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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밑에 열린 박근혜 대통령,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한길 대표의 3자 회담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회3자회담’이 별 내용도 결과도 없이 끝나는 것을 보며, 야당과 정국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야당의 장외투쟁을 거론하며 ‘국민적 저항’을 운운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이해가 안 된다.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민생을 거론하고 있지만 현재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급한 사안의 핵심을 회피하며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거나 자각능력이 부족해서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히려 광장의 소리와 야당의 행동들을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해석하며 이 사태를 공안정국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청와대의 의지만을 보여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확인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 나라에 작동되고 있는 ‘청와대 룰’이란 것이다.

 

 

[출처]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30510104604176&srchid=IIM%2Fnews%2F67626214%2F2f65476def26efc926a1632ec9dfdf30  

 

 

앤드루 바세비치는 ‘워싱턴 룰’에서 지난 60년간 미국의 군사정책과 실제 관행들을 관찰해 보고 국제평화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최소한 몇 가지 중요한 지속적인 요소들을 발견해 유지하기 위한 믿음으로 ‘성(聖)삼위일체’를 말했다. 첫째 미 군사력의 세계적 주둔, 둘째 이 군사력에 의한 세계적 힘의 투사, 셋째 현존하는, 또는 앞으로 예상되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세계적 개입주의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미국적 신조가 합해져서 하나는 목표를, 다른 하나는 실천을 규정하는데 이 두 가지가 그동안 미국의 세기를 통치하고 감시하기 위해 워싱턴이 시도해온 방식의 진수를 이룬다고 하며, 이 두 가지를 ‘워싱턴 룰’이라고 불렀다. 이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CIA(중앙정보부)’와 ‘SAC(전략공군사령부)’라는 조직을 만들어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으며, 그들 역시 미국 시민들을 비밀과 은폐로 몰상식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세비치가 말하는 ‘워싱턴’은 지리적 의미가 아니라 이러한 워싱턴 룰을 수호하고 집행하는 인물과 일련의 조직들로 행정, 입법, 사법부의 상층부를 비롯해 국가안보의 주요 구성원-국방부, 국무부, 그리고 최근 만들어진 국토안보부, 나아가 정보기관들과 연방 법집행기구들-이 포함된다. 또한 일부 싱크탱크와 이익단체들, 그리고 변호사, 로비스트, 해결사, 전직 관료, 예비역 군 장교 등 아직도 권력 핵심부와 끈이 닿는 사람들을 워싱턴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또한 거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 방위산업체와 대기업, TV방송국과 ‘뉴욕타임스’와 같은 고급신문들, 나아가 대외관계협의회나 하버드 대학 케네디행정대학원 같은 준학술 조직들도 포괄한다. 이들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워싱턴 룰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외는 없다고 이 책의 역자 또한 전한다.

 

 

정파를 넘어서서 정치적 협력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과거 식민세력에 협력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아니면 그들이 이미 누려오던 기득권을 보호받은 집단으로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그 연결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다. 경제적 성장만 되면 친일도, 독재도, '무조건 친미'도 좋다는 암묵적 정서가 그들에게 시민의 권력을 일임해 주었다. 우리들도 한 몫을 거들었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이미 그 힘을 잃은 ‘제국주의’나 ‘이념’들이 아직도 거론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5년간을 돌아보며 내가 생각하는 청와대 룰은, 첫째 분단국가를 앞세운 국가안보를 위해 민주주의 원리는 무시할 수 있다. 둘째 국가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사회적 약자에 놓인 국민들의 희생은 당연하다. 셋째 정치협력 집단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국가기관은 권력의 비호에 적극 협조한다. 현재 이렇게 작동되는 정황들에서 나오는 개인의 지나친 억측일까.

