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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거들이 대표팀 합류. 축구대표팀 손흥민(왼쪽부터), 구자철, 지동원, 홍정호가 13일 오후 경기도 파주 NFC(대표팀 트레이닝센터)로 들어오고 있다. 2014.5.13/뉴스1

 

 

“엄마, 제발 노란 리본 달고 어디 가지 마세요." 아침 일찍 날아온 문자였다.

 

"기사 뜬 거 보세요. 난 수업 들어 가요."
'노란 리본'을 검색하니 줄줄이 튀어나오는 기사들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이래?

< "노란 리본 단 시민 차단” 경찰 시위지침 드러나
警 “불법시위자 될 가능성이 있다고 차단을 지시”.. 직권남용 논란>

 

대한민국이 갑자기 미래로 이동한 건가. 갑자기 스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의 한 장면들이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2054년의 워싱턴이 배경이다. 미래의 범죄를 예측하는 세 명의 예지자와 범죄를 예방하는 '프리크라임' 시스템에 의해 6년 동안 범죄가 발생하지 않은 평화로운 도시이다. 그곳은 자동운전 장치에 의해 교통난이 해소되고, 투명액정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접하며 동공인식장치가 신분을 확인하는 최첨단의 사회이기도 하다. 평온해 보이는 도시의 풍경, 그 이면을 보지 않으면 마치 인류가 꿈꾸던 유토피아같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과연 과학기술 혹은 인간의 예지능력은 인간의 의식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설사 미래에 일어날 일을 현재에 미리 가늠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해도, 현재 잘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범죄자 취급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또한 인간의 미래는 확정된 것이 없기에 살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수정, 보완되기도 하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이 지닌 의지의 중요성을 말한다. 내 의지로 개인의 선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미래는 현재에서 비롯되어 연결되는 시간의 흐름인데, 내 행동의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이는 그나마 자신밖에 더 있겠나 싶다. 그런데 <경향신문>에 따르면 경찰청 관계자는 “당시 정권 퇴진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동향이 있어 노란 리본을 단 사람 등은 불법시위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 차단하라는 지침을 서울지방경찰청이 자체적으로 내렸다”고 밝혔다고 한다. 정당성 없는 정부의 정치적 공상이 이제는 이 사회의 아픔을 나누고 책임을 촉구하는데 동참한 시민들을 SF에서 가능한 시간여행까지 가능하게 하려는 것인가도 싶었다.

 

우리 사회에서 불온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인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가능성만으로 나의 행동을 차단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책임을 져야 마땅할 이들이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권력의 남용 문제가 극단적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세월호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는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권이다.

 

그간 내 생각을 글로 드러내고 있는 내게 불쑥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아이들의 불안해 하는 모습들이 안쓰럽다. 이런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늘 망설여진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인데 아이들을 오히려 불안에 떨게 만든다.

 

통제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권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암묵적인 승인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음을, 내 문제로 생각해 보기를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현실에 대한 냉소, 무관심, 거리두기만으로는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20대는 여전히 지금 내 아이들의 시간대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능력을 발휘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위들이 지속되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삶이 그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통감하면서 직시하고 있다.

 

십대들과 지내는 나의 세상은 늘 나만을 위한 세상으로 펼쳐있다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아이들과 나누는 이 모든 시간들이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이만큼이면 되는 세상인 것을,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이런 공동체라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작은 기쁨들은 그리 큰 자산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 싶다.

 

세상의 몰염치한 인간층으로 전락한 권력의 부역자들이 불온한 세력들이다. 내 삶에 행복한 순간들은 내가 숨쉬는 이 사회의 맑고 자유로운 공기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공평한 단 하나, '일인일표'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말로, 노란 리본 단 개인들의 저항을 전하지만 이 오월의 변함없는 햇살은 아직도 마음을 아프게 찌르고 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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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어린이날은 범국민적인 세월호 침몰사고 애도 분위기 속에 각 지자체와 기관 및 기업들이 일부 행사를 취소하거나 축소하는 등 차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2014.5.5/뉴스1

 

새천년이 밝아 오던 그 때, 2001년 나의 세계를 벗어나 처음으로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미 두 해 전부터 홀로 시작한 독서문화운동은 내 아이들을 위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남편의 후원에 힘입어 새 집을 지을 때 마을도서관을 만들고 주변의 아이들과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지요. 그렇게 행복했던 나의 세계는 시대적인 흐름에 힘입어 자연스레 지역사회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에게 건강한 사회를 물려주기 위한 최선의 노력만이 어른들의 역할입니다.

 

책읽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열린 교육을 부르짖던 8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던 그 해부터 책읽기를 위한 작은 운동에 공감한 엄마들이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일인 듯해도 이 운동에 동참한 엄마들은 많았습니다. 물론 저 역시 지금까지 텔레비전을 보지 않습니다. 필요한 정보는 인터넷을 이용하고 좋은 TV프로그램은 찾아서 봅니다. 십 여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레 이 운동의 확산을 더욱 열심히 왜, 하지 못했던가 하는 마음이 요즘 저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개인적인 욕심에 빠졌던 거지요.

 

우리의 교육 환경은 사회적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 환경이 우리의 아이들 뿐만아니라 국민 전체를 병들게 하는데 근원이 되고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국민TV조합원 중 한 분의 트윗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리트윗을 하고는 바로 이 글을 씁니다. 미디어로 열어가는 이 시대에서 우린 미디어를 이용하는 주체인지를 고민해 보고, 미디어에 지배당하고 있는 대상은 아닌 지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분명 TV없는 세상은 가능합니다.

