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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5일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의 정당해산심판안을 청구하고 정당활동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자, 같은 날 문재인 의원의 검찰 소환과 나란히 언론의 화두가 되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무오류의 논리를 펼치는 건 의식적으로 오류에 대한 면역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 확실한 근거가 존재할 때 우리는 오류가 없고, 논리적이라고 말을 한다. 정부가 하는 일이 논리적일 때 대중은 그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할 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부가 하는 일들이 오류에 둘러 쌓여진 채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기에 정부에 대한 신뢰감은 실종 중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정부의 ‘종북’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보수세력이 야권 전체를 싸잡아 ‘종북세력’으로 낙인찍고,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정치적 타격을 주곤 했다. 이런 식의 논리가 만연한 이유는 오히려 ‘분단국가 처지’를 빈틈없이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을 뒤집을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참이라고 믿을만한 타당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반박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애초에 그 가능성을 배제해 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 때도 있다. 그렇게 조작된 사건이라면 모든 증거가 한쪽에만 유리하도록 기우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해산심판 청구안을 꺼내든 정부의 의도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넘어 야권 전체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그간의 정부가 보여 온 국가주의를 내세워 편가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 본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욕을 충족시키려는 방법으로 너무 오래 써 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즉, 그동안 언론플레이, 포퓰리즘, 총체적인 관권선거 등에서 드러난 오류의 면역성에 기대고 있다 하겠다. 결국 뭔가를 설득력 있게 부정할 때 흔히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번 법무부의 성명은 ‘정의의 축소’로 보이게 하는 교묘한 말장난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관련사진


통합진보당원들이 5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긴급 기자회견



오류에 대한 면역력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음모론인데 증거들마저 사실상 음모론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가짜논리가 극성을 부리며 진행되고 있는 허울만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추락한 현실에서 국가안보에 관한한 우리 사회는 자신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가능성마저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생각이 경직됐을 공산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정부가 통진당의 해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기감을 조장하고 있다 하겠다. ‘조건부 진실’이라는 오류는 놀라운 주장들이 모호한 정의(定義)를 근거로 제기되곤 한다. 도대체 어디까지 달려갈 설국열차인가.


대의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라고 옳은 선택이라 할 수만은 없다. 다수결이 지닌 오류가 아니던가. 그런 오류들에 면역된 구성원들은 고질적으로 각인된 언어의 왜곡된 개념에 갇혀 ‘내 식대로 정의(定義)’를 내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철학자 앤서니 플루는 이런 식의 주장에 ‘진정한 스코틀랜드 사람의 오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문에 대문짝하게 난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를 보며 ‘진정한 스코틀랜드인이라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는 말로, 그럴듯한 이유가 되어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지난 대선까지 이어져온 야권연대의 한 축인 동시에 ‘종북’ 논란의 당사자인 탓에 통진당을 감싸면 마치 내가 유유상종이라고 생각되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급진적인 정책이나 발언에 ‘종북’이란 왜곡된 용어를 씌우는 가짜 논리들을 바로 잡을 의식적인 노력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나 뭐든 원하는 대로 정의하고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진실을 중시한다면, 정의(定義)가 공정한지 따져봐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의 다양성이 보장되어 정책의 차별화와 그에 따른 국민들의 소수 의견까지도 반영될 수 있을 때 사회구성원들의 보다 나은 삶이 마련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될 가능성이 깃드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RO라는 조직을 위험한 단체로 규정한 근거가 녹취록에 따른 것인데, 

