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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중구 필동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 앞에서 열린 '안녕하지 못한 동국인들의 안녕들하십니까 성토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발언하고 있다. 2013.12.17/뉴스1

 

 

 

편지글은 약간의 형식이 필요하지요. 글의 시작은 읽을 대상을 불러 내고, 그간의 안부와 함께 글을 쓰는 이의 일상도 알려 주어야지요. 그리고 편지를 쓰는 까닭을 말하는 것이 형식일 겁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형식을 거부하고 굳이 '편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씁니다. 늘 오르내리는 대통령의 이름 석 자가 주는 스트래스로  나의 안부는 안녕할 수 없기에 격식을 차려 잘 지내고 있다는 식으로 쓰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2012년 12월 19일 당선확정 소식에 2박 3일을 평소처럼 일을 할 수가 없었지요. 당일날은 밤새 막걸리 타령을 해야 했고, 이틑날은 하얗게 된 내 머리 속에서 헤메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주말내내 스스로를 다독이며 월요일부턴 평상심을 발휘해야 한다고 다독거려야 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될 수 없는 현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런 날들이 오늘까지 사그라들기는 커녕

대통령이 최근에 띄워놓은 한 단어가 짓누릅니다. 암덩어리.

 

언론에 보도되는 극히 일부분의 알려지고 있는 죽음들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그 죽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알아차릴 수 없나요. 광장에서끊이지 않는 시민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나요. 대통령이 왜 그렇게 되고 싶었나요. 국민들 앞에서 내건 공약들을 너무 쉽게 외면할 수 있는 강심장, 나와 같은 시민들에게도 그 비법을 알려주세요. 내 어머님이 어린 동생과 다툴때면 이런 말씀을 하셨죠. 어린 시절, 무척이나 기분이 상하는 말씀이셨어요.

 

"나이 값 좀 해라, 더 배웠다는 애가 부끄럽지 않니?"

 

한 개인이 들어도 맘 상하는 말인데 일국의 대통령을 떠올리며 팔십을 넘기신 어머님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이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내가 듣기 싫었던 말을 내 아이들에게 하지 않으며 살려고 많이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이 사회의 일들에 대해서 무엇이라 설명을 해 주어야 할까요? 딴에는 道를 닦듯이 살아온 자부심 있는 내가 말에 앞서는 격분함을 누르기가 참으로 고역스럽습니다. 비결이 무엇이신지요.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부족하신가요. 물론 세상에 알려진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밖으로 드러난 대통령의 삶은 부족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내면에서 갈구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들 중에서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하는 충심, 부모를 위한 경애, 그리고 개인적 성취감인가요. 이 모든 것들의 바탕에 부디 친애의 감정을 담아 구국의 결단을 하세요. 너무 추상적인지요.

 

일국의 대통령이 지닐 덕은 '측은지심'에서 발휘됩니다.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헌법을 수호하고 이 나라의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는 지를 광장을 통해 들으세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있어도 세상의 소리는 빛보다 멀리 갑니다. 21세기에 선동정치는 너무 진부하지 않나요. 주변의 아부꾼들과 부역자들이 대통령을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국민은 우둔하지 않습니다. 인간적 존재감에 위협이 느껴지면 오히려 냉정하지요.          

 

 

 

 

 

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故 이한열 열사 26주기 추모제가 열린 가운데 학생들이 흰 국화를 들고 있다. 이한열 열사는 연세대학교 재학중이던 1987년, 시위 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22살의 나이에 사망해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2013.6.7/뉴스1 © News1 박철중 기자

 

 

개인이 행할 수 있는 작은 선함이 공공의 선으로 향해 따뜻한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황홀한 나비효과를 생각하며 마음이 설렙니다. 한 국가의 행정부 수반으로서 '위대한 선택'을 하실 수는 없나요. 그런 엄청난 행운을 잡았는데, 그동안의 지난 역사에 기록된 과오들을 더 연장시킬 기록을 남기시려나요. 한 가문의 장녀가 아니라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 잘못된 과정들을 바로 잡고 전환의 시대를 열어 주어야 합니다.

 

16세기에 <유토피아>를 발표한 토머스 모어를 이번 주말에 다시 만났답니다. 아이들이 묻지요. 고전을 왜 읽어야 하냐고, 늘 신간들이 눈길을 끌고 베스트셀러를 읽기에도 부족한데 말이지요. 함부로 말에 확신을 담아 하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만큼은 단언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삶과 세상에 대한 영원한 물음이 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과 답을 찾아갈 수 있기에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그 의미가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말입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 시대는 여전히, 우리에게 고전을 시대와 상관없이 손에 들어야 할 이유를 확실히 보여주죠. 현재의 문제들은 안타깝게도 몇 세기를 지나며 이름만을 달리한 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불편한 진실로 있습니다. 모어의 작품을 읽으면, 방향을 잃고 <디스토피아>로 나아가는 그 선두에 대통령이 지휘를 하고 있다는사실을 만나죠. 역사는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기성세대로서 신세대들에게 부끄러움보다 더한 것은 없지 싶습니다.

 

최근에 IOC의 정기심사에서 판정 등급 오류는 우리나라의 처지를 보여주고 있잖아요. 얼만큼 더 추락해야 하는 걸까요. 대통령 주변의 전방위적인 굴종들이 보여주는 작태들은 가관이 아닌지요. 인권이 사라진 사회, 사회와 개인의 조화를 방해하고, 오히려 고립을 조장하는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생각이신지요. 감히 난 이 모든 것을 대통령이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합니다. 우습지요. 나와 같은 평범한 개인들이 인식하는 상황을 대통령이 모를 수는 없겠지요.

 

대통령의 우아한 거짓말, 이땅에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끊어야 하는 것인가요. 1년 2개월이 지나면서 기가막힌 일들은 너무 많더이다. 대통령을 감동시킬 생각은 없답니다. 그런 감동을 원했다면 일일이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눈 앞에 펼쳐질 수 있는 표현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쓰여질 편지는 아마도 끝을 낼 수 없게 될 겁니다. 기성세대는 남은 시간동안은 부족했던 지난 삶을 메우며 온전하게 마무리해야 하지 않을지요. 허공에 부숴질 말들의 풍경,하소연이겠지요.

