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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노잼

Overdye*~ 2015. 9. 26. 17:53

어차피 돈이 많다면 당신은 괜찮다. 미리 다른 행성이라도 갈 무언가를 마련했을 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그것 또한 가능하진 않겠지. 돈이 없다면 지금부터 삶을 정리해 보는 게 현명한 선택일지 모르겠다. 만약에 한국에 원전 사고가 난다면 피난은 거의 불가능하다. 국민의 안전 따위에는 그야말로 "노잼"인 정부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지. 돈이 없는 당신은 그 자리에 남은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돈이 있건 없건 비슷한 처지에 놓일 확률이 더 높긴 하겠군.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상상력에서 나온 말이니 무시해도 상관없다. 그래도 인류의 삶은 상상력을 허락하는 과정에서 진보해 왔고 문명사회는 지속 가능했음을 기억해 내기를 바란다. 핵에 미친 한국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변화를 모색할 것이다. 늘 그래 왔던 거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소리를 낸다. 그때는 이미 늦은 건 아닐지 고민해 보자.

 

지난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해 국내 최고령 원전인 고리원전 1호기(587000)200730년 수명이 다했다. 하지만 2017년까지 '1차 수명연장'돼 가동되던 중 지난 6월 고리 원전 1호기의 영구정지를 하게 되었다. 시민단체와 지역주민들은 반대하며 즉각 폐쇄를 요구했고 지난한 투쟁 끝에 얻은 결과이다.

 

고리 1호기는 지난 200730년이 애초의 설계수명이 종료됐으나 정부로부터 계속 운전허가를 받아 2017618일까지 수명이 10년 연장되었던 거다. 이 역시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례로 추가될 정부의 규제 완화규제개혁이라는 기업의 입장만을 위한 선택이었다. 과연 더 큰 파이를 만든다는데 모두가 나누어 먹는 그 날이 있을까.

 

파이 부스러기도 낙수효과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대다수 사람의 삶이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과 고통에 허우적거린다. 그 고통도 부족하여 원자력 발전소의 밀집도가 세계 최고의 나라에 사는 5천만 생명이 위험에 빠져 있다. 그 상황은 한국사회가 짊어질 아무도 책임질 필요 없는 시스템의 탓이 되어 버릴 것이라는 추측이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정부의 무책임과 핵발전소라 생각하지 못하는 수천만의 생명으로 그 대가를 치르겠지.

 

 

2009년 존 힐코트 감독의 영화 <The Road>

 

두 발이 남았구나. 너 한 발, 나 한 발.”

 

총을 아이의 손에 쥐여 주고, 두 발이 남은 총으로 자살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걸 입에 넣고, 이렇게 향하게 해.”

 

영화 <The Road>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알아차릴 수 없는 그 순간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영화이다. 인류에게 닥친 그 어느 날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그 원인을 상상하는 일들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니.

 

2011년 후쿠시마 사고는 최악이 아니었다. 앞으로 사고 발생 가능성이 큰 한국의 원전은 지난 4.16 세월호 참사보다 더 혹독한 트라우마를 줄 것이다. 한국은 원전이 밀집되어 있고 피난 계획도 없다. 재난 컨트롤타워가 작동할 수 없는 한국은 이미 겪어보았기에 피난은 개인의 몫이다. 국가는 당신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다행인가. 바닷속이 아니라 그래도 땅 위에서 숨차도록 달리면 벗어날 수 있을까. 수영연습은 일단 미루시고 달리기 연습을 우선 시작하던지, 체력 단련에 힘써야 한다. 이 영화 속의 길은 현실이 되겠지.

 

원전 지역에서 피폭 가능한 반경 밖에서 거주하고 있는 나는 괜찮을까. 멀리 떨어진 진도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전국을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지금까지도 그 트라우마는 가실 줄을 모른다. 이제는 원전 참사이다. 안전하다는 원전에 대한 우리가 모르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보면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에 원전산업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았고, 고통에 신음하게 했다. 또한, 엄청나게 많은 죽음의 땅으로 만든 사상 최악의 사고들이 있었고 계속될 것이다. 그토록 공부를 강조하는 한국사회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무엇을 학습했을까. 세계의 공포에서도 이명박 정권부터 더 확대해서 진행 중이다.

 

2009년 존 힐코트 감독의 영화 <THE ROAD>

 

 

모든 게 사라졌어. 시계는 새벽 117분에 멈췄다.

 

내 아이에게 이런 삶을 주기 싫어.”

 

그녀는 떠났다.

 

이따금 나는 아이에게 오래전 얘길 했다. 용기와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그걸 기억하는 게 어려움이다. 내가 아는 모든 건 아이가 나의 가망성이란 거다.

 

들어 봐, 우린 얘길 해야 해. 그 사람들이 뒤에 있어,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그게 다지. 나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해. 우린 단지 불씨를 옮기는 거야.”

 

무슨 불씨요?”

 

네 마음속의 불씨.”

 

 

 

일본의 해안 지대는 원전 건설 입지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경고를 수없이 들었음에도 일본은 쓰나미와 지진이 겹쳐 일어났을 때의 전력 문제에 대비하지 않았다. 실제로 고령화된 원전 사고는 자연재해 앞에서는 답이 없다. 그곳을 피할 수밖에는 그 어떤 안전대책도 무용지물이 된다. 원전산업이 하나의 기업이 하는 일이라면 돈을 댈 주주들이 없었을 것이다. 원전산업 배후에는 막대한 이권의 먹이사슬이 존재한다. 엄청난 국가 보조금으로 허위와 은폐, 비밀과 낭비로 가득 찬 산업이다. 4년 전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또 잊고 있다.

 

강윤재 에너지전환 부대표·가톨릭대학교 연구교수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제안을 했다. ·장기적으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중단하고 수명이 다한 원자력 발전소는 차례대로 폐쇄하는 방식으로 원자력 위주의 에너지 정책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는 철저한 수요 관리와 시스템 정비, 전력원의 다양화, 지역적 분산화 등을 제시했다.

 

정부의 고리 원전 1호기 폐쇄로 그칠 일이 아니라는 거다. 현재 한국은 고리 1호기를 포함한 23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다. 11기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해 2029년까지 36기로 확대하는 전력수급 계획이 마련됐다. 정부의 원전추진은 그 이유가 분명하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효과와 경제적이며 안정적인 전력공급이라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원전 1기를 폐기하는 과정이 30년이 걸린다는 것은 알리지 않는다. 그 과정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원전을 가동할 때보다 폐기할 때 더 큰 비용과 환경문제, 사람의 목숨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 전적으로 이 위험을 미래 세대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정부가 하는 일에 주목할 이유이며 필요함이다.

 

정부의 레토릭 정책, 나쁜 정부는 레토릭을 반복한다. 그것이 언론 플레이 되면서 반복되는 모욕감에 몸을 떨게 되지 않던가. 그동안 전력 수급의 문제로 블랙아웃이 되었을 때, 전력의 절약은 개인들의 몫이었다. 정부는 전력 수급의 수혜자인 기업들이 당연히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그에 합당한 정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본질을 왜곡하는 정부의 에너지 정책 중심에 역시 사람은 없다. 한국 사회의 불씨, 사람 마음속에 있는 불씨, 아이들의 미래다.

 

 

[딩동]

이 글은 팟캐스트 [그알싫] 독재유산답사기 : 핵노잼을 듣고 제목을 가져와 쓴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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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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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Overdye*~ 2015. 9. 23. 13:24

 

2015년 이준익 감독의 <사도>

 

 

부자 간의 갈등을 바라본 감독의 시선처럼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 다양할 수 있을 것 같다. 함께 간 젊은 친구와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숙소로 돌아왔다. 생각이 많았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살아온 시간이 다르기에 느끼는 사회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차이가 전제겠지만 말이지.