        녹취록 상에 나타난 발언을 근거로 내란을 음모했다고 하는 것은 순환 논리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제발 ‘정치적’으로 ‘진화’ 좀 하자. 그러기 위해 다양성을 획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통진당이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해도 정당의 해체는 법무부가 나설 일은 아니다. 과오에 대한 사실 규명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정부는 스스로 가짜논리에 갇혀 여전히 대중에게 호소하는 오류까지 저지르고 있다. 단어의 의미가 상황의 ‘진실’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언어를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특정 용어의 의미를 엄격하게 규정할 때 이런 식의 억지 논리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고착된 ‘이념’은 이미 해체된 지 오래인 세계화로 열린 시대가 아닌가. 정부가 알아야 할 ‘진실’은 대중이 결코 아둔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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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시대의 '음서'가 현대에 되살아 나려 한다. 삼성자사고 개교의 소식에 더 큰 한숨과 한심한 정부에게  왜 그러니~ 하며, 목을 빼고 있는 다수의 민초에 속한 1인으로 몇 년 전 읽은 책을 부활시키며 곱씹고 있다. 부모가 잘나지 못하면 자식도 잘날 수 없다는 삼성판 '음서'는 다시 말해, 부모가 용기를 내면 자식도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겠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며 채워주고 잘못된 것들은 바로 잡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담긴 몇 해 전에 만난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학벌없는 사회)'를 떠올리는 시간이다.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들을 사유와 분석을 통해 쟁점화 하며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8명의 필진들이 쓴  이 책은 '학벌없는 사회'로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학교를 떠나라!" 진학을 앞두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어린 그들에게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말이다. 더우기 내 아이들에게도 건네기 어려운 말이다. 적어도 지금 이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학교 밖에서 만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기에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그 희망은 사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내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내용들이지만 과연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열릴 혼돈과 어지럼증은 어떤 마음의 변화를 오게 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만나는 시간 내내 '내 속에 웅크린 허무(dada)'를 불러내어 만났지만 내 생각이 크게 필자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삶으로 향한 전환을 건네는 것이고, 아주 특별한 기회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먼저, 돌을 막 지난 첫 아이의 '바람그리기'부터 시작된 그림에 대한 재능을 키우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일관성을 대학입학까지 유지했던 부모로서 삼성판 '음서'에 떠오르는 생각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다. 수요자의 거부만이 답이다. 허나 그 답을 낸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있겠다 정도일 것이리라.

내게는 오로지 제 삶에서 '그림'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아이가 스물이 되자 자신의 진로에 스스로 딴지걸기를 해, 저 스스로가 더 힘들고 막막할 인문학을 선택해 다시 시작하기를 선언한 첫째의 삶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 즈음엔 대한민국 고3, 둘째의 갑작스런 진로 변화와 이탈, 저항에 동조하고 수포자로서 선택의 한계를 넘으려고 매진하며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딸의 모습에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의 시간이 있었다. 둘째에게 그림을 접고 인문학으로의 선택은 수학을 하지 않았던 수포자의 한이 반영되기에 서울에 있는 대학진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도움과 서울특별시를 탈출한 내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의 시간들이라 여겼던 것들이 아이들의 선택과는 다름을 알아차리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위한 선택에 우선적으로 대응을 해왔다. 그들의 미래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내가 서울특별시를 벗어난다는 두려움을 넘어서면서 찾아낸 자유로움으로 채워지는 삶들을 생각하고 아이들의 정서적인 독립선언으로 열릴 고단할 시간에 응원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둘째는 제 언니와는 다르게 동양미술을 선택해 진행하던 고교과정에서 그 뜨건 고3 수시 기간 중에 돌연 전공을 인문학으로 바꾸어 차악의 선택을 향했다. 저 스스로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기에 타인의 시선을 벗어던지고 원하는 학문의 길로 여행을 찾아가는 시간들에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결코 늦지않은 오히려 적절한 시기, 그러나 타자의 시선에선 결코 현명하지 못한 둘째의 <선언>은 한 인간으로서 성장한 모습이었기에 그동안의 시간들을 뒤돌아 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일이. 그렇게 해서 얻을 명문대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외면하고, 그녀에게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고통이었음을 생각하면 미리부터 짐짓 건넨 진로에 대한 방향 모색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만 그녀가 그 길로 나아갈 때 온전하게 스스로를 느끼지 못한다면 대학 4년 내내 스스로 고통과 우울, 외로움과의 지난한 투쟁으로 패배의 감정을 만나기도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까지도 경험한 후에야 그녀는 진정한 스스로의 얼굴을 만들어 낼테지만 말이다.

이런 우려함도 이제는 치루어 내어, 둘째는 대학 입학 후 반학기를 다니고, 2년 휴학의 시간을 치루어 내더니 자신의 재능을 재발견하고 복학을 했다. 그녀는 지금 한 학기 중 얻을 수 있는 학점을 취득하기 보단 스스로채우지 못한 시간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란 것은 늘 내 가까이에 있었고, 이 저속한 사회가 끼친 영향력에서 자유롭기만 하다면, 매일이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리라. 또래들보다 2년이 뒤늦었다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를 인정했기에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스스로를 만나며 작은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며 살아질 것이다. 내가 누리는 이만큼의 풍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시간이 빠를수록 살아있는 동안 느낄 수 있는 행복한 마음은 일상을 채워 줄 것이다. 그 시간들로 이루어질 많은 감동들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라 내가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에 있건 학교 밖에 있건, 공간의 의미는 우리의 영혼을 방해하지 않는다. 내가 놓인 이 사회가 나의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주된 원인일 뿐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만이 필요하다. 이것이 늘 나에게로 던지는 물음이었고, 이렇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내 주변과 나눌 수 있는 이 마음이면 되었다고, 마음만 부자인 내게 늘 다독여왔다. 둘째의 분투가 통하여지기를 응원하면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말했다. 탐욕을 버리고 나를 통한 너를 인식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간들이 계속 열려질 수 있기만을, 간절하게 열망하는 내 안의 힘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기만을, 한 개인의 용기있는 선택이 '딴지 걸기'라고 말이다.

