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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국사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벅찬 기대와 오랜 아픔을 치유하려는 몸부림이 미투로 이어지고 있나 봅니다.

 

남과 북이 평화를 향한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가운데 오랜 세월 묻어둔 아픈 기억들을 꺼내는 용기의 미투와 힘을 보태고 있는 윗유운동도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우리 모두의 꿈틀거림이라 생각합니다

 

김미덕의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1부에서 이어지는 2부는 또 다른 가부장적 시선과 공감, 정체성, 그리고 탈동일시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2) 방송듣기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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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7화 방송

 

김미덕의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로 공부하기.

 

 

방송 분량이 1회로 마무리하기에 좀 길어졌어요. 그래서 이번 페미니즘 공부는 두 번에 나눠 업로드됩니다. 1회 방송은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 중에서 페미니즘 외부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구요. 여성주의 지식을 다루는 공동체 내부에서 명확하게 해야 할 쟁점들을 공부했습니다.

 

대중적으로 이해되는 여성주의 지식이 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사실, 여성주의 지식이 폄하되는 양상과 원인, 한국에서 논의되는 페미니즘이 서구 중심적이라는 비판이었죠.

 

다음 주 업로드될 2부에서는 여성학계 내부에서 더욱 풍부하게 논의되어야 할 쟁점들로서, 페미니즘의 정의와 관련된 가부장제의 속성, 여러 사회 정체성 변수들을 염두에 두면서 젠더가 사회 분석 범주가 된다는 것의 의미, 또한 여성주의 지식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며 인식론의 전제로 인식되는 공감 전략의 한계와 저자 김미덕이 제안하는 탈 동일시를 생각해 봅니다.

 

이번 에피소드 방송 음질이 다소 떨어지는 점, 죄송합니다. 녹음실이 아닌 곳에서 하게 되어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함께 한 청년 형근씨 유쾌한 시간 함께 해서 신나는 공부였습니다. 2부에서 다시 만나요.

 

그 많은 페미니즘이야기는 미투에 용기를 낸 분들과 함께 하는 윗유 방송입니다.

 

페미니즘 공부는 우리 모두를 로 살아가게 해 줄 힘을 주는 실천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주세요. 언제나 #MeToo에 목소리를 내는 그대들과 함께 하는 많은 사람이 있음을!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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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MeToo에 #WithYou (1)

 

 

성범죄는 개인이나 한 집단만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바로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공소시효라는 장벽. 현재까지도 수많은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경찰을 통하여 제대로 된 사건의 해결을 받아내지 못하자 이러한 범죄들을 대중에게 폭로하고 이슈를 만들어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운동인 “MeToo”

 

그에 응원을 보내는 “WithYou”가 지속되는 가운데 근원적인 문제들을 풀어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으로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가 반드시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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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월 은행나무에서 출간한 그럼에도 페미니즘 두 번째 방송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5화. <그럼에도 페미니즘>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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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그럼에도 페미니즘 (1)

 

<그럼에도 페미니즘> 20171월 출간. 윤보라 외 / 은행나무

-일상을 뒤집어 보는 열두 가지 질문들-

 

책을 읽고 일상에서 발견하는 페미니즘을 같이 이야기 나눕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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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에서 못 다한 이야기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충남도의회는 2일 제2차 본회의를 열고 ‘충청남도 도민 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 폐지 안’을 가결했습니다. 인권조례는 인천시를 제외한 전국 16개 시·도가 제정해 시행하고 있으며 인권조례 폐지안이 가결되기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인권조례를 만든 자유한국당(당시 새누리당) 소속 도의원들이 스스로 폐지에 앞장섰습니다. 인권 조례 폐지안은 자유한국당 김종필 의원이 대표 발의했는데 이날 표결에 앞서 2시간 동안 벌어진 토론에서 한 말은 반지성주의에 대표적인 사례더군요.

 

그들이 내건 인권 폐지의 주장 근거는 도민 인권선언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가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무지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인권 조례를 폐지하는 발상 자체부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호하려고 만든 인권 조례이기도 하니까요.