 

분명한 것만 짚고 가자.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았다라고 말하면 된다. 나이 든 사람들이 잘 못 하는 건지 않은 건지 아무튼 사과하는 거 드물더라. 그리고 어찌하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지.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탁상공론일 뿐이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말뿐인 사회에서 또 말로 지적하게 되는 거고. 성질 급한 사람이 먼저 블라블라~~~~

 

갈등의 해결은 대화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대화 자체가 어려울 경우가 더 많곤 하지.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입 다물고 사는 경우는 적어도 한 두 번은 대화를 시도했다는 의미이겠지. 쉽게 말하면 갈등은 외면하는 게 편하니까. 이럴 땐 개인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끝까지 버티며 자신을 관철하는 모습의 사도 세자와 타협하는 것과 다르긴 다르지. 나를 지키려면 죽어야 하고 살리려면 타협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기도 하니까.

 

주말에 영화를 보고 다시 시작한 월요일의 SNS에 보이는 갈등중 조선일보의 김광일 논설위원의 칼럼과 그에 응하는 미디어스의 강민하 기자의 글을 읽는다. 조선일보라는 점만으로도 안 읽는 나는 화가 날 이유도 없는데 말이지. 아직도 그 조선일보의 글을 안 읽었다 뭐. 그것에 반박하는 글은 그 칼럼을 읽지 않아도 화가 날만도 하군 정도. 내 머리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연상되더라.

 

그리고 경향신문 고종석의 칼럼과 그 글에 대한 반응들.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단상. 개인적으로 닮고 싶은 글이지만 너무 감당 안 되는 나는 요 정도에서 허덕거리기에 그의 글에 대해서는 그저 느낌만으로도 충분했다. “남자 여자 또 다른 무엇의 구분 없이 모두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건가~” 정도의 글쓴이 마음이 전해지던데. 내가 보게 된 글들이야 갈등의 극히 한 부분이지만 이 두 가지에는 당면한 한국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놓친 마음의 실종 상태, 나와 당신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사도>에서 세자가 칼을 내려놓아야 했던 순간, 잊고 있었든지 아니면 그리워하든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했을 테니. 가족 공동체에서도 개인의 욕망은 가족 간 갈등의 시작이 아니던가. 다만 누가 얼마만큼 자신의 욕망보다 가족의 화합에 더 힘을 보탤 수 있을까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아니던가.

 

그의 지위가 무슨 상관일까. 과거 왕의 자리이건 백성의 자리이건 사람이 있는 곳에 갈등은 곧 삶이니까. 갈등 없이 지나는 삶도 그리 좋을 것은 없지 않나 싶은 거지. 갈등을 풀어가려는 나의 움직임에서 뜻밖의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같다.

 

모든 갈등에는 그에 담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생각해 볼 시간은 필요했던 것 같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과 갈등의 대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국가와 개인 간의 갈등에는 시스템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인데 사회구조와 관료제라는 시스템이 만든 악. 생각이 없어진 광기의 군중처럼 역사는 현재에 다다른 것일까.

 

세대 간의 갈등. 그것을 풀기 위한 노력이 삶이 아닐지. 개인에 머물 수만은 없는 갈등은 시스템이 주체가 되었을 때 이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역사의 단죄와 성찰이 개인에 머물 수 없는 이유는 사회윤리의 자율성이 사라지기 때문이겠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그럴싸한 자기 합리화로 세상의 일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거나 갈등하지 않으려는 것, 회피이거나 외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있어야 당신도 있는 것이니 나를 지키는 일이 우선일 것이고 그 사이의 갈등은 나를 위한 해결이 우선되고는 하지. 하지만 여기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가는 것은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관에 따라 다른 해결 방법을 모색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이 아닐까.

 

하늘이 할 수 없는 조율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에 약간의 사랑을 담아보자.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벅차더라. 이 나라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하마. 열렬하게. 내가 이 나라에 사랑을 퍼붓기 시작하면 갈등을 풀어나갈 무언가를 위한 개인적인 움직임이 시작되겠지. 당신을 사랑하기로 했다면 당신을 위한 나의 몸짓은 지금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달라지겠지. 

 

이번 한가위 보름달에 소원을 살포시 전하는 마음을 다시 가지면 조금 나아지려나. 차가운 이성 앞에 따뜻한 감성이 먼저라면 나도 꼰대 소리 들으려나. 영화 <사도>에서 정조로 분한 소지섭이 너무 짧게 나온 것이 못내 아쉽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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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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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월의 겨울 방학 기간에 개인적으로 작은 도서관을 운영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책을 읽는 공간을 열었습니다. 2회는 독서지도와 NIE로 수다도 떨었습니다. 마무리되어 가기에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지요. 하지만 의외의 상황에 스스로 한 방 얻어맞아 띵해지고 말았죠. 충격이었습니다. 관리부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관리하지?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관리당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할 내 나름의 행동을 취했습니다. 일단 작은 상자를 입구에 두고 휴대전화기를 걷었습니다. 이 공간은 와이파이가 그야말로 빵빵하게 터지는 곳이지요. 그동안 그들은 책을 읽기보다는 스낵 컬처와 스마트폰 게임을 했습니다. 관리자가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함께 있을 때는 책에 빠져있는 모습이었죠.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라 빗대면 과한 것일까요.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 사회,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앞장서서 구성원들을 관리하고 그것이 마치 국가 안보를 국가 성장을 위한 것이라 여기도록 하고 있지요. 관리당한 기성세대들이 신세대들을 그렇게 관리하려 합니다. 청소년을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장래 대한민국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일부 십 대들의 모습을 너무 과대 해석하는 것이라고 부디 비판해주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과 관리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행하는 어른들의 관리 역할은 그들을 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의 교육은 사육으로 변질하여 버렸고 그 사육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다시 사회를 향해 화살을 쏩니다.

   

2008년 데니스 간젤 감독의 '디벨레(Die Welle)'

 

이 영화는 독일영화로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커 벌리 고등학교에서 교사 론 존스에 의해 행해진 실제 실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무정부주의 대신 독재에 관한 토론 수업을 진행하게 된 한 고교 교사가 독일 나치즘의 독재 정치가 현대 독일에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학생의 의견에 그 작동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교실 실험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같은 유니폼을 입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실험에 점점 동화된 학생들은 협동단결을 위한 단체를 결성해 그 목적에 맞지 않는 친구들을 지목하고 감시하며 배척하는 등 점점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개인주의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지만 공동체가 발휘할 수 있는 연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느끼는 겁니다. 독재는 어디에서건 가능합니다.

 

휴대 전화기를 걷지 않으면 자제할 수 없는 청소년들의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한국의 교육이 저지른 주입과 획일화를 마치 연대의식으로 몰아가는 전체주의의 영향력은 심각합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일상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청소년들은 '규율'획일화로 시작되는 '독재'의 가능성에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집단적 광기로 몰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애국심을 내세워 국민을 선동하려는 현 정부의 모습만큼 위험합니다.

 

이 영화에서 프로젝트 수업을 한 주간 진행한 후 벵어 선생이 말합니다.

 

첫 수업 시간에 질문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우리에게 독재가 가능할 것인지 물었다. 독재정치란 바로 이런 거다. 방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나, 너희?”

