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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딩포레스터

Overdye*~ 2015. 6. 26. 10:24

사전적으로 ‘소수자’는 ‘적은 수의 사람’일 뿐이다. 허나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는 단지 그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다. 의미가 전복되는 경우는 넘친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 ‘소수자’라 하면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장애인, 성적소수자, 비혼모 등. 하지만 또 다른 소수자도 분명 있다. 청소년용으로 1등급, 분명 소수자이다. 대학생용으로 명문대, 직업별로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인 소수의 기득권자들까지. 그들도 분명 소수자이다. 그 다음은 너절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유추해 나갈 여지는 많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로 들어가 보기 위해 ‘소수자’로는 연관 검색어로 뜨지 않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를 통해 이어가려 한다.

 

 

▲ 2001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1. 과연 영화의 주인공은 소수자일까

 

2001년 개봉된 영화,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작품 <파인딩 포레스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소수자이다. 열여덟의 소년이 보여주는 농구와 문학적 재능, 은둔자로 살아가는 바로 50년 전 전설적인 데뷔소설을 발표한 후 모습을 감춰버린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

 

길거리 농구를 즐기는 고등학생 지멀 월러스와 그의 친구들은 동네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상한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호기심으로 지멀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하지만 뜻밖의 상황에 놓여져 가방을 놓고 나오고 그 집의 주인공 포레스터는 가방 속의 습작노트에서 평범함을 뛰어넘는 지멀의 수많은 글들을 발견한다.

 

다음 날 지멀은 그의 창문에 걸린 자신의 가방을 발견하지만 가방을 찾기 위해 아파트를 오르지는 못한다. 가방은 창 아래 길바닥으로 떨어지고 자신의 글들에 쓰여진 빨간색의 글씨를 발견하고 지멀은 포레스터를 다시 찾아가게 된다.

 

브롱스를 벗어나 스카우트되어 (지멀의 표현으로 콤마가 두 개인 상류층이 많은)사립고등학교의 농구 선수로 활약하게 되는 지멀은 그곳에서 낯선 자로 ‘소수자’이다. 이런 영화 속의 사회적 환경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게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실, 특목고와 자사고 등, 이미 고등학교에서 교육의 평등선은 사라졌다. 부모의 부(富)가 자식으로 대를 잇게 되는 ‘지배블록’이 굳건해 지고 있으니까. 최근에 언급되어 2014년에 개교를 앞둔 일명 ‘삼성고’라 불리는 자사고의 설립 과정과 개교에서 벌어질 기득권이라는 소수자가 누리는 시혜는 인권 침해라거나 생존 위협을 거론하는 ‘소수자’로서 만날 공포감은 결코 아니다.

 

지멀의 호기심으로 알게 된 은둔자 포레스터는 개인적인 상실의 아픔에서 스스로를 가두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저명한 작가로 그 또한 ‘소수자’이다. 그 둘의 만남은 서서히 진행되면서 때묻은 고전 서적들과 정적만이 가득했던 포레스터의 은둔지를 두 대의 타이프라이터의 소리와 웃음, 논쟁, 학문에의 열정으로 채워간다.

 

포레스터는 이 어린 소년을 따라 지난 40여 년 간 닫고 살아온 창 밖의 세상과 조금씩 조우하게 된다. 그 후 지멀은 포레스터에게 문학을 배우고 교감을 나누고, 포레스터는 지멀 덕분에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다.

 

 

▲ 지멀의 글쓰기를 위한 조언을 하는 포레스터

2. 소수자의 분류 기준은

 

이 영화에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답습되고 있는 많은 관습적 사고를 만났다. 소수자로 주류가 되는 인생들과 소수자이기에 비주류로 분류되는 삶은 어떤 기준이 있기에 가능하게 인식되어 왔던가에 주목하게 되었다.

 

주류와 비주류의 분류마저도 언제, 누가, 왜, 만들어 놓은 것인 지 출처는 분명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별 거부감 없이 사용되는 주입된 언어들로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위 1%의 부자들에게, 또는 1등급을 맞은 학생들에게 결코, 소수자라고 명명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다수에게 부정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소수자이기에 받아야 하는 부당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희생을 해야만 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빈번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의 소외는 공동체의 해체에 의해 야기되어 왔다. 기본 단위의 가족에서부터 친구, 직장, 학교 등의 공동체에서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음을 선택하고, 일상의 고통은 불편한 진실이 되어 암묵 속에 놓여져 있다.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지는 사회, 알 수 없는 공포에 자기를 추스르기 힘든 이 곳에서 나는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 참여연대,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공약파기 규탄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대선 당시 공약이 상당수 파기되거나 퇴행하고 있다며 애초 약속대로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뉴스1

3. 영화 속 인물과 대화

 

영화에서 포레스터는 지멀에게 묻고 답한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거지. 우린 이해가 안 되면 가정(假定)을 하게 된단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 개인이 놓인 사회적 환경에 의해 그를 판단해 버리는 오류를 아주 쉽게 저지른다. 오류의 면역력에 의해 진행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적 자아에 길들여지게 하고, 관계를 맺게 하여 그것만이 성공적인 삶인 것처럼 꾸며낸다는 것이다. 개인적 자아는 실종되어 ‘내가 누구지?’ 라는 끝없는 질문을 허공에 되뇌일 뿐.

 

더 이상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 자각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거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소수자는 구분되어 지는데 합리적 이성을 강조한 ‘공리’와 ‘편견’이 근거로 자리 잡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하게 만들어 왔다.

 

브롱스라는 지역의 나쁜 환경에 놓인 소년의 문학적 재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선생은 결국 지멀의 글에 문제 제기(포레스터의 글 제목을 도입으로 쓴 것)를 하고 지멀은 글의 출처에 대한 해명을 요구 받는다. 즉 스스로 쓴 글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려 한다.

 

▲ 지멀의 문학적 재능을 시기하며 문제 제기를 하는 문학선생 크로포드

“자네에게 제안을 하겠네. 이젠 모든 걸 잊고 내년에는 학업계획이 좀 느슨하게 짜여질 거 야. 자네가 할 일은 이번 토너먼트에서 승리를 안겨다 주는 거지. 그것만 해 내면 내가 알 아서 하마.”

포레스터의 글을 인용한 것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없는 지멀이 마지막 농구시합에서 우승하는 것만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시합이 종료될 시간에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자유투를 얻은 지멀은(의도적인 듯) 실수로 득점을 하지 못했다.

지멀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위해 그들이 원하는 승리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인생에서 마주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은 행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지멀은 자신의 성공보다는 ‘우정’을 선택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킴으로

포레스터가 세상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친애의 힘이다. 그런 지멀을 돕기 위해 학교로 나온 포레스터는 지멀이 그에게 건넨 글을 읽는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친구를 돕기 위한 포레스터의 선택이었다.

“가족을 잃게 되면 가족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됩니다. 피를 나눈 가족만을 의미하는 게 아 니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말하기도 하죠.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면 그들에게 품었던 소망...마지막으로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라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소수자의 친애가, 우정이 거둔 승리는 타자들에게 전해질 진심으로 충분히 감동적이다. 나도 지멀의 글을 들으며 친애하는 ‘나의 지멀’에게 전하고 싶다.

