한다.

 

 

 

416일의약속국민연대(약칭:4.16연대)는 가족이 시민, 단체와 함께 꾸린 4.16참사에 대응한 통합적 상설단체이다.

 

4.16세월호 참사의 실종자, 희생자, 생존자 가족의 하나같은 요구인 실종자 완전수습,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과 진상규명, 피해자에 대한 책임있는 지원이 이뤄지도록 하는 목표를 최우선적으로 두며, 나아가 4.16 참사 이후의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를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국민의 안전, 존엄과 권리, 인권이 보장되도록 하며 침몰한 대한민국의 최종책임을 묻고 그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도록 노력한다.

 

4.16연대는 단체 간의 임시 연대기구가 아닌 <시민회원 가입>을 기반으로 한 단일한 사회단체이며, 지역, 풀뿌리 간의 수평적 교류, 연결(네트워크)을 지향한다. 4.16이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기억과 행동이 흩어지지 않고 일상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회원가입제를 두고 회원단체로서 활동을 지향한다.

 

4.16연대는 무엇보다 가족과 통합적 운영을 통해 상설적인 논의집행을 원활히 하고, 또 시민회원을 기반으로 한 상설적 단체로서 일상적인 운동과 발 빠른 대응, 또 교류와 연결을 통한 빠른 소통과 정보공유를 펼쳐나가 4.16참사에 대응한 진실과 안전, 인양 실현을 최우선에서 해결해 나가도록 노력한다.

 

4.16연대는 새로운 시민운동으로서 다중심성 / 자발성 / 확장성 / 수평적 전국, 해외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출처] http://416act.net/intro_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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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아이들은 조금씩 드러나는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정보들을 구체적으로 접해가며 충격에서 분노로 질문을 던집니다. 엉뚱한 말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저는 걸어갈 때 고개를 숙이며 다녔거든요. 이제부터 길을 걸어가면서 고개를 바로 들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다니고 있어요.”

 

 

왜냐고 묻는 나의 물음에 나온 답은 참으로 서글펐습니다. 이것은 어떤 정서로 아이들에게 다가선 것일까요. 나쁜 사람을 향한 분노의 또 다른 마음의 변화일까요. 만약에 현상금이 걸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은 그만 두었습니다. 수사에 집중하기 보다는 여론몰이로 사실을 은폐하려는 수작인 것만 같아서 말이지요.

 

 

유병언 잡을려구요. 혹시 모르잖아요. 찾아보지 않는 지방의 한 작은 도시에서 돌아 다닐 지모르잖아요.”

 

현상금을 내걸어 눈길을 모으는 행태가 어째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간첩신고는 113’이 겹쳐집니다. 꽤 오랜 시간 나의 삶에 각인된 표어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간첩 하나 신고해서 잡으면 대박인생이 되는 거였습니다. 말만 바뀌었지 국가 차원에서 조장하는 대박인생은 다양합니다. 삶을 이런 한탕주의에 의존하게 하는 사회 분위기는 사람보다는 돈이 먼저인 현실에 충분한 근거로 보여집니다. 도대체 얼만큼의 돈으로 한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일까요.

 

지방에 살고 있는 십대의 청소년들은 광장으로 나가 함께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인터넷 뉴스로 접하는 대도시의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자신들이 작아만 져서 존재감도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 느낌들은 기성세대에게도 다가오는 끊임없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지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는 있다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6.4지방선거를 위한 투표참여와 제대로 된 정보들을 주변에 알릴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세월호참사로 겪는 트라우마는 우리들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막연하게 파고드는 죄의식, 구해주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죄의식들이 슬픔과 함께 떠날 줄을 모릅니다. 죄의식과 슬픔들에 혼자 빠져들면 더 큰 불행이 찾아들겠지요. 함께 이야기 하고 표출하고, 극복할 수 있는 내일을 향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겠지요. 여전히 책임이 등가로 여겨지도록 해서는 안 되겠지요.