 

 

2008년 데니스 간젤 감독의 '디벨레(Die Welle)'

 

프로젝트 수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많은 청소년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디벨레'의 일원으로 평소에 경험할 수 없었던 연대의식과 그 힘의 파장을 마주하면서 전혀 다른 폭력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 이 실험 수업은 커다란 불행을 가져왔고 한 교사의 실험 정신조차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는가를 조심스레 되묻고 있습니다. 벵어 선생은 프로젝트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수업관리만 했기 때문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수업 진행 중 교사는 학습관리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의 1972년 신동아에 실린 글을 전환의 논리에서 읽었던 활자들이 너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1970년대의 풍경들이 하나둘 재현되고 있는 태극기가 휘날리는 거리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독재시대의 재현같습니다. 표준화된 시대에 주입된 대중매체를 통한 우민화를 위한 국가의 노력은 빛을 발휘한다는 리영희 선생의 말을 되뇝니다.

 

브라운관과 10인치의 유리창을 통해서 원거리로 조작되는 지배층의 의도는 자기 자신의 감각과 지각으로 이 사회의 실태를 꿰뚫고 살피려는 노력을 포기한 치매증 대중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한 듯하다.”

 

감각 미디어에 혼이 빠져버린 신세대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진 그 오랜 습속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기성세대로서 만나는 통렬함입니다. 문자 미디어가 전해줄 이성과 사고와 멀어지게 의도한 이 사회의 필요조건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세대 간의 벽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태극기를 바라보는 것이 애국심을 흉내 내는 일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2015년으로 96돌을 맞은 3·1절의 거리는 정부의 태극기 달기 운동 분위기를 확산시킨 덕분인지 곳곳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물결입니다. 1970년대를 학창시절로 보낸 나는 서울시청 앞을 지날 때면 국기하강 식을 하는 동안 가던 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너무도 당연시되었던 의례는 그저 바쁜 걸음 멈추게 한 재수 없는 날의 기억으로 남았을 뿐입니다.

 

정부의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이 박근혜 대통령이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 국기하강 식 장면을 보고 애국심을 강조한 즈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올 한 해는 전국이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힐 것 같습니다. ‘디벨레물결이란 뜻의 독일어입니다. 한국사회를 뒤덮는 이 태극기의 물결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3.1만세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요. 다른 공동체를 배척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가져올 결과는 암울한 과거의 교훈으로 끝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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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다른 세계로 떠나기 전까지 추구할 수 있는 영혼의 탁월함을 향한 변화의 과정, 그 가능할 것만 같은 일의 한 사례로 위대한 영혼 ‘간디’를 생각해 본다. 필자에게 각인된 간디는 '물레를 돌리는 모습'의 간디이다. 그의 영혼이 고양되기까지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와의 편지 인연이 있었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톨스토이 사상의 중요한 키워드 '비폭력'이 킹 목사와 넬슨 만델라에게로 이어졌듯이 간디에게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절대시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각을 유지하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필요하다.

 

간디의 행적을 보면 흔히 알려져 있는 간디와는 다른 모습도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주장’했다거나, ‘제국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자국민 청년들에게 호소’하는 모습도 있다. 그러한 모습은 우리의 역사 속 ‘친일파 지식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지식인들이 보였던 치졸한 친일 부역과 현재 거대 정당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후대들에게 ‘마하트마 간디’라 불린다. 그는 적어도 후대에 남을 흠잡을 데 없는 위인이기 보다는 '모두'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를 뛰어 넘으려 노력했던 영혼의 탁월함을 지니려한 한 ‘인간’으로 남았다. 간디의 사유는 그 한계가 있지만 그는 결코 스스로 선택한 물레를 버리지 않았다.

 

만약, 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자신의 삶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혼의 탁월함을 위한 개인적인 각성과 노력을 했다면, 그가 말년에라도 자신의 온전한 삶을 위한 어떠한 행동으로라도 이 나라를 위해 실천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허나 그는 자신만의 현실에 머물고 떠났다. 여기에서 한 개인의 삶에 시선을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개인을 놓고 그를 나름대로 평가할 때, 그가 가진 배경이 어떤 배경인가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외면하거나 특히 사회에서 부여해온 기득권에 있어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 인생을 후대에서 조명할 때 '완벽함'이란 그야말로 플라톤의 이데아계에서 가능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만 인간의 부족함을 극복해 나가려는 개인의 노력이나 개인이 마주하는 하나의 계기 등이 작용될 때 그에 따른 '선택'에 의해 삶의 모습은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대의 위인들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을 선택하여 비판받는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현실에서 얻어지는 개인의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영혼이 지향하는 '모두'의 선을 향한 시간들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현재의 시간은 하필이면 미래가 아닌 과거로 향하고 있다. 거부하기에 벅찬 현재에서 내가 원해서 발 딛고 있는 땅이 아니라고 소리치며 내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간디를 등장시키며 어떻게든 이상한 나라의 구조를 이해해 보려고는 한다. 이 '잘못된 구조'를 '악'으로 놓는다면 이 구조를 만든 개인도 '악'인 것이다. 저절로 만들어져 뚝 떨어진 구조는 아닐테니 말이다. '악'의 개인이 집단을 이루고 정파에, 기득권에, 지도층에, 줄줄이 그럴싸한 수식어를 붙인 채 만든 '구조'인 것이다. 물론 그 개인의 '악'은 여러 유형의 '나쁜 쾌락'을 통해 자신만의 욕망을 담았을 뿐인 거다.

 

사실이 소설로 둔갑하고, 소설이 사실이 되는 요지경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정국에서 설흔의 ‘왕의 자살’을 읽은 터에 이야기의 배경 연대가 같은 김상규의 소설 ‘화담 서경석’까지 줄줄이 떠오른다. 조선의 역사에서 ‘인종’을 기억해 내기는 쉽지 않다. 영의정 윤인겸 등이 대행대왕의 묘호를 인종이라고 의정했는데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일컬어 인이라 했다고 ‘명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역사 관련 책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그의 재위 기간이 조선 역사에서 가장 긴 26년의 세자 시절과 가장 짧은 여덟 달의 왕좌를 지킨 병약한 임금으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설흔은 인종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상상력을 발휘했다. 물론 소설이 가진 허구성에서 그 당시의 배경을 다양하게 추론해 볼 수는 있지만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아닌 한 개인 ‘이호’의 선택을 주시했다. 이호는 개혁 세력의 피바람을 부른 사화(士禍)의 중심에 선 아버지 중종을 닮지 않기 위해 스스로 병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설이 왜 사실로 느껴지는지.

 

아마도 모든 근원은 '나'에게서 '모두'에게로 나아가려 할 때 그나마 인류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진보가 진행되었던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어탑을 원하는 영혼에게 ‘철학자의 돌’을 선물로 주고 싶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나와 너, 모두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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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영화 <Dave>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의 일탈은 활력소가 됩니다. 그런 일탈로 세상을 바꿀 작은 시작의 순간이 내게 찾아온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의 주변 이야기가 뉴스를 차지하는 중에 이 영화는 의외의 기쁨과 모색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오늘로 455일을 넘어왔습니다. 그동안 진상 규명을 밝힐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대통령과 관련된 검색어는 점점 늘어납니다. 최근엔 현 정부의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재의결 되지 않아 국회법 개정안은 폐기됐어요. 현 정부에게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은 이미 훼손된 지 오래전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만 주시하고 있어야겠지요.