“너를 잃고 나서 후회의 마음에 시달리기 보다는 너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킬 수 있어 야 한다는 거. 너를 지켜줄 수 있음으로 나도 살아날 수 있다는 거. 그렇기에 너는 내가 부를 이름으로 온전한 ‘너’로 있으면 되었다.”

▲ 포레스터와의 친애를 선택한 소년 지멀

4. 소수자인 나와 너의 세계

다수에 속하지 않는 의미로 일반화 될 수 없는 이들을 내 나름대로 소수자라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분명 소수자인 거 맞다. 나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기에 소수자로서 이 사회에서 제도와 무지와 편견으로 요구하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히 거부한다. 그래서 나는 함께 나누고 싶은 너의 희생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상황에 놓인 부분의 이해는 가능하겠지만. 그 부분으로 한 개인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보기에 ‘느껴주기’로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대신할 수 있었다고. 그 느낌을 나눌 수 있는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친애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영화 속에서 지멀과 포레스터의 교감이 ‘우정’이라는 친애의 사랑을 쌓을 수 있게 해 주었고, 각자 스스로의 삶에 당당하게 맞서 나아갈 힘을 서로에게 준 것처럼.

▲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시작, 포레스터의 화려한 외출

인간의 다양성에서 시작되는 삶의 모습들, 또한 사회의 각 분야에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분되어, 늘 소수자로서 받아야 하는 부당함들이 있다. 그것들은 ‘나’에게서 시작될 수 있었고 ‘너’로 하여 이어지기도 한다.

소수자라는 ‘구분’이 사라질 때 우린 비로소 ‘인간’으로서 대등해 질 수 있을 거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는 나이기도, 또 너이기도 하기에.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나기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분명 적어질 것이다.

중증 장애인의 1인 시위, 세대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자살이 넘치는 사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어린이들이 많은 사회, 기계와 벗삼아 놀아야 하는 청소년, 철탑 위로 올라간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너가 같은 성(性)이라는 이유로 모멸의 대상이 되는 사회, 너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넬 수 없는 내가 있다.

▲ 지멀을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온 포레스터, 아름다운 우정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글이 훨씬 나을 수 있다는 포레스터의 말을 옮기면서 웃고 있다.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꿈을 꾸는 것을 잊지 않도록, 내게는 주인공 포레스터와 그의 친구 지멀처럼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에 꿈을 꾸고 있는 친애하는 ‘너’가 있다는 것이기에.

그래서 나의 세계는 이렇게 작동될 수 있는 것이라고.

‘협동조합’이라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확산된 여러 현상들을 도처에서 발견한다. 내 주변을 돌아 보며 나와 교감할 수 있는 너를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어쩌면 내 옆에서 웃고 있는 너가 있었음을 발견해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을 기웃거리며 함께 공감하는 우리는 소수자이다. 이 사회의 구분에 의해 명명된 소수자들이 자유롭게 소리낼 수 있는 사회는 개인의 시작에서 가능하다. 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되돌아 보며 내 옆에 있는 너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을지라도 너가 함께이면 가능하지. 그렇다고 해 주시라.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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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서, 돌봄의 배를 띄우자

 

세월호 참사 1년이다. 이 글은 지난 해 세월호 참사를 겪고 한겨레출판사가 기획한 <한국 사회의 길을 묻다>에 기고해 실린 글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가족들은 물론 국민을 기만하고 있는 뻔뻔한 정부가 더 강고하게 있을 뿐이다.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의 도덕적 해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묻는다.

 

 

 

 

 

넋 빠진 대한민국이다. 홀로코스트는 계속 되고 있었다. 국가의 야만에 의해 파괴되어야 했던 소중한 목숨들이 바람처럼 불어오는 계절이다. 숱한 넋이 광장에서 내게로 달겨드는 오월을 지나 유월의 햇살이 너무 따갑다는 느낌으로 길을 걷는다. 내가 느끼는 세계와 거리에서 만나지는 일상의 모습은 혼란스럽다. 정오를 지난 시간에 하는 외출이 참으로 불편하다. 낯설게 존재의 위기감이 거친 숨과 함께 내부에서 스멀거리기 시작한 거다. 노동자들의 죽음, 세월호참사, 밀양사태, 정부의 인사참극, 전교조의 투쟁, 아무렇지 않게 또 7월이 열린다.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다시 빙 두리번거리며 겨우 도착한 그곳은 그 지역의 오래된 책방이었다. 그 책방 역시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채비를 하고 대형서점으로 변신 중이다. 책방의 이름은 옛 것이지만 이미 그 모습은 없다. 주변에는 이런 변신이 일상처럼 일어난다. 우리의 윤택한 삶은 사물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사물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나. 답답한 심정에 불러 세운 너마저 객기 넘치는 격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듯 술이나 한 잔 마시자며 날 더 아프게 한다.

 

도대체 이게 나라냐. 시궁창이지. 광화문 네거리에 늘어선 놈들을 봐.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더 나빠진 거겠지. 소용없어. 내가 광장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닐 때 늘 들었던 그 빨갱이라는 말을 이 나이 먹어도 집안 어른에게서 듣고 있거든. 희망 따위는 없어. 소용없다니까. 바라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힌다. 다 썩었어. 다 죽어야 돼. 나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 나이 먹은 인간들이 다 죽 으면 바뀔 거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 이 나라가 싫다.

 

내 기억 속에 너는 여전히 투사로 살아있는데 너는 자꾸 아니라고 한다. 술이나 퍼먹고 소리나 지르면 뭐하냐고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낸다. 너는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거였어. 청년시절 느끼는 사회에서 만나는 낯선 시선들을 지금도 마주해야 하는 고통에 화가 나는 거겠지. 조직의 존립을 위해 국가를 이용하는 패거리 정치, 각종 마피아들이 판을 치며 사람을 가라앉게 한 대한민국이다. 반세기 가까이를 뒷걸음질 치며 광장에서 사람들이 왜, 저항하고 있는 지 기억하면 돼.

 

정치는 나의 삶을 공동체와 더불어 향유할 수 있도록,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행위의 시스템이지. 나쁜 정부의 통치는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대의민주주의 시대에서 오로지 정치인들만이 정치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표에게 맡겨놓고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고대 아테네에 사는 노예와 다름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내게 화를 내는 대상이 많아지면 한국사회에 다른 가능성이 생길거야.

 

 

현재를 살아가는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할 책임감을 기억하고, 포기하지 말자고 토닥거렸지만 네 마음을 알 것 같다. 한국 사회에 국민은 있지만 시민은 없다. 국가는 사람이 없는 교육과 시장을 만들며 언론 장악으로 현실과 타협하게 해왔어. 시키는 대로 순응하며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배우게 만들었던 거야. 많은 신세대들이 자신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은 내가 누군가의 자식이고, 어딘가에 속해 있고, 어느 집단에서든 안전하면 된다는 거지. 자동적으로 학습되어 '?' 라는 말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나의 이해관계로 가장 편한 선택을 하는 것이 현실을 잘 살아가는 방법이란다.