 

 

 

누군가의 금전의 손실때문에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간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사람의 목숨만한 가치를 지닌 것은 결코 없습니다.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열린책들 -

 

    

2014.08.11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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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아바타

Overdye*~ 2015. 10. 13. 12:13

책 한 권과 영화 한 편, 그리고 국정화. 이 세 가지가 연상되는 가운데 먼저 양해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이다. 책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니 그렇다 치고 감히 이 영화에 유신 시대 아바타를 엮어 말하는 것이 솔직히 너무 화가 나는 것은 맞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아름다운 영화를 이렇게 꺼내 드는 것은 영화 아바타에 심취한 나와 당신에게 다시 현실을 곱씹어 보자는 거니 심하게 생각하지는 마시기를.

 

먼저 책을 정리해 본다. 8인의 학자가 『박정희의 맨얼굴』을 엮으며 ‘객관적이고 엄정하고자 했다’는 유종일의 서문은 태극기 게양식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현 정권하에서 되새김해야 할 필요가 더 절박해 보인다. 이명박 정부가 박정희의 경제철학을 상당 부분 계승해 시행하고 있는 가운데 ‘박정희 향수’가 유령처럼 떠돌던 차에 이 책이 기획되었다고 한다. 시의성으로 말하자면 오늘이 더 적절하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결정하고 박정희의 유신 아바타가 여기까지 왔다.

 

박정희 시대 경제 신화는 뛰어난 지도력에 의한 고도성장인 양 평가를 하지만 현실에선 왜 실감할 수 없는지를 해부하면서 경제 전략과 정책의 선택에 미국의 영향을 짚어 준다. 18년간 내 젊은 시절을 대통령으로 있었던 그에 대한 추억은 억울함과 분노이다. 학창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배워온 사실이 왜곡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며 느낀 감정은 국가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유신 시대 아바타들이 2017년부터 국정화 교과서를 사용하려 한다. 이 상황을 역사는 무엇으로 기록할까.

 

내가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 있다면 적어도 현재 정권이 내건 단 하나의 교과서를 만드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거다. 국가를 적으로 삼아야 하는 현실, 왜곡과 미화의 역사를 되풀이 하려는 권력을 바꿀 힘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일어난 사실을 기술하는 역사를 판단하는 일은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사실을 왜곡하면 바른 판단은 불가능하다. 미래 세대에게 하나의 역사 교과서 교육과 입시체제에서 이 사회는 그들의 바른 판단을 어떻게 요구할 수 있는가.

 

 

 

『박정희의 맨얼굴』에서 이정우는 정치적 독재자들이 경제운용에서 눈앞의 실적에 급급하여 국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지가와 물가를 상승시키면서 무리하고 조급하게 성장에만 치우쳤기에 지도력을 내걸어 그를 평가할 수는 없다는 점을 말한다. 1953년에서 2007년까지 한국의 지가는 1만 배 폭등해서 세계 최고, 물가 역시 소득 수준에 걸맞지 않게 거의 최고 수준이다. 현재는 더 심화하였다. 합법을 가장한 노조탄압과 해고는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서 노동자들의 존재를 알리는 절규로 나타난다.

 

청년들의 활기찬 목소리는 사라졌고, ‘3포 시대’라는 자조적 유행어를 좇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여기, 노동자들의 고난의 시간은 오늘도 투쟁 중이다. 굴뚝 위에서, 거리와 빌딩 위에서 배제된 노동자와 광장에서 밤을 지내며 정부의 옳지 못한 일에 소리를 질러야 한다. 이념적 편향을 말하는 그들이 내거는 균형 잡힌 역사관이란 다름 아닌 획일화와 주입식으로 단 하나의 역사 교과서에 의한 독재의 시도이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평화와 공존의 시대에 색깔로 편 가르기를 내세우는 유신 아바타는 집권 내내 참사를 부른다.

 

정치경제학의 시각에서 박정희 시대의 통제경제체제를 분석한 박헌주는 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소수의 선택된 집단이 국가가 제시한 발전 방향에 따라 대규모의 사업을 추진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증가한 물질적 이익의 대부분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부의 편중화는 심화하였고, 고도성장뿐 아니라 분배의 불평등, 사회 통합 저해 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김상조는 박정희 체제가 가져온 후유증의 또 다른 측면인 정부 정책의 왜곡이 1997년의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는지 논증한다. 개발금융과 재벌이 낳은 모순은 지속 불가능한 체제였으며 재벌 스스로 박정희의 신화에서 재벌의 신화로 변했을 뿐인 한국 경제의 현실은 결국 재벌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벌에게 국가는 없다. 저들의 이해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박 섭은 수출산업 육성과 중화학 공업화 등 박정희 시대의 산업정책을 투자 주체의 발견과 육성, 투자 자금 조달, 투자 전략 수립 등 세 부분으로 나눈다. 비록 산업정책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박정희 정권 말기에 이르면 그러한 방법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을 때 역량과 조건이 부족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은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노동 정책과 노동운동의 성장을 조망한 윤진호는 박정희 시대의 발전이 단순한 자본의 양적 축적과 경제지표의 양적 성장만이 아니라 그에 수반한 노동자계급의 양적, 질적 성장과 이에 따른 역사 주체로서의 등장이 포함된 발전이었다는 점을 주장한다. 나와 당신은 저임금정책의 실태와 장시간 노동 및 산업재해 등 열악한 노동조건이 현재까지 부정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박정희의 지도력은 초기에는 농어촌고리채 정리사업이나 농업구조 개선 심의 등에서는 중농주의로 보인다. 하지만 농업구조 개선방안 마련 실패와 외향적 성장전략의 선택에 따라 농업의 성장을 통한 국민경제의 균형성장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조석곤은 말한다. 생산력 증대의 길을 포기한 후 증산과 가격지지를 통한 소득증대책에 집중해 농가수지가 악화하였다. 지금의 농촌은 쌀 개방화로 살이 썩을 지경이다. 땅에서 사람이 떠나고 있다.

 

결코, 사회복지와 노동은 박정희 정권에서 정책 의제로 채택될 수 없었다. 권위주의적 발전 국가였던 정권에서 경제성장에 종속되어 ‘복지 없는 성장’ ‘노동 없는 성장’ ‘불균형한 성장’을 초래했을 뿐이다. 이에 신동면은 국가와 기업 간 연합이 주된 정책 망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책 결정 과정에서 기업의 이해관계가 과도하게 반영되고 노동의 이해관계는 배제되었다고 한다.