이영화에서 ‘데이브’는 볼티모어에서 직업 소개서를 운영하며 사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는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데서 즐거움을 찾지요. 그런 데이브에게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미국의 44대 대통령 빌 미첼과 똑같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돼지의 등에서 내린 데이브는 “자동차는 세보레죠.” 하며 대통령의 말과 행동을 흉내 냅니다. 데이브는 대통령을 연기하며 주변인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우리에게도 현 대통령과 관련되어 기억나는 관련 검색어만 채집해도 웬만한 소사전이 만들어질 수 있잖아요? 그 말들이 희망의 격언이 될 수 있다면 싶은데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을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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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영화 <Dave>

 

미첼 대통령은 볼티모어 방문 시 공식적인 행사에서 사적이고도 은밀한 시간을 가지려고 데이브를 잠시 내세우기로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공직자의 부정의 한 일들이 졸지에 ‘일탈’로 치부됐던 것처럼 대통령 개인의 일탈을 위해 자신을 똑 닮은 데이브를 대역으로 내세웁니다. 영화에서처럼 권선징악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불가능한 것 같은데 말이지요. 대통령은 뇌졸중으로 혼수상태가 되고, 데이브는 대통령의 역할로 그의 일탈이 시작됩니다.

 

미첼 대통령의 교활한 비서 실장 ‘밥’은 데이브에게 잠시 대통령 흉내만 내게 함으로써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유혹합니다. 애국심을 강조하며 데이브의 선량함을 이용해 대통령의 역할을 하게 하지요.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데 어쩐지 청와대와 관련된 입말들이 현실에서 넘치기에 예외성으로 유쾌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대통령의 역할을 대신하는 누군가가 있기는 했나? 하는 추측이 난무하던 지난해 이슈가 생각이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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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일보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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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영화 <Dave> 비서실장 밥이 대통령대신 법안 처리에 사인한다.

 

신영복 선생의 『담론』 중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은 그때 그곳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저자의 말은 ‘사실’이 ‘진실’이 될 수 없는 것을 다시 되새기게 합니다. 사실조차 개인의 편향된 시선에 따라 왜곡되기 일쑤인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무거운 일이던가요. 자기검열이 작동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가 두려운 사회, 시대를 뛰어넘기 어려운 정서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걸까 싶습니다.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들에 이러쿵저러쿵 춤을 추다가 제풀에 힘이 달려 그만 주저앉게 되고 말 것 같은 거지요.

 

이런 사회의 불안들은 삶을 절박하게 만들지 않던가요. 패배의 역사에는 서사가 꽤 낭만적으로 퍼집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패배를 치유할 자유로움과 창조성은 소멸했겠지요. 패배의 역사, 혁명이 글자로 박제된 지금, 저자는 ‘현실과 이상의 지혜로운 조화’를 담론으로 삼았습니다.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를 이룰 능력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분리된 힘이 아니라 유연함이며 이런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 하죠.

 

왜, 정치가 내 삶과 멀리 있어야 했지? 이 물음을 알아가는 과정의 시간에서 나는 또 다른 삶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내 머리가, 가슴이 생각하는 것들이 엉키다 보면 결국엔 내 세상 안으로 기어들어가 버리곤 하는데 그것은 나의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지독히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나를 다시 각성시키고 끄집어내 매번 기성세대의 나를 성찰하게 하는 청년들의 작은 웃음이, 눈빛이 늘 성가시게 하곤 합니다. 이제 나를 위해 민주주의가 자명성을 얻어야 한다는 거지요. 나의 자유를 위해서 말입니다.

 

데이브예산

 

 

“차 구매자에게 신뢰 홍보비로 4천7백 만 불을 쓰고 있소.”

“네, 자동차를 구매한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요.”

“차 산 사람의 신뢰감을 얻기 위해 아이한테 길에서 자게 하라 한다? 그럴 수 있소?”

“못 하죠. 그럴 수 없죠.”

 

대통령 미첼은 볼티모어 연설을 끝으로 그의 개인적 일탈이 그를 영원히 잠들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데이브에게 그 역할이 맡겨집니다. 대통령의 비서와 측근에 의해 움직이던 데이브에게 영부인은 하나의 계기를 주게 됩니다. 그녀가 원했던 “무주택자 법안”을 정부가 예산 부족으로 거부하면서, 문제를 의식하게 됩니다. 데이브는 정부 예산안을 검토하기 위해 친구의 도움으로 공부를 합니다. ‘사실’과 ‘진실’에 대해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무주택자 법안’을 살릴 예산안 재검토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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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 그렇겠지요, 뇌졸중으로 쓰러진 대통령 대신 데이브는 진실을 담아 기자회견을 합니다.

 

나는 오늘 아침 비서실장에게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 나라에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더는 못 참아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있는데 못 본 척 한 거죠. 그런데 이제는 점점 더 커져서 누구도 손을 못 대죠. 그뿐 아닙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이죠. 정말 비극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어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몰랐다면 시작할 일은 제가 제안하죠. 오늘부터 정부는 일을 원하는 시민에게 직업을 찾아줄 책임을 질 겁니다. 일자리 얻은 사람의 얼굴은 하늘을 날 것 같죠.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뜻있는 일을 한다는 기쁨을 한 사람씩 느끼게 되면 다른 문제의 해결도 불가능은 아닙니다.”

 

권위에서 나오는 힘이 권위주의로 둔갑, 권력을 악용하는 정치인들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데 전력 질주했던 무리가 벽을 쌓고 있습니다. 이미 해체된 이념을 들먹이며 국민을 호도합니다. 보수와 진보, 그 둘의 협력으로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말의 진정한 힘이 사라져 사람들을 혼동하게 합니다. 영화에서는 선한 인성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바른 정치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 집단 이기주의가 적다면 정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바람직한 파수꾼이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이 망국으로 가는 역사의 혼란한 시간을 멈추게 할 힘이 있어야 하고, 정치만큼이나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개인들도 그 책임을 함께 지고 가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키는 그의 평전에서 “하나의 일관된 전략이 없으면, 그 집단은 살 수도 없고 숨 쉴 수도 없다.”고 말하더군요. 전략은 적중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전략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한 명의 리더십이 작동될 수 없다면 진보의 결집이 필요하고 그것이 전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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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혁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총과 폭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혁명이란 사고의 전환이다. 유교나 기독교도 당시에는 혁명이었다.” (호세 무히카)

 

투쟁에는 후퇴할 시간이 있어야 하고 힘을 유지한다는 것은 후퇴했다가 다시 모으고 조직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지나간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하게 맞닥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호세 무히키의 말은 한국사회에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선거의 결과에 따른 치밀하고 비전의 아젠다를 재창출할 수 있는 전략가들이 힘을 합쳐야만 하겠지요. 계파의 늪에서 언제까지 허우적거리며 책임 전가를 하려는 것일까요. 현실의 벽 앞에 언제까지 무릎을 꿇고 국가의 미래를 팔아먹는 행태에 손가락질만 할 것인지 답답합니다.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키는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자신의 급여 대부분의 90%를 자선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지만 가장 존경받고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우루과이는 현재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평균성장률을 웃도는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퇴임 당시 무히카 대통령 지지율은 당선 때(52%)보다 훨씬 높은 65%였다는군요.