 

자본이 중심이 되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해소시킬 수 있는 최선의 노력들에 함께 힘을 실어야하겠지요.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아도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보다 인간적인 삶의 가치들을, 그 이야기를 우리 사회에서 들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잠재력들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교육 환경과 자신의 빛으로 채워갈 다양한 색깔로 물들여진 시간들로 향유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양한 개인들이 저들만의 역할로 개별의 선을 추구한다면 우리 사회는 공동의 선으로 넘칠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때마침 트위터에 올라온 적절한 사진을 찾아 사용여부를 쪽지로 보냈지요. 그는 자로 [네티즌 수사대]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를 추적하는 네티즌 수사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민이 이슈공중으로 진보하는 거지요. 우리 사회가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작은 역할들이 정의를 세워갈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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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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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햇살이 너무 따갑다는 느낌으로 길을 걷습니다. 거리는 저들 나름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정오를 지난 시간에 하는 외출이 참으로 불편합니다. 내가 느끼는 세계와 거리에서 만나지는 세계는 너무 이질적입니다. 나는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자족의 풍요를 누리며 삽니다. 나의 풍요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으로 채워지지요. 크게 부족함을 못느끼며 살아갑니다. 이런 내게 낯설게도 존재의 위기감이 숨과 함께 내부에 차오릅니다. 늘 있었지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들이 나의 시선이 멈추기를 바라는 듯햇습니다.

 

 

 

▲ '삵 자연으로 돌아가다’ 서울동물원에서 태어난 멸종위기 2급 야생동물 '삵' 5마리가 21일 오후 경기도 안산 시화호 상류습지에서 자연으로 방사되고 있다. 2014.3.21/뉴스1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다시 빙 돌아서 겨우 도착한 그곳은 그 지역의 오래된 책방이었습니다. 그 책방 역시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채비를 하고 대형서점으로 변신 중이었습니다. 책방의 이름은 옛 것이지만 이미 그 모습은 없습니다. 내 주변에는 이런 변신이 일상처럼 일어납니다. 우리의 윤택한 삶은 사물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사물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책으로 가득찬 그 공간에서 이끌리는 시선이 멈춘 것, 내가 선택한 100쪽의 책 한 권입니다. '깊이에의 강요/파트리크 쥐스킨트'였습니다.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에 <깊이>가 무엇인지 구현하려다가 좌절하여 자살한 젊은 여류 화가의 이야기가 책의 내용 중에서 유독 시선을 끌었습니다. 소묘 화가로 재능있는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한 평론가의 비평을 신문에서 읽은 후,'깊이'라는 그 말의 의미를 찾다가 결국에는 자살을 하지요.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기에 그녀의 몸은 아주 멀리 날려가 전나무 숲에 떨어졌는데 즉사했습니다. 자살 사건. 한때 전도양양했고 미모도 뛰어난 그녀의 특이한 형태의 죽음은 대중지의 보도 가치에 따라 그간의 끔찍한 그녀의 삶이 드러났습니다.

 

깊이가 없다는 평론을 한 그는 이제, 그녀의 죽음을 평론합니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 번 충격적인 사건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녀의 끔찍한 삶은 그대의 상상력에 맡기려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시선이 말이 되어 어느 대상에 꽂힐 때,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한 국가의 수장이 한 말이 비수처럼 꽂힙니다. 그런 5월은 이 땅에 황망하게 떠도는 숱한 영혼들의 말들로 찾아옵니다.

 

국가의 야만에 의해 파괴되어야 했던 소중한 목숨들이 바람처럼 불어오는 달이기도 하지요. 5.16 군사쿠데타와 5.18 민주항쟁으로 스러져간 넋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보 대통령의 영혼이 광장에서 내 가슴을 향해 그리움을 담은 바람으로 넘치는 달입니다. 오늘의 광장에 더해진 세월호의 맑은 영혼들까지, 이 5월은 그렇게 우리들을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서게 하고 있습니다. 심리분석가 마거릿 말러가 첨단 기업들의 관행으로 ‘존재론적 불안정’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 전문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존재론적 불안정은 재앙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특정 상황에서 이렇다 할 개인적 이유 없이 걱정에 빠져든다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기업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유화된 국가는 국민을 이용해서 이윤을 추구하려 합니다. 재난을 이용해서 이윤을 취하려는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이윤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금수(禽獸)일 뿐입니다. 이것이 저들이 말하는 창조경제일지요.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할 주체인 정부는 희생의 시스템을 가동하는 허언들로 넘칩니다. 국가의 존재,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정치와 경제를 공간적으로 갈라놓은 고대 아테네인들은 민주주의의 미래를 예견한 듯합니다. 사람들이 돈벌이에 신경 쓰다보면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는 고전적인 명제를 생각하도록 하고 있네요. 플라톤이 국가는 경제에서 요구하는 필요와 탐욕이 아닌 정의에 근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현대 국가와 국민들이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유착되어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은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여전합니다. 정치도 소비의 한 형태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라면 소비자인 나는 단호하게 금수정부를 거부 하겠습니다. 나는 사람입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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