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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오른쪽) 파리고등사범학교 명예교수와 홍세화 <말과 활> /한겨레

 

2년 전 가을,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경희대와 '지젝 바디우 네트워크'의 주최로 열리는 '멈춰라 생각하라-공통적인 것과 무위의 공동체를 위한 철학축제' 참석을 위해 한국을 첫 방문 했다. 지금 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물음 끝에 바디우는 보다 근원적인 곳으로 시선 돌리기를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까지 내 나라가 치닫고 있는 현실, 현 정부의 행태는 과거 독재에 저항하여 스러져간 목숨을 다시 요구하려는가 싶다

 

바디우가 그의 저서 투사를 위한 철학에서 말하는 것은 실제 아주 간단하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피곤한 삶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머리 아프다. 그런데 그 피곤함을 감내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길이란다. 그 길을 포기하면, 그저 우리는 '먹고사는' 데만 신경 쓰는 '인간-동물'에 머물 뿐이라고 말한다.

 

현대를 '이념'이 사라진 시대라고들 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극단적인 역사의 장을 넘기며 인류는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지구촌'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허나 이 지구촌이라는 말은 교과서적인 말로 사용될 뿐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은 여전히 동과 서, 남과 북이라는 긴장감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아니다. 정부는 오히려 이념을 들먹이며 래드 콤플렉스를 조장하고 있다. 국민을 마음놓고 우롱하는 5년짜리 정부를 보라.

 

남쪽에서는 '세계화'에 북쪽에서는 '주체화'에 갇혀 서로 평행선 위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한반도 이 공간에 두 원칙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과연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다. 극단적인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는 쉽다. 상생을 위한 길을 모색해 내기가, 새로운 이념(사상)을 만들어 내기가 벅찰 뿐이다. 달콤한 자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신자유주의에 심하게 매료되어 온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분명히 '세계화'의 철학인 '신자유주의'는 부자들에게는 조세 감면, 환경 보호 정책의 후퇴, 교육과 복지 정책의 포기를, 세계적 차원에서는 '부익부 빈익빈'만을 낳은, 인간적 모습마저 잃은 이 세계의 야만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새로운 실천을 요구할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게 바디우의 '투사(鬪士)'는 자본주의의 어두움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치의 조건들'을 사유하는 주체의 개인을 위한 의미로 다가왔다. 

 

민주주의, 정치, 철학이라는 세 항 사이에는 무언가 역설적인 관계가 있는데 바디우는 민주주의에서 철학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은 누구에게나 '주장'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를 미리 선택해 놓지 않는다. 한 사안에 대해 말하거나 사유하는 사람의 사회적, 문화적 또는 정치적 지위에 완전히 무관심하기에 철학은 민주주의의가 작동되는 다수에 의한 결정 방식이라 할 수가 없다.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에서 만화계의 계약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중, 머리가 없고 가슴만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너님, 후대에겐 병신인 거에요!” 격한 말이 두 해가 지났음에도 생생하다. 그와 반대로 머리만 있는 이들이 만든 사회구조를 면밀히 생각해 보았다면? 가슴은 쓰레기통에 처박고 머리만 있는 인간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용하여 '자유''평등'을 내걸며 저들에게로 치우친 사회제도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게 하고 평등은 원래 그런 거거든 하며, 우민화 시켜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야기이다.

 

철학은 머리와 가슴이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데 필요한 사유이다. 이제 본질적인 구조의 변화를 위한 투쟁은 연대의 행동만으로는 역부족하다는 것을 이미 우린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시간에서 바라보자면 '혁명'또한 현재를 변화하게 하려는 데 급급한 조급증의 결과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에도 혁명으로 피어난 4.196월의 민주항쟁이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현재는 쓰레기 같은 권력이 낯뜨겁게 날뛰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은 ''로 부터 시작된다. 현실의 움직임을 알아가고, 온전하게 삶을 향유한다는 것에 대해서. 비주체로서 허위욕망과 그로인해 발생되는 내 안의 탐욕을 부추기는 이기주의를 털어낼 새로운 가치 지향이 필요한 거다. 한 철학자가 건네는 인간을 위한 정치가 되기 위한 투사가 되기 위한 철학이라는 선물을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다른 가능성, 다른 세상을 모색하는 ‘투사(鬪士)’가 필요하다

 

분명, 바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후세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걸자면 세대를 몇 번은 지나야 한다 해도 이제는 본질에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 내가 '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종()의 공멸을 막기 위한 한걸음의 의미가 될 것 같다. 바디우가 말하듯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사상)을 지닌 삶을 살아나야 한다. 전 인류를 위한 '새로운 사상''새로운 철학', 나와 당신에게서부터 마련되어야 한다.

 

비인간적인 것으로 얻어지는 풍요로운 요소 안에서 인간의 상징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상을 향해 기꺼이 투사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노예성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형상을 지켜내기 위한 철학이 민주주의, 정치와 공존하게 될 때,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이고, 정치는 비로소 권력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장()이 될 수 있다. 니체가 '최후의 인간'이라 불렀던 비극의 모습, 모든 형상을 잃은 창백한 형상으로 남은 인간이기를 결코 허용할 마음이 내게는 없는데 당신은 어떠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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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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