 

현대인들의 망각 속에서 공화국의 정신은 왜곡되고 붕괴하여 가고 있습니다. 공화국들은 봉건적 향수 때문인지 혹은 소비주의 문화 때문인지 ‘부유하게 살기’를 그들이 나아갈 방향으로 수용했고, 보통사람들의 삶과 꿈, 생활의 요구들을 외면해버렸습니다. 정부는 결국 자기 국민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호세 무히카)

 

호세 무히카 대통령의 2013년 9월 24일, 유엔 총회 연설의 내용은 ‘현실’에서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크고 절망스럽게 다가옵니다. 분명 동시대를 살고 있는데 정반대의 철학과 행동을 보여주는 대통령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국사회, 그 현실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그의 말대로 한 사회의 실패는 정치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정치가 실패하는 것은 삶을 부의 축적보다 우위에 두는 철학적 시야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새겨 봅니다.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영화 같은 상황을 바라기보다는 공정한 선거를 통해 데이브 같은 대통령으로 바꾸는 일이 더 현실적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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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2013년 손태경, 김태희 감독의 <미생 프리퀄>

 

 

하루아침에 뒤집히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해마다 이맘때면 최저임금의 협상이 쟁점으로 떠오릅니다. 지난해에도 올 해의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반영은 찾을 수가 없었지요. 2015년 적용 최저임금 시급 얼마라고 결정되면, 그것이 시장을 규제하는 기준이 됩니다만 올해 최저임금은 시급 '5,580’입니다. 내년도 최저임금은 6,030원으로 결정되었구요. 최저임금 1만 원은 그야말로 높은 장벽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희생의 대가는 늘 노동자의 몫이었음을 기억해 봅니다.

 

주변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이십 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부분이 실제로 최저임금도 받지 못합니다. 임금에 대한 불만은 차치하고 처지에 대한 고통을 토로합니다. 법으로 보장된 최저임금제가 실제로는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도 정작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체들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애초에 노동력 공급이 넘치는 상황에서 그나마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겨우니까요. 최저임금이 최고 임금으로 둔갑해 있는 현실에서 최저임금을 높이기 위해 정부의 조정 능력은 기대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노동의 현실은 참혹합니다. 인간의 기본권이 무시되는 것은 다반사이고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것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더 악랄하지요. 아예 무노조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기업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 이름도 찬란한 삼성.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현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정치를 하려는 정치인들의 입말들은 허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헛공약이 남발하고 공약을 지키려는 공직자로서 윤리의식은 찾아볼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최저임금, 말 그대로 최저 기준이 돼야 할 임금이 다수 노동자에게는 곧 실질 임금입니다. 시민사회와 노동계에서 최저임금 현실화를 외치는 이유입니다.

 

''에 대한 인식이라곤 연봉으로 받는 돈의 많고 적음일 뿐이고 일을 통한 성취감이나 자긍심은 개의치 않는다는 거죠. 그런 가운데 어릴 적부터 사회에서 요구하는 개인으로 교육되고 학습해 왔습니다. 하지만 일의 발견은 삶의 질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생존에 급급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유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노동자 없이 자본가는 존재할 수 있을까요? 노동 탄압에서 인권 탄압으로 이어지는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외면하게도 만듭니다. 현실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졸지에 서로 적이 되기도 합니다.

 

 

2014년 다큐멘터리 홍리용 감독의 <탐욕의제국>

 

 

세계는 탐욕으로 야만의 시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업의 야만스러움은 한국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대기업만을 키워주는 정책과 무역협정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노동환경과 기업의 무책임, 그것을 방관하는 정부, 이런 세계의 노동 현실에 무관심하게 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한국사회는 한강의 기적을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러 왔고 현재진행형입니다.

 

노동자들의 생명으로, 내 삶의 미래를 위한 현재를 희생으로 '내일을 위해서'라는 의미였지만 실상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 같은 내일이 진행될 뿐이죠.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없는 대기업이 가능한 한국사회는 민주 공화국으로 포장된 탐욕의 제국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잊도록 하는 수많은 방해물이 많지만,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버리는 개인들의 무의식도 한몫을 합니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이념, 반공과 노동조합의 몰이해는 노동을 현실에서 멀리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일한다면 우리는 모두 노동자입니다. 노동의 환경이 다를 뿐인데 직업 분류로 명칭을 달리하는 거죠. 아버지의 직업을 노동자로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노동은 어떤 모습인가요. 내가 하는 일이, 노동이 부끄럽도록 하는 것은 내가 받는 돈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으니 말입니다.

 

 

카트 2014년 부지영 감독의 <카트>

 

미래에는 달라질 대안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 달이 지나면 들어올 돈이 없다고 무작정 겁을 집어먹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는 없을 거야!" 바티스트 밀롱도의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정부가 매월 지급하는 약간의 기본소득이 있어서 해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요. 일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동은 삶이니까요.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일이 없으면 진정한 자유도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삶에서 진정한 일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일'이라 하더군요. ,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더라도 '논다'는 의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한국사회에서 일은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장시간의 노동시간에서 자부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노동하는 시간은 지옥과 같은 것으로 변질하지 않던가요. 노동의 가치는 결과로 쥐어지는 돈이 아니라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조건 없이 기본 소득'이 제도로 현실화 하는 데 노력할 수 있는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기까지는 노동자의 현재가 문제로 인식되어야 하고, 스스로 주저앉히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해야만 합니다. 연대의식은 이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으로도 가능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둔다면 그에 따른 변화는 더디지만, 반드시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같아선 꿈만 꿀 일 같지만, 세계는 달라지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도 극단으로 치닫게 될 부조화는 어느 정도 상쇄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업의 성장만이 국부(國富)라는 전제로 달려온 산업사회의 기만적 믿음은 노동의 현장에서 증명됐으니까요. 바티스트 밀롱도의 말처럼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막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재 기득권자들의 자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한국의 사회제도에서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헤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당신은 어떠신가요?

 

[출처] http://murutuku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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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렇게 선언했던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의식을 갖춘 성숙한 한 인간’을 기억해내려 하는데 도무지 내 기억력이 달려서 기억해 낼 수가 없습니다. 혹시 이런 분이 계시긴 했던가요? 물론 이 인용문조차 인터넷에서 찾았다는 거 아시겠지만, 공인으로서 말장난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여기에서야 뭐, 별거 아니겠죠.

 

국민 여러분 저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첫 번째로 선택한 개인적인 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저는 오늘, 아버지의 왕국에서 누렸던 삶을 청산하며 한 인간으로 독립했음을 선언하려 합니다. 지나온 시간 동안 일어났던 내 아버지의 과오로 인해 희생당한 이들에게 고인을 대신하여 머리 숙여 사죄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18년 간 대통령 자리에 있었던 대통령의 딸이 아니라, 자의식을 갖춘 성숙한 한 인간으로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의무를 성실하게 해 나갈 것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요.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중심으로 기억하게 되니까요. 개인의 선택으로 마음껏 누릴 자유의지입니다. 개인이 모여 있는 공동체는 어떤가요? 작은 공동체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때의 상황과 진행 과정, 결과, 그것으로 끼친 영향력 등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없었던 일로 될까요? 게임처럼 한 판 끝나고 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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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이 사건은 기억하실까요? 세월호 시행령 개정 촉구를 위한 ‘40만 서명’을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시민들이 청와대 민원실에 전달하려 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찰 10명에게 제지당해 가로막혀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종로경찰서에서는 이 말만 반복했다고 합니다.

 

 

미신고 불법집회 중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불법행위를 전부 채증하겠습니다. 채증자를 바탕으로 사법처리 하겠습니다. 아울러서 대기 경찰관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몸싸움을 시도하거나, 멱살을 잡거나, 밀칠 시에는 폭조법 위반으로 현행법 체포하겠습니다.”

 

 

내 나름대로 기억의 장을 열어 보니 아주 멍청한 일도 생각이 나는군요.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잠시 어린애처럼 상상했더랬죠.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던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을 데려간 유령들이 부디 그녀를 잠시 여행시켜 주진 않을까? 혹시 개과천선(改過遷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상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늘 동화의 세계였죠. 크리스마스, 어린 시절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억하기도 하잖아요. 이래서 잠시 웃기도 합니다.