 

 

 

 

‘아바타(avatar)’는 힌두어로 강림 또는 화신의 개념인 ‘아바타라(avatara)’에서 나온 말로, 사이버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변하는 대리 물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아바타는 현실 속의 자아가 아니라 자아가 욕망하는 바를 투영한 것이었고, 사이버 공간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아바타들은 서로 만나고 교류하고 헤어지면서 관계를 맺어 나갔다.

 

2000년대 초 우리 사회에서도 사이버 공간에서 크게 유행해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아바타가 경이와 환상으로 다가온 것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덕분이었다. 영상에서 건네주는 3D의 충격과 영화로 불어넣어 주는 모두의 ‘선’을 향한 기운들에서 공간에 대한 판타지로 시간을 되돌아보며 한참을 영화 ‘아바타’에 몰두했다.

 

영화 ‘아바타’가 보여주는 인류 역사에 대한 성찰의 중심에는 침략의 역사가 있다. 영화 속에서 지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우주 기지는 인간 대 자연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던 인간들이 만든 현실이다. 반면 판도라는 지구인들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만든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우주이다.

 

판도라는 ‘나비’라고 하는 전혀 다른 윤리 기준과 심성을 가진 존재들의 공간이다. 나비와 판도라의 자연은 신경과 신경이 접합되는 시냅스처럼 서로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화의 주인공이 인간의 몸을 버리고 아바타로 사는 삶을 선택하여 진실로 나비가 됨으로써 바로 참된 인간성에 도달한다. 지금 유신 시대 아바타들의 등장을 보며, 문득 인간성이 사라진 이 공간이 가상세계는 아닌가 싶어졌다.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론의 성과로 20여 년간 고도 경제 성장의 결과, 대부분 국민은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성장 가도를 달리는 듯했지만 ‘선 성장 후 분배’는 부의 불균형을 확대했고, 정권 후기로 갈수록 경제 안정을 위협했다. ‘선 경제 발전 후 민주주의’는 유신 체제의 이념을 뒷받침하고 결국 정치적 독재, 경제적 재벌 체제 등 경제 제일주의와 사유재산 절대주의를 극한적으로 관철해 왔다. 현재가 중요한 이유, 내일은 오늘을 지나야 가능하니까.

 

영화 아바타에서 보여주는 것은 약자가 강자에 승리하는 판타지, 신화와 상상력이 합리성과 이성으로 무장한 기술문명에 승리를 거두는 판타지이다. 생태주의 철학이 발전주의 철학에 승리를 거두고 수평적 네트워크의 힘이 수직적인 조직의 힘에 승리하는 판타지이다. 과연 촛불에 휩싸인 군중과 함께 모두의 ‘선’으로 향하는 신경과 신경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소통하는 새로운 시간을 만나는 나의 조국에 대한 판타지는 가능한 것인가. 유신 시대 아바타가 하는 일이라고는 권력으로 국민을 우롱하고 국가의 폭력성을 휘두를 뿐이니.

 

박정희는 재벌체제와 비대한 토건 부문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구조와 정부의 통제 아래 이들 부문에 자금을 지원하는 관치금융이라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만들어냈다. 재벌과 토건, 경제 관료들의 3각 특권 성장 동맹을 낳았고 그들의 영향력은 성장 지상주의로 오늘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거시경제에서는 적대적 노사관계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노동개악을 노동개혁이라 말할 수 있는 그들의 뇌 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저들의 이해관계로 국가를 통째로 말아먹으려는 박정희의 아바타, 유신 시대의 아바타에 불과하다.

 

아바타는 허상이다. 역사는 한 개인의 사적인 이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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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오른쪽) 파리고등사범학교 명예교수와 홍세화 <말과 활> /한겨레

 

2년 전 가을,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경희대와 '지젝 바디우 네트워크'의 주최로 열리는 '멈춰라 생각하라-공통적인 것과 무위의 공동체를 위한 철학축제' 참석을 위해 한국을 첫 방문 했다. 지금 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물음 끝에 바디우는 보다 근원적인 곳으로 시선 돌리기를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까지 내 나라가 치닫고 있는 현실, 현 정부의 행태는 과거 독재에 저항하여 스러져간 목숨을 다시 요구하려는가 싶다

 

바디우가 그의 저서 투사를 위한 철학에서 말하는 것은 실제 아주 간단하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피곤한 삶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머리 아프다. 그런데 그 피곤함을 감내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길이란다. 그 길을 포기하면, 그저 우리는 '먹고사는' 데만 신경 쓰는 '인간-동물'에 머물 뿐이라고 말한다.

 

현대를 '이념'이 사라진 시대라고들 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극단적인 역사의 장을 넘기며 인류는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지구촌'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허나 이 지구촌이라는 말은 교과서적인 말로 사용될 뿐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은 여전히 동과 서, 남과 북이라는 긴장감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아니다. 정부는 오히려 이념을 들먹이며 래드 콤플렉스를 조장하고 있다. 국민을 마음놓고 우롱하는 5년짜리 정부를 보라.

 

남쪽에서는 '세계화'에 북쪽에서는 '주체화'에 갇혀 서로 평행선 위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한반도 이 공간에 두 원칙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과연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다. 극단적인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는 쉽다. 상생을 위한 길을 모색해 내기가, 새로운 이념(사상)을 만들어 내기가 벅찰 뿐이다. 달콤한 자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신자유주의에 심하게 매료되어 온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분명히 '세계화'의 철학인 '신자유주의'는 부자들에게는 조세 감면, 환경 보호 정책의 후퇴, 교육과 복지 정책의 포기를, 세계적 차원에서는 '부익부 빈익빈'만을 낳은, 인간적 모습마저 잃은 이 세계의 야만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새로운 실천을 요구할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게 바디우의 '투사(鬪士)'는 자본주의의 어두움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치의 조건들'을 사유하는 주체의 개인을 위한 의미로 다가왔다. 