세째는 학교를 버렸다. 의무교육을 마치기까지 진심으로 고마운 것은 별 사고없이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다. 아직도 내겐 숙제이다. 세째가 학교밖에서 제 방식으로 사회와 교류 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학교'의 의미를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적어도 어린 세대들에게 내 방식을 강요하거나 삶의 잘못된 모습들을 각인시키거나 하지는 않을 듯싶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학교'가 한 몫을 단단히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변화의 가능성은 늘 내게 달린 문제였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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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media.daum.net 

삼성의 노조 탄압을 규탄하는 집회가 서울 서초동 삼성 본사 건물 앞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증인채택을 놓고 여야가 충돌해 3시간 동안 국감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가 세 시간 뒤에 속개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도대체 한국에서 ‘재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 본다. 자료들을 다시 찾아 보니 재벌의 출생은 민족자본 부재의 시대에 잉태되고 성장해 왔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즈음 이병철, 정주영 등 오늘날 재벌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태어났다. 1920년대에 회사령이 철폐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회사는 설립 되었다. 하지만 이 회사들은 1937년 일본의 중일전쟁 도발로 조선이 병참기지화되면서 일본 독점자본이 대거 몰려오고, ‘중요산업통제법’이 실시되자 몰락해 갔다.

다시 말하면 해방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친일·부일을 통해 일제 독점자본의 하위파트너로 기생했을 뿐이다. 8.15 해방과 함께 친일·부일에 자유롭지 못한 거부들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튼튼한 정치적 동아줄을 잡고자 움직였고 정경유착의 시대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레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튼튼한 동아줄을 잡은 이들은 독점과 특혜로 어떤 정부이던 그들과의 유착에서 성장한 것이라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 물론 재벌은 196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지만, 1950년대에 이미 그 단초가 시작되었다. 독점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실수요가제 공급, 원조물자의 할당 및 판매와 관련된 상업, 안정적인 자금 공급처 역할을 하는 금융업이 자본계열화하여 하나의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 이병철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재벌의 역사는 계속 되었고 급속한 재벌의 성장은 곧 가혹한 노동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대자본가들의 저급한 생산력의 기초를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보완했고 노동임금은 노동량에 비추어 터무니 없었으니까 말이다. 1960년대에도 노동자들은 기아임금에 허덕였고, 그 시기에 청계광장에 홀로 있는 ‘전태일 열사’를 만들어 냈다. 1970년대는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항거한 ‘아름다운 청년’의 분신에도 나아진 것은 별로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 재벌 지배체제는 공고하게 확립되었고, 높은 생산성은 여전히 저임금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재벌기업 노동자들은 노동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재벌기업들은 비정규직 노동력을 활용해 고용의 유연성을 확대하고 신기술을 도입해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자 했는데, 1997년 경제 위기는 이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즉 재벌 중심으로 성장해 온 우리나라 경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인 것이다. 주기적 공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는 부분도 있지만 재벌기업의 고부채 구조와 금융자유화 요구가 큰 요인이었던 것이다. IMF의 구제금융으로 위기를 수습해야 했던 만큼 한국경제는 IMF의 신자유주의 요구에 따라 재편되어 갔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정리해고제를 도입하여 대량 실업을 초래했다.


[출처] http://imgv.search.daum.net/ 뉴시스

사회운동단체들이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여성 노동자의 권리 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 단체는 요구안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취임 이후 첫 세계여성의 날이라 의미가 각별하다"며 "여성노동자의 가치를

인정하고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촉구했다. (참으로 각별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노동의 역사가 현재에까지 이르렀다는 것, 최소한의 변화에 시선 맞추기를 거론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국가의 성장 속에서 더욱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를 보면서 보다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경제는 왜 성장해야 하고, 성장을 했다면 우리는 왜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인가. 노동자가 더 많은 나라, 국가의 성장에 더 많은 희생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왜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피켓을 들며 광장에서 삶의 현장들에서 목소리를 내고 결연하게 주먹을 쥐어야 하는 것인가.

노동현장에는 더 이상 취재를 하는 기자들을 찾아 보기 힘들어졌다는어느 사진가의 인터뷰를 듣고 우리의 시선은 무엇을 향해 맞추고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했다. 재벌들이 부리는 끝없는 욕망의 기차에 편승하는 이들의 탐욕은 이제 야만스럽기까지 하다. 한정된 자원과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노동의 가치는 저하될 수 없는 고귀함이어야 한다. 특히나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노동 없는 임금이 가능한 것인지 정부에게 묻는다.