 

이미지에 불과한 국가 정체성의 개념에 남아있는 나의 삶을 잃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역할은 있어도 주체의 존재감은 없어. 시민으로 존엄성과 의의를 찾아야 해. 내 나라, 나의 정원에 단 한 송이의 장미로 존재감을 뽐내고 싶다. 돌봄의 공동체에서 개별자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어야 한다. 현실을 초월하여 좀 더 고귀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체성, 자존감, 자부심이 중요한데 학벌사회에서 교육 과정을 무시한 채 존재감을 발휘할 방법은 흔하지 않잖아. 아이들은 학교를 거부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공교육의 위기는 공동체를 교묘하게 해체하는 결과를 빚어내어 왔다고 하면 지나친 걸까. 여기, 한국 사회에 교육은 없었다. 개인의 성공과 이해관계로 개인의 잠재력이나 상상력이 발휘될 가능성을 애초에 원천 봉쇄해 왔지. 아이들은 권위주의의 억압으로 자신의 몸 사리기 급급하고, 획일적으로 주입된 사회적 성공이란 허울 좋은 허위욕망으로 허덕거려야만 해. 비주체로 사는 것이 덜 두렵게 다가오기에 사육당하는 교육 환경에서 주체로서 철저히 배제의 대상일 뿐이었어. 그런 결과로 발생하는 일들이 사회에 넘쳐나고 있었지만 국가는 표면적 대응과 감추기, 책임 전가에 급급했지.

 

 

 

청소년의 자살과 학교 폭력, 인권의 부재에서 보여지는 권위의 추락에 사람은 없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너와 내가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은 동양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마음이었다. 이것이 서양과 다른 문화거든.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떨어져서도 잘 버티어나가는 사람보다는 함께 협력하려는 우리의 공동체 정서이지. ‘내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잖아. 강한 내가 약자인 너를 어깨동무하여 나아가는 것이 이 땅의 정서였다. 한국사회에도 우리만의 철학이 가능하다는 우리라는 시선을 찾아 가는 거지. '새로운 이념', '새로운 철학'이 나와 너에게서부터 마련되어 우리의 정서에 맞는 세상을 열어가야 해.

 

한국인의 기질 중에 가장 큰 특징은 '선함''강인함'이다. 절망적으로 학대 받지 않는 한, 늘 평화롭고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들로 고난의 역사를 보내 왔어. 착하고 순박하다가도 위험이 닥치면 무섭게 일어서는 용감한 사람들이기도 했지. 얼핏 바보 같지만 따뜻한 손을 옆 사람에게 내밀어 주는 좋은 사람들이 바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 수세기를 거쳐 이러한 문화적인 정체성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을 기억해 내야만 해. 우리 어머니들이 물려준 강인함은 한국인의 정체성에 근원이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돌봄의 공동체를 향한 우리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야.

 

2014년 대한민국은 사회적 약자들과 검은 바다 속에서 죽어간 영혼들의 원통함을 함께 가슴에 새기는 어머니들의 통곡들로 이어지고 있잖아. 가족에서 사회로 서로 돌봄의 공동체가 가능한, 인간적인 형상을 지켜내기 위한 철학이 내 안에서 꿈틀거려야 해. 민주주의가 삶과 공존하게 되어질 때,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이고, 정치는 비로소 권력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공론장이 될 거야. 친구야,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파괴된 인간성을 딛고 생물학적으로 견딜 수 있었던 기대는 삶의 의미를 기억하는 일이었어.

 

[416일의약속국민연대]를 소개하며 한국의 정서 돌봄의 공동체를 향한 당신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작은 행동이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기억하려 한다. 내가 치루고 있는 이 잔인한 사월의 봄이 다시 열리지 않아야만 한다.

 

 

 

416일의약속국민연대(약칭:4.16연대)는 가족이 시민, 단체와 함께 꾸린 4.16참사에 대응한 통합적 상설단체이다.

 

4.16세월호 참사의 실종자, 희생자, 생존자 가족의 하나같은 요구인 실종자 완전수습,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과 진상규명, 피해자에 대한 책임있는 지원이 이뤄지도록 하는 목표를 최우선적으로 두며, 나아가 4.16 참사 이후의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를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국민의 안전, 존엄과 권리, 인권이 보장되도록 하며 침몰한 대한민국의 최종책임을 묻고 그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도록 노력한다.

 

4.16연대는 단체 간의 임시 연대기구가 아닌 <시민회원 가입>을 기반으로 한 단일한 사회단체이며, 지역, 풀뿌리 간의 수평적 교류, 연결(네트워크)을 지향한다. 4.16이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기억과 행동이 흩어지지 않고 일상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회원가입제를 두고 회원단체로서 활동을 지향한다.

 

4.16연대는 무엇보다 가족과 통합적 운영을 통해 상설적인 논의집행을 원활히 하고, 또 시민회원을 기반으로 한 상설적 단체로서 일상적인 운동과 발 빠른 대응, 또 교류와 연결을 통한 빠른 소통과 정보공유를 펼쳐나가 4.16참사에 대응한 진실과 안전, 인양 실현을 최우선에서 해결해 나가도록 노력한다.

 

4.16연대는 새로운 시민운동으로서 다중심성 / 자발성 / 확장성 / 수평적 전국, 해외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출처] http://416act.net/intro_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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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아이들은 조금씩 드러나는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정보들을 구체적으로 접해가며 충격에서 분노로 질문을 던집니다. 엉뚱한 말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저는 걸어갈 때 고개를 숙이며 다녔거든요. 이제부터 길을 걸어가면서 고개를 바로 들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다니고 있어요.”

 

 

왜냐고 묻는 나의 물음에 나온 답은 참으로 서글펐습니다. 이것은 어떤 정서로 아이들에게 다가선 것일까요. 나쁜 사람을 향한 분노의 또 다른 마음의 변화일까요. 만약에 현상금이 걸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은 그만 두었습니다. 수사에 집중하기 보다는 여론몰이로 사실을 은폐하려는 수작인 것만 같아서 말이지요.

 

 

유병언 잡을려구요. 혹시 모르잖아요. 찾아보지 않는 지방의 한 작은 도시에서 돌아 다닐 지모르잖아요.”

 

현상금을 내걸어 눈길을 모으는 행태가 어째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간첩신고는 113’이 겹쳐집니다. 꽤 오랜 시간 나의 삶에 각인된 표어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간첩 하나 신고해서 잡으면 대박인생이 되는 거였습니다. 말만 바뀌었지 국가 차원에서 조장하는 대박인생은 다양합니다. 삶을 이런 한탕주의에 의존하게 하는 사회 분위기는 사람보다는 돈이 먼저인 현실에 충분한 근거로 보여집니다. 도대체 얼만큼의 돈으로 한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일까요.

 

지방에 살고 있는 십대의 청소년들은 광장으로 나가 함께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인터넷 뉴스로 접하는 대도시의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자신들이 작아만 져서 존재감도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 느낌들은 기성세대에게도 다가오는 끊임없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지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는 있다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6.4지방선거를 위한 투표참여와 제대로 된 정보들을 주변에 알릴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세월호참사로 겪는 트라우마는 우리들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막연하게 파고드는 죄의식, 구해주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죄의식들이 슬픔과 함께 떠날 줄을 모릅니다. 죄의식과 슬픔들에 혼자 빠져들면 더 큰 불행이 찾아들겠지요. 함께 이야기 하고 표출하고, 극복할 수 있는 내일을 향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겠지요. 여전히 책임이 등가로 여겨지도록 해서는 안 되겠지요.