 

다양한 사람이 모여 다름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공동체를 만들어 나누기 위해 충청남도에는 인권 기본 이해 교육이나 관련 문화 행사가 많습니다. 인권조례가 폐지됨에 따라 그동안 도민의 인권 개념 이해 및 관심 유도 등을 위해 진행한 인권에 대한 활동들이 어려워집니다. 활동 지원에 어려움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일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일상에서 인권 교육의 필요성입니다. 부족한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서 지역 사회를 이끌어갈 도의원들이 이 정도이니 말문이 막힙니다. 일부 개신교도의 무논리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말입니다. 종교가 정치에 영향을 준다는 일이 현대에도 가능한 일이라니 참으로 한심한 거죠.

 

인권 교육이 제도로 정착하지 못한 현실에서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는 더 자유롭고 평등한 학교를 만드는 열 개의 목소리로 그 시작을 알려줍니다. 사회를 변화하게 하는 힘은 개인에게서 나옵니다. 인권 감수성이 발휘되는 사회는 페미니즘에서 지향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성이 평등해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에 공감하게 됩니다. 성 감수성은 다른 성별의 입장이나 사상 등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이기에 여성이나 남성에 대한 고정되고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줍니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선언만을 원하는 게 아니죠.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일이 먼저라는 겁니다. 페미니즘은 ‘미래인’에서 출간한 「여성학」을 보면 서구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여성의 권리에 대한 옹호’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군요. 페미니즘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나 실체를 가진 것이기보다는 다양한 갈래의 이념적 토대와 관점을 견지하는 사상, 이론, 행동주의(또는 운동)로 구성된 묶음이기 때문이죠.

 

교육만 바뀌면 제도, 법률만 잘 만들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일은 아닙니다. 필요한 일이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바로 지금, 나부터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대체로 알지 못할 때 가장 크게 나를 휘어잡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공부하는 일은 경험하는 것만으로 너무 부족합니다. 그 부족한 경험을 대신할 수 있는 일이 공부라고 생각해요. 덜 불안해질 수 있거든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이런 선언이 필요한 시기, 페미니즘이 보편성을 획득하기까지 과정이라 생각해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산다고 해서 “나는 민주주의자입니다!”라고 선언하진 않잖아요. 보편으로 인식되고 있는 개념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늘 위기에 봉착합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그 사실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거죠.

 

그 많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현재 한국에 있는 대학에 여성학과는 어떨까 궁금해서 찾아봤죠. 여성학과를 폐지하는 대학이 늘어났어요.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한국의 대학은 오히려 순수 학문을 외면하는 정책을 우선으로 하더군요.

 

나는 ‘인간’ 보다 ‘자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더 크게 사람들을 끌어당긴 것으로 생각해요. 인간보다 자본이 우선되다 보니 자본주의가 강성해진 것을 사회 각 분야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대학의 기업화가 진행되면서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대학의 역할은 찾아보기 어려워진 겁니다. 교육이 변하는 사회속도는 아주 느립니다. 그러니 나부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힘, 통찰할 수 있는 앎이 필요합니다.

 

긴 터널을 지나 선생님이 된 세 청년에게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건네는 일로 2월을 열었습니다. 적어도 내 주변에 페미니즘을 공부해 청소년들과 유쾌함을 나눌 선생님이 있어서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를 계속할 이유는 늘어만 갑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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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3화 <충남 도민 인권 조례 폐지>

 

자유한국당 소속 충남도의원들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넘어 모든 지역민의 인권을 강조한

충남 인권조례를 폐지하려고 한다.

폐지안을 표결에 부치는 본회의가 2월 2일 열려 현재 폐지 되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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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에서 못 다한 이야기 <페미니즘은 예술 하기>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동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페미니즘은 예술 하기”라고요. 지금 이 마음을 담아 글의 제목을 만듭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살 수 있기에 더없이 멋진 일이 페미니즘 공부입니다. 호모 아르텍스가 되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와, 예술이다!”