 

민주주의, 정치, 철학이라는 세 항 사이에는 무언가 역설적인 관계가 있는데 바디우는 민주주의에서 철학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은 누구에게나 '주장'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를 미리 선택해 놓지 않는다. 한 사안에 대해 말하거나 사유하는 사람의 사회적, 문화적 또는 정치적 지위에 완전히 무관심하기에 철학은 민주주의의가 작동되는 다수에 의한 결정 방식이라 할 수가 없다.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에서 만화계의 계약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중, 머리가 없고 가슴만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너님, 후대에겐 병신인 거에요!” 격한 말이 두 해가 지났음에도 생생하다. 그와 반대로 머리만 있는 이들이 만든 사회구조를 면밀히 생각해 보았다면? 가슴은 쓰레기통에 처박고 머리만 있는 인간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용하여 '자유''평등'을 내걸며 저들에게로 치우친 사회제도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게 하고 평등은 원래 그런 거거든 하며, 우민화 시켜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야기이다.

 

철학은 머리와 가슴이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데 필요한 사유이다. 이제 본질적인 구조의 변화를 위한 투쟁은 연대의 행동만으로는 역부족하다는 것을 이미 우린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시간에서 바라보자면 '혁명'또한 현재를 변화하게 하려는 데 급급한 조급증의 결과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에도 혁명으로 피어난 4.196월의 민주항쟁이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현재는 쓰레기 같은 권력이 낯뜨겁게 날뛰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은 ''로 부터 시작된다. 현실의 움직임을 알아가고, 온전하게 삶을 향유한다는 것에 대해서. 비주체로서 허위욕망과 그로인해 발생되는 내 안의 탐욕을 부추기는 이기주의를 털어낼 새로운 가치 지향이 필요한 거다. 한 철학자가 건네는 인간을 위한 정치가 되기 위한 투사가 되기 위한 철학이라는 선물을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다른 가능성, 다른 세상을 모색하는 ‘투사(鬪士)’가 필요하다

 

분명, 바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후세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걸자면 세대를 몇 번은 지나야 한다 해도 이제는 본질에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 내가 '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종()의 공멸을 막기 위한 한걸음의 의미가 될 것 같다. 바디우가 말하듯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사상)을 지닌 삶을 살아나야 한다. 전 인류를 위한 '새로운 사상''새로운 철학', 나와 당신에게서부터 마련되어야 한다.

 

비인간적인 것으로 얻어지는 풍요로운 요소 안에서 인간의 상징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상을 향해 기꺼이 투사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노예성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형상을 지켜내기 위한 철학이 민주주의, 정치와 공존하게 될 때,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이고, 정치는 비로소 권력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장()이 될 수 있다. 니체가 '최후의 인간'이라 불렀던 비극의 모습, 모든 형상을 잃은 창백한 형상으로 남은 인간이기를 결코 허용할 마음이 내게는 없는데 당신은 어떠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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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상산고, 대자보는 여전히 실종 중!!  (0) 201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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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왼쪽)이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지난 6·4지방선거 교육감 선거가 깜깜이 선거, 로또 선거 였다"며

         임명제로의 전환 취지발언을 하고 있다. 2014.6.9/뉴스1

 

 

로이스 로리의 ‘파랑 채집가’에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이 소설은 핵 전쟁 이후에 펼쳐진 미래 사회를 보여줍니다. 수호자 집단이 이끌어가는 그 곳의 아이들 '맷'과 '키라'는 먼 훗날 펼쳐질 수도 있을 법한 우리 사회에서 성장할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들이 결국 미래의 그 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이 책에서도 무겁게 만날 수 있답니다.

 

강한 자들, 가진 자들이 쥐고 있는 권력의 힘을 남용하면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자신들만의 세상 안에 가두게 됩니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살을 파고드는 파편들이 결국은 맷과 키라의 사회를 낳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바로 현재가 이 책의 흐름에 맞춰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건 지나친 망상일까요. 아이들은 느낄 수 있답니다.

 

5년 전, '파랑채집가'를 읽고 섬뜩한 새벽을 만나면서 내 주변인들을 떠올렸던 시간은 지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십대들과 시간들을 함께 하고 있는 내게는 나름 확신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요. 하지만 십대들과 나누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두려움의 숲을 건너면 진정한 자유 속에서 만나지는 희망'이 있음을 만납니다. ‘파랑’이 구할 수 없는 아주 귀한 색이 된 그곳에서 파랑채집가, 그들이 ‘희망’이었지요.

이번 6.4지방선거는 13군데에서 진보교육감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교육의 혁신을 가능하게 만들어 갈 것이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세월호참사라는 외적인 요인만으로 진보교육감의 진출이 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내부적으로 현재 교육의 방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많은 이들이 절감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의식적인 투표의 결과였습니다.

 

공교육의 위기는 공동체를 교묘하게 해체하는 결과를 빚어내어 왔다고 하면 지나친 우려일까요. 우리의 교육은 없었습니다. 개인의 성공과 이해관계로 개인의 잠재력이나 상상력은 발휘될 가능성이 없었으니까요. 청소년들은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져 자신의 몸 사리기에 급급하고, 수동적으로 사회적 성공이란 허울 좋은 허위욕망으로 허덕거려야만 했습니다. 비주체로 사는 것이 덜 두렵게 다가왔겠지요.

 

우리 사회는 이미 교육이 아닌 사육을 통해 로리스 로이가 문학 내에서 ‘파랑’으로 설정된 ‘희망’을 빼앗아 왔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사육당하는 교육 환경에서 주체로서 철저히 배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결과로 발생하는 일들이 사회에 넘쳐나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 감추는데 급급했습니다. 청소년의 자살과 학교 폭력, 인권의 부재에서 보여지는 권위의 추락은 교육의 주체를 일깨우게 합니다.