 

자본이 중심이 되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해소시킬 수 있는 최선의 노력들에 함께 힘을 실어야하겠지요.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아도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보다 인간적인 삶의 가치들을, 그 이야기를 우리 사회에서 들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잠재력들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교육 환경과 자신의 빛으로 채워갈 다양한 색깔로 물들여진 시간들로 향유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양한 개인들이 저들만의 역할로 개별의 선을 추구한다면 우리 사회는 공동의 선으로 넘칠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때마침 트위터에 올라온 적절한 사진을 찾아 사용여부를 쪽지로 보냈지요. 그는 자로 [네티즌 수사대]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를 추적하는 네티즌 수사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민이 이슈공중으로 진보하는 거지요. 우리 사회가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작은 역할들이 정의를 세워갈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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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햇살이 너무 따갑다는 느낌으로 길을 걷습니다. 거리는 저들 나름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정오를 지난 시간에 하는 외출이 참으로 불편합니다. 내가 느끼는 세계와 거리에서 만나지는 세계는 너무 이질적입니다. 나는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자족의 풍요를 누리며 삽니다. 나의 풍요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으로 채워지지요. 크게 부족함을 못느끼며 살아갑니다. 이런 내게 낯설게도 존재의 위기감이 숨과 함께 내부에 차오릅니다. 늘 있었지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들이 나의 시선이 멈추기를 바라는 듯햇습니다.

 

 

 

▲ '삵 자연으로 돌아가다’ 서울동물원에서 태어난 멸종위기 2급 야생동물 '삵' 5마리가 21일 오후 경기도 안산 시화호 상류습지에서 자연으로 방사되고 있다. 2014.3.21/뉴스1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다시 빙 돌아서 겨우 도착한 그곳은 그 지역의 오래된 책방이었습니다. 그 책방 역시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채비를 하고 대형서점으로 변신 중이었습니다. 책방의 이름은 옛 것이지만 이미 그 모습은 없습니다. 내 주변에는 이런 변신이 일상처럼 일어납니다. 우리의 윤택한 삶은 사물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사물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책으로 가득찬 그 공간에서 이끌리는 시선이 멈춘 것, 내가 선택한 100쪽의 책 한 권입니다. '깊이에의 강요/파트리크 쥐스킨트'였습니다.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에 <깊이>가 무엇인지 구현하려다가 좌절하여 자살한 젊은 여류 화가의 이야기가 책의 내용 중에서 유독 시선을 끌었습니다. 소묘 화가로 재능있는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한 평론가의 비평을 신문에서 읽은 후,'깊이'라는 그 말의 의미를 찾다가 결국에는 자살을 하지요.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기에 그녀의 몸은 아주 멀리 날려가 전나무 숲에 떨어졌는데 즉사했습니다. 자살 사건. 한때 전도양양했고 미모도 뛰어난 그녀의 특이한 형태의 죽음은 대중지의 보도 가치에 따라 그간의 끔찍한 그녀의 삶이 드러났습니다.

 

깊이가 없다는 평론을 한 그는 이제, 그녀의 죽음을 평론합니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 번 충격적인 사건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녀의 끔찍한 삶은 그대의 상상력에 맡기려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시선이 말이 되어 어느 대상에 꽂힐 때,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한 국가의 수장이 한 말이 비수처럼 꽂힙니다. 그런 5월은 이 땅에 황망하게 떠도는 숱한 영혼들의 말들로 찾아옵니다.

 

국가의 야만에 의해 파괴되어야 했던 소중한 목숨들이 바람처럼 불어오는 달이기도 하지요. 5.16 군사쿠데타와 5.18 민주항쟁으로 스러져간 넋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보 대통령의 영혼이 광장에서 내 가슴을 향해 그리움을 담은 바람으로 넘치는 달입니다. 오늘의 광장에 더해진 세월호의 맑은 영혼들까지, 이 5월은 그렇게 우리들을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서게 하고 있습니다. 심리분석가 마거릿 말러가 첨단 기업들의 관행으로 ‘존재론적 불안정’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 전문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존재론적 불안정은 재앙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특정 상황에서 이렇다 할 개인적 이유 없이 걱정에 빠져든다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기업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유화된 국가는 국민을 이용해서 이윤을 추구하려 합니다. 재난을 이용해서 이윤을 취하려는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이윤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금수(禽獸)일 뿐입니다. 이것이 저들이 말하는 창조경제일지요.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할 주체인 정부는 희생의 시스템을 가동하는 허언들로 넘칩니다. 국가의 존재,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정치와 경제를 공간적으로 갈라놓은 고대 아테네인들은 민주주의의 미래를 예견한 듯합니다. 사람들이 돈벌이에 신경 쓰다보면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는 고전적인 명제를 생각하도록 하고 있네요. 플라톤이 국가는 경제에서 요구하는 필요와 탐욕이 아닌 정의에 근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현대 국가와 국민들이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유착되어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은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여전합니다. 정치도 소비의 한 형태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라면 소비자인 나는 단호하게 금수정부를 거부 하겠습니다. 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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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거들이 대표팀 합류. 축구대표팀 손흥민(왼쪽부터), 구자철, 지동원, 홍정호가 13일 오후 경기도 파주 NFC(대표팀 트레이닝센터)로 들어오고 있다. 2014.5.13/뉴스1

 

 

“엄마, 제발 노란 리본 달고 어디 가지 마세요." 아침 일찍 날아온 문자였다.

 

"기사 뜬 거 보세요. 난 수업 들어 가요."
'노란 리본'을 검색하니 줄줄이 튀어나오는 기사들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이래?

< "노란 리본 단 시민 차단” 경찰 시위지침 드러나
警 “불법시위자 될 가능성이 있다고 차단을 지시”.. 직권남용 논란>

 

대한민국이 갑자기 미래로 이동한 건가. 갑자기 스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의 한 장면들이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2054년의 워싱턴이 배경이다. 미래의 범죄를 예측하는 세 명의 예지자와 범죄를 예방하는 '프리크라임' 시스템에 의해 6년 동안 범죄가 발생하지 않은 평화로운 도시이다. 그곳은 자동운전 장치에 의해 교통난이 해소되고, 투명액정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접하며 동공인식장치가 신분을 확인하는 최첨단의 사회이기도 하다. 평온해 보이는 도시의 풍경, 그 이면을 보지 않으면 마치 인류가 꿈꾸던 유토피아같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과연 과학기술 혹은 인간의 예지능력은 인간의 의식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설사 미래에 일어날 일을 현재에 미리 가늠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해도, 현재 잘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범죄자 취급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또한 인간의 미래는 확정된 것이 없기에 살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수정, 보완되기도 하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이 지닌 의지의 중요성을 말한다. 내 의지로 개인의 선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미래는 현재에서 비롯되어 연결되는 시간의 흐름인데, 내 행동의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이는 그나마 자신밖에 더 있겠나 싶다. 그런데 <경향신문>에 따르면 경찰청 관계자는 “당시 정권 퇴진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동향이 있어 노란 리본을 단 사람 등은 불법시위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 차단하라는 지침을 서울지방경찰청이 자체적으로 내렸다”고 밝혔다고 한다. 정당성 없는 정부의 정치적 공상이 이제는 이 사회의 아픔을 나누고 책임을 촉구하는데 동참한 시민들을 SF에서 가능한 시간여행까지 가능하게 하려는 것인가도 싶었다.