 

이런 말을 하던 순간을 각자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지나쳐 왔던 그 많은 불평등과 차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 사회가 쌓아둔 채 거들떠보지도 않은 진실을 발견합니다. 대중문화로 반복된 획일화된 감각들은 아주 익숙합니다. 그 익숙함을 낯설게 만드는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저절로 내지르는 탄성이 그렇습니다.

 

2017년 12월 8일 한동대 ‘들꽃’에서 주최한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특히 주목한 점은 별 의식 없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개인을 향한 폭력입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권을 지나며 공동체에 골몰해 있었고 그 가능성으로 가까이 다가간 책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남기게 되는 경우를 보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알려줍니다. 내가 무엇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죠. ‘한동대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사건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 책의 기억을 꺼냅니다. 당시 책을 읽을 때는 크게 주목하지 못한 주인공들, 개개인에 내 마음이 다가가지 못했던 겁니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두 번째로 다가설 ‘폴리아모리’를 풀어갑니다. 이 용어에 집중하기로 한 것은 지난해 한 청년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에 답하기입니다. 내가 무척 아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와 인연은 20년 가까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1학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인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의 질문에 답을 글로 올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직도 나의 벗으로 동행중인 청년에게 건네는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열린책들. 상, 하 두 권인 이 책은 저자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가 수용소 생활 중 1863년 발표한 대표적인 사회·정치 소설입니다. '주인공들 베라 빠블로브나, 로뿌호푸, 끼르사나노프, 라흐메또프는 1840년대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새로운 도덕적 정열을 지닌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구시대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일치한다는 <합리적 에고이즘>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역자는 밝힙니다.

 

작품에서 인물들은 그 시대에서 접하기 힘든 ‘특별함’을 겸비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인물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그 특별함을 삶에 적용해 갈 수 있는 행운아들만이 누릴 수 있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행운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적잖이 행운아라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내게로 온 그 행운들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두의 ‘선’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특별함은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서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했기에 위대한 고전이라는 ‘스테디셀러’들의 힘은 역시 보편타당함을 지닐 수밖에 없구나 싶은 거죠. 그래서 우린 고전읽기를 멈추어선 안 되고 특히나 젊은 세대들에게 잔소리처럼 떠들 수밖에 없나 봅니다. 한국사회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보이는 원인은 책을 읽는 이들을 주변에서 찾기 힘든 것에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요. 부디 스스로 판단해 볼 일이겠지요.

 

소설에서 중심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유형들이기도 합니다. 그 인물들이 펼치는 대화는 개인의 삶과 결혼의 의미, 사랑과 자유, 가족과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공동의 선을 향한 이야기들로 그 방법론을 작가의 정신에 따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결혼은 형식에 맞추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내용에 있는 것인지를, 타자가 아닌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는지를 묻죠. 대부분 여성의 결혼은 그 시대의 사회 관습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지만 작가는 주인공 ‘베라’를 통해 주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합니다.

 

한 세기 반이 지난 우리 시대에도 베라와 같은 선택을 한다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남성도 포함된 것이지만, 주인공의 비중을 여성으로 잡은 것이 우선일 뿐, 그런 여성의 이상을 위해 그런 남성이 없었다면 가능하진 않았겠지요. 결국, 서로의 결이 맞아 이룰 결혼이 격식으로 전락한 결혼이었기에 낳게 된 혼란 같기도 합니다.

 

제정러시아시대가 지나고 볼셰비키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국가 소련이 성립되고 해체되고, 현재는 다시 러시아로 남은 일련의 역사적 흐름을 생각해 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개인의 선택과 투쟁은 참으로 지난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의 방향에서 각 개인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 소설이 그들의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점들을 우리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주인공 베라의 삶이 지나가는 과정에는 그녀의 선택과 그것이 가능하게 실현될 수 있었던 주변 인물인 두 남자의 존재를 주목해야 하거든요. 그들은 서로 친구이며 그녀의 두 남편이기도 하죠. "당신은 싫어요. 우리 헤어져요."라고 말할 권리를, 아내의 자유를 똑같이 인정한 두 남자의 선택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누구 하나의 선택만으로 시작되고 자신의 ‘선’을 향한 신념이 실현되는 사회는 어쩌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가능성은 여전히 남겨져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믿음’에 의해 남긴 실낱같은 빛에 스며듦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시작되어야만 하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는 겁니다.