 

 

노란리본의 마음에 한 발 다가서기는 텔레비전 안 보기 운동과 시청료 거부운동, 시민불복종으로!!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 조합원@julia_kbs 수신료 인상과 동시에 TV를 없애 버리겠음 아이들 교육에도 정보 습득에도 아무 도움 안되는 국민 세뇌용 관제 방송 세월호 참사마저 정부 입맛대로 조작하는 방송을 누구 좋으라고 봐주냐 가짜 언론 불매운동 시작

   

텔레비전이 주는 오락성과 맞바꾸고 있는 단절된 가족문화를 들여다 봅니다. TV화면 앞에 눈길을 주고 내 가족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를 만난 때, 나와 너의 사이에 자리잡은 텔레비전은 주체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미디어가 결코 아닙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방송국들의 제작된 방영물들은 그들만의 이해관계, 또는 제작하는 이들만의 정서가 담긴 것들입니다. 예능프로그램만이 유일한오락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을 열망하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시간들에서 도망치듯, 영상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로 숨는 것입니다. 무조건 수용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텔레비전이 없는 시간에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느끼고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하루를 같이 보낼 그 저녁 시간에 얼굴을 마주하고 맛난 것들을 먹으며 책도 읽고, 수다도 떨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제작, 날조한 뉴스입니다. 뉴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해야 하는 것이지만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뉴스는 객관성과 공정성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꼭두각시들의 인형극처럼 대본에 의해 앵무새처럼 소리를 냅니다. 물론 기자도 없습니다. 저널리즘을 내세워 시청자를 바보로 만드는 못된 장사꾼들만이 있지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 정보는 주류 방송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번 세월호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병든 모습을 적나라하게 직면합니다. 내 삶을 유쾌하게 해 줄 감동이 있는 방송들이 부족한 것은 어쩌면 무심코 지나치는 우리들의 습관적인 행동들에 있지 않을까요.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텔레비전 앞에서 분노한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싶답니다. 시청료 거부운동부터 시작해서 텔레비전 안 보기 운동을 이제부터라도 함께 해 나갔으면 합니다. 이에 저는 시민불복종운동, 언론좀비 퇴출 운동을 제안합니다. "나의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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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krwu.nodong.net ‘철도분할’ 잊지말자! 12월 10일'


철도파업 이틀만에 코레일의 수서발KTX 운영 자회사 설립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고 철도노조는 밀실 날치기 결정이라며 즉각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철도노조는 이 안이 향후 민영화를 위한 수순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코레일 사측은 이번 파업을 '명백한 불법파업'으로 규정하고 첫날부터 강경 대응해왔다. ‘민영화 반대 파업’ 7일째인 15일까지 코레일은 8565명의 철도노조원들을 직위해제하고, 190여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현 상태의 국가는 우리 이전에 살았던 모든 세대의 발견, 발명, 개선, 숙달, 분발의 결과이다.’ 역사적 운명공동체인 국민의 국가를 강조한 독일의 경제 사상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누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공동유산으로 물려받은 진보 덕택이다. 공동 역사가 가져다준 선물은 사회 모든 구성원들에 의해 창출되어 왔고 풍요의 이면에는 각 분야의 개인들이 쏟아 부운 노동이 있다. 경제 주체의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나라에 미래는 암울하다.

경제 성장은 사회 전체에 누적된 지식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공동지식은 공공부문의 노력을 통해 창조되었고 정부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성장해 온 것이다. 공공지원이 없었다면 기업들의 성장은 가능하지 않았다. 기업만의 힘으로 자연 속에서 부를 창출한 것이 아니며 사회는 전반적으로 경제적 성장에 주된 기여를 해왔던 것이다. 그만한 보수를 대가로 가져가야 한다. 기업의 사회 환원은 사회적 책임이며 정부는 그 재원들을 당연히 공공재로써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관대하고 폭넓은 혜택이 돌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주 쉽게 불평등한 분배 현실을 찾을 수 있다. 거대 공룡처럼 지배블럭을 쌓아온 대기업들의 횡포는 정부의 정책들이 주된 원인이다. 국가는 사회를 통해 쌓인 부를 균등한 분배에 가까워지기 위해 공공부문의 시설을 확충하고 공기업을 통해 고용 창출을 기대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행복도를 높이는 데 집중해야만 한다. 노동과 자원에 더 많은 힘을 보태 생산적 목적이 활용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역할이다. 국가를 위해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희생해 온 지나온 역사가 이를 말해 준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고통의 본질이 무엇일까. 영양실조가 아니다. 질 좋은 서비스를 못 받아서 느끼는 불쾌감도 아니다.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막연한 불안이다. 딱히 두려운 대상이 없이 그저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건네는 거짓과 한숨, 극도로 몰리는 피로도 등 정신의 파괴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민영화‘ 혹은 '선진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얼마나 이득을 보는가를 따져 보고 공공성을 수호하는 일에 감시의 눈을 밝혀야 한다.


민영화의 가속화를 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해서 외국자본에 개방한다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영화는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지금까지의 선례로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특히 공공부문의 외국 자본진출로 향후 국가의 부는 외국 자본에 잠식당하고, 경제식민지가 되어 가는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것일 뿐이다. 지난 5년, 시장경제 체제의 모색 노력은 커녕 '역주행 정부'라는 비판을 들어가면서도 오히려 철지난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여전히 맹렬하게 매달리고 있다.

 

                                ▲ [출처]http://impeter.tistory.com


지난 유럽 나들이 중 박대통령은 프랑스 기업인들과 간담회에서 도시철도 조달시장 추가 개방을 공언했으며 다음날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고 GPA 개정의정서를 처리했다. 이 사실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알려졌고 국회비준 동의안 필요는 무시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진행되었거나 추진되고 있는 공공부문의 민영화 정책들은 국민의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다. 공기업이 하나, 둘 민영화되면서 효율성을 강조한 정부의 논리들은 자본의 예속화를 가중시겨 왔을 뿐이다. 이에 철도사업의 공공성을 무시하고 외국자본에 개방까지 한다고 했다.

프랑스 기업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던 대통령은 내 나라의 미래를 자발적으로 내어 주는 일을 합의없이 결정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쁜 행보를 보이더니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 스스로도 정당성을 내세울 수 없는자리에서 홀로, 자국에 엿먹이는 일을 하고 그 측근들은 장단 맞춰 북소리를 낸다. 국민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는 대통령이 없는 나라,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부에 저항하는, 나를 위한 철도노조의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힘을 보낸다.

김영훈 철도노조 지도위원은 딴지일보와 인터뷰에서 노조의 파업 배경과 구체적인 설명을 하며 정부가 하고 있는 정책들의 이면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정부는 경쟁체제 도입으로 효율성이 높을 거라 생각하지만 통합적 관리로 구축되었을 때 시너지 효과가 크다는 점을 일상 속에서 경험하며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시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버스지하철 환승 체계가 그것이다.