 

우리 사회에서 불온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인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가능성만으로 나의 행동을 차단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책임을 져야 마땅할 이들이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권력의 남용 문제가 극단적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세월호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는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권이다.

 

그간 내 생각을 글로 드러내고 있는 내게 불쑥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아이들의 불안해 하는 모습들이 안쓰럽다. 이런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늘 망설여진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인데 아이들을 오히려 불안에 떨게 만든다.

 

통제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권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암묵적인 승인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음을, 내 문제로 생각해 보기를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현실에 대한 냉소, 무관심, 거리두기만으로는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20대는 여전히 지금 내 아이들의 시간대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능력을 발휘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위들이 지속되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삶이 그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통감하면서 직시하고 있다.

 

십대들과 지내는 나의 세상은 늘 나만을 위한 세상으로 펼쳐있다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아이들과 나누는 이 모든 시간들이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이만큼이면 되는 세상인 것을,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이런 공동체라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작은 기쁨들은 그리 큰 자산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 싶다.

 

세상의 몰염치한 인간층으로 전락한 권력의 부역자들이 불온한 세력들이다. 내 삶에 행복한 순간들은 내가 숨쉬는 이 사회의 맑고 자유로운 공기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공평한 단 하나, '일인일표'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말로, 노란 리본 단 개인들의 저항을 전하지만 이 오월의 변함없는 햇살은 아직도 마음을 아프게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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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어린이날은 범국민적인 세월호 침몰사고 애도 분위기 속에 각 지자체와 기관 및 기업들이 일부 행사를 취소하거나 축소하는 등 차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2014.5.5/뉴스1

 

새천년이 밝아 오던 그 때, 2001년 나의 세계를 벗어나 처음으로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미 두 해 전부터 홀로 시작한 독서문화운동은 내 아이들을 위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남편의 후원에 힘입어 새 집을 지을 때 마을도서관을 만들고 주변의 아이들과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지요. 그렇게 행복했던 나의 세계는 시대적인 흐름에 힘입어 자연스레 지역사회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에게 건강한 사회를 물려주기 위한 최선의 노력만이 어른들의 역할입니다.

 

책읽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열린 교육을 부르짖던 8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던 그 해부터 책읽기를 위한 작은 운동에 공감한 엄마들이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일인 듯해도 이 운동에 동참한 엄마들은 많았습니다. 물론 저 역시 지금까지 텔레비전을 보지 않습니다. 필요한 정보는 인터넷을 이용하고 좋은 TV프로그램은 찾아서 봅니다. 십 여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레 이 운동의 확산을 더욱 열심히 왜, 하지 못했던가 하는 마음이 요즘 저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개인적인 욕심에 빠졌던 거지요.

 

우리의 교육 환경은 사회적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 환경이 우리의 아이들 뿐만아니라 국민 전체를 병들게 하는데 근원이 되고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국민TV조합원 중 한 분의 트윗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리트윗을 하고는 바로 이 글을 씁니다. 미디어로 열어가는 이 시대에서 우린 미디어를 이용하는 주체인지를 고민해 보고, 미디어에 지배당하고 있는 대상은 아닌 지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분명 TV없는 세상은 가능합니다.

 

 

노란리본의 마음에 한 발 다가서기는 텔레비전 안 보기 운동과 시청료 거부운동, 시민불복종으로!!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 조합원@julia_kbs 수신료 인상과 동시에 TV를 없애 버리겠음 아이들 교육에도 정보 습득에도 아무 도움 안되는 국민 세뇌용 관제 방송 세월호 참사마저 정부 입맛대로 조작하는 방송을 누구 좋으라고 봐주냐 가짜 언론 불매운동 시작

   

텔레비전이 주는 오락성과 맞바꾸고 있는 단절된 가족문화를 들여다 봅니다. TV화면 앞에 눈길을 주고 내 가족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를 만난 때, 나와 너의 사이에 자리잡은 텔레비전은 주체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미디어가 결코 아닙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방송국들의 제작된 방영물들은 그들만의 이해관계, 또는 제작하는 이들만의 정서가 담긴 것들입니다. 예능프로그램만이 유일한오락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을 열망하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시간들에서 도망치듯, 영상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로 숨는 것입니다. 무조건 수용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텔레비전이 없는 시간에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느끼고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하루를 같이 보낼 그 저녁 시간에 얼굴을 마주하고 맛난 것들을 먹으며 책도 읽고, 수다도 떨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제작, 날조한 뉴스입니다. 뉴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해야 하는 것이지만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뉴스는 객관성과 공정성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꼭두각시들의 인형극처럼 대본에 의해 앵무새처럼 소리를 냅니다. 물론 기자도 없습니다. 저널리즘을 내세워 시청자를 바보로 만드는 못된 장사꾼들만이 있지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 정보는 주류 방송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번 세월호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병든 모습을 적나라하게 직면합니다. 내 삶을 유쾌하게 해 줄 감동이 있는 방송들이 부족한 것은 어쩌면 무심코 지나치는 우리들의 습관적인 행동들에 있지 않을까요.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텔레비전 앞에서 분노한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싶답니다. 시청료 거부운동부터 시작해서 텔레비전 안 보기 운동을 이제부터라도 함께 해 나갔으면 합니다. 이에 저는 시민불복종운동, 언론좀비 퇴출 운동을 제안합니다. "나의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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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krwu.nodong.net ‘철도분할’ 잊지말자! 12월 10일'


철도파업 이틀만에 코레일의 수서발KTX 운영 자회사 설립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고 철도노조는 밀실 날치기 결정이라며 즉각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철도노조는 이 안이 향후 민영화를 위한 수순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코레일 사측은 이번 파업을 '명백한 불법파업'으로 규정하고 첫날부터 강경 대응해왔다. ‘민영화 반대 파업’ 7일째인 15일까지 코레일은 8565명의 철도노조원들을 직위해제하고, 190여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현 상태의 국가는 우리 이전에 살았던 모든 세대의 발견, 발명, 개선, 숙달, 분발의 결과이다.’ 역사적 운명공동체인 국민의 국가를 강조한 독일의 경제 사상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누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공동유산으로 물려받은 진보 덕택이다. 공동 역사가 가져다준 선물은 사회 모든 구성원들에 의해 창출되어 왔고 풍요의 이면에는 각 분야의 개인들이 쏟아 부운 노동이 있다. 경제 주체의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나라에 미래는 암울하다.