 

 

대한민국의 정치협력자들은 너무 뻔뻔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의 직속기관인 국정원의 맹활약과 집권당이 보여 주는 국민 기만 행위들, 독립적인 국가기관들의 대통령 예속화를 위한 검찰 흔들기, 저널리즘이 실종된 공영방송의 허황된 보도들과 보수 언론들의 불공정한 보도 등이 그것이다. 어디 정치 뿐 이던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단절된 소통은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감을 전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사회가 진행되는 그 이면을 철저히 들여다 볼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롤즈(J. Rawls)의 정의론(正義論)을 다시 떠올려 보자. 롤즈의 주장에는 "원초적 상황(original position)이라고 불리는 가상적 상태"로부터 출발해 "앞으로 사회가 어떤 기본 질서를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이뤄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다. 사회적 원칙에 관한 논의는 자신이 처하게 될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게 정상이라는 설명이다.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의외로 많이 있다.

 

 

정의는 어느 계층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들을 알고 개인의 자각과 사회의 성찰을 통해 국기문란에 앞장 서고 있는 정부와 그에 협력하는 집단들을 향해 끊임없이 요구해야만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시민은 정치적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다. ‘워싱턴 룰’의 저자 바세비치는 ‘미국시민들이 시민정신의 빈곤화와 약화에 따라 집단적 책임보다는 개인적 선택을, 장기적 웰빙보다는 즉각적인 욕망의 충족을 더 중요시 한다’며 정부가 그렇게 하도록 “우리가 허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한다. 사회적으로 강자들의 심기를 거스리는 순간 개인은 두려움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의가 통하는 사회는 좌도 우도, 부자도 빈자도 없으며, 나의 이익이 곧 이 사회 공동체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국민 일반의 이익과 의사와 감정을 무시한 채 속속 드러나는 정부의 무능과 속임수, 안이한 자세와 편협한 시각으로 야기되는 판단, 문제제기에 대한 봉쇄와 왜곡과 탄압으로 인해 쌓인 국민들의 뒤틀린 감정은 쉽게 사그라질 것이 아님을 현 정부는 직시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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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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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는 두 개의 감정들이 서로 엇갈리며 나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모처럼 주말을 18세기 소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만난, 뒤늦게 찾아온 절절한 사랑과 상실의 아픔으로 인한 지독히 낭만적인 감성으로 벅찬 마음이었다. 다른 하나의 마음은 바로 쿠바를 떠나며 남겨둔 혁명가의 마음이었다. 그의 마음은, 그의 정의를 향한 사랑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정의 사회를 향한 체 게바라의 혁명정신은 이 땅의 오늘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마음의 요동침을 고스란히 마주 하는 시간이다.


이제 스물 다섯인 큰애가 존경하는 인물이 ‘체 게바라’이다. 자신도 혁명 정신으로 살아가고 싶다며 그의 평전과 시집을 내게로 건넸다. 내키실 때 읽어 보라며 씨익 작은 웃음을 흘리고 타국으로 떠나 공부를 하고 있게 된 지도 벌써 4년이다. 난 서가에 꽂혀 있는 짙붉은 표지와 그의 얼굴이 그려진 ‘체 게바라 평전’을 보면 애써 외면해 왔다. 사실은 겁이 났던 게다. 이 책을 읽으면 나는 심한 혼돈에 빠질 것이고 그의 삶과 죽음을 떠올리는 것으로만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책을 펼치고야 말았다.


한 개인이 시대정신을 구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고 외면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모두가 체 게바라처럼 행동하는 혁명가가 될 수는 없다. 허나 표창원 교수의 말처럼 냉소주의를 버릴 수는 있는 거다. 아주 쉽게는 아고라 청원에 서명하는 일일 것이고, 당장 일어날 것은 아니라 해도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하다. 혼자의 힘으론 어렵지만 사실은 나부터 시작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 않던가. 모든 변화의 시작은 무모한 듯해도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기에 서명을 하는 일부터 했다.


광장에서 타오르는 촛불과 각계에서 소리 내고 있는 시국선언들, 일상에서 개인적 투쟁을 향한 기운의 전조들은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노래와 함께 가슴속으로 쌓여지고 있다. 온갖 상념들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표현할 수 없는 격한 마음과 함께 지난 밤을 엎치락 뒷치락하며 하얗게 지냈다. 여전히 작동되는 나의 이런 날 선 감성에 적잖이 스스로 놀라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꿈틀거림을 다시 확인하는 거였다. 언론의 직무유기로 나타나는 지(知)의 세계와 무지(無知), 두 개의 현실 세계의 부조화 속에서 낯설게 살아가고 있나 보다.