 

‘공동체’에 대한 가치는 그 어느 때가 되면 반드시 열려야 할 세계라 믿고 있습니다. 베라의 선택은 두 번의 결혼으로 가능했어요. 사랑이 자신의 신념에 반할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이 물음에서 나는 그 해답을 이 소설 속의 여주인공 베라와 그의 남편 로뿌호프, 끼르사나노프를 떠올리며 만납니다. 두 남자는 베라의 갈등에 해답을 건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소설’에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가능성을 저자는 러시아의 사회에 이식시킬 수 있기를 부단하게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분명 러시아의 사회에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이 없죠. 볼셰비키 혁명에서 그 후 러시아는 레닌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으로 변화했으니 말입니다.

 

‘베라’는 비천한 집안의 예쁜 처녀이지만 자신의 환경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인간’이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것을 공동체와 나눌 것인가, 나의 것을 지킬 것인가에 ‘사회 지식인’의 선택이 있는 것이고,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죠.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나눔의 시작은 소수의 '위대한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기득권층의 변화를 기다리는 일보나 사회 다수의 개인이 삶의 변화를 위한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자연스러운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를 통한 ‘선’을 향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나아가는 시간에는 한 개인의 사랑과 신념에서 어떤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로써 ‘희망’이었거든요.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와 충돌하는 개인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작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그동안 놓쳤던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다시 기억해 내고 꿈꿀 수 있게 해 줍니다.

 

21세기에 살면서도 여전히 친일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한국사회입니다. 내 나라 지성의 역부족을 탓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현대를 살아가야 하는 남아진 자들의 선택에 의해 변화될 과제이겠지요. 한 개인으로 선택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의 시작은 가치 지향의 공감대로 형성된 자발적인 작은 공동체의 움직임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 믿음과 지속 가능한 행위들을 이 책을 읽으며 더 가다듬는 시간이었나 봅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것은 위대한 비밀이며 다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고.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기술 도 필요 없으며 오로지 순수한 마음과 정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의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그 이상의 비밀은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지금까지 글이 첫 번째입니다. 이제 시작할 글은 주인공 베라가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 ‘인간’이기를 원했던 것에 집중을 했습니다. 당시 나는 ‘폴리아모리’라는 용어를 몰랐습니다.

 

"폴리아모리(Polyamory)란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다자간(多者間) 사랑, 다자간 연애, 비독점적 다자 연애 등으로도 부른다. 폴리(Poly)는 ‘많은’이라는 뜻의 접두사이며 ‘아모리(Amory)’는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모르(Amor)’에서 온 말이다.

 

베라의 사랑이 가능했던 것은 남편의 보이지 않았던 배려였습니다. 나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로 단순하게 생각을 했던 거죠. 어차피 사랑은 개인이 선택하면서 만들어지는 관계이기에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레 도덕규범인 결혼제도를 의식합니다. 일부일처제가 전제되는 혼인제도에서 그 외 사랑은 법적으로는 허용하지 않죠.

 

사람이 살아가면서 법의 허용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법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허용범위가 달라지잖아요. 사실 양심의 문제로 해결해야 할 일이 일상에서는 더 많죠. 도덕적 해이가 넘치는 한국사회에서 법 때문에 개인이 추구하는 사랑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나는 폴리아모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내가 원하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런 나를 이해하거나 인정해주거나 배려라도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라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점도 지나칠 수는 없지요. 폴리아모리를 원하는 개인이 질 책임 문제인 겁니다. 문제가 된다는 것도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맡겨야지 사회에서 또는 집단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개인이 선택한 그 사랑이 사회를 와해한다거나 종교에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타자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한지요. 위험한 발상인가요? 내가 믿고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 사랑은 여러 형태로 가능합니다. 단 한 가지 유형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겁니다.