경제 성장은 사회 전체에 누적된 지식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공동지식은 공공부문의 노력을 통해 창조되었고 정부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성장해 온 것이다. 공공지원이 없었다면 기업들의 성장은 가능하지 않았다. 기업만의 힘으로 자연 속에서 부를 창출한 것이 아니며 사회는 전반적으로 경제적 성장에 주된 기여를 해왔던 것이다. 그만한 보수를 대가로 가져가야 한다. 기업의 사회 환원은 사회적 책임이며 정부는 그 재원들을 당연히 공공재로써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관대하고 폭넓은 혜택이 돌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주 쉽게 불평등한 분배 현실을 찾을 수 있다. 거대 공룡처럼 지배블럭을 쌓아온 대기업들의 횡포는 정부의 정책들이 주된 원인이다. 국가는 사회를 통해 쌓인 부를 균등한 분배에 가까워지기 위해 공공부문의 시설을 확충하고 공기업을 통해 고용 창출을 기대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행복도를 높이는 데 집중해야만 한다. 노동과 자원에 더 많은 힘을 보태 생산적 목적이 활용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역할이다. 국가를 위해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희생해 온 지나온 역사가 이를 말해 준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고통의 본질이 무엇일까. 영양실조가 아니다. 질 좋은 서비스를 못 받아서 느끼는 불쾌감도 아니다.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막연한 불안이다. 딱히 두려운 대상이 없이 그저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건네는 거짓과 한숨, 극도로 몰리는 피로도 등 정신의 파괴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민영화‘ 혹은 '선진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얼마나 이득을 보는가를 따져 보고 공공성을 수호하는 일에 감시의 눈을 밝혀야 한다.


민영화의 가속화를 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해서 외국자본에 개방한다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영화는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지금까지의 선례로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특히 공공부문의 외국 자본진출로 향후 국가의 부는 외국 자본에 잠식당하고, 경제식민지가 되어 가는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것일 뿐이다. 지난 5년, 시장경제 체제의 모색 노력은 커녕 '역주행 정부'라는 비판을 들어가면서도 오히려 철지난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여전히 맹렬하게 매달리고 있다.

 

                                ▲ [출처]http://impeter.tistory.com


지난 유럽 나들이 중 박대통령은 프랑스 기업인들과 간담회에서 도시철도 조달시장 추가 개방을 공언했으며 다음날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고 GPA 개정의정서를 처리했다. 이 사실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알려졌고 국회비준 동의안 필요는 무시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진행되었거나 추진되고 있는 공공부문의 민영화 정책들은 국민의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다. 공기업이 하나, 둘 민영화되면서 효율성을 강조한 정부의 논리들은 자본의 예속화를 가중시겨 왔을 뿐이다. 이에 철도사업의 공공성을 무시하고 외국자본에 개방까지 한다고 했다.

프랑스 기업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던 대통령은 내 나라의 미래를 자발적으로 내어 주는 일을 합의없이 결정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쁜 행보를 보이더니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 스스로도 정당성을 내세울 수 없는자리에서 홀로, 자국에 엿먹이는 일을 하고 그 측근들은 장단 맞춰 북소리를 낸다. 국민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는 대통령이 없는 나라,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부에 저항하는, 나를 위한 철도노조의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힘을 보낸다.

김영훈 철도노조 지도위원은 딴지일보와 인터뷰에서 노조의 파업 배경과 구체적인 설명을 하며 정부가 하고 있는 정책들의 이면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정부는 경쟁체제 도입으로 효율성이 높을 거라 생각하지만 통합적 관리로 구축되었을 때 시너지 효과가 크다는 점을 일상 속에서 경험하며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시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버스지하철 환승 체계가 그것이다.

자연독점일 수밖에 없는 철도는 시민들에게 경쟁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오히려 회사가 틀리면 중복투자가 생기고 그로인한 적자는 더 커지게 된다고 한다. 적자의 폭을 줄이는 투명한 경영과 독점의 폐해를 막을 시민들의 참여와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부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법파업으로 몰아가는 이유가 기립 박수의 대가라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 전국철도노동조합 조합원들이 14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철도민영화 저지·노동탄압 중단 범국민 대회'를 열고 투쟁승리를 다짐하는 만세를 부르고 있다.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측과의 실무교섭이 무산된 가운데 전국에서 운집한 조합원들은 "총파업 총력투쟁으로 철도민영화 저지하자", "국민과 함께 투쟁하여 승리해 돌아가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코레일과 정부를 규탄했다. ⓒ News1

 

철도노조는 1945년 해방과 함께 만들어져 올해로 68주년이 되며 구성원들은 대부분 전동열차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가장 오래된 공기업 노조란다. 그동안 공기업 노조로써 철도노조는 요금체계의 문제, 장애인 이동권 보장 운동, 조합원들의 처우 등의 일을 해왔다. 이번 파업의 쟁점은 철도 민영화와 사유화 반대이다. 산업재해가 세계 제 1위인 나라에서 철도 노동자로 산다는 것, 동료가 자신의 기차에 몸을 던지는 현실을 만나는 일이 발생하는 나라, 공기업 노조 16개 중 14번째의 임금, 복지의 처우상태인 그들이 대중교통에 의지하는 나를 위해 나선 거다.

노동자의 파업에 부정적인 시선은 내 문제가 아니면 관심도 가지지 않는 개인들의 이기적인 모습들과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사회 분위기라는 불편한 진실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온 착취의 역사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 3권이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데 불법파업이라 몰아가는 주류 언론이나 정치권력자들은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파업으로 칭하는 것에 다름없다. 합의해 나가는 과정을 무시하는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노조는 사회적 대화, 국회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발언하지만 국토부와 여당은 외면하고 있다고 김영훈 지도위원은 말한다. 공론화하여 노조파업의 이유와 요구되는 핵심사항들에 충분한 답변을 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임에도 불법파업이라 하며 강경 대응하는 정부는 노조를 주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철도노조 파업의 주장은 세 가지인데 핵심주장은 공기업의 지배구조 개혁촉구(낙하산 인사 사절)이다. 또 하나는 시민의 감시를 위한 철도이용자의 사외 이사 기용과 마지막으로 공무원 정년 연장에 맞춰달라는 것이다. 그래, 작은 목소리들이 모이면 빛보다 멀리 갈 수 있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 "힘내라, 철도 노조!!" 


노조가 선택한 행동은 잘못된 정부의 정책에 반한 합법적인 파업권의 행사인 것이다. 철도노조는 총파업 선언문 시작에서 탈선을 막기 위한 잠시의 이탈을 이렇게 밝혔다.