혁명이란 말이 주는 의미는 좀 전투적이긴 하다. 허나 내게 혁명이란 말은 아주 친숙한 말이다. 가끔씩 나른해지는 나를 발견하곤 할 때면 어김없이 이 생명력 넘치는 말을 내뱉고는 해 왔으니까 말이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책 이름이기도 하다. 그가 책으로 전해 준 것은 스스로가 일으키는 내 안의 혁명이었다. 휘청거리는 청춘의 시절부터 스스로를 다그치고 설레는 말, 그것은 ‘혁명’이란 말이었다. 그 말을 되뇌이면 참으로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오늘은 나와 함께 하는 너를 향해 혁명 정신을 말하고 싶어진다.


체 게바라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의 정신을 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로, 행동으로, 여전히 기억해 내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념을 초월하고 국수주의, 이기주의 같은 것이 없는 건강한 세상을 바랐다. 야만의 땅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아름다운 사람의 전형으로 휴머니스트일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나는 국정원게이트는 정의를 위한 휴머니스트 혁명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를 떠올리고 있다. 정의를 향한 결연한 의지는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강력한 욕구에서 발휘될 수 있다.


나에게 그는 야성을 잃지 않은 사자와 같은 모습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온화하다. 그의 야성이 깨어날 때 세상은 바람을 가르며 그에게 길을 내주게 될 것이라 믿는다. 우리에게 공동의 적은 누구일까.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는 적이 될 수 없기에 그렇다. 적으로서 마주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할 대상으로 진정한 삶을 향유할 수 있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서로 아껴주고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그 길을 가야 할 동행인이고 싶다. 우리 사회가 걸어 온 그 혼돈의 시간들에서 빠져 나와 체 게바라의 말을 전한다.


“인간은 태양을 향해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어야 한다. 태양은 인간을 불타오르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 준다. 고개를 숙인다면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삶의 참된 가치를 외면한 채 자본과 탐욕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들에게 체 게바라의 낮은 곳으로 향하는 혁명 정신을 오늘은 참으로 격하게 그러나 간절함을 담아 이야기 하고 싶다. 한 개인으로서 이 사회를 향한 사랑이 계속 될 수 있기를 나에게도 당부를 하며 남은 이 밤의 시간은 체 게바라의 시를 읊조리며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이 땅의 사람들이 지배 권력의 남용에 분노를 드러내는 다양한 모습들은 더 이상 우리 사회를 부정의로 몰아갈 수 없다는 결연함이다. 부당한 권력의 횡포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는 혁명정신의 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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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처음 접한 소식은 ‘훈련 도중 높은 파도 휩쓸려 5명 실종’이란 뉴스의 헤드라인이었다. 기사 전문을 읽으며 시작된 나의 촉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예민하게 발동되고 있나 보다. ‘태안 해병대 캠프’라는 익숙한 이름과 현재 사고가 난 학교와 연결된 십대들이 내 주변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속속 알려지는 이야기는 우리 교육의 부실함을 여지없이 드러내 주었다. 금요일 밤을 하얗게 지나고 나는 1인 시국선언을 트위터에 했다.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었지만 어떻게든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는 견디기가 힘든 밤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교육을 향한 1인 시국선언을 한다.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분량이 넘칠 이 나라의 잃어버린 ‘민주주의 공화국’의 정체성을 되찾는데 결연함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의 시국선언은 현재까지도 넘치고 있는 사안들이다. 나는 어제 태안에서 해병대캠프로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에게 일어난 인재를 보며 교육의 위험 수위를 더욱 절감했다. 시급한 교육의 변화만이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여 이에 참 교육을 위한 이 나라의 위급함을 직시하며 시국선언을 한다.

하나, 잘못된 교육제도의 희생에 교육부는 과거의 식민 교육을 멈추기 바란다.
둘, 교육의 주체는 ‘학생’임을 자각하기 바란다.
셋. 학생인권조례를 학교의무화로 하여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넷, 학생의 자율권을 보장하길 바란다.
다섯. 향후 교육제도의 혁신을 위한 즐거운 혁명은 기성세대들이 책임지길 바란다.