자연독점일 수밖에 없는 철도는 시민들에게 경쟁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오히려 회사가 틀리면 중복투자가 생기고 그로인한 적자는 더 커지게 된다고 한다. 적자의 폭을 줄이는 투명한 경영과 독점의 폐해를 막을 시민들의 참여와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부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법파업으로 몰아가는 이유가 기립 박수의 대가라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 전국철도노동조합 조합원들이 14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철도민영화 저지·노동탄압 중단 범국민 대회'를 열고 투쟁승리를 다짐하는 만세를 부르고 있다.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측과의 실무교섭이 무산된 가운데 전국에서 운집한 조합원들은 "총파업 총력투쟁으로 철도민영화 저지하자", "국민과 함께 투쟁하여 승리해 돌아가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코레일과 정부를 규탄했다. ⓒ News1

 

철도노조는 1945년 해방과 함께 만들어져 올해로 68주년이 되며 구성원들은 대부분 전동열차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가장 오래된 공기업 노조란다. 그동안 공기업 노조로써 철도노조는 요금체계의 문제, 장애인 이동권 보장 운동, 조합원들의 처우 등의 일을 해왔다. 이번 파업의 쟁점은 철도 민영화와 사유화 반대이다. 산업재해가 세계 제 1위인 나라에서 철도 노동자로 산다는 것, 동료가 자신의 기차에 몸을 던지는 현실을 만나는 일이 발생하는 나라, 공기업 노조 16개 중 14번째의 임금, 복지의 처우상태인 그들이 대중교통에 의지하는 나를 위해 나선 거다.

노동자의 파업에 부정적인 시선은 내 문제가 아니면 관심도 가지지 않는 개인들의 이기적인 모습들과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사회 분위기라는 불편한 진실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온 착취의 역사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 3권이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데 불법파업이라 몰아가는 주류 언론이나 정치권력자들은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파업으로 칭하는 것에 다름없다. 합의해 나가는 과정을 무시하는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노조는 사회적 대화, 국회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발언하지만 국토부와 여당은 외면하고 있다고 김영훈 지도위원은 말한다. 공론화하여 노조파업의 이유와 요구되는 핵심사항들에 충분한 답변을 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임에도 불법파업이라 하며 강경 대응하는 정부는 노조를 주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철도노조 파업의 주장은 세 가지인데 핵심주장은 공기업의 지배구조 개혁촉구(낙하산 인사 사절)이다. 또 하나는 시민의 감시를 위한 철도이용자의 사외 이사 기용과 마지막으로 공무원 정년 연장에 맞춰달라는 것이다. 그래, 작은 목소리들이 모이면 빛보다 멀리 갈 수 있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 "힘내라, 철도 노조!!" 


노조가 선택한 행동은 잘못된 정부의 정책에 반한 합법적인 파업권의 행사인 것이다. 철도노조는 총파업 선언문 시작에서 탈선을 막기 위한 잠시의 이탈을 이렇게 밝혔다.

 "오늘 우리는 철도를 멈춘다. 서민의 발이며 국가의 동맥인 철도를! 철도노동자가 평생을 굴려온 철도를 잠시 멈추려 한다. 탈  선을 눈앞에 두고 질주 하는 열차를 잠시 멈추고 선로를 바로 잡으려 한다. 다시 달리기 위해 멈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불황을 넘어서’에서 경제와 관련된 점점 더 많은 판단이 국가의 통제 밖에서 이루어지는 경우 민주주의에 대한 국가의 책임의식 또한 희박해지기에 새로운 유형의 경제식민지화가 진행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핵심적인 이념 가운데 하나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이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국가는 식민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공기업의 민영화는 경제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공공의 적은 과연 누구인가.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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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도청 강당에서 '제12회 식품안전의 날' 기념행사


지난 대선 때 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거론한 것으로 4대 사회악 척결에 끼어든 ‘불량식품근절’은 의외였다. '악(惡)’이라는 말이 불량식품에 덧붙여진다는 놀라움과 함께 대다수 시민들을 졸지에 악인으로 만들기도 한 공약이었다. 불량식품을 만드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이 늘 있었다는 의미이고, 나도 예외는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학교 앞 문구점에서 동전 한 개로 나의 입을 달콤하게 할 수 있었던 그 추억의 과자들이 전부 악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악을 추억하는 나를 악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왜?’라는 의문이 따라왔다. 이것이 ‘4대 악’에 들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해 낼 수 없었던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악인이었기에 몰랐던 것인가 싶었다

.

이번에 새누리당의 신의진 의원이 발의한 일명 ‘게임 중독법’이 우리 사회의 ‘4대 중독’이란 범주에 들어갔다. 마약, 술, 도박, 게임, 그렇게 규정되어진 상황에서 필자는 또 궁금해진다. 왜 3대는 아니고 5대는 아닐까? 생각하다 숫자 ‘4’가 지닌 우리 사회의 관습적 사고에 마주하게 되었다. 죽을 ‘死’를 연상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인가. 마치 ‘중독을 죽이자’라는 의미로 연상되는 것이 필자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어떤 말들이 사회구성원의 뇌를 조종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사회학습으로 각인되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회 담론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보수주의의 ‘엄격한 아버지’를 연상시키고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으며 내가 도덕적인 인간이 되려면 ‘악’에 맞서야만 한다. 이번에는 국회의원에 의해 졸지에 게임에 집중하고 과하게 노는 이들은 ‘중독자’가 되는 거다.