 

 

기억의 숲2

 

 

 

팽목항에서 4.16km 떨어진 곳으로 팽목항을 오고 가는 방문객들이 쉬어가는 길목에 첫 번째 나무를 심었고 이후 이 숲에는 천 년을 넘게 살 수 있는 울창한 은행나무 숲이 조성됩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오드리 헵번 가족이 한국을 방문해서 제안한 프로젝트입니다. 세월호 기억의 숲 조성에 나서는 이유는 가족 대 가족으로서 비극적인 사건을 접하고 마음을 같이 나누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The family of late Hollywood actress Audrey Hepburn unveiled plans for a memorial forest in South Korea to remember the 304 victims of last year’s Sewol ferry disaster. Sean Hepburn Ferrer, the eldest son of the Hollywood icon and chair of the Audrey Hepburn Society, has initiated the project.

 

“A year has passed and instead of sending flowers to the families, we wish to create something beautiful. We want to create a platform that will bring some feelings of hope and comfort,” Sean Hepburn Ferrer said. “We will create a place from which everyone can work toward the future where a tragedy like this will not repeat itself,” he told reporters in Seoul.

 

Ferrer, along with his wife and eldest daughter, will plant the first trees on Friday that will eventually form the “Sewol Memorial Forest.”

 

 

할리우드 여배우인 故 오드리 헵번의 가족이 지난해 일어난 세월호 참사의 304명 피해자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한국에 기억의 숲을 만드는 계획을 발표했다. 오드리 헵번의 장남이자 ‘오드리 헵번 재단’의 이사장인 션 햅번 페러가 이 프로젝트를 발족한 사람이다.

 

션 헵번 패러는 “참사로부터 1년이 흘렀는데, 우리는 유가족들에게 헌화하는 대신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희망과 편안함을 가져다줄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싶었다.”며 “우리는,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미래를 위해 모든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고 서울의 기자들에게 전했다.

 

그의 아내, 첫째 딸과 함께 페러는 “세월호 기억의 숲”을 형성할 나무들을 돌아오는 금요일부터 심기 시작할 예정이다.

[기사 번역 / 비더슈탄트]

 

 

기억숲1

지난 4월에 오드리 헵번 가족과 함께 심은 30그루의 은행나무가 모두 건강히 자라고 있다.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따뜻하고 의미 있는 ‘세월호 기억의 숲’은 지난 5월 15일까지 참여자 2,972 명, 참여금액은 212,296,010원으로 숲 조성기금을 달성해서 현재 진행 중입니다. 1억 원 이상의 조성기금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커다란 숲이 조성되며, 세월호 희생자 및 실종자 가족과 생존 학생들의 메시지가 각인된 아름다운 숲 기념물이 만들어집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들어가는 말입니다. 아마 이 말이 건네는 의미가 너무 달콤해서는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가진다”를 의미하더군요.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죠. 현대에서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말인 거죠.

 

 

하지만 나는 반드시 이 말이 사회지도층에만 해당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평범하게 보통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발적인 나눔은 흔하니까요. 다만 굳이 사회지도층을 겨냥하는 것은 반어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주 드문 한국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나 싶고요.

 

 

 

기억숲오드리

 

 

 

이런 프로젝트가 외국의 한 사람에 의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가능해졌다는 현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물론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많은 일이 곳곳에서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죠. 작든 크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자연스럽게 작동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거대한 집단의 문제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축적된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삶의 가치’의 문제는 아닐지요.

 

돌봄의 공동체를 향한 마음, 그 선함과 진실이 진도 앞바다 그 깊은 바다의 세월호처럼 깊숙이 갇혀 있습니다. 오늘은 당신과 함께 그 기억의 숲으로 가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사람’이 있음을 다시 느껴볼 수 있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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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이 영화에서 용주의 엄마는 홀로 아들을 키우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비혼모로 당당합니다. 아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기웅은 엄마와는 단절된 채 직장에서 해고되고 복직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갔다 와 숨어 사는 아빠를 찾아다닙니다. 기웅의 모습과 다를 수 있었던 용주의 내면에 쌓인 힘은 가정환경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지요. 영화에서는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다면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강제 전학을 시킵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한다면 상관없는 일이 되기도 하죠. 학교는 학생이 아니라 ‘서울대’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용주의 성 정체성의 다름을 무시해 버리죠. 아주 쉽게.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성적 1등급의 우등생 용주와 학교 내 폭력서클의 우두머리가 된 일진 기웅이 선택한 방법은 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친구’였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절친했던 두 친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로 엇갈린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지요. 함께 중학교에 다닌 기택이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자, 기택을 감싸고 여전히 가까이 지내는 용주와 달리 기웅은 이들을 지켜보기만 하죠.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선택한 기택의 제보로 용주는 학교에서 졸지에 추락하여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런 거 다 상관없어. 서울대만 가!”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학교 벽에 자신을 남기고 떠난 용주.

 

학교폭력이 왜 발생하게 되는지, 아이들은 왜 서로를 깔아뭉개며 싸워야 하는 지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 문제를 의식하게 됩니다. 친구가 성적보다 중요하냐며 다그치는 학교 선생님까지 세상의 비틀어진 잣대와 어른들의 왜곡된 시선을 십 대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몸으로 은밀하게 제보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몸짓을 사회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거죠. 준비가 안 된 사회, 개인의 삶이 자유의지로 발휘되기 어려운 한국사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현실일까요. 부디 많은 어른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가 19금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문제가 바로 어른이 만들어낸 원인에 의해 나타나는 어두운 현상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기성세대의 은폐하고 싶은 욕구를 대변하는 것이라 여겨지더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교묘하게 금기시하는 나라, 그래서 더욱 어둡기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소수자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를 향해 말을 겁니다. 그들의 말에, 행동에 귀 기울이고 어울릴 수 있는 이 사회의 성찰과 격려, 응원까지 너무도 간절합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그들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성 소수자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란 먼 나라 얘기일 뿐이죠. ‘헌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헌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법치국가는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 나도 ‘국가’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깁니다.

 

 

 

지난 5월, 성 소수자 인권을 위한 비영리 단체가 법인 설립 신청 과정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법무부는 “한쪽에 치우쳐진 인권을 다루는 법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정식 절차조차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재단 허가 여부를 6개월 미루다 국내 최초 성 소수자 인권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법인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쪽에 치우친 결정을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묻고 싶습니다.

 

청소년기의 자아 정체성, 흔하게 들어왔던 말입니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없었습니다. 12년의 기초 교육과정을 지나오면서 ‘성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들어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 보시지요. 바꿔 말하면 개개인을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교육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인간을 여러 이름으로 나누는 일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어서 ‘LGBT’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느낌, 마치 번갯불에 잠시 감전된 듯한 느낌을 만났을 때가 있다면 조금은 알 수 있으시려나요. 굳이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이 내 관심을 더 끌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3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초저녁 무렵 ‘PO PO’라는 이름의 그곳에는 고양이가 무섭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죠. 아주 우연히 ‘성 정체성’에 관한 궁금증을 찾아가면서 나의 평소 습관이 나를 얼마나 안일하게 만들어 왔는가도 깨달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좀 더 활동적이고 폭넓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인생 후반기에 와서야 이 궁금증을 갖고 이리도 기웃기웃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A Denver bakery has found itself at the center of an LGBT rights controversy. A customer, identified as Bill Jack, told reporters this week that he believes Azucar Bakery “discriminated” against him “based on my creed,” which is Christian. Jack walked into Azucar Bakery last March and asked for two cakes, both in the shape of Bibles. That wasn’t a problem for Marjorie Silva, the bakery’s owner. It was what Jack wanted her to write on the cake: Anti-gay phrases including “God hates gays” and an image of two men holding hands, covered in a big, red “X.”