미래를 향한 시선에 십대들의 삶은 실종되어 있다. 언제까지 외면하고 기다리라고 할 것인가. 사회 현안들에 시급함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는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들을 놓치고 있다. 십대들의 신음과 무기력한 모습들에 시선을 맞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성세대들의 과거, 성공 신화의 허상에 압박을 느껴 스스로의 삶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욕망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향한 삶을 향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즐거운 학교로 총총 교문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십대들의 생기 있는 얼굴들이 이 나라의 희망이기에 교육의 혁신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2013. 7. 19.

 


베스트셀러로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외면했던 것은, 아마도 개인적으로 그것을 읽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간되고 몇 해가 지나, 서가 한 켠에 자리 잡아놓고 있던 이 책을 두 해 전에 읽었다. 이 책은 스스로가 ‘엄마’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느낄 때에야 가슴으로 절절하게 전해질 수 있겠다고 혼자 읊조려 보았다. 이 땅의 엄마들이 살아온 시간들의 모양새와 과정들은 달라도 ‘엄마’라는 그 호칭이 건네는 애닯고, 아리고, 고맙고 정겨운 말의 힘을 이 책은 벅차도록 뿜어내어 주었다.

내 현실과는 다른, 너무나도 다른 ‘엄마’라는 모습을 만났다. 가슴에 묻어 있는 나의 엄마 모습은 분명 아닌데도 눈물이 가슴 밑에서 부터 솟아 올라 거기까지만! 하곤 억지로 책을 덮었다. 이미 날이 바뀐 새벽에서 아침의 경계가 펼쳐지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에 젖은 가슴을 닫아버렸다. 그 다음 날에도 가방에 넣고 다니며 가까스로 꺼내 마저 읽고, 또 가슴 가득 그 날들의 느낌들이 다시 튀어 나왔다. 그리곤 책을 덮고 스스로에게 이건 무엇이지? 물으며 가까스로 책의 여백에 빼곡히 써내려가며 아무래도 나이듦인가 싶기만 했다.

내가 그렇게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로 떠나갔을 때, 그 어느 날 나의 흔적을 찾아 헤메는 세 아이들의 모습이 가득 찬다. 이렇게 저렇게 흩뿌린 나의 흔적들을 아이들이 찾아내면서 이 책속의 아이들처럼 내 아이들도 그리 아플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이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할 것 같은데 아이들이 멀리 있다는 것이 그 날만은 몹시 슬펐다. 나도 엄마는 엄마인가 보다. 그래 세 아이들의 엄마임에도 내 아이들에게 살갑게 해주지 못한 나를 만나게 해 주었다. 이런 내가 아이들에게 훗날 어떤 그리움으로든 남아질테지만 지금은, 지금은 내 앞에 아이들이 있었으면 했던 그 간절함에 잠 못 이루던 밤이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이렇게 책은 시작된다. 책 속의 아이들이 만난 아픔과 내 아이들의 아픔이 함께 나에게로 몰려 와 홀로 있는 시간이 아주 낯설었던 생생한 기억들이었다. 이 느낌들은 그 시간들의 그 마음들이 이번 주말에 분노와 애통함과 절절함으로 아이들을 놓치고 망망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부모들과 오버랩 되었다. 미리 알아차릴 수 없었던 죽음 앞에서 황량하게 남아있는 이들의 아픔들이 이 책에 녹여져 있어서였다. 늘 곁에 있었기에 눈치 채지 못했던 수많은 마음들을 어찌 진정시킬 수 있을까. 주변인인 나조차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이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데 말이다.

열여덟 아들이 묻는다. 내가 그렇게 되었다면 엄만 어떻게 했을 거 같아? 태안 해병대 캠프참사 얘기를 나누다가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렁그렁, 울먹울먹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먹먹해 진 채 고개를 돌렸다. 난 상상력이 넘치는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이 상황은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그저 까맸다. 엄만 기절해버렸을 거라며 웃는 아이가 순간, 날아가 버릴까 봐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거다. 모든 부모는 그런 거다. 어느 곳, 어느 아이, 할 것 없이 금지된 죽음이든 참사로 맞이한 죽음이든 같은 마음이다.