직업의 다양성만큼이나 노동의 모습은 다르다. 그 다름의 노동에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과학의 진보와 함께 문명의 이기가 노동의 종말을 가져올 수 없듯이 노동이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핍박한 사회에서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노동자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면 한 국가의 장래는 요원하다. 노동현장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을 외면하고 있는 재벌과 그에 동조하는 정부는 노동자의 임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리인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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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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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은 교사의 기본적 권익 옹호, 민주교육 발전에의 기여, 참교육 실현을 목적으로 내걸고 있다. 주요 활동으로는 교사들의 근무조건 개선 및 조직 강화에 관한 활동, 교육환경 및 교육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 교육의 민주화와 자주성 확립을 위한 활동, 노동3권의 완전보장 등 교육관계법의 개정을 위한 활동, 참교육 실천 활동 등을 설정하고 있다. 결성 당시 정부는 전교조를 현행법을 위반한 불법단체로 규정해 교원조합의 결성을 무효화하고 관련교사를 구속·파면·해임 조치했다. 이 때문에 전교조는 본래의 목적과 관련된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한 정치활동에 주력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전교조는 1999년 국민정부시절 합법화 되었다.


고용노동부는 23일 전교조에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있는 규약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면서, 내달 23일까지 시정하지 않을 경우 노조설립을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인들은 제쳐놓고라도 학생들은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실체에 대한 인식조차 할 수 없다.‘전교조’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는 학생들이 더 많은 이 사회가 그것을 말해 준다. 네이버 ‘지식in’에 ‘전교조’를 써 넣으면 계속되는 질문들이 보인다. 교육의 현장에서 교육의 주체들을 최일선에서 마주하는 교사들의 인권과 민주 교육을 위한 노동조합으로 인식하고 있는 학생들은 전무할 정도이다. 우리는 왜 다수의 예비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보다 많은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안들에 대해서 이리도 무지할까.


[출처] http://media.daum.net


우리나라 국민들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불편하다고 불평을 하고 노동조합을 ‘집단이기주의’라고 비난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려고 애쓴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봉건 해체 과정에서 시민 계급이 형성되고, 이들이 자본을 축적하여 물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자본주의로 진행하여 시민적 권리 의식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쌓여 왔다. 노동자의 파업을 비난하지 말아야 결국 노동자인 나 자신, 우리의 권리도 지켜진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이런 현실은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식민 시대를 경험하고, 곧바로 자본주의로 편입되면서 그런 소중한 경험을 축적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또한 선진국에서 보편화 되어 있는 노동교육으로 노동법, 노동 운동, 노동조합 등을 외면한 채 교육을 통한 시민 권리 의식을 갖추기 위한 미래 세대를 위한 노력도 기회도 저버렸다. 대부분의 학생이 장차 노동자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학생인 아이들에게 ‘노동자’라는 말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이 받게 될 최저 임금을 최고 임금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이러한 무지에서 오는 시선들이 노동 운동에 대한 비뚤어진 의식을 갖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노동조합에 대해서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매스컴의 정보 전달이나 간접적인 사회 경험 등을 통해 오히려 노동조합은 뭔가 대단히 불순하거나 불온한 단체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의식을 그렇게 조율해온 음모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온 국민들은 ‘반조폭 정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반노동조합 정서’를 갖고 있다. ‘반정서’야 어디 이 것 뿐인가. 최근에는 국가 안보를 내세워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과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파렴치한 일들을 국가기관이 나서서 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진보'를 바라보는 편향된 '반정서'를 확대하여 급기야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도록 조장하고 있다. 


[취재파일] 이석기 내란음모 기소가 남긴 것들, 그리고 지켜볼 것들 관련 이미지

[출처] http://news.sbs.co.kr/


정보화 사회가 진행될수록 전문 직종, 고학력, 비생산직의 계층은 그 사회적 지위가 예전에 비해 더욱 상향되고 사회적 분포도는 더욱 넓어졌다. 다만, 그러한 계층 구성원의 가치관은 개인주의화되고 파편화되어 조직, 집단, 단체 등 공동체 개념을 거부한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는 노동 없이 살아갈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현존재의 생존과 직결되기에 누구도 ‘노동자가 아닐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수의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이 힘을 합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 그 역할을 해야 하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노동자들이 외면하도록 정부가 앞장선다는 것이다.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있는 규약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의도하고 있다는 이해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결국 해직된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이 외면하도록 합법화하여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 3권을 무력하게 만들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계급이 있고,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이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방향이 우리가 지향하는 역사의 진보인 것이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