 

개인주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여전히 우리는 고착된 문화, 아비투스에서 빠져나오기를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문화가 자연스럽다고 이해되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흘러 당연시된 것은 아닐지요. 잘못된 문화라면 바꿔나가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류의 진보는 변화 가능성이지 고착은 아니니까요.

 

이번 한동대 사태는 교내 동아리가 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했다는 이유로 관련 교수와 학생들의 징계 절차에 착수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 개인의 사생활을 공공연하게 폭로한(학교 측은 폭로라고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의식이 없다고 봐야죠.) 것을 문제 삼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다수로 일반화되는 성 정체성과 소수로 일컬어지는 다른 성 정체성은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이블을 근거로 내거는 기독교 입장은 시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로 밖에는 볼 수가 없어요. 적어도 사랑을 떠벌이지는 말아야죠. 인간이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것을 싫어할 신이 있어야 하나요? 종교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나는 폴리아모리스트가 되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세 주인공으로 작가는 새로운 인류 모습을 찾았나 봅니다. 결혼하기 전에 그들이 한 세 가지 서약은 한국사회에서 하는 결혼 서약과는 다릅니다. 첫째, 사랑할 때 이외에는 각방을 쓴다. 둘째, 서로의 사생활을 방해하지 않는다. 셋째,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는다. 지난해 영화 <박 열>에서 동거 서약을 했던 연인, 후미코와 박열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공감했던 삶, 동료애는 가능합니다.

 

결혼 4년째, 베라는 남편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끼르사노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마음을 남편에게 고백하자 자살을 위장하여 종적을 감추고 남은 두 사람은 결혼을 합니다. 세 가지 서약은 이번 결혼 생활에서도 유지되고요. 여기서 현실이 개입되기에 작가는 결혼을 위해 가짜 죽음을 만듭니다. 결혼제도에 변화가 온다면 이런 고통도 필요 없겠지요.

 

죽은 줄 알았던 로뿌호프가 비몬트라는 이름의 미국 사업가가 되어 돌아오고 베라의 친구인 까쩨리나와 결혼합니다. 이후 두 부부는 하나의 공동주택에서 사이좋게 살게 됩니다. 소설이죠. 네, 그렇습니다. 나는 이상적인 결혼을 위해서도 폴리아모리를 존중합니다.

 

폴리아모리스트라는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는 대안 결혼을 제시하며 그것으로 가능한 미래 공동체를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동료애로 결혼할 수 있는 시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자,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가?”로 이해해 가는 과정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압니다. 1996년 ‘된장녀’라는 말부터 이어진 2012년 메르스 사태에서 다시 온라인상에서 뜨거웠던 메갈리아 미러링과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까지 ‘혐오’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랑하기를 방해합니다.

 

“여러 사랑을 포용할 수 있다면 왜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해야 하나요?”

 

체르니셰프스끼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류인 나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면 더 좋은 일이잖아요. 비 독점 다자 연애는 어려운 사랑입니다. 나 혼자만 일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죠. 내 애인을 ‘비 독점’할 수 있으려면 애인이 다자 연애 하는 것을 수용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죠. 그 둘 다 ‘다자 연애’에만 방점이 찍히면 이별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 책에서 남편이 비 독점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이별로 가능해지는 ‘순간’일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할 필요가 없다면... 독점과 소유욕이 낳은 집착. 전통 결혼 규범과 비 독점과 비 소유, 움직이는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도 존중할 수 있다면 개인의 선택이 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란한 성이 아니라 소유욕을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반드시 폴리아모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 중 하나가 집착이잖아요.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로 살아갈 아름다운 동행이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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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2화 <한동대 페미니즘 강연 관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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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1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못다한 이야기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소설가이며 1977년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자랐다. 열아홉에 미국으로 건너가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인종, 이민자, 여성에 대한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삼은 소설로 평단의 각광을 받으며 영미문학을 이끌 차세대 작가로 부상했다. 이 책의 원본이 된 TED강연은 유튜브에서 250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고, 팝스타 비욘세의 노래에 피처링되기도 했다. 스웨덴에서는 이 책을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 2학년에게 나눠주고 성평등 교육의 교재로 삼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만일 남자들만 계속해서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남자만 사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이 현실과 다르다고 알게 된 것은 십 대부터였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여자로 태어났지만 ‘나’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삶에서 선택은 문학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시몬 드 보봐르, 루이제 린저와 F. 사강,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으로 살았다.