내 아이 네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부모는 그렇다. 아이들을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오열하고 있을 부모들이 이번 참사에만 있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여린 죽음의 비보가 있어 왔다. 우린 무엇을 해 왔지? 난 이 기운에서 빠져나오려고 무진 애를 써 보는데 잘 안 되고 있다. 예정된 대학생들과의 번개모임도 취소하고야 말았다. 처박혀 있다 보면 나아지리라, 책도, 음악도, 트위터도 건성이다. 충분히 슬퍼한다는 것이 가능한 지 모르겠다. 슬픔은 시간을 이동하며 불쑥 튀어 나왔다가 슬그머니 내달아 도망가기도 하니까.

예전에 품었던 사회를 향한 모든 질문을 근본적으로 변경하거나 혹은 해체해 버려야만 한다. 교육과 사육. 돈 버는 기계와 돈 버는 인간. 무책임한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가족과 국가. 의무와 책임.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우리는 늘 개인과 사회와 조화를 꾀하려고 노력한다. 그 조화는 공공의 선을 향한 가치 추구에 있기 때문이었다. 교육의 병폐는 발랄하고 건강한 아이들을 학교라는 곳에 가두어 안전망이란 구실과 학생다움이라는 저들만의 틀에 몰아넣어 길들여 온 것이다. 교육은 전 세대들이 책임을 다 하여 이끌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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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 >학벌없는사회/메이데이


                                      

 

 

                                          '학교'를 떠나라*~

 내 아이들에게도 건네기 어려운 말이다. 적어도 지금 이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학교 밖에서 만날 희망이 지금은 보이지 않기에.

그러나 그 희망은 사실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내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내용들이지만 과연 이 책을 읽는 이들의 혼돈과 어지럼증은 어떤 마음의 변화를 오게 할 수 있을까.

 

 난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만나는 시간 내내 '내 속에 웅크린 DaDa'를 불러내어 만났다.

이즈음 대한민국 고3 둘째의 갑작스런 진로 변화와 이탈, 저항에 동조하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도움과 서울특별시를 탈출한 내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의 시간들을 들려 주었다. 서울특별시를 벗어난다는 두려움을 후일에는 자유로움으로 만나졌다는 나의 삶들을 건넨다.

 무엇보다 둘째 스스로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기에 타인의 시선을 벗어던지고 원하는 학문의 길로 여행을 찾아가는 시간들에 응원을 보내고 있다. 결코 늦지않은 오히려 적절한 시기의 둘째의 <선언>은 성장의 한 모습이었기에 그동안의 시간들을 뒤돌아 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일이 그녀에게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고통이었음을 생각하면 미리부터 짐짓 건넨 방향 모색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만 그녀가 그 길로 나아갈 때 온전하게 스스로를 느끼지 못한다면 대학 4년 내내 스스로 고통과 우울, 외로움과의 지난한투쟁으로 패배의 감정을 만나기도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까지도 경험한 후에야 그녀는 진정한 스스로의 얼굴을 만들어 낼테지만 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란 것은 늘 내 가까이에 있었고, 이 저속한 사회가 끼친 영향력에서 자유롭기만 하다면, 매일이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리라.

작은 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며 살아질 것이다. 내가 누리는 이만큼의 풍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시간이 빠를수록 살아있는 동안 느낄 수 있는 행복한 마음은 일상을 채워 줄 것일텐데.

그시간들로 이루어질 많은 감동들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간다는 것!!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에 있건 학교 밖에 있건, 공간의 의미는 우리의 영혼을 방해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만이 필요하다.

 이것이 늘 나에게로 던지는 물음이었고, 이렇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내 주변과 나눌 수 있는 이 마음이면 되었다고, 마음만 부자인 내게 늘 다독여왔다. 둘째의 분투가 통하여지;기를 응원하면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말했다.

 

 탐욕을 버리고 나를 통한 너를 인식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간들이 계속 열려질 수 있기만을 간절하게 열망하는 내 안의힘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기만을*~

 

                                                                                                                                                     2010.08.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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