[출처] http://www.jeonmin.co.kr


노동조합이 없다면 이 세상은 소수의 특권을 누리는 세력들만의 이해가 무자비하게 관철되는 심각한 불평등구조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특히나 전교조와 같은 노동조합은 다른 노동조합에 힘을 실어주는 그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나라의 미래 세대들을 위한 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해, 자신들이 소속돼 있는 교육계의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가장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전교조라는 공동체의 힘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지켜내야 한다. 전교조를 포함한 모든 노동조합은 지금까지 지난한 역사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사회의 특권세력이 노동조합을 혐오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가장 확실한 표적이 되고 있다. 이에 나는 전교조를 적극 지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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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밑에 열린 박근혜 대통령,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한길 대표의 3자 회담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회3자회담’이 별 내용도 결과도 없이 끝나는 것을 보며, 야당과 정국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야당의 장외투쟁을 거론하며 ‘국민적 저항’을 운운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이해가 안 된다.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민생을 거론하고 있지만 현재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급한 사안의 핵심을 회피하며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거나 자각능력이 부족해서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히려 광장의 소리와 야당의 행동들을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해석하며 이 사태를 공안정국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청와대의 의지만을 보여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확인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 나라에 작동되고 있는 ‘청와대 룰’이란 것이다.

 

 

[출처]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30510104604176&srchid=IIM%2Fnews%2F67626214%2F2f65476def26efc926a1632ec9dfdf30  

 

 

앤드루 바세비치는 ‘워싱턴 룰’에서 지난 60년간 미국의 군사정책과 실제 관행들을 관찰해 보고 국제평화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최소한 몇 가지 중요한 지속적인 요소들을 발견해 유지하기 위한 믿음으로 ‘성(聖)삼위일체’를 말했다. 첫째 미 군사력의 세계적 주둔, 둘째 이 군사력에 의한 세계적 힘의 투사, 셋째 현존하는, 또는 앞으로 예상되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세계적 개입주의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미국적 신조가 합해져서 하나는 목표를, 다른 하나는 실천을 규정하는데 이 두 가지가 그동안 미국의 세기를 통치하고 감시하기 위해 워싱턴이 시도해온 방식의 진수를 이룬다고 하며, 이 두 가지를 ‘워싱턴 룰’이라고 불렀다. 이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CIA(중앙정보부)’와 ‘SAC(전략공군사령부)’라는 조직을 만들어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으며, 그들 역시 미국 시민들을 비밀과 은폐로 몰상식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세비치가 말하는 ‘워싱턴’은 지리적 의미가 아니라 이러한 워싱턴 룰을 수호하고 집행하는 인물과 일련의 조직들로 행정, 입법, 사법부의 상층부를 비롯해 국가안보의 주요 구성원-국방부, 국무부, 그리고 최근 만들어진 국토안보부, 나아가 정보기관들과 연방 법집행기구들-이 포함된다. 또한 일부 싱크탱크와 이익단체들, 그리고 변호사, 로비스트, 해결사, 전직 관료, 예비역 군 장교 등 아직도 권력 핵심부와 끈이 닿는 사람들을 워싱턴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또한 거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 방위산업체와 대기업, TV방송국과 ‘뉴욕타임스’와 같은 고급신문들, 나아가 대외관계협의회나 하버드 대학 케네디행정대학원 같은 준학술 조직들도 포괄한다. 이들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워싱턴 룰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외는 없다고 이 책의 역자 또한 전한다.

 

 

정파를 넘어서서 정치적 협력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과거 식민세력에 협력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아니면 그들이 이미 누려오던 기득권을 보호받은 집단으로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그 연결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다. 경제적 성장만 되면 친일도, 독재도, '무조건 친미'도 좋다는 암묵적 정서가 그들에게 시민의 권력을 일임해 주었다. 우리들도 한 몫을 거들었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이미 그 힘을 잃은 ‘제국주의’나 ‘이념’들이 아직도 거론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5년간을 돌아보며 내가 생각하는 청와대 룰은, 첫째 분단국가를 앞세운 국가안보를 위해 민주주의 원리는 무시할 수 있다. 둘째 국가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사회적 약자에 놓인 국민들의 희생은 당연하다. 셋째 정치협력 집단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국가기관은 권력의 비호에 적극 협조한다. 현재 이렇게 작동되는 정황들에서 나오는 개인의 지나친 억측일까.