악에 맞서려면 강한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 그 도덕성을 준법정신으로 하여 악을 제거하기 위해 보복과 징벌의 법을 제정한다. 우리 사회에서 ‘중독’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의미로 쓰여 왔고, 그런 의미에서 ‘중독은 나쁘다’는 말이다. ‘게임중독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이 심각한 우(遇)를 범한 것은, 같은 문화 콘텐츠에 대한 형평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겠다. 심각한 중독 현상은 오히려 강력한 미디어 매체로 부상한 텔레비전이다. 굳이 4대 중독법을 만들어야 했다면 ‘TV중독법’이 먼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다. 우리에게 TV가 있는 저녁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일상이고, 그 중독은 한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를 지체시키는 독재자들에게 열렬했다. 시청자들을 우민화시키는데 급급한 불량방송을 송출하는 텔레비전이야말로 나쁜 것이기에 중독법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http://cafe.daum.net/ibims 


중독으로 인해 생기는 각종 문제들은 반드시 사회적·개인적 노력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허나 그 ‘중독’이란 말 앞에 어떤 말이 놓이는 가에 따라 그 의미도 긍정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아름다운 중독’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몰입’이다. 이 몰입은 자기 진화를 위한 발견의 시작이고, 그 효과를 굳이 따지자면 세상을 변화시켜 진보할 수 있었던 역동적인 힘이었다.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는 사회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에 개인들이 각자 몰입한다면 그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게 된다. 게임에 몰입하는 개인들이 모여 산업적 성과를 이루어낸 것처럼 사회·정치·교육 등 각 분야에 몰입한 개인들이 모여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율적 의미의 접근으로 강제할 ‘법 제정’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중독을 해결하려면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학업과 연결된 시간을 제외하면 아이들에게 남는 시간은 아주 적다. 즉 충분히 뛰어 놀 시간이, 저들끼리 모여서 놀고 떠들 시간이 없다는 것이, 게임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임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게임중독법’을 발의해서 타율과 강제로 막을 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누릴 자유로운 시간을 먼저 허락할 수 있는 교육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논다’라는 말이 구성원들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회 분위기에 ‘놀 수 있는 사회’로 변신하지 않는다면 ‘중독법’은 숱하게 발의되고 제정될 것이다. 과연 강제되는 법을 만들어 놓고 자율적인 준법정신을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법이 개인에게 휘두르는 힘은 보이지 않는 국가의 폭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회는 그만큼의 개인들이 감당할 책임의식이 뒤따른다. 자유는 스스로 책임질 것을 전제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 자유를 ‘법’으로 차단하겠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은 과연 그 흔하게 널린 ‘자유론’에 대한 수많은 인문학자들의 말에 몰입한 경험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인간이 우위를 정하는 부분은 지구의 그 어떤 종(種)도 접근하지 못한 문화적 도구 때문이라고 한다. 그 도구를 사용하는 자의 선택이 게임만은 아니다. 문화집중 현상을 모든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그 도구가 한 개인을 파멸로 몰아간다면 그 도구를 덜 사용할 수 있는 개인적인 노력이 우선일 것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 체험 환경은 이 사회의 몫이다. 이 사회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해 게임의 즐거움에만 빠지도록 한 것은 아닌지 사회적 성찰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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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http://movie.daum.net


감정노동을 엄밀히 정의하면 “업무상 요구되는 특정한 감정상태를 연출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일체의 감정관리 활동”이 직무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노동 유형이다. 그런 의미로 정치인도 일종의 ‘감정노동자’라 하겠다. 일반인과 달리 감정노동자로서의 일부 정치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노동을 뻔뻔하게 즐기는 능력을 갖게 되어 그것을 완력으로 이용까지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땅의 대부분의 감정노동자들은 고통에 신음하게 된다.


지난 일주일 뉴스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다 열 개의 단어로 지난 30여 년 간의 시간을 지나면서 드러난 중국 사회를 말하던,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를 떠올렸다. 눈에 들어 오는 반복되는 단어들에  필자도 우후죽순 감정노동의 트라우마를 만나고 있다. 지난 1년을 되돌아 보며 한국을 말할 수 있는 열 개의 단어를 생각한다. 그 열 개의 단어는 는 또 하나의 단어 ‘사태’로 모아져 있었다.


단어 나열의 순서에는 하등의 의미가 없음을 전제하고 감정노동자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필자의 처지에서 내 주변을 떠돌며 결국에는 중증의 감정노동자로 만들어 온 우리의 현실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국가의 면적이나 인구로 비교하기 어려운 두 나라의 모습이지만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쉽게 발견된다. 국가의 정체성에 의문 부호가 붙는다.


위화는 중국에서 ‘홀유(忽悠)’의 의미는 맨 처음의 의미를 벗어나 점차 하나의 속어로 자리잡아 중국동북지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속어로서 ‘홀유’는 똑같은 발음의 ‘호유(胡誘)’ 즉 ‘어지럽게 잘못 인도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책에서 말한다. 이후 끊임없는 변이가 일어나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허풍과 선동, 종용의 의미를 갖고 허튼소리나 뜬소문, 사기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해학과 조롱, 근거 없는 날조와 투기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홀유는 중국어의 만능열쇠가 되어 관련된 단어의 말뜻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입만 열었다 하면 홀유를 하게 만들었다는데 한국에서 정부의 홀유는 ‘사태’가 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먼 계절로 갈 것도 없다. 지난 대선의 겨울부터 궤적을 돌아보면 NLL대화록 사태를 시작으로 진주의료원 사태, 국정원 사태,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난 시국선언 사태, 인터넷의 일베사태, 개성공단 사태, 해병대캠프 사태, 윤창중 사태, 밀양송전탑 사태, 국회의원 이석기 사태는 통진당사태로 이어졌고, 아직도 열거할 ‘사태’가 마치 유행처럼 줄을 잇는다.


전교조사태까지 생각하면 한 마디로 ‘민주주의 위기 사태’라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개인의 감정 노동은 극한까지 갈 수밖에 없는 거다.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세대를 초월하여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개인들의 자살사태는 무엇으로 표현해야 적절한가. 정부의 홀유는 개인의 영웅주의에서 시작되었기에 잠시의 현상으로 머물러서도 안 된다.


위화는 ‘홀유’라는 단어가 중국 사회의 윤리및 도덕성 결핍과 가치관의 혼란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 혼란 속에서 한 개인도 정부를 상대로 홀유하기 시작하고 그 사회는 홀유라는 언어유희에서 종국에는 홀유가 실제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면서 어느날 내가 속임수나 헛소문 같은 단어에 합리성이라는 외피를 입혀 놓은 홀유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출처] 정봉주와 미래권력들


한국의 매스컴에서 넘쳐나고 있는 도처에 퍼지는 가짜 뉴스의 등장과 이런 가짜 뉴스에 법률적 책임은 물론 도덕적 책임조차 지지 않아도 되는 현실, 정부가 국민을 우롱하는 사태에서 개인들의 감정 노동에서 발생하는 트라우마는 너무도 당연하다. 인터넷에서 어느 고등학생이 때늦은 1인 시국선언을 했다. 그 소년은 마지막에 “민주주의를 쉽게 내주지는 못하겠다. 내 미래를 도둑질 하지 말라”라며 끝을 맺었다.