 "오늘 우리는 철도를 멈춘다. 서민의 발이며 국가의 동맥인 철도를! 철도노동자가 평생을 굴려온 철도를 잠시 멈추려 한다. 탈  선을 눈앞에 두고 질주 하는 열차를 잠시 멈추고 선로를 바로 잡으려 한다. 다시 달리기 위해 멈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불황을 넘어서’에서 경제와 관련된 점점 더 많은 판단이 국가의 통제 밖에서 이루어지는 경우 민주주의에 대한 국가의 책임의식 또한 희박해지기에 새로운 유형의 경제식민지화가 진행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핵심적인 이념 가운데 하나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이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국가는 식민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공기업의 민영화는 경제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공공의 적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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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도청 강당에서 '제12회 식품안전의 날' 기념행사


지난 대선 때 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거론한 것으로 4대 사회악 척결에 끼어든 ‘불량식품근절’은 의외였다. '악(惡)’이라는 말이 불량식품에 덧붙여진다는 놀라움과 함께 대다수 시민들을 졸지에 악인으로 만들기도 한 공약이었다. 불량식품을 만드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이 늘 있었다는 의미이고, 나도 예외는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학교 앞 문구점에서 동전 한 개로 나의 입을 달콤하게 할 수 있었던 그 추억의 과자들이 전부 악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악을 추억하는 나를 악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왜?’라는 의문이 따라왔다. 이것이 ‘4대 악’에 들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해 낼 수 없었던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악인이었기에 몰랐던 것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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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누리당의 신의진 의원이 발의한 일명 ‘게임 중독법’이 우리 사회의 ‘4대 중독’이란 범주에 들어갔다. 마약, 술, 도박, 게임, 그렇게 규정되어진 상황에서 필자는 또 궁금해진다. 왜 3대는 아니고 5대는 아닐까? 생각하다 숫자 ‘4’가 지닌 우리 사회의 관습적 사고에 마주하게 되었다. 죽을 ‘死’를 연상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인가. 마치 ‘중독을 죽이자’라는 의미로 연상되는 것이 필자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어떤 말들이 사회구성원의 뇌를 조종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사회학습으로 각인되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회 담론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보수주의의 ‘엄격한 아버지’를 연상시키고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으며 내가 도덕적인 인간이 되려면 ‘악’에 맞서야만 한다. 이번에는 국회의원에 의해 졸지에 게임에 집중하고 과하게 노는 이들은 ‘중독자’가 되는 거다.


악에 맞서려면 강한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 그 도덕성을 준법정신으로 하여 악을 제거하기 위해 보복과 징벌의 법을 제정한다. 우리 사회에서 ‘중독’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의미로 쓰여 왔고, 그런 의미에서 ‘중독은 나쁘다’는 말이다. ‘게임중독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이 심각한 우(遇)를 범한 것은, 같은 문화 콘텐츠에 대한 형평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겠다. 심각한 중독 현상은 오히려 강력한 미디어 매체로 부상한 텔레비전이다. 굳이 4대 중독법을 만들어야 했다면 ‘TV중독법’이 먼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다. 우리에게 TV가 있는 저녁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일상이고, 그 중독은 한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를 지체시키는 독재자들에게 열렬했다. 시청자들을 우민화시키는데 급급한 불량방송을 송출하는 텔레비전이야말로 나쁜 것이기에 중독법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http://cafe.daum.net/ibims 


중독으로 인해 생기는 각종 문제들은 반드시 사회적·개인적 노력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허나 그 ‘중독’이란 말 앞에 어떤 말이 놓이는 가에 따라 그 의미도 긍정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아름다운 중독’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몰입’이다. 이 몰입은 자기 진화를 위한 발견의 시작이고, 그 효과를 굳이 따지자면 세상을 변화시켜 진보할 수 있었던 역동적인 힘이었다.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는 사회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에 개인들이 각자 몰입한다면 그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게 된다. 게임에 몰입하는 개인들이 모여 산업적 성과를 이루어낸 것처럼 사회·정치·교육 등 각 분야에 몰입한 개인들이 모여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율적 의미의 접근으로 강제할 ‘법 제정’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중독을 해결하려면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학업과 연결된 시간을 제외하면 아이들에게 남는 시간은 아주 적다. 즉 충분히 뛰어 놀 시간이, 저들끼리 모여서 놀고 떠들 시간이 없다는 것이, 게임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임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게임중독법’을 발의해서 타율과 강제로 막을 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누릴 자유로운 시간을 먼저 허락할 수 있는 교육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논다’라는 말이 구성원들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회 분위기에 ‘놀 수 있는 사회’로 변신하지 않는다면 ‘중독법’은 숱하게 발의되고 제정될 것이다. 과연 강제되는 법을 만들어 놓고 자율적인 준법정신을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법이 개인에게 휘두르는 힘은 보이지 않는 국가의 폭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회는 그만큼의 개인들이 감당할 책임의식이 뒤따른다. 자유는 스스로 책임질 것을 전제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 자유를 ‘법’으로 차단하겠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은 과연 그 흔하게 널린 ‘자유론’에 대한 수많은 인문학자들의 말에 몰입한 경험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인간이 우위를 정하는 부분은 지구의 그 어떤 종(種)도 접근하지 못한 문화적 도구 때문이라고 한다. 그 도구를 사용하는 자의 선택이 게임만은 아니다. 문화집중 현상을 모든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그 도구가 한 개인을 파멸로 몰아간다면 그 도구를 덜 사용할 수 있는 개인적인 노력이 우선일 것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 체험 환경은 이 사회의 몫이다. 이 사회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해 게임의 즐거움에만 빠지도록 한 것은 아닌지 사회적 성찰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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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http://movie.daum.net


감정노동을 엄밀히 정의하면 “업무상 요구되는 특정한 감정상태를 연출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일체의 감정관리 활동”이 직무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노동 유형이다. 그런 의미로 정치인도 일종의 ‘감정노동자’라 하겠다. 일반인과 달리 감정노동자로서의 일부 정치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노동을 뻔뻔하게 즐기는 능력을 갖게 되어 그것을 완력으로 이용까지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땅의 대부분의 감정노동자들은 고통에 신음하게 된다.


지난 일주일 뉴스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다 열 개의 단어로 지난 30여 년 간의 시간을 지나면서 드러난 중국 사회를 말하던,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를 떠올렸다. 눈에 들어 오는 반복되는 단어들에  필자도 우후죽순 감정노동의 트라우마를 만나고 있다. 지난 1년을 되돌아 보며 한국을 말할 수 있는 열 개의 단어를 생각한다. 그 열 개의 단어는 는 또 하나의 단어 ‘사태’로 모아져 있었다.


단어 나열의 순서에는 하등의 의미가 없음을 전제하고 감정노동자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필자의 처지에서 내 주변을 떠돌며 결국에는 중증의 감정노동자로 만들어 온 우리의 현실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국가의 면적이나 인구로 비교하기 어려운 두 나라의 모습이지만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쉽게 발견된다. 국가의 정체성에 의문 부호가 붙는다.


위화는 중국에서 ‘홀유(忽悠)’의 의미는 맨 처음의 의미를 벗어나 점차 하나의 속어로 자리잡아 중국동북지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속어로서 ‘홀유’는 똑같은 발음의 ‘호유(胡誘)’ 즉 ‘어지럽게 잘못 인도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책에서 말한다. 이후 끊임없는 변이가 일어나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허풍과 선동, 종용의 의미를 갖고 허튼소리나 뜬소문, 사기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해학과 조롱, 근거 없는 날조와 투기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홀유는 중국어의 만능열쇠가 되어 관련된 단어의 말뜻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입만 열었다 하면 홀유를 하게 만들었다는데 한국에서 정부의 홀유는 ‘사태’가 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먼 계절로 갈 것도 없다. 지난 대선의 겨울부터 궤적을 돌아보면 NLL대화록 사태를 시작으로 진주의료원 사태, 국정원 사태,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난 시국선언 사태, 인터넷의 일베사태, 개성공단 사태, 해병대캠프 사태, 윤창중 사태, 밀양송전탑 사태, 국회의원 이석기 사태는 통진당사태로 이어졌고, 아직도 열거할 ‘사태’가 마치 유행처럼 줄을 잇는다.