 

내가 자연스럽게 여기던 것들은 현실에서 부자연스러웠고 “여자인 내가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 익숙하게 될 즈음 부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일은 나를 드러내는 일보다 더 쉬웠다. ‘나’를 숨긴다는 의미는 이십대까지는 ‘세상 모르고 산다’는 것을 표현하는 일이고 친구들에게 아나키스트라 불리는 것에 더 익숙한 시절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세상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일보다는 ‘나’를 지켜내는 일에 몰두했다. ‘나’로 산다는 것은 ‘홀로 주체’가 된다는 일이고 혼자서 거의 모든 선택을 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오히려 동성 친구에게서 ‘나’를 존중받는 일이 고단했던 기억이 많다. “왜 화장을 안 하니?” 결혼식 당일까지 무던히도 들었던 대표적인 말이다.

 

남들과 다른 내 삶을 좀 더 객관화할 수 있던 시기는 결혼 후 사회 활동을 하면서였다. 아, 어떻게 남편이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삶에 적응하며 살 수 있는 거지? 결혼하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니. 자주 떠오르는 물음이었다. 이제는 나로 살아가는데 필요했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의지를 발휘하며 산다. 21세기에 서 있는 나는 이제 그렇다. 나와 교류하는 사람들에서 자연스럽다.

 

“그들에게 나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나도 똑같은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일이지만, 때로는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픈 법입니다.

 

직장인으로 살아보지 못한 내가 겪는 분노이기도 하다. 지난해까지 ‘을’이라 지칭되는 집단이나 개인으로 서 있던 시절이 거의 없는 셈이다. 나는 노동의 가치를 다르게 인식하며 살았기에 나에게 노동은 놀이와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고 자유롭다. 이 점에서 늘 나는 겸손해진다. 얼마나 큰 행운이던가. 그 행운은 ‘나’로 살아온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한 준비된 자에게 온 행운이기도 하다.

 

책을 좋아해서 쌓아둔 책이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을 할 것이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책을 읽는 일이 일상이고 밥벌이다. 그 자격은 사회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다고 여기는 내 취미활동으로 기록되곤 하던 독서였다. 이 사소하다 여기는 취미로 내가 가장 아팠던 일은 꽤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의 분서갱유다. 직접 진시황제처럼 책을 불질러버린 사건은 아니여도 내게는 가장 큰 아픔이었다. 집안에 있는 책들을 아파트 현관문 밖으로 다 내던지시며 시집이나 가라는 말씀. 당시까지 아버지는 개방적인 분이셨고 미래지향이셨던 분이기에 상처가 컸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더럽고 치사해서 결혼 한다 내가. 후후. 아버지는 그 후 1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뜨셨다. 어머님의 위안은 이렇게 이어지곤 한다. 다 네 아버지가 떠날 때가 돼서 마음이 급해서 막내딸 손잡고 결혼식장에 들여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라고. 내 어머니도 당시에는 드물게 맞벌이를 하며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이런 일들은 현실에서 늘 덜그럭거리는 불협화음이다.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한 세상을, 스스로에게 좀 더 진실함으로써 좀 더 행복해진 남자들과 좀 더 행복해진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 부분이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슬그머니 넘어갔다. 이 문장을 서 너 번 소리 내어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굳이 남자와 여자들이란 말을 하지 않고 싶다. 성별 구분 자체가 너무 오랜 시간 편리하게 사용된 관념 덩어리이기에 모두가 더 행복해진 세상을 상상하면서 지금을 살아나고 싶다.