 

 

 

 

          ▲ 서울 조희연 등 진보성향 교육감 후보들이 지난달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3대 공동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News1 김재식 기자

 

 

교육에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번 진보적인 교육감의 역할은 건강한 미래 사회를 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의 병든 교육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사람을 살리는 교육을 위한 혁신을 통한 진보적인 정책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합니다.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주체적인 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교육의 역할입니다. 그 역할은 기성세대의 사회적 책임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번 6.4지방선거의 결과에 보여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행동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육감 직선제 폐지를 위한 헌법소원 추진을 공언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교육의 주체를 외면하는 현실을 공고하게 알려준 일이지요. 또한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현행 교육감 직선제는 과도한 선거비용 문제가 있다"라며 '교육감 임명제 부활'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는 "2010년 교육감 1인 당 38억5800만 원의 선거비를 썼는데 이처럼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선거에서 지면 패가망신한다"라며 "교육감 비리가 빈번한 이유는 선거비용 조달 문제 때문"이라며 또 돈타령을 합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선거비용이 들어도 교육감 직선제는 필요한 일이며 당연히 지켜야할 제도 입니다. 오히려 교육의 주체가 구경꾼으로 놓인 현재 상황을 바꿀 의지가 더 발휘되어야할 때라고 봅니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너와 내가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은 동양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서구와 다른 점이죠.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떨어져서도 잘 버티어나가는 사람보다는 함께 하려는 우리의 공동체 정서입니다. ‘내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인 거죠. 강한 내가 약자인 너를 어깨동무하여 나아가는 것이 교육의 힘입니다. 공교육의 혁신으로 그 힘을 키워야 합니다.

 

2014.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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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 인사이드

Overdye*~ 2015. 10. 1. 15:19

 

 

리메이크된 <뷰티 인사이드>의 원작은 도시바와 인텔의 후원으로 노트북 홍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란다. 2012년 인텔 & 도시바 합작 소셜 필름인 ‘The Beauty inside'인데 이 작품은 칸 국제광고제 그랑프리 클리오 국제광고에서 금상을 차지하기도 했다더라.

 

상업성을 등에 업고 "누구나 남자 주인공을 연기할 수 있는 영화"라는 슬로건으로 영화의 주인공인 알렉스의 페이스북을 통해 하나의 에피소드가 공개되면, 1주일 동안 그 이후로 어떻게 진행될지를 관객들로부터 비디오로 직접 받아 다음 편 에피소드가 만들어지는 방식이었단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상성이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 어쩌면 나의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수 있으니까. 제작 의도와 발상이 전혀 다른 효과를 주는 것이 원작과는 다른 감동을 준 것 같다. 백감독의 <뷰티 인사이드>는 느리게 마음을 적시더라. 영화 역시 내면을 들춰내어 질문을 던지고 나를 닮은 수많은 사람을 통해 나를 다시 만나게 하기도 하고.

 

 

 

나의 수많은 모습의 순간들이 다른 인물의 이미지로 이어진다는 느낌에 어느 순간 뜻밖의 나를 만날 때처럼 친근하기도 하더군. 영화의 리뷰를 쓰는 것이 목적은 아니기에 나의 영화 이야기는 늘 나의 주변과 인물, 내 공간, 내 주변에서 느끼는 감성들로 이어지고는 한다. 나와 당신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당신의 눈에 비치는 나의 사회적 지위인가 아니면 나의 경제적인 면인가 출중하다 할 나의 외모인가(?) 아니면 영화 속의 그녀가 잡은 '그런 마음'인가를.

 

이 영화는 어느 날은 친근하게 또 다른 날은 낯설게 수많은 느낌으로 나를 스쳐 갔던 사람의 희미한 표정들과 닮았다. 마음 타령으로 스스로 위안으로 삼았던 내가 영화의 주인공으로 분하는 순간 세계는 작은 점들로 이어진 직선을 보여준다. 끝이 없다. 끝나지 않을 선이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의 모습에 보이지 않았던 마음은 이성의 힘으론 설명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금 빨리 알아차린 덕분에 이 영화가 주는 판타지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게 되어 버렸거든.

 

형식과 내용. 외면과 내면. 두 가지에서 늘 허덕거려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꽤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때는 잘 모르고 지나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어쩔 수가 없지. 이방인이 되어 먼 길을 돌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시간이 지금은 세상이 나를 자꾸 불러낸다는 생각도 들거든. 내가 세상을 향해 소리 낼 수 있을 때 세상은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었다고 말하는 나도 있긴 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다른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설정은 문학 작품에서도 새로운 것은 아니지. 카프카의 <변신>은 널리 읽는 고전의 대열에 있는 작품이니까. 다만 내용에서 집중했던 것은 역시 현대인의 소외였어. 개인 간에 일어나는 소외의 일상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 조장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에 머물게 되더군. 사회를 움직이는 테크노크라시로 만들어낸 소외. 국가가 개인을 교묘하게 소외시키고 있다는 거지.

 

이 영화는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을 외부에서 찾지 않는다. 주인공의 삶은 매일 매일을 다른 얼굴로 살아간다는 게 드러나지 않을 뿐 현대인으로 반복되는 일이기도 하지. 보이는 것 말고 느끼는 것으로 살아질 수 없는 삶.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집 앞으로 난 밤길을 걸으며 가을의 깊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삶과 함께 수많은 얼굴이 지나간다. 결국,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의 기능에 주목하게 된다.

 

인간에게도 유통기한이란 것이 있을까. 5년짜리 정부의 유통기한 중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자. 아직도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참사 이후 과연 변한 것이 있을까. 정부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애프터 립 서비스는 최고이다. 입으로는 삼권분립을 외치는 대통령만큼이나 공공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우리 사회, 악의 유혹은 고용소비그 달콤함으로 개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데 힘을 보태 왔다.

 

경제 성장을 위한 국가의 도그마에서 국민은 권리의 유통기한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회에서 상품의 유통기한이 지나면 폐기 처분된다. 그 기한을 만든 이는 생산자이고 수요자의 입장에선 생산자에 대한 믿음이 전제된 가운데 그 기간 안에 상품을 소비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그 상품이 변질하면 내 건강을 위해서라도 쓰레기통에 버린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그와 같은 사회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상호 신뢰이다. 역사는 훌륭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 인간이 생활해 온 모습이고, 그들의 경제적 욕구와 공공선을 향한 존엄이 반영되어 온 과정이기도 하다. 한쪽으로만 치달은 급성장의 역사를 성찰할 기회는 늘 마련되어 왔고, 그것을 향한 지속하는 저항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정부가 겉으로 추진하는 정책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거겠지.

 

역사의 진보는 한 시대, 또 한 세대를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나침반 역할을 해 왔다. 한 개인이 몸담은 그 사회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구성원 모두에게 상식적으로 통하기 위해 그 사회의 역사적 기록과 그 이미지는 역사의 발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 오지 않았던가. 지나온 역사에서 반복되곤 하던 공안 정국을 내세우는 국가의 정치는 이미 유통기한을 넘긴 지 오래다.