 

 

대한민국의 정치협력자들은 너무 뻔뻔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의 직속기관인 국정원의 맹활약과 집권당이 보여 주는 국민 기만 행위들, 독립적인 국가기관들의 대통령 예속화를 위한 검찰 흔들기, 저널리즘이 실종된 공영방송의 허황된 보도들과 보수 언론들의 불공정한 보도 등이 그것이다. 어디 정치 뿐 이던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단절된 소통은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감을 전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사회가 진행되는 그 이면을 철저히 들여다 볼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롤즈(J. Rawls)의 정의론(正義論)을 다시 떠올려 보자. 롤즈의 주장에는 "원초적 상황(original position)이라고 불리는 가상적 상태"로부터 출발해 "앞으로 사회가 어떤 기본 질서를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이뤄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다. 사회적 원칙에 관한 논의는 자신이 처하게 될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게 정상이라는 설명이다.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의외로 많이 있다.

 

 

정의는 어느 계층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들을 알고 개인의 자각과 사회의 성찰을 통해 국기문란에 앞장 서고 있는 정부와 그에 협력하는 집단들을 향해 끊임없이 요구해야만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시민은 정치적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다. ‘워싱턴 룰’의 저자 바세비치는 ‘미국시민들이 시민정신의 빈곤화와 약화에 따라 집단적 책임보다는 개인적 선택을, 장기적 웰빙보다는 즉각적인 욕망의 충족을 더 중요시 한다’며 정부가 그렇게 하도록 “우리가 허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한다. 사회적으로 강자들의 심기를 거스리는 순간 개인은 두려움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의가 통하는 사회는 좌도 우도, 부자도 빈자도 없으며, 나의 이익이 곧 이 사회 공동체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국민 일반의 이익과 의사와 감정을 무시한 채 속속 드러나는 정부의 무능과 속임수, 안이한 자세와 편협한 시각으로 야기되는 판단, 문제제기에 대한 봉쇄와 왜곡과 탄압으로 인해 쌓인 국민들의 뒤틀린 감정은 쉽게 사그라질 것이 아님을 현 정부는 직시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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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는 두 개의 감정들이 서로 엇갈리며 나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모처럼 주말을 18세기 소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만난, 뒤늦게 찾아온 절절한 사랑과 상실의 아픔으로 인한 지독히 낭만적인 감성으로 벅찬 마음이었다. 다른 하나의 마음은 바로 쿠바를 떠나며 남겨둔 혁명가의 마음이었다. 그의 마음은, 그의 정의를 향한 사랑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정의 사회를 향한 체 게바라의 혁명정신은 이 땅의 오늘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마음의 요동침을 고스란히 마주 하는 시간이다.


이제 스물 다섯인 큰애가 존경하는 인물이 ‘체 게바라’이다. 자신도 혁명 정신으로 살아가고 싶다며 그의 평전과 시집을 내게로 건넸다. 내키실 때 읽어 보라며 씨익 작은 웃음을 흘리고 타국으로 떠나 공부를 하고 있게 된 지도 벌써 4년이다. 난 서가에 꽂혀 있는 짙붉은 표지와 그의 얼굴이 그려진 ‘체 게바라 평전’을 보면 애써 외면해 왔다. 사실은 겁이 났던 게다. 이 책을 읽으면 나는 심한 혼돈에 빠질 것이고 그의 삶과 죽음을 떠올리는 것으로만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책을 펼치고야 말았다.


한 개인이 시대정신을 구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고 외면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모두가 체 게바라처럼 행동하는 혁명가가 될 수는 없다. 허나 표창원 교수의 말처럼 냉소주의를 버릴 수는 있는 거다. 아주 쉽게는 아고라 청원에 서명하는 일일 것이고, 당장 일어날 것은 아니라 해도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하다. 혼자의 힘으론 어렵지만 사실은 나부터 시작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 않던가. 모든 변화의 시작은 무모한 듯해도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기에 서명을 하는 일부터 했다.


광장에서 타오르는 촛불과 각계에서 소리 내고 있는 시국선언들, 일상에서 개인적 투쟁을 향한 기운의 전조들은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노래와 함께 가슴속으로 쌓여지고 있다. 온갖 상념들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표현할 수 없는 격한 마음과 함께 지난 밤을 엎치락 뒷치락하며 하얗게 지냈다. 여전히 작동되는 나의 이런 날 선 감성에 적잖이 스스로 놀라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꿈틀거림을 다시 확인하는 거였다. 언론의 직무유기로 나타나는 지(知)의 세계와 무지(無知), 두 개의 현실 세계의 부조화 속에서 낯설게 살아가고 있나 보다.