 

“It’s unfair that he’s accusing me of discriminating when I think he was the one that is discriminating,” Silva told NBC affiliate KUSA. She said she refused to inscribe the cakes with the requested messages. “All I did was stand up for what was right. Think of what a better place the world would be if we could stop all discrimination and hate! I will continue to stand up for what is right and I hope our experience is an inspiration to others who are also faced with injustice. Because, GOD LOVES EVERYONE!”

 

덴버의 한 베이커리는 LGBT 권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빌 잭이라는 손님은 스스로가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기독교라는 자신의 종교 때문에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잭은 지난 3월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성경 모양의 케이크 두 개를 주문했다. 여기까지는 주인 마조리 실바에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잭은 이 케이크에 “신은 동성애자를 증오한다”라는 반 동성애 문구를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두 남성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위에 크게 붉은 ‘X’자를 그려 달라고 했다.

 

실바는 KUSA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그의 차별적 행위를 거부했다고 해서, 나에게 오히려 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해요.”라고 말했다. 결국 실바는 잭이 요구한 메시지를 케이크에 새기는 것을 거절했다. “저는 그저 옳은 것을 위해 저항한 것 뿐이에요. 모든 차별과 증오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나은 곳이 될 지 상상해 보라구요! 저는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저항할 것이고, 저의 경험이 부당함을 마주한 다른 사람에게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뉴욕 타임스의 기사 번역/비더슈탄트]

 

“GOD LOVES EVERYONE!” 빵집 주인이 그의 주문을 거부한 이유입니다. 손님은 그것을 차별당했다고 한것이죠. 과연, 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것이 차별인가요?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차별’의 의미로 다가선다면 이해할 수 없지 않나요? 상식적으로 신(GOD)은 선(Good)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걸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요. 그러면서 한국 사회의 기독교단체의 동성애 혐오 발언이나 행태들은 신앙심을 이용해 또 다른 혐오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더군요. 이제 미국은 2015년 6월 26일로 세계사의 한순간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미국 연방 법원이 게이나 레즈비언 간의 동성결혼에 대해 합헌 판정을 내렸고, 미 전역에 적용될 예정입니다.

 

 

[출처] The White House Blog

 

한국의 성 소수자 차별 반대 무지개 행동은 6월 28일 제16회 퀴어문화축제 퀴어 퍼레이드를 시청광장에서 시작합니다. 이 축제는 전국 성 소수자, 인권,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는 행동이죠. 2004년부터 시작된 ‘국제 성 소수자혐오 반대의 날’은 세계 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 분류(ICD)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1990년 5월 17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5월 17일로 정했습니다. 현재 전 세계 130여 개국 주요 도시에서 아이다호를 기념한 다양한 캠페인과 액션을 펼치고 있는 거죠.

 

이제라도 당신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내가 왜 당신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지면 안 되는지를 말입니다. 무지개 행동은 오로지 ‘나’로서 살아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인류에게 남은 최후의 믿음은 사랑의 힘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렇기에 사랑하며 함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미국의 연방법원의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 낸 아름다운 결정문’에 가슴이 설레는 이유입니다.

 

동성 결혼 합법화 : 미 연방대법원 판결 [번역/요제프]

6월 26일 아침, 미 연방 대법원은 동성 결혼을 합법화 했습니다. 연방대법관 앤서니 케네디가 읽은 판결문 마지막 부분을 번역해 봅니다. (지나친 의역과 오역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No union is more profound than marriage, for it embodies the highest ideals of love, fidelity, devotion, sacrifice, and family. In forming a marital union, two people become something greater than once they were. As some of the petitioners in these cases demonstrates, marriage embodies a love that may endure even past death. It would misunderstand these men and women to say they disrespect the idea of marriage. Their plea is that they do respect it, respect it so deeply that they seek to finds its fulfillment for themselves. Their hope is not to be condemned to live in loneliness, excluded from one of civilization’s oldest institutions. They ask for equal dignity in the eyes of the law. The constitution grants them that right. The judgement of the Court of Appeals for the Sixth Circuit is reversed. It is so ordered.

 

결혼보다 심오한 결합은 없다. 그것은 가장 높은 이상의 사랑, 충실함, 헌신, 희생, 가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결혼 관계를 맺기 위해, 두 사람은 그들이 원래 그래 왔던 것 이상의 존재가 된다. 몇몇 진정인(연방 대법원에 상고한 동성애자들)이 밝히듯, 결혼은 죽음을 뛰어넘어서까지도 이어지는 사랑을 상징한다. 이들 남성과 여성이 결혼이라는 것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를 존중한다고 호소한다. 깊이 존중한 나머지 그들 역시 그들의 관계를 결혼을 통해 완성하고 싶다고 한다. 그들의 희망은 우리 문명의 가장 오래된 제도인 결혼에서 격리되어, 외로움 속에 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법 앞에서 동등한 존엄성을 확인받길 원한다. 헌법은 그들에게 그럴 권리를 허용하고 있다. 고로 Sixth Circuit(동성 결혼을 불법화 시킨 재판소 구역) 연방 고등법원의 판정을 번복한다. 이와 같이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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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헌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헌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법치국가는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 나도 국가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긴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비영리 단체가 법인 설립 신청 과정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법무부는 한 쪽에 치우쳐진 인권을 다루는 법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정식 절차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재단 허가여부 6개월 미루다 지난 5월 3일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인권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법인 설립을 불허했다.

 

청소년기의 자아 정체성, 흔하게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없다. 아니 없었다. 12년의 기초 교육과정을 지나오면서 '성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들어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 보시라. 바꿔말하면 개개인을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교육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인생의 제3(생애 주기를 100세로 잡고 네 부분으로 나눈 것)에 들어서야 성 정체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십 대에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 여자 '전혜린'이 있었고 너무 이른 죽음으로 몇 권의 책만을 남기고 떠났기에 박제된 의식이었을 수도 있다.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에 굳이 이거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혼, , 통이다. 누군가의 책 제목 같지만 그 의미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 책은 사회 전반적인 것을 향한 것이니 말이다. 내게 '()'은 당신의 정신이다. '()'은 당신만의 것인 무엇이다. 개성일 수도 당신다운 것일 수도, 암튼 그건 당신의 몫이다. '()'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감이다.

 

 

 

 

인간을 여러 이름으로 나누는 일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LGBT'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은 맞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느낌, 마치 번갯불에 잠시 감전된 듯한 느낌을 만났을 때가 있다면 조금은 알 수 있으려나. 굳이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이 내 관심을 더 끌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3년 전 여름이었다. 초저녁무렵이었고 'PO PO'라는 이름의 그 곳에는 고양이가 무섭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고양이를 싫어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우연하게 '성 정체성'에 관한 궁금증을 찾아 가면서 나의 평소 습관이 나를 얼마나 안일하게 만들어 왔는가도 깨달았지. 내가 좀 더 활동적이고 폭 넓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인생 3기에 와서야 이 궁금증을 갖고 이리도 기웃기웃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지금까지야 성 소수자 인권을 위해 행동하는 단체에 후원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접적으로 열심히 알아가는 중이다. , 나에게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마주할 기회를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채 청년기를 지나왔다는 그 사실에 화가 난다. 자아정체성을 위한 그만큼의 노력이 성 정체성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런 생각들을 제대로 써보게 된 것은 지난 1월에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빵집에서 일어난 일인데 케이크를 주문한 사람이 빵집 주인에게 자신을 차별했다고 시작된 사건이다. 그가 원했던 케이크 위에 쓸 문구는 "Got hates gays"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종교를 믿건 그렇지 않건 이 문구를 쓸 자유도 있지만, 그 문구를 거부할 자유도 있다. 그것을 '차별'의 의미로 다가선다면 이해할 수가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신(GOD)은 선(Good)이다. 그걸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GOD LOVES EVERYONE!"