 

그런데도 정치·경제, 사회 각 분야를 부패의 냄새로 전염시키며 휩쓸고 있다. 눈 가리고, 귀 막고, 입 막고 이제는 코를 막아야 할 때이다. 결국, 썩은 냄새가 싫으면 알아서 기어 그들의 품에 안기거나, 숨통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 틀어막고 연명하라는 말이다. 정치를 바라보는 피로도가 급격하게 몰려오는 현실감은 방향을 잃기에 십상이다. 국민을 상품화하여 유통기한에만 사용하는 국가는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기간이라는 유통기한이 상실되면 국민을 폐기 처분하듯 버린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서 'Inside'라는 단어는 선물처럼 포장된 '내용물'이나, 사람의 '내면'의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한 개인의 마음이 한결같을 수는 없었지. 늘 뜻밖의 작은 일로 그동안의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그 마음을 애써 버리려고도 하지. 하지만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도 그 안에 담긴 진정성을 판단하고 느낄 수 있다면 내 마음을 한결같이 이끌어갈 수는 있었던 것 같다. 하물며 5년짜리에 불과한 나쁜 정부에 동참하고 있는 조력자들과 정치인(政治人)에게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겠지. 겉으로 보이는 이 사회의 풍요와 그 이면에 드리운 암울함을 바라보게 된다면.

 

내면의 아름다움이 나를 감동하게 할 그 어느 날, 광장의 유쾌함을 위하여 오늘은 빗소리와 바람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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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상산고는 왜? 

 

오늘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선택한 학교들의 명단이 보도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는 유일무이하게도 전주 상산고가 철회의 소식을 주지 않은 채 학교 교감선생님의 바람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지금부터 소설을 써 보려고 한다. 열여덟들이 벌인 숨막히는 서스펜스!!

  

   

▲ 1월 1일 밤, 익명의 학생이 대자보를 붙였다. “안녕들하십니까?”의 형식을 빌려 만든 이 대자보는 1월 1일 밤에 급식실 앞 게시판, 매점 앞, 학교 중앙 현관에 총 3부가 붙었다. A4용지 4개를 붙여 프린트한 대자보 전문 중 일부 내용이다.

 슬퍼2실종 중!!

 

 

   
 

먼저 첫 번째로 붙여진 대자보 옆으로 3일 저녁 9시께 '존경하는 교장선생님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자보를 상산고 2학년 학생이 역시 본관 입구에 게시했지만, 4일 오전 8시께 학교에 의해 철거됐다.  

  

슬퍼2이 역시 실종 중!!

 

 

소설쓰기.

첫 번째 '안녕들하십니까'를 어둠을 이용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철저히 익명으로 붙여야만 할 한 소년이 보인다. 그 소년은 치밀하게 낮에 A4 네 장의 글을 붙일 적절한 장소를 물색했다. 또한 CCTV의 위치도 꼼꼼하게 위치 파악을 했을 것이다. 주머니에는 스카치테이프를 단단히 챙겼을 것이고, 기숙사를 나오는데 최대한 자연스레 나오기 위해 들고 나올 종이들을 재주껏 위장해야 했다.

자, 이쯤이면 그 당시의 상황에 뛰어들어가 봄직하다. 심장은 팔딱거릴 것이고, 생전 해 보지 않았을 일을(소년에겐 거사가 아니었을가 싶은데) 하는 거다.

만약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적잖이 있을 것이고, 떠오르는 얼굴들도 있었을 거다. 부모님, 주변인들, 영화 속의 한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을 수도 있겠지. 깊은 밤에 교내를 돌아다니며 다른 친구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며 그 소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다가 이놈의 나라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일에 무슨 레지스탕스처럼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 우리는 알고는 있다. 그 소년도 알고 있기에 그렇게 하는 자신을 격려하고 지금까지도 학교의 철회 발표를 기다리며 그 다음의 상황을 애써 상상하지 않으려고 할 지도 모른다. 똥고집을 피우는 상산고 측의 선생들이 애들을 아주 초죽음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할까.

학교 측이 대자보를 뗀 황당 이유는 "편지글이어서 교장에게 전달하려고…" 라는 말. 말한 것은 있으니까 일요일 오전 10시에 상산회관에서는 약 30명의 개인들이 참가했고 교장에게 전달하기 위해 나온 교감선생님 한 분과(그 유명한 역설의 달인) 또 한 분의 교감 선생님과 토론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기자가 찾아와서 도중에 한 분 교감선생은 나갔다나. 뭐, 별 성과없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양측 모두 제 소리들만 내다가 약속있으신 교감선생님 덕분에 한시간여에 끝이 났다고 하더라. 
 

   

▲상산고 재학생들이 돌린 '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 반대 서명용지'. 모두 280여 명의 학생들이 서명했다. 이 서명에는 역사 교육을 받게 될 신입생들도 참여했다.

  

슬퍼2이 역시 실종되면 안 돼!!

 

 2014.01.04. 제목: 상산고 학생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최대한 퍼트려 주세요

 

짧게 쓰겠습니다.
서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과반수는 여유있게 넘길 것 같습니다.
채택 교과서를 수정할 수 있는 기간은 1월 6일까지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학교 측에선 책임 회피를 하며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사회가 소집되어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해 보겠다고 했는데, 
결국 소집되지 않았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라서, 학생회 간부들은
이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저와 생각이 같은 친구들 몇 명이 모여서 진행중이고요.
현재 졸업생들과 언론, 시민 단체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
이하 생략

  

위의 글은 [오늘의 유머]에 올라온 상산고 학생의 호소였다. 

   
 

 

상산 홈페이지에는 "상산에 가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 어느 곳이나 학교의 교육 목표는 그럴 듯하다. 멀쩡한 애들 데려다  졸지에 "친일파..."로 싸잡아 몰아 가는 사회이다. 지학사 역사교과서의 보충을 위해 나라를 말아먹는 데 앞장 선 이들을 칭송하는 교학사, 2종을 선택했다는 게 더 괘씸하다. 피할 구멍을 만들어 놓고 실시하지도 않는 토론 교육을 떠벌이는 학교측의 말에서 우리 교육의 환경을 제대로 보는 것같아 실소를 하고 말았다.

 

왜, 학생이 부끄러워해야 하지? 기가막힌 교육현실이다.