전교조사태까지 생각하면 한 마디로 ‘민주주의 위기 사태’라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개인의 감정 노동은 극한까지 갈 수밖에 없는 거다.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세대를 초월하여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개인들의 자살사태는 무엇으로 표현해야 적절한가. 정부의 홀유는 개인의 영웅주의에서 시작되었기에 잠시의 현상으로 머물러서도 안 된다.


위화는 ‘홀유’라는 단어가 중국 사회의 윤리및 도덕성 결핍과 가치관의 혼란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 혼란 속에서 한 개인도 정부를 상대로 홀유하기 시작하고 그 사회는 홀유라는 언어유희에서 종국에는 홀유가 실제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면서 어느날 내가 속임수나 헛소문 같은 단어에 합리성이라는 외피를 입혀 놓은 홀유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출처] 정봉주와 미래권력들


한국의 매스컴에서 넘쳐나고 있는 도처에 퍼지는 가짜 뉴스의 등장과 이런 가짜 뉴스에 법률적 책임은 물론 도덕적 책임조차 지지 않아도 되는 현실, 정부가 국민을 우롱하는 사태에서 개인들의 감정 노동에서 발생하는 트라우마는 너무도 당연하다. 인터넷에서 어느 고등학생이 때늦은 1인 시국선언을 했다. 그 소년은 마지막에 “민주주의를 쉽게 내주지는 못하겠다. 내 미래를 도둑질 하지 말라”라며 끝을 맺었다.


기성세대로서 순간 가슴이 후끈해지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한 것은 현재에도 민주주의는 권력자들에 의해 충분히 짓이겨지고 있다. 그 고통에 신음하지만 한 개인들의 힘은 협동의 형태로 작은 공동체로 공감의 마음들이 모이고 있다. 그런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협동조합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그 가치를 후대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기에 결코 우리는 미래를 도난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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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북을 면치 못하는 우리 외교는 이번 유럽 순방에서도 여전한 듯하다. 외교의 중요성은 국익과 관련되었기에 중요함에도 그 효과적인 면에서 본다면 탐탁하게 여길 수가 없다. 대통령을 포함한 측근들의 행동들에서부터 드러나는 잡음들은 지난 미국 방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국내 언론들의 북소리만 시끄럽다.


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수행중인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3일 첫 순방국인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국정원 대선 개입 항의 집회’와 관련해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다”며 참석자들을 협박하는 글을 써서 눈길을 끌어 주었다. 그의 행동은 국가를 위한 외교인지, 1인을 향한 애교인지 구분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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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시위 사진출처 : 경향신문


김 의원이 말한 파리 시위는 지난 2〜3일 대통령이 유럽 순방 첫 방문국인 프랑스를 찾은 때에 프랑스 거주 한국 교민들과 유학생 등이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에 항의해 벌인 시위다. ‘민주주의 파괴를 규탄하는 재불 한인’은 2일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 3일 팔레 루아얄 광장 등에서 국가기관의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촛불 시위를 열었다고 한다.


미국의 웹모바일 미디어 토픽스는 8일(현지시각) 김 의원이 시위 참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관련된 한국 언론 기사를 ‘토픽스 프랑스’에 링크했다니 과연 북소리가 날만도 하다. 일국의 국회의원이 제 스스로 알아서 민주주의 국가를 부정한 꼴이다. 국민을 대행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국민을 협박할 수 있는 나라로 알리고자 소리를 내었으니 말이다.


대통령의 이번 유럽 순방 컨셉은 문화산업 교류 및 창조경제 중심의 '세일즈 외교'라고 한다. 무엇을 세일즈한 것인지는 도통 알 수 없지만 국정원 등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입장을 "과거의 정치적 이슈"로 규정하며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태평하게 순방길에 오르는 뒷모습은 해외 관광을 위해 떠나는 여행객 같기만 하다.


대통령의 서유럽 방문소식은 국내 언론에게는 큰 뉴스로 연일 보도되었다. 대통령이 떠나기 전 프랑스 보수 일간지 '르피가로'와 인터뷰 한 내용이 대서특필 됐고, 영국국빈 방문 때의 성대한 환영식 장면은 주요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국내에 대서특필된 인터뷰 내용은 번역에서부터 그 의미를 달리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 영국 언론들은 대통령의 방문 소식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극소수의 언론만이 한국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언급했다는 거다.


프랑스의 일부 언론은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한국에서 일고 있는 국정원, 군의 선거개입 문제, 아버지의 그림자,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문 등을 다루기도 했지만 국내 언론에서 이와 관련된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한국을 출발하기 전에 BBC가 인터뷰를 했지만 이 기사는 BBC 월드로만 방송되고 영국인들을 위해 BBC에서는 방송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국내 언론사들이 권력에 부역하는 열띤 모습은 언제나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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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위 사진출처 http://blog.daum.net/rhekaeorn/3743


대통령의 해외방문은 국내 악재로 인한 지지율 하락을 상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여 한복입고, 정상들과 회담하는 모습이 집중 조명되면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서유럽 방문도 마찬가지여서 갤럽이 대통령의 해외방문 기간이던 11월 4일부터 7일 사이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전 주보다 지지율이 5%p 늘었고 부정적 평가는 4%p 줄었다고 발표했다.


정치가 몰락한 나라에 외교의 몰락 또한 당연지사이다. 실리도 자주도 없는 그동안의 우리 외교는 정부가 내거는 창조경제에는 턱없이 부족한 ‘눈치외교’ 답습의 구태일 뿐이다. 추상적인 ‘창조경제’가 국내에선 미사여구에 불과하니, 그야말로 ‘우물안 외교’에 머무는 수준이기에 한국외교의 근본 문제를 성찰할 기회를 필요로 한다 하겠다. 외교를 대외용이 아니라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지나쳐 국민으로서 기만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국내 언론의 대서특필되는 대통령 나들이가 국민을 기만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옛 성인들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제 한 몸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하는 정부가 외교를 내걸고 국익을 논하며 ‘세일즈’를 생색낸다는 것이 막힌 가슴을 더욱 갑갑하게 하고 있는 꼴이다. 민주당이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에 대한 특검을 요구하고 나섰고, 정국은 심상치 않은데도 언론을 통해 비춰진 정부의 모습만 보면 태평천하(太平天下) 같다.


필자는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 국민 여론을 정부정책 지지용으로 하기 위한 국내용 외교를 보면서 세계에 놓인 대한민국의 위상을 좌우할 수 있는 외교부와 그에 속한 외교관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국경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외교는 외교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국민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외교라고 생각하기에 피켓을 든 재외국인들의 모습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발견될 수 있음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서유럽 순방 중 유일한 국빈 방문은 영국뿐인 그런 대접을 받는 나라에 산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외교를 대통령 당선 후에 의례적으로 치루는 주변 국가들을 방문하는 모양새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보다 실질적인 외교부를 갖추고, 역량있는 외교관이 될 인재를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국가 간의 접촉으로 국내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 실질적인 국익에 힘쓸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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