기성세대로서 순간 가슴이 후끈해지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한 것은 현재에도 민주주의는 권력자들에 의해 충분히 짓이겨지고 있다. 그 고통에 신음하지만 한 개인들의 힘은 협동의 형태로 작은 공동체로 공감의 마음들이 모이고 있다. 그런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협동조합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그 가치를 후대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기에 결코 우리는 미래를 도난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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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북을 면치 못하는 우리 외교는 이번 유럽 순방에서도 여전한 듯하다. 외교의 중요성은 국익과 관련되었기에 중요함에도 그 효과적인 면에서 본다면 탐탁하게 여길 수가 없다. 대통령을 포함한 측근들의 행동들에서부터 드러나는 잡음들은 지난 미국 방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국내 언론들의 북소리만 시끄럽다.


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수행중인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3일 첫 순방국인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국정원 대선 개입 항의 집회’와 관련해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다”며 참석자들을 협박하는 글을 써서 눈길을 끌어 주었다. 그의 행동은 국가를 위한 외교인지, 1인을 향한 애교인지 구분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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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시위 사진출처 : 경향신문


김 의원이 말한 파리 시위는 지난 2〜3일 대통령이 유럽 순방 첫 방문국인 프랑스를 찾은 때에 프랑스 거주 한국 교민들과 유학생 등이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에 항의해 벌인 시위다. ‘민주주의 파괴를 규탄하는 재불 한인’은 2일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 3일 팔레 루아얄 광장 등에서 국가기관의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촛불 시위를 열었다고 한다.


미국의 웹모바일 미디어 토픽스는 8일(현지시각) 김 의원이 시위 참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관련된 한국 언론 기사를 ‘토픽스 프랑스’에 링크했다니 과연 북소리가 날만도 하다. 일국의 국회의원이 제 스스로 알아서 민주주의 국가를 부정한 꼴이다. 국민을 대행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국민을 협박할 수 있는 나라로 알리고자 소리를 내었으니 말이다.


대통령의 이번 유럽 순방 컨셉은 문화산업 교류 및 창조경제 중심의 '세일즈 외교'라고 한다. 무엇을 세일즈한 것인지는 도통 알 수 없지만 국정원 등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입장을 "과거의 정치적 이슈"로 규정하며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태평하게 순방길에 오르는 뒷모습은 해외 관광을 위해 떠나는 여행객 같기만 하다.


대통령의 서유럽 방문소식은 국내 언론에게는 큰 뉴스로 연일 보도되었다. 대통령이 떠나기 전 프랑스 보수 일간지 '르피가로'와 인터뷰 한 내용이 대서특필 됐고, 영국국빈 방문 때의 성대한 환영식 장면은 주요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국내에 대서특필된 인터뷰 내용은 번역에서부터 그 의미를 달리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 영국 언론들은 대통령의 방문 소식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극소수의 언론만이 한국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언급했다는 거다.


프랑스의 일부 언론은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한국에서 일고 있는 국정원, 군의 선거개입 문제, 아버지의 그림자,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문 등을 다루기도 했지만 국내 언론에서 이와 관련된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한국을 출발하기 전에 BBC가 인터뷰를 했지만 이 기사는 BBC 월드로만 방송되고 영국인들을 위해 BBC에서는 방송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국내 언론사들이 권력에 부역하는 열띤 모습은 언제나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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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위 사진출처 http://blog.daum.net/rhekaeorn/3743


대통령의 해외방문은 국내 악재로 인한 지지율 하락을 상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여 한복입고, 정상들과 회담하는 모습이 집중 조명되면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서유럽 방문도 마찬가지여서 갤럽이 대통령의 해외방문 기간이던 11월 4일부터 7일 사이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전 주보다 지지율이 5%p 늘었고 부정적 평가는 4%p 줄었다고 발표했다.


정치가 몰락한 나라에 외교의 몰락 또한 당연지사이다. 실리도 자주도 없는 그동안의 우리 외교는 정부가 내거는 창조경제에는 턱없이 부족한 ‘눈치외교’ 답습의 구태일 뿐이다. 추상적인 ‘창조경제’가 국내에선 미사여구에 불과하니, 그야말로 ‘우물안 외교’에 머무는 수준이기에 한국외교의 근본 문제를 성찰할 기회를 필요로 한다 하겠다. 외교를 대외용이 아니라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지나쳐 국민으로서 기만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국내 언론의 대서특필되는 대통령 나들이가 국민을 기만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옛 성인들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제 한 몸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하는 정부가 외교를 내걸고 국익을 논하며 ‘세일즈’를 생색낸다는 것이 막힌 가슴을 더욱 갑갑하게 하고 있는 꼴이다. 민주당이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에 대한 특검을 요구하고 나섰고, 정국은 심상치 않은데도 언론을 통해 비춰진 정부의 모습만 보면 태평천하(太平天下) 같다.


필자는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 국민 여론을 정부정책 지지용으로 하기 위한 국내용 외교를 보면서 세계에 놓인 대한민국의 위상을 좌우할 수 있는 외교부와 그에 속한 외교관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국경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외교는 외교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국민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외교라고 생각하기에 피켓을 든 재외국인들의 모습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발견될 수 있음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서유럽 순방 중 유일한 국빈 방문은 영국뿐인 그런 대접을 받는 나라에 산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외교를 대통령 당선 후에 의례적으로 치루는 주변 국가들을 방문하는 모양새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보다 실질적인 외교부를 갖추고, 역량있는 외교관이 될 인재를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국가 간의 접촉으로 국내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 실질적인 국익에 힘쓸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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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5일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의 정당해산심판안을 청구하고 정당활동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자, 같은 날 문재인 의원의 검찰 소환과 나란히 언론의 화두가 되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무오류의 논리를 펼치는 건 의식적으로 오류에 대한 면역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 확실한 근거가 존재할 때 우리는 오류가 없고, 논리적이라고 말을 한다. 정부가 하는 일이 논리적일 때 대중은 그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할 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부가 하는 일들이 오류에 둘러 쌓여진 채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기에 정부에 대한 신뢰감은 실종 중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정부의 ‘종북’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보수세력이 야권 전체를 싸잡아 ‘종북세력’으로 낙인찍고,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정치적 타격을 주곤 했다. 이런 식의 논리가 만연한 이유는 오히려 ‘분단국가 처지’를 빈틈없이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을 뒤집을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참이라고 믿을만한 타당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반박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애초에 그 가능성을 배제해 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 때도 있다. 그렇게 조작된 사건이라면 모든 증거가 한쪽에만 유리하도록 기우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해산심판 청구안을 꺼내든 정부의 의도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넘어 야권 전체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그간의 정부가 보여 온 국가주의를 내세워 편가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 본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욕을 충족시키려는 방법으로 너무 오래 써 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즉, 그동안 언론플레이, 포퓰리즘, 총체적인 관권선거 등에서 드러난 오류의 면역성에 기대고 있다 하겠다. 결국 뭔가를 설득력 있게 부정할 때 흔히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번 법무부의 성명은 ‘정의의 축소’로 보이게 하는 교묘한 말장난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관련사진