 

한국사회는 여자 남자로 성역할을 고정시켜서 모두가 힘들다. 남자는 남자라서 여자는 여자라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선택과 가치는 제쳐두고 사회에서 원하는 이름에 종속되곤 한다. 개인의 행복이 사회에서 무시되는 일이 너무 흔하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타인의 행복을 말할 수 있는가.

 

나부터 행복해지기. 내가 웃을 수 있어야 당신도 웃을 수 있지 않은가. 같이 웃고 같이 울 수 있으면 된다. 페미니즘이 그 시작으로 된다면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보다는 안으로 채워진 나의 가치와 공감으로 변화 가능성이 지속되고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야망을 품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돼. 그러면 남자가 기가 죽을 테니까.

 

남자의 기를 살리기 위해서 야망을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된다는 말은 여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다. 한국사회에서 아들, 특히 장남을 위한 희생이 미덕처럼 여기던 시절을 지나온 현재까지도 가족에서 딸, 굳이 장녀를 위한 희생은 거론되지 않는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란 말을 종종 들으며 성장한 기성세대로서 남아선호로 인한 편애는 어머니 교과서의 한 부분이다. 어머니 교과서 개정판은 은밀하게 희생을 강요한 사회에 맞서는 일의 하나로 강한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져 오기도 한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는 말이 가슴 한 편에서 메아리칠 때가 있지 않던가. 강한 어머니는 당당하게 불릴 수 있어야 했던 이 땅의 페미니스트였다.

 

“다리를 오므리렴. 몸을 가리렴.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여자로 태어난 것부터가 무슨 죄를 지은 것인 양 느끼게끔 만듭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남자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대체로 타인의 시선에 몸을 사리고 방어막을 두르기 시작하면 소통할 수 없는 사회로 이어진다. 결국, 불통에서 생산된 말들이 모여들면 한 더미의 쓰레기 처리장처럼 냄새를 풍긴다.

 

‘혐오’라는 말로 ‘충’이라는 말로 인간임을 스스로 내던지는 일을 거침없이 하기도 한다. 유전자의 다름으로 구분하기 전에 같은 사람으로서 조화를 이루는 일은 유토피아처럼 여긴다. 이 문장들은 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나와 당신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가슴을 후벼 팠으면 한다.

 

여자와 남자가 사회에서 어떤 상황으로 위치해 있는가는 모두에게 새로운 시선을 갖는 기회를 준다. 내가 선택할 기회조차 없는 상태에서 강제된 것이기에 여자, 남자라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 폭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인류가 진보한다는 것은 어느 한 편으로 집중되는 발전은 아니다. 그런 사회구조에서 만들어진 문화가 변화하려면 주체로 선 내가 주체인 당신과 동행하며 얻는 가능한 변화이다. 페미니즘 공부는 가능한 변화를 위한 첫 걸음으로 좋은 선택이다.

 

“바로 그 점이 문제의 일부입니다. 많은 남자들이 젠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 말입니다. 겉보기에는 사소한 상황들에서, 남자들이 나서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 내는 일을 겁내지 않아야 한다. 그래, 말은 쉽다. 젠더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전 세대가 각자 의식하고 있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한국사회에서 ‘성sex’이란 말은 겉으로 편하게 주고받거나 나를 드러내는 말로 자리 잡을 수 없다.

 

‘금기’가 넘치는 사회라고 할까. 19금. 일상에서 자주 보이는 표식이다. 그것은 어쩐지 대상을 더 강조하는 표식이 되어 19금을 넘나드는 것도 일상이라 할 만큼 진부하다. 형식에 그치는 사회제도를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사회제도를 그게 현실이니까 어쩌겠냐는 말로 대신한다. 원래 인생은 부조리해!?

 

사회 강자로 살아온 사람들이 나서서 부당하다고 외칠 이유는 넘친다. 이젠 그런 남자를 만들어야 하는 일부터 해야 하는 걸까? 이 점에서 ‘나’를 성찰해야 한다. 과연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역꾸역 해올 수 있던 것은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멈출 수 없었던 이유가 크다.