 

 

                                 

학교 안에서 밖에서 동문들도 학교측의 잘못된 선택을 지적하고 바로 잡아줄 것을 알리고 있었다.

전북지역 30여 개 시민사회·교육단체로 이뤄진 ‘전북교육혁신네트워크'는 6일 오후 상산고 앞에서 교학사 교과서 철회 촉구 기자 회견과 학교 항의방문 등에 나설 예정이란다. 전북교육청도 최근 상산고 홈페이지 게시판 글 무단삭제와 재학생들의 대자보 철거 건과 관련해 전북학생인권조례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는지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를 실시할 방침이기도 하다고 전해진다.  

 

아래 글은 <서프라이즈>에 올라온 글이다. 

   

 

상산고, 역설의 달인 교감과 바쁘신 교장선생님,

자,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상산고 정문 앞에서 일요일 번개모임으로 동문들이 급하게 모여 이틀 전부터 1인 시위 자들과 함께 했다. 아이들은 1인 시위자들의 주머니에 따듯한 음료수를 찔러 넣어주고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학교로 들어가기도 했다. 부디 아이들의 애를 그만 태우고 학교 측의 올바른 결정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평소에는 공부들 좀 하라고 어지간히들 볶아대면서 이런 상황에서 애들이 참, 공부할 수는 있겠나.

역설 좋아하시는 교감선생, 혹시 방학도 실종 중인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스릴 넘치는 방학을 즐기라는 것인가? 아이들이 선택한 자신의 학교에 자긍심을 찾아줄 상산고의 교학사 교과서 철회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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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노잼

Overdye*~ 2015. 9. 26. 17:53

어차피 돈이 많다면 당신은 괜찮다. 미리 다른 행성이라도 갈 무언가를 마련했을 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그것 또한 가능하진 않겠지. 돈이 없다면 지금부터 삶을 정리해 보는 게 현명한 선택일지 모르겠다. 만약에 한국에 원전 사고가 난다면 피난은 거의 불가능하다. 국민의 안전 따위에는 그야말로 "노잼"인 정부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지. 돈이 없는 당신은 그 자리에 남은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돈이 있건 없건 비슷한 처지에 놓일 확률이 더 높긴 하겠군.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상상력에서 나온 말이니 무시해도 상관없다. 그래도 인류의 삶은 상상력을 허락하는 과정에서 진보해 왔고 문명사회는 지속 가능했음을 기억해 내기를 바란다. 핵에 미친 한국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변화를 모색할 것이다. 늘 그래 왔던 거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소리를 낸다. 그때는 이미 늦은 건 아닐지 고민해 보자.

 

지난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해 국내 최고령 원전인 고리원전 1호기(587000)200730년 수명이 다했다. 하지만 2017년까지 '1차 수명연장'돼 가동되던 중 지난 6월 고리 원전 1호기의 영구정지를 하게 되었다. 시민단체와 지역주민들은 반대하며 즉각 폐쇄를 요구했고 지난한 투쟁 끝에 얻은 결과이다.

 

고리 1호기는 지난 200730년이 애초의 설계수명이 종료됐으나 정부로부터 계속 운전허가를 받아 2017618일까지 수명이 10년 연장되었던 거다. 이 역시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례로 추가될 정부의 규제 완화규제개혁이라는 기업의 입장만을 위한 선택이었다. 과연 더 큰 파이를 만든다는데 모두가 나누어 먹는 그 날이 있을까.

 

파이 부스러기도 낙수효과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대다수 사람의 삶이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과 고통에 허우적거린다. 그 고통도 부족하여 원자력 발전소의 밀집도가 세계 최고의 나라에 사는 5천만 생명이 위험에 빠져 있다. 그 상황은 한국사회가 짊어질 아무도 책임질 필요 없는 시스템의 탓이 되어 버릴 것이라는 추측이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정부의 무책임과 핵발전소라 생각하지 못하는 수천만의 생명으로 그 대가를 치르겠지.

 

 

2009년 존 힐코트 감독의 영화 <The Road>

 

두 발이 남았구나. 너 한 발, 나 한 발.”

 

총을 아이의 손에 쥐여 주고, 두 발이 남은 총으로 자살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걸 입에 넣고, 이렇게 향하게 해.”

 

영화 <The Road>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알아차릴 수 없는 그 순간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영화이다. 인류에게 닥친 그 어느 날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그 원인을 상상하는 일들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니.

 

2011년 후쿠시마 사고는 최악이 아니었다. 앞으로 사고 발생 가능성이 큰 한국의 원전은 지난 4.16 세월호 참사보다 더 혹독한 트라우마를 줄 것이다. 한국은 원전이 밀집되어 있고 피난 계획도 없다. 재난 컨트롤타워가 작동할 수 없는 한국은 이미 겪어보았기에 피난은 개인의 몫이다. 국가는 당신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다행인가. 바닷속이 아니라 그래도 땅 위에서 숨차도록 달리면 벗어날 수 있을까. 수영연습은 일단 미루시고 달리기 연습을 우선 시작하던지, 체력 단련에 힘써야 한다. 이 영화 속의 길은 현실이 되겠지.

 

원전 지역에서 피폭 가능한 반경 밖에서 거주하고 있는 나는 괜찮을까. 멀리 떨어진 진도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전국을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지금까지도 그 트라우마는 가실 줄을 모른다. 이제는 원전 참사이다. 안전하다는 원전에 대한 우리가 모르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보면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에 원전산업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았고, 고통에 신음하게 했다. 또한, 엄청나게 많은 죽음의 땅으로 만든 사상 최악의 사고들이 있었고 계속될 것이다. 그토록 공부를 강조하는 한국사회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무엇을 학습했을까. 세계의 공포에서도 이명박 정권부터 더 확대해서 진행 중이다.

 

2009년 존 힐코트 감독의 영화 <THE ROAD>

 

 

모든 게 사라졌어. 시계는 새벽 117분에 멈췄다.

 

내 아이에게 이런 삶을 주기 싫어.”

 

그녀는 떠났다.

 

이따금 나는 아이에게 오래전 얘길 했다. 용기와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그걸 기억하는 게 어려움이다. 내가 아는 모든 건 아이가 나의 가망성이란 거다.