통합진보당원들이 5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긴급 기자회견



오류에 대한 면역력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음모론인데 증거들마저 사실상 음모론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가짜논리가 극성을 부리며 진행되고 있는 허울만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추락한 현실에서 국가안보에 관한한 우리 사회는 자신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가능성마저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생각이 경직됐을 공산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정부가 통진당의 해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기감을 조장하고 있다 하겠다. ‘조건부 진실’이라는 오류는 놀라운 주장들이 모호한 정의(定義)를 근거로 제기되곤 한다. 도대체 어디까지 달려갈 설국열차인가.


대의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라고 옳은 선택이라 할 수만은 없다. 다수결이 지닌 오류가 아니던가. 그런 오류들에 면역된 구성원들은 고질적으로 각인된 언어의 왜곡된 개념에 갇혀 ‘내 식대로 정의(定義)’를 내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철학자 앤서니 플루는 이런 식의 주장에 ‘진정한 스코틀랜드 사람의 오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문에 대문짝하게 난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를 보며 ‘진정한 스코틀랜드인이라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는 말로, 그럴듯한 이유가 되어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지난 대선까지 이어져온 야권연대의 한 축인 동시에 ‘종북’ 논란의 당사자인 탓에 통진당을 감싸면 마치 내가 유유상종이라고 생각되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급진적인 정책이나 발언에 ‘종북’이란 왜곡된 용어를 씌우는 가짜 논리들을 바로 잡을 의식적인 노력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나 뭐든 원하는 대로 정의하고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진실을 중시한다면, 정의(定義)가 공정한지 따져봐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의 다양성이 보장되어 정책의 차별화와 그에 따른 국민들의 소수 의견까지도 반영될 수 있을 때 사회구성원들의 보다 나은 삶이 마련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될 가능성이 깃드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RO라는 조직을 위험한 단체로 규정한 근거가 녹취록에 따른 것인데, 

        녹취록 상에 나타난 발언을 근거로 내란을 음모했다고 하는 것은 순환 논리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제발 ‘정치적’으로 ‘진화’ 좀 하자. 그러기 위해 다양성을 획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통진당이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해도 정당의 해체는 법무부가 나설 일은 아니다. 과오에 대한 사실 규명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정부는 스스로 가짜논리에 갇혀 여전히 대중에게 호소하는 오류까지 저지르고 있다. 단어의 의미가 상황의 ‘진실’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언어를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특정 용어의 의미를 엄격하게 규정할 때 이런 식의 억지 논리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고착된 ‘이념’은 이미 해체된 지 오래인 세계화로 열린 시대가 아닌가. 정부가 알아야 할 ‘진실’은 대중이 결코 아둔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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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시대의 '음서'가 현대에 되살아 나려 한다. 삼성자사고 개교의 소식에 더 큰 한숨과 한심한 정부에게  왜 그러니~ 하며, 목을 빼고 있는 다수의 민초에 속한 1인으로 몇 년 전 읽은 책을 부활시키며 곱씹고 있다. 부모가 잘나지 못하면 자식도 잘날 수 없다는 삼성판 '음서'는 다시 말해, 부모가 용기를 내면 자식도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겠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며 채워주고 잘못된 것들은 바로 잡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담긴 몇 해 전에 만난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학벌없는 사회)'를 떠올리는 시간이다.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들을 사유와 분석을 통해 쟁점화 하며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8명의 필진들이 쓴  이 책은 '학벌없는 사회'로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학교를 떠나라!" 진학을 앞두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어린 그들에게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말이다. 더우기 내 아이들에게도 건네기 어려운 말이다. 적어도 지금 이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학교 밖에서 만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기에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그 희망은 사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내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내용들이지만 과연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열릴 혼돈과 어지럼증은 어떤 마음의 변화를 오게 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만나는 시간 내내 '내 속에 웅크린 허무(dada)'를 불러내어 만났지만 내 생각이 크게 필자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삶으로 향한 전환을 건네는 것이고, 아주 특별한 기회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먼저, 돌을 막 지난 첫 아이의 '바람그리기'부터 시작된 그림에 대한 재능을 키우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일관성을 대학입학까지 유지했던 부모로서 삼성판 '음서'에 떠오르는 생각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다. 수요자의 거부만이 답이다. 허나 그 답을 낸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있겠다 정도일 것이리라.