혁명이란 말이 주는 의미는 좀 전투적이긴 하다. 허나 내게 혁명이란 말은 아주 친숙한 말이다. 가끔씩 나른해지는 나를 발견하곤 할 때면 어김없이 이 생명력 넘치는 말을 내뱉고는 해 왔으니까 말이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책 이름이기도 하다. 그가 책으로 전해 준 것은 스스로가 일으키는 내 안의 혁명이었다. 휘청거리는 청춘의 시절부터 스스로를 다그치고 설레는 말, 그것은 ‘혁명’이란 말이었다. 그 말을 되뇌이면 참으로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오늘은 나와 함께 하는 너를 향해 혁명 정신을 말하고 싶어진다.


체 게바라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의 정신을 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로, 행동으로, 여전히 기억해 내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념을 초월하고 국수주의, 이기주의 같은 것이 없는 건강한 세상을 바랐다. 야만의 땅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아름다운 사람의 전형으로 휴머니스트일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나는 국정원게이트는 정의를 위한 휴머니스트 혁명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를 떠올리고 있다. 정의를 향한 결연한 의지는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강력한 욕구에서 발휘될 수 있다.


나에게 그는 야성을 잃지 않은 사자와 같은 모습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온화하다. 그의 야성이 깨어날 때 세상은 바람을 가르며 그에게 길을 내주게 될 것이라 믿는다. 우리에게 공동의 적은 누구일까.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는 적이 될 수 없기에 그렇다. 적으로서 마주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할 대상으로 진정한 삶을 향유할 수 있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서로 아껴주고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그 길을 가야 할 동행인이고 싶다. 우리 사회가 걸어 온 그 혼돈의 시간들에서 빠져 나와 체 게바라의 말을 전한다.


“인간은 태양을 향해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어야 한다. 태양은 인간을 불타오르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 준다. 고개를 숙인다면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삶의 참된 가치를 외면한 채 자본과 탐욕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들에게 체 게바라의 낮은 곳으로 향하는 혁명 정신을 오늘은 참으로 격하게 그러나 간절함을 담아 이야기 하고 싶다. 한 개인으로서 이 사회를 향한 사랑이 계속 될 수 있기를 나에게도 당부를 하며 남은 이 밤의 시간은 체 게바라의 시를 읊조리며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이 땅의 사람들이 지배 권력의 남용에 분노를 드러내는 다양한 모습들은 더 이상 우리 사회를 부정의로 몰아갈 수 없다는 결연함이다. 부당한 권력의 횡포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는 혁명정신의 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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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처음 접한 소식은 ‘훈련 도중 높은 파도 휩쓸려 5명 실종’이란 뉴스의 헤드라인이었다. 기사 전문을 읽으며 시작된 나의 촉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예민하게 발동되고 있나 보다. ‘태안 해병대 캠프’라는 익숙한 이름과 현재 사고가 난 학교와 연결된 십대들이 내 주변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속속 알려지는 이야기는 우리 교육의 부실함을 여지없이 드러내 주었다. 금요일 밤을 하얗게 지나고 나는 1인 시국선언을 트위터에 했다.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었지만 어떻게든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는 견디기가 힘든 밤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교육을 향한 1인 시국선언을 한다.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분량이 넘칠 이 나라의 잃어버린 ‘민주주의 공화국’의 정체성을 되찾는데 결연함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의 시국선언은 현재까지도 넘치고 있는 사안들이다. 나는 어제 태안에서 해병대캠프로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에게 일어난 인재를 보며 교육의 위험 수위를 더욱 절감했다. 시급한 교육의 변화만이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여 이에 참 교육을 위한 이 나라의 위급함을 직시하며 시국선언을 한다.

하나, 잘못된 교육제도의 희생에 교육부는 과거의 식민 교육을 멈추기 바란다.
둘, 교육의 주체는 ‘학생’임을 자각하기 바란다.
셋. 학생인권조례를 학교의무화로 하여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넷, 학생의 자율권을 보장하길 바란다.
다섯. 향후 교육제도의 혁신을 위한 즐거운 혁명은 기성세대들이 책임지길 바란다.

미래를 향한 시선에 십대들의 삶은 실종되어 있다. 언제까지 외면하고 기다리라고 할 것인가. 사회 현안들에 시급함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는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들을 놓치고 있다. 십대들의 신음과 무기력한 모습들에 시선을 맞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성세대들의 과거, 성공 신화의 허상에 압박을 느껴 스스로의 삶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욕망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향한 삶을 향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즐거운 학교로 총총 교문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십대들의 생기 있는 얼굴들이 이 나라의 희망이기에 교육의 혁신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2013. 7. 19.