 

페미니즘 공부는 나를 지금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데 아주 훌륭한 근거였다. 자유인으로 누리는 삶은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확실하게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만 자유로운 세상을 나는 결코 원하지 않는다. 당신도 자유롭기를 바란다. 그래야 서로 신나게 놀 수 있지 않은가.

 

“문화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문화를 만듭니다. 만일 여자도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우리 문화에 없던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문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안체 슈룹 글과 파투 그림의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를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그림과 글로 비교적 쉽게 페미니즘 역사를 보여주는데 ‘하나의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로운 제안, 연구 결과, 그리고 지식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나누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문화는 사회에서 약자들을 배제해온 문화였기에 모든 사람을 품어 향유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고 그 시작은 내가 먼저 첫 걸음을 떼면서 형성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동행이다.

 

인류 역사에 일방적으로 내린 전 세계로 뻗친 뿌리를 흔들어야 한다. 모든 가부장제에 합류해 강한 협력을 조장한 자본주의에서 배제를 더 이상 참아낼 이유가 없다. 자본주의에서 외면당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숨죽이고 있지 않던가.

 

“그 순간 나는 친웨 아줌마의 성격에 모난 데가 전혀 없는 비결을 알아차렸다. 아줌마는 그것들을 몽땅 뭉개고 있었다. 아줌마는 무한한 아량의 바다였다.

 

남편이 나만큼 행복하길 원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은 성장하면서 자기 안에 쌓인 분노를 풀어내는 일이다. 길을 걷는 만행이었다. 그는 인도로 명상의 길을 떠났고 자기와 마주함에 온전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와 동행하는 여행자들로부터 ‘부처’라는 허무맹랑한 호칭이 내게 붙었다.

 

내가 충분히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에 남편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결과. 남편의 길 떠남이 가져다 준 것은 가족 부양의 책임이다. 당시 나는 충분한 능력이 사회 분위기와 맞아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결핍은 아이들에게서 생겼다. 두 어른의 결정만으로 세 아이들은 각각 아버지 부재라는 일상의 결핍에 힘든 성장기를 거쳐야 했다. 특히 남자 아이가 겪어야 했던 결핍은 한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자신과 다를 때 혼란을 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부모라는 말로 가해지는 사회폭력은 얼마나 이기적이던가.

 

친웨 아줌마처럼 나는 무한한 아량도, 타인에게 말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의 불행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몰랐고 그 스스로 찾아내주길 바란 이기심이 먼저였다. 물론 나는 관용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 이면에는 ‘나’의 공감과 만족, 지금 이대로 행복할 수 있는가에 달린 점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나를 위해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나를 위해 가장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게 한 관용으로 덮은 자기애와 비슷하다.

 

“왜 아줌마는 단정하게 반응해야만 존경받을 수 있었을까? 왜 아줌마는 모욕에 직면하여 세상에 대고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을까? 왜 아줌마의 완벽함은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에 달려 있었을까?

 

사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관리를 필요로 하는 고된 일이다. 외모지상주의에서 학벌주의 등 나를 에워싼 사회에서 요구하는 나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나는 인정하는 일부터 하면서 비로소 ‘나’로 살아가는 시간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힘은 아무리 둘러봐도 평생의 벗으로 늘 곁에 있어준 책이었다. 문학에서 만난 여성들의 목소리는 나를 자연스레 “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선택 가능하게 해 주었다. 이제, 비로소 ‘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치기를 바라면서 2018년을 열고 있다. 그대, 함께 가시려나... .

 

[덧붙임]

팟캐스트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를 송출하고 못내 아쉬운 점들을 후기로 정리해 보니 마음의 무게가 덜해진다. 평생 공부를 하면서 남은 삶을 잘 짓고 싶은 마음. 이 방송을 듣고 이 글을 읽는 이들 모두가 페미니즘 공부 효과를 같이 나눌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삶은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스스로 한 걸음 딛고 걸어가는 ‘선택’이 연속되는 낯섦과 두려움에서 이어지는 거였다. 나는 노마드의 삶을 즐기는 중인데 그 가운데 함께 나눌 페미니즘 공부로 새로운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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