내게는 오로지 제 삶에서 '그림'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아이가 스물이 되자 자신의 진로에 스스로 딴지걸기를 해, 저 스스로가 더 힘들고 막막할 인문학을 선택해 다시 시작하기를 선언한 첫째의 삶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 즈음엔 대한민국 고3, 둘째의 갑작스런 진로 변화와 이탈, 저항에 동조하고 수포자로서 선택의 한계를 넘으려고 매진하며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딸의 모습에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의 시간이 있었다. 둘째에게 그림을 접고 인문학으로의 선택은 수학을 하지 않았던 수포자의 한이 반영되기에 서울에 있는 대학진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도움과 서울특별시를 탈출한 내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의 시간들이라 여겼던 것들이 아이들의 선택과는 다름을 알아차리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위한 선택에 우선적으로 대응을 해왔다. 그들의 미래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내가 서울특별시를 벗어난다는 두려움을 넘어서면서 찾아낸 자유로움으로 채워지는 삶들을 생각하고 아이들의 정서적인 독립선언으로 열릴 고단할 시간에 응원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둘째는 제 언니와는 다르게 동양미술을 선택해 진행하던 고교과정에서 그 뜨건 고3 수시 기간 중에 돌연 전공을 인문학으로 바꾸어 차악의 선택을 향했다. 저 스스로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기에 타인의 시선을 벗어던지고 원하는 학문의 길로 여행을 찾아가는 시간들에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결코 늦지않은 오히려 적절한 시기, 그러나 타자의 시선에선 결코 현명하지 못한 둘째의 <선언>은 한 인간으로서 성장한 모습이었기에 그동안의 시간들을 뒤돌아 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일이. 그렇게 해서 얻을 명문대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외면하고, 그녀에게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고통이었음을 생각하면 미리부터 짐짓 건넨 진로에 대한 방향 모색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만 그녀가 그 길로 나아갈 때 온전하게 스스로를 느끼지 못한다면 대학 4년 내내 스스로 고통과 우울, 외로움과의 지난한 투쟁으로 패배의 감정을 만나기도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까지도 경험한 후에야 그녀는 진정한 스스로의 얼굴을 만들어 낼테지만 말이다.

이런 우려함도 이제는 치루어 내어, 둘째는 대학 입학 후 반학기를 다니고, 2년 휴학의 시간을 치루어 내더니 자신의 재능을 재발견하고 복학을 했다. 그녀는 지금 한 학기 중 얻을 수 있는 학점을 취득하기 보단 스스로채우지 못한 시간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란 것은 늘 내 가까이에 있었고, 이 저속한 사회가 끼친 영향력에서 자유롭기만 하다면, 매일이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리라. 또래들보다 2년이 뒤늦었다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를 인정했기에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스스로를 만나며 작은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며 살아질 것이다. 내가 누리는 이만큼의 풍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시간이 빠를수록 살아있는 동안 느낄 수 있는 행복한 마음은 일상을 채워 줄 것이다. 그 시간들로 이루어질 많은 감동들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라 내가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에 있건 학교 밖에 있건, 공간의 의미는 우리의 영혼을 방해하지 않는다. 내가 놓인 이 사회가 나의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주된 원인일 뿐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만이 필요하다. 이것이 늘 나에게로 던지는 물음이었고, 이렇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내 주변과 나눌 수 있는 이 마음이면 되었다고, 마음만 부자인 내게 늘 다독여왔다. 둘째의 분투가 통하여지기를 응원하면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말했다. 탐욕을 버리고 나를 통한 너를 인식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간들이 계속 열려질 수 있기만을, 간절하게 열망하는 내 안의 힘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기만을, 한 개인의 용기있는 선택이 '딴지 걸기'라고 말이다.

세째는 학교를 버렸다. 의무교육을 마치기까지 진심으로 고마운 것은 별 사고없이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다. 아직도 내겐 숙제이다. 세째가 학교밖에서 제 방식으로 사회와 교류 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학교'의 의미를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적어도 어린 세대들에게 내 방식을 강요하거나 삶의 잘못된 모습들을 각인시키거나 하지는 않을 듯싶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학교'가 한 몫을 단단히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변화의 가능성은 늘 내게 달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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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media.daum.net 

삼성의 노조 탄압을 규탄하는 집회가 서울 서초동 삼성 본사 건물 앞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증인채택을 놓고 여야가 충돌해 3시간 동안 국감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가 세 시간 뒤에 속개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도대체 한국에서 ‘재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 본다. 자료들을 다시 찾아 보니 재벌의 출생은 민족자본 부재의 시대에 잉태되고 성장해 왔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즈음 이병철, 정주영 등 오늘날 재벌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태어났다. 1920년대에 회사령이 철폐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회사는 설립 되었다. 하지만 이 회사들은 1937년 일본의 중일전쟁 도발로 조선이 병참기지화되면서 일본 독점자본이 대거 몰려오고, ‘중요산업통제법’이 실시되자 몰락해 갔다.

다시 말하면 해방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친일·부일을 통해 일제 독점자본의 하위파트너로 기생했을 뿐이다. 8.15 해방과 함께 친일·부일에 자유롭지 못한 거부들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튼튼한 정치적 동아줄을 잡고자 움직였고 정경유착의 시대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레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튼튼한 동아줄을 잡은 이들은 독점과 특혜로 어떤 정부이던 그들과의 유착에서 성장한 것이라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 물론 재벌은 196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지만, 1950년대에 이미 그 단초가 시작되었다. 독점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실수요가제 공급, 원조물자의 할당 및 판매와 관련된 상업, 안정적인 자금 공급처 역할을 하는 금융업이 자본계열화하여 하나의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 이병철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재벌의 역사는 계속 되었고 급속한 재벌의 성장은 곧 가혹한 노동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대자본가들의 저급한 생산력의 기초를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보완했고 노동임금은 노동량에 비추어 터무니 없었으니까 말이다. 1960년대에도 노동자들은 기아임금에 허덕였고, 그 시기에 청계광장에 홀로 있는 ‘전태일 열사’를 만들어 냈다. 1970년대는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항거한 ‘아름다운 청년’의 분신에도 나아진 것은 별로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 재벌 지배체제는 공고하게 확립되었고, 높은 생산성은 여전히 저임금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재벌기업 노동자들은 노동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재벌기업들은 비정규직 노동력을 활용해 고용의 유연성을 확대하고 신기술을 도입해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자 했는데, 1997년 경제 위기는 이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즉 재벌 중심으로 성장해 온 우리나라 경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인 것이다. 주기적 공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는 부분도 있지만 재벌기업의 고부채 구조와 금융자유화 요구가 큰 요인이었던 것이다. IMF의 구제금융으로 위기를 수습해야 했던 만큼 한국경제는 IMF의 신자유주의 요구에 따라 재편되어 갔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정리해고제를 도입하여 대량 실업을 초래했다.


