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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Overdye*~ 2015. 9. 23. 13:24

 

2015년 이준익 감독의 <사도>

 

 

부자 간의 갈등을 바라본 감독의 시선처럼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 다양할 수 있을 것 같다. 함께 간 젊은 친구와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숙소로 돌아왔다. 생각이 많았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살아온 시간이 다르기에 느끼는 사회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차이가 전제겠지만 말이지.

 

분명한 것만 짚고 가자.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았다라고 말하면 된다. 나이 든 사람들이 잘 못 하는 건지 않은 건지 아무튼 사과하는 거 드물더라. 그리고 어찌하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지.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탁상공론일 뿐이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말뿐인 사회에서 또 말로 지적하게 되는 거고. 성질 급한 사람이 먼저 블라블라~~~~

 

갈등의 해결은 대화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대화 자체가 어려울 경우가 더 많곤 하지.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입 다물고 사는 경우는 적어도 한 두 번은 대화를 시도했다는 의미이겠지. 쉽게 말하면 갈등은 외면하는 게 편하니까. 이럴 땐 개인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끝까지 버티며 자신을 관철하는 모습의 사도 세자와 타협하는 것과 다르긴 다르지. 나를 지키려면 죽어야 하고 살리려면 타협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기도 하니까.

 

주말에 영화를 보고 다시 시작한 월요일의 SNS에 보이는 갈등중 조선일보의 김광일 논설위원의 칼럼과 그에 응하는 미디어스의 강민하 기자의 글을 읽는다. 조선일보라는 점만으로도 안 읽는 나는 화가 날 이유도 없는데 말이지. 아직도 그 조선일보의 글을 안 읽었다 뭐. 그것에 반박하는 글은 그 칼럼을 읽지 않아도 화가 날만도 하군 정도. 내 머리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연상되더라.

 

그리고 경향신문 고종석의 칼럼과 그 글에 대한 반응들.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단상. 개인적으로 닮고 싶은 글이지만 너무 감당 안 되는 나는 요 정도에서 허덕거리기에 그의 글에 대해서는 그저 느낌만으로도 충분했다. “남자 여자 또 다른 무엇의 구분 없이 모두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건가~” 정도의 글쓴이 마음이 전해지던데. 내가 보게 된 글들이야 갈등의 극히 한 부분이지만 이 두 가지에는 당면한 한국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놓친 마음의 실종 상태, 나와 당신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사도>에서 세자가 칼을 내려놓아야 했던 순간, 잊고 있었든지 아니면 그리워하든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했을 테니. 가족 공동체에서도 개인의 욕망은 가족 간 갈등의 시작이 아니던가. 다만 누가 얼마만큼 자신의 욕망보다 가족의 화합에 더 힘을 보탤 수 있을까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아니던가.

 

그의 지위가 무슨 상관일까. 과거 왕의 자리이건 백성의 자리이건 사람이 있는 곳에 갈등은 곧 삶이니까. 갈등 없이 지나는 삶도 그리 좋을 것은 없지 않나 싶은 거지. 갈등을 풀어가려는 나의 움직임에서 뜻밖의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같다.

 

모든 갈등에는 그에 담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생각해 볼 시간은 필요했던 것 같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과 갈등의 대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국가와 개인 간의 갈등에는 시스템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인데 사회구조와 관료제라는 시스템이 만든 악. 생각이 없어진 광기의 군중처럼 역사는 현재에 다다른 것일까.

 

세대 간의 갈등. 그것을 풀기 위한 노력이 삶이 아닐지. 개인에 머물 수만은 없는 갈등은 시스템이 주체가 되었을 때 이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역사의 단죄와 성찰이 개인에 머물 수 없는 이유는 사회윤리의 자율성이 사라지기 때문이겠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그럴싸한 자기 합리화로 세상의 일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거나 갈등하지 않으려는 것, 회피이거나 외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있어야 당신도 있는 것이니 나를 지키는 일이 우선일 것이고 그 사이의 갈등은 나를 위한 해결이 우선되고는 하지. 하지만 여기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가는 것은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관에 따라 다른 해결 방법을 모색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이 아닐까.

 

하늘이 할 수 없는 조율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에 약간의 사랑을 담아보자.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벅차더라. 이 나라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하마. 열렬하게. 내가 이 나라에 사랑을 퍼붓기 시작하면 갈등을 풀어나갈 무언가를 위한 개인적인 움직임이 시작되겠지. 당신을 사랑하기로 했다면 당신을 위한 나의 몸짓은 지금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달라지겠지. 

 

이번 한가위 보름달에 소원을 살포시 전하는 마음을 다시 가지면 조금 나아지려나. 차가운 이성 앞에 따뜻한 감성이 먼저라면 나도 꼰대 소리 들으려나. 영화 <사도>에서 정조로 분한 소지섭이 너무 짧게 나온 것이 못내 아쉽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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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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