 


베스트셀러로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외면했던 것은, 아마도 개인적으로 그것을 읽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간되고 몇 해가 지나, 서가 한 켠에 자리 잡아놓고 있던 이 책을 두 해 전에 읽었다. 이 책은 스스로가 ‘엄마’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느낄 때에야 가슴으로 절절하게 전해질 수 있겠다고 혼자 읊조려 보았다. 이 땅의 엄마들이 살아온 시간들의 모양새와 과정들은 달라도 ‘엄마’라는 그 호칭이 건네는 애닯고, 아리고, 고맙고 정겨운 말의 힘을 이 책은 벅차도록 뿜어내어 주었다.

내 현실과는 다른, 너무나도 다른 ‘엄마’라는 모습을 만났다. 가슴에 묻어 있는 나의 엄마 모습은 분명 아닌데도 눈물이 가슴 밑에서 부터 솟아 올라 거기까지만! 하곤 억지로 책을 덮었다. 이미 날이 바뀐 새벽에서 아침의 경계가 펼쳐지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에 젖은 가슴을 닫아버렸다. 그 다음 날에도 가방에 넣고 다니며 가까스로 꺼내 마저 읽고, 또 가슴 가득 그 날들의 느낌들이 다시 튀어 나왔다. 그리곤 책을 덮고 스스로에게 이건 무엇이지? 물으며 가까스로 책의 여백에 빼곡히 써내려가며 아무래도 나이듦인가 싶기만 했다.

내가 그렇게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로 떠나갔을 때, 그 어느 날 나의 흔적을 찾아 헤메는 세 아이들의 모습이 가득 찬다. 이렇게 저렇게 흩뿌린 나의 흔적들을 아이들이 찾아내면서 이 책속의 아이들처럼 내 아이들도 그리 아플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이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할 것 같은데 아이들이 멀리 있다는 것이 그 날만은 몹시 슬펐다. 나도 엄마는 엄마인가 보다. 그래 세 아이들의 엄마임에도 내 아이들에게 살갑게 해주지 못한 나를 만나게 해 주었다. 이런 내가 아이들에게 훗날 어떤 그리움으로든 남아질테지만 지금은, 지금은 내 앞에 아이들이 있었으면 했던 그 간절함에 잠 못 이루던 밤이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이렇게 책은 시작된다. 책 속의 아이들이 만난 아픔과 내 아이들의 아픔이 함께 나에게로 몰려 와 홀로 있는 시간이 아주 낯설었던 생생한 기억들이었다. 이 느낌들은 그 시간들의 그 마음들이 이번 주말에 분노와 애통함과 절절함으로 아이들을 놓치고 망망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부모들과 오버랩 되었다. 미리 알아차릴 수 없었던 죽음 앞에서 황량하게 남아있는 이들의 아픔들이 이 책에 녹여져 있어서였다. 늘 곁에 있었기에 눈치 채지 못했던 수많은 마음들을 어찌 진정시킬 수 있을까. 주변인인 나조차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이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데 말이다.

열여덟 아들이 묻는다. 내가 그렇게 되었다면 엄만 어떻게 했을 거 같아? 태안 해병대 캠프참사 얘기를 나누다가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렁그렁, 울먹울먹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먹먹해 진 채 고개를 돌렸다. 난 상상력이 넘치는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이 상황은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그저 까맸다. 엄만 기절해버렸을 거라며 웃는 아이가 순간, 날아가 버릴까 봐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거다. 모든 부모는 그런 거다. 어느 곳, 어느 아이, 할 것 없이 금지된 죽음이든 참사로 맞이한 죽음이든 같은 마음이다.

내 아이 네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부모는 그렇다. 아이들을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오열하고 있을 부모들이 이번 참사에만 있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여린 죽음의 비보가 있어 왔다. 우린 무엇을 해 왔지? 난 이 기운에서 빠져나오려고 무진 애를 써 보는데 잘 안 되고 있다. 예정된 대학생들과의 번개모임도 취소하고야 말았다. 처박혀 있다 보면 나아지리라, 책도, 음악도, 트위터도 건성이다. 충분히 슬퍼한다는 것이 가능한 지 모르겠다. 슬픔은 시간을 이동하며 불쑥 튀어 나왔다가 슬그머니 내달아 도망가기도 하니까.

예전에 품었던 사회를 향한 모든 질문을 근본적으로 변경하거나 혹은 해체해 버려야만 한다. 교육과 사육. 돈 버는 기계와 돈 버는 인간. 무책임한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가족과 국가. 의무와 책임.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우리는 늘 개인과 사회와 조화를 꾀하려고 노력한다. 그 조화는 공공의 선을 향한 가치 추구에 있기 때문이었다. 교육의 병폐는 발랄하고 건강한 아이들을 학교라는 곳에 가두어 안전망이란 구실과 학생다움이라는 저들만의 틀에 몰아넣어 길들여 온 것이다. 교육은 전 세대들이 책임을 다 하여 이끌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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