[출처] http://imgv.search.daum.net/ 뉴시스

사회운동단체들이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여성 노동자의 권리 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 단체는 요구안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취임 이후 첫 세계여성의 날이라 의미가 각별하다"며 "여성노동자의 가치를

인정하고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촉구했다. (참으로 각별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노동의 역사가 현재에까지 이르렀다는 것, 최소한의 변화에 시선 맞추기를 거론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국가의 성장 속에서 더욱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를 보면서 보다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경제는 왜 성장해야 하고, 성장을 했다면 우리는 왜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인가. 노동자가 더 많은 나라, 국가의 성장에 더 많은 희생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왜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피켓을 들며 광장에서 삶의 현장들에서 목소리를 내고 결연하게 주먹을 쥐어야 하는 것인가.

노동현장에는 더 이상 취재를 하는 기자들을 찾아 보기 힘들어졌다는어느 사진가의 인터뷰를 듣고 우리의 시선은 무엇을 향해 맞추고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했다. 재벌들이 부리는 끝없는 욕망의 기차에 편승하는 이들의 탐욕은 이제 야만스럽기까지 하다. 한정된 자원과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노동의 가치는 저하될 수 없는 고귀함이어야 한다. 특히나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노동 없는 임금이 가능한 것인지 정부에게 묻는다.

직업의 다양성만큼이나 노동의 모습은 다르다. 그 다름의 노동에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과학의 진보와 함께 문명의 이기가 노동의 종말을 가져올 수 없듯이 노동이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핍박한 사회에서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노동자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면 한 국가의 장래는 요원하다. 노동현장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을 외면하고 있는 재벌과 그에 동조하는 정부는 노동자의 임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리인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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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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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은 교사의 기본적 권익 옹호, 민주교육 발전에의 기여, 참교육 실현을 목적으로 내걸고 있다. 주요 활동으로는 교사들의 근무조건 개선 및 조직 강화에 관한 활동, 교육환경 및 교육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 교육의 민주화와 자주성 확립을 위한 활동, 노동3권의 완전보장 등 교육관계법의 개정을 위한 활동, 참교육 실천 활동 등을 설정하고 있다. 결성 당시 정부는 전교조를 현행법을 위반한 불법단체로 규정해 교원조합의 결성을 무효화하고 관련교사를 구속·파면·해임 조치했다. 이 때문에 전교조는 본래의 목적과 관련된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한 정치활동에 주력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전교조는 1999년 국민정부시절 합법화 되었다.


고용노동부는 23일 전교조에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있는 규약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면서, 내달 23일까지 시정하지 않을 경우 노조설립을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인들은 제쳐놓고라도 학생들은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실체에 대한 인식조차 할 수 없다.‘전교조’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는 학생들이 더 많은 이 사회가 그것을 말해 준다. 네이버 ‘지식in’에 ‘전교조’를 써 넣으면 계속되는 질문들이 보인다. 교육의 현장에서 교육의 주체들을 최일선에서 마주하는 교사들의 인권과 민주 교육을 위한 노동조합으로 인식하고 있는 학생들은 전무할 정도이다. 우리는 왜 다수의 예비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보다 많은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안들에 대해서 이리도 무지할까.


[출처] http://media.daum.net


우리나라 국민들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불편하다고 불평을 하고 노동조합을 ‘집단이기주의’라고 비난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려고 애쓴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봉건 해체 과정에서 시민 계급이 형성되고, 이들이 자본을 축적하여 물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자본주의로 진행하여 시민적 권리 의식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쌓여 왔다. 노동자의 파업을 비난하지 말아야 결국 노동자인 나 자신, 우리의 권리도 지켜진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이런 현실은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식민 시대를 경험하고, 곧바로 자본주의로 편입되면서 그런 소중한 경험을 축적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또한 선진국에서 보편화 되어 있는 노동교육으로 노동법, 노동 운동, 노동조합 등을 외면한 채 교육을 통한 시민 권리 의식을 갖추기 위한 미래 세대를 위한 노력도 기회도 저버렸다. 대부분의 학생이 장차 노동자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학생인 아이들에게 ‘노동자’라는 말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이 받게 될 최저 임금을 최고 임금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이러한 무지에서 오는 시선들이 노동 운동에 대한 비뚤어진 의식을 갖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노동조합에 대해서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매스컴의 정보 전달이나 간접적인 사회 경험 등을 통해 오히려 노동조합은 뭔가 대단히 불순하거나 불온한 단체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의식을 그렇게 조율해온 음모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온 국민들은 ‘반조폭 정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반노동조합 정서’를 갖고 있다. ‘반정서’야 어디 이 것 뿐인가. 최근에는 국가 안보를 내세워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과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파렴치한 일들을 국가기관이 나서서 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진보'를 바라보는 편향된 '반정서'를 확대하여 급기야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도록 조장하고 있다. 


[취재파일] 이석기 내란음모 기소가 남긴 것들, 그리고 지켜볼 것들 관련 이미지

[출처] http://news.sbs.co.kr/


정보화 사회가 진행될수록 전문 직종, 고학력, 비생산직의 계층은 그 사회적 지위가 예전에 비해 더욱 상향되고 사회적 분포도는 더욱 넓어졌다. 다만, 그러한 계층 구성원의 가치관은 개인주의화되고 파편화되어 조직, 집단, 단체 등 공동체 개념을 거부한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는 노동 없이 살아갈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현존재의 생존과 직결되기에 누구도 ‘노동자가 아닐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수의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이 힘을 합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 그 역할을 해야 하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노동자들이 외면하도록 정부가 앞장선다는 것이다.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있는 규약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의도하고 있다는 이해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결국 해직된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이 외면하도록 합법화하여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 3권을 무력하게 만들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계급이 있고,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이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방향이 우리가 지향하는 역사의 진보인 것이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


[출처] http://www.jeonmin.co.kr


노동조합이 없다면 이 세상은 소수의 특권을 누리는 세력들만의 이해가 무자비하게 관철되는 심각한 불평등구조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특히나 전교조와 같은 노동조합은 다른 노동조합에 힘을 실어주는 그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나라의 미래 세대들을 위한 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해, 자신들이 소속돼 있는 교육계의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가장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전교조라는 공동체의 힘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지켜내야 한다. 전교조를 포함한 모든 노동조합은 지금까지 지난한 역사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사회의 특권세력이 노동조합을 혐오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가장 확실한 표적이 되고 있다. 이에 나는 전교조를 적극 지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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