 

빵집 주인이 그의 주문을 거부한 이유이다. 과연, 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것이 차별인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미국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오는 516일 오후 2~8시 서울역 광장에서 ‘2015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아이다호 공동행동)을 개최한다. 전국 성소수자, 인권,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는 공동행동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517)을 기념해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경종을 울리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의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과 문화제를 연다.

 

2004년부터 시작된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은 세계 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분류(ICD)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1990517)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517일로 정하고, 현재 전 세계 130여 개국 주요 도시에서 아이다호를 기념한 다양한 캠페인과 액션을 펼치고 있다. 이제라도 당신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내가 왜 당신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면 안 되는 지를 말이다. 무지개 행동은 오로지 로서 살아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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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행동

Overdye*~ 2015. 6. 27. 00:08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헌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헌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법치국가는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 나도 국가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긴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비영리 단체가 법인 설립 신청 과정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법무부는 한 쪽에 치우쳐진 인권을 다루는 법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정식 절차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재단 허가여부 6개월 미루다 지난 5월 3일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인권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법인 설립을 불허했다.

 

청소년기의 자아 정체성, 흔하게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없다. 아니 없었다. 12년의 기초 교육과정을 지나오면서 '성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들어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 보시라. 바꿔말하면 개개인을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교육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인생의 제3(생애 주기를 100세로 잡고 네 부분으로 나눈 것)에 들어서야 성 정체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십 대에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 여자 '전혜린'이 있었고 너무 이른 죽음으로 몇 권의 책만을 남기고 떠났기에 박제된 의식이었을 수도 있다.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에 굳이 이거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혼, , 통이다. 누군가의 책 제목 같지만 그 의미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 책은 사회 전반적인 것을 향한 것이니 말이다. 내게 '()'은 당신의 정신이다. '()'은 당신만의 것인 무엇이다. 개성일 수도 당신다운 것일 수도, 암튼 그건 당신의 몫이다. '()'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감이다.

 

 

인간을 여러 이름으로 나누는 일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LGBT'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은 맞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느낌, 마치 번갯불에 잠시 감전된 듯한 느낌을 만났을 때가 있다면 조금은 알 수 있으려나. 굳이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이 내 관심을 더 끌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3년 전 여름이었다. 초저녁무렵이었고 'PO PO'라는 이름의 그 곳에는 고양이가 무섭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고양이를 싫어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우연하게 '성 정체성'에 관한 궁금증을 찾아 가면서 나의 평소 습관이 나를 얼마나 안일하게 만들어 왔는가도 깨달았지. 내가 좀 더 활동적이고 폭 넓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인생 3기에 와서야 이 궁금증을 갖고 이리도 기웃기웃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지금까지야 성 소수자 인권을 위해 행동하는 단체에 후원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접적으로 열심히 알아가는 중이다. , 나에게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마주할 기회를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채 청년기를 지나왔다는 그 사실에 화가 난다. 자아정체성을 위한 그만큼의 노력이 성 정체성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런 생각들을 제대로 써보게 된 것은 지난 1월에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빵집에서 일어난 일인데 케이크를 주문한 사람이 빵집 주인에게 자신을 차별했다고 시작된 사건이다. 그가 원했던 케이크 위에 쓸 문구는 "Got hates gays"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종교를 믿건 그렇지 않건 이 문구를 쓸 자유도 있지만, 그 문구를 거부할 자유도 있다. 그것을 '차별'의 의미로 다가선다면 이해할 수가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신(GOD)은 선(Good)이다. 그걸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덴버의 한 베이커리는 LGBT 권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빌 잭이라는 손님은 스스로가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기독교라는 자신의 종교 때문에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잭은 지난 3월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성경 모양의 케익 두 개를 주문했다. 여기까지는 주인 마조리 실바에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잭은 이 케익에 "신은 동성애자를 증오한다"라는 문구 등의 반 동성애 문구를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두 남성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위에 크게 붉은 X자를 그려 달라고 요구했다. 실바는 KUSA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그의 차별적 행위를 거부했다고 해서, 나에게 오히려 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해요."라고 말했다. 결국 실바는 잭이 요구한 메시지를 케익에 새기는 것을 거절했다. "저는 그저 옳은 것을 위해 저항한 것 뿐이에요. 모든 차별과 증오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나은 곳이 될 지 상상해 보라구요! 저는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저항할 것이고, 저의 경험이 부당함을 마주한 다른 사람에게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GOD LOVES EVERYONE!"

빵집 주인이 그의 주문을 거부한 이유이다. 과연, 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것이 차별인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미국은

2015년 6월 26일로 세게사의 한 순간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오는 516일 오후 2~8시 서울역 광장에서 ‘2015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아이다호 공동행동)을 개최한다. 전국 성소수자, 인권,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는 공동행동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517)을 기념해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경종을 울리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의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과 문화제를 연다.

 

2004년부터 시작된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은 세계 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분류(ICD)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1990517)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517일로 정하고, 현재 전 세계 130여 개국 주요 도시에서 아이다호를 기념한 다양한 캠페인과 액션을 펼치고 있다. 이제라도 당신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내가 왜 당신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면 안 되는 지를 말이다. 무지개 행동은 오로지 로서 살아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이고 싶다.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아빠를 찾아 나서는 기웅.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성적 1등급의 우등생 용주와 학교 내 폭력서클의 우두머리가 된 일진짱 기웅이 선택한 방법은 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친구'였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절친했던 두 친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로 엇갈린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지요. 함께 중학교를 다닌 기택이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자, 기택을 감싸고 여전히 가까이 지내는 용주와 달리 기웅은 이들을 지켜보기만 하죠. 허나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선택한 기택의 제보로 용주는 학교에서 졸지에 추락하여 조롱거리가 됩니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용주의 엄마는 비혼모로 당당합니다. 아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기웅은 엄마와는 단절된 채 직장에서 해고되고 복직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갔다 와 숨어 살고 있는 아빠를 찾아 다니죠. 기웅의 모습과 다를 수 잇었던 용주의 내면에 쌓인 힘은 가정환경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지요.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다면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강제 전학을 시킵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한다면 상관없는 일이 되기도 하죠. 학교는 학생이 아니라 '서울대'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용주의 성정체성의 다름을 무시해 버리죠. 아주 쉽게.

 

"그런 거 다 상관없어. 서울대만 가!"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학교 벽에 자신을 남기고 떠난 용주.

 

학교폭력이 왜 발생하게 되는 지, 아이들은 왜 서로를 깔아 뭉개며 싸워야 하는 지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 문제를 의식하게 됩니다.

친구가 성적보다 중요하냐며 다그치는 학교 선생님까지 세상의 비틀어진 잣대와 어른들의 왜곡된 시선을 십대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몸으로 은밀하게 제보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몸짓을 사회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거죠. 준비가 안 된 사회, 개인의 삶이 자유의지로 발휘되기 어려운 한국사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현실인 것일까요. 부디 많은 어른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가 19금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문제가 바로 어른들이 만들어낸 원인에 의해 나타나는 어두운 현상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기성세대의 은폐하고 싶은 욕구를 대변하는 것이라 여겨지더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교묘하게 금지하는 나라, 그래서 더욱 어둡기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제보자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를 향해 말을 겁니다. 그들의 말에, 행동에 귀 기울이고 어울릴 수 있는 이 사회의 성찰과 격려, 응원까지 너무도 간절합니다.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그들 스스로의 몸짓으로 제보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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