 

들어 봐, 우린 얘길 해야 해. 그 사람들이 뒤에 있어,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그게 다지. 나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해. 우린 단지 불씨를 옮기는 거야.”

 

무슨 불씨요?”

 

네 마음속의 불씨.”

 

 

 

일본의 해안 지대는 원전 건설 입지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경고를 수없이 들었음에도 일본은 쓰나미와 지진이 겹쳐 일어났을 때의 전력 문제에 대비하지 않았다. 실제로 고령화된 원전 사고는 자연재해 앞에서는 답이 없다. 그곳을 피할 수밖에는 그 어떤 안전대책도 무용지물이 된다. 원전산업이 하나의 기업이 하는 일이라면 돈을 댈 주주들이 없었을 것이다. 원전산업 배후에는 막대한 이권의 먹이사슬이 존재한다. 엄청난 국가 보조금으로 허위와 은폐, 비밀과 낭비로 가득 찬 산업이다. 4년 전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또 잊고 있다.

 

강윤재 에너지전환 부대표·가톨릭대학교 연구교수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제안을 했다. ·장기적으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중단하고 수명이 다한 원자력 발전소는 차례대로 폐쇄하는 방식으로 원자력 위주의 에너지 정책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는 철저한 수요 관리와 시스템 정비, 전력원의 다양화, 지역적 분산화 등을 제시했다.

 

정부의 고리 원전 1호기 폐쇄로 그칠 일이 아니라는 거다. 현재 한국은 고리 1호기를 포함한 23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다. 11기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해 2029년까지 36기로 확대하는 전력수급 계획이 마련됐다. 정부의 원전추진은 그 이유가 분명하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효과와 경제적이며 안정적인 전력공급이라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원전 1기를 폐기하는 과정이 30년이 걸린다는 것은 알리지 않는다. 그 과정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원전을 가동할 때보다 폐기할 때 더 큰 비용과 환경문제, 사람의 목숨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 전적으로 이 위험을 미래 세대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정부가 하는 일에 주목할 이유이며 필요함이다.

 

정부의 레토릭 정책, 나쁜 정부는 레토릭을 반복한다. 그것이 언론 플레이 되면서 반복되는 모욕감에 몸을 떨게 되지 않던가. 그동안 전력 수급의 문제로 블랙아웃이 되었을 때, 전력의 절약은 개인들의 몫이었다. 정부는 전력 수급의 수혜자인 기업들이 당연히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그에 합당한 정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본질을 왜곡하는 정부의 에너지 정책 중심에 역시 사람은 없다. 한국 사회의 불씨, 사람 마음속에 있는 불씨, 아이들의 미래다.

 

 

[딩동]

이 글은 팟캐스트 [그알싫] 독재유산답사기 : 핵노잼을 듣고 제목을 가져와 쓴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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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Overdye*~ 2015. 9. 23. 13:24

 

2015년 이준익 감독의 <사도>

 

 

부자 간의 갈등을 바라본 감독의 시선처럼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 다양할 수 있을 것 같다. 함께 간 젊은 친구와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숙소로 돌아왔다. 생각이 많았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살아온 시간이 다르기에 느끼는 사회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차이가 전제겠지만 말이지.

 

분명한 것만 짚고 가자.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았다라고 말하면 된다. 나이 든 사람들이 잘 못 하는 건지 않은 건지 아무튼 사과하는 거 드물더라. 그리고 어찌하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지.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탁상공론일 뿐이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말뿐인 사회에서 또 말로 지적하게 되는 거고. 성질 급한 사람이 먼저 블라블라~~~~

 

갈등의 해결은 대화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대화 자체가 어려울 경우가 더 많곤 하지.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입 다물고 사는 경우는 적어도 한 두 번은 대화를 시도했다는 의미이겠지. 쉽게 말하면 갈등은 외면하는 게 편하니까. 이럴 땐 개인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끝까지 버티며 자신을 관철하는 모습의 사도 세자와 타협하는 것과 다르긴 다르지. 나를 지키려면 죽어야 하고 살리려면 타협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기도 하니까.

 

주말에 영화를 보고 다시 시작한 월요일의 SNS에 보이는 갈등중 조선일보의 김광일 논설위원의 칼럼과 그에 응하는 미디어스의 강민하 기자의 글을 읽는다. 조선일보라는 점만으로도 안 읽는 나는 화가 날 이유도 없는데 말이지. 아직도 그 조선일보의 글을 안 읽었다 뭐. 그것에 반박하는 글은 그 칼럼을 읽지 않아도 화가 날만도 하군 정도. 내 머리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연상되더라.

 

그리고 경향신문 고종석의 칼럼과 그 글에 대한 반응들.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단상. 개인적으로 닮고 싶은 글이지만 너무 감당 안 되는 나는 요 정도에서 허덕거리기에 그의 글에 대해서는 그저 느낌만으로도 충분했다. “남자 여자 또 다른 무엇의 구분 없이 모두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건가~” 정도의 글쓴이 마음이 전해지던데. 내가 보게 된 글들이야 갈등의 극히 한 부분이지만 이 두 가지에는 당면한 한국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놓친 마음의 실종 상태, 나와 당신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사도>에서 세자가 칼을 내려놓아야 했던 순간, 잊고 있었든지 아니면 그리워하든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했을 테니. 가족 공동체에서도 개인의 욕망은 가족 간 갈등의 시작이 아니던가. 다만 누가 얼마만큼 자신의 욕망보다 가족의 화합에 더 힘을 보탤 수 있을까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아니던가.

 

그의 지위가 무슨 상관일까. 과거 왕의 자리이건 백성의 자리이건 사람이 있는 곳에 갈등은 곧 삶이니까. 갈등 없이 지나는 삶도 그리 좋을 것은 없지 않나 싶은 거지. 갈등을 풀어가려는 나의 움직임에서 뜻밖의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같다.

 

모든 갈등에는 그에 담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생각해 볼 시간은 필요했던 것 같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과 갈등의 대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국가와 개인 간의 갈등에는 시스템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인데 사회구조와 관료제라는 시스템이 만든 악. 생각이 없어진 광기의 군중처럼 역사는 현재에 다다른 것일까.

 

세대 간의 갈등. 그것을 풀기 위한 노력이 삶이 아닐지. 개인에 머물 수만은 없는 갈등은 시스템이 주체가 되었을 때 이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역사의 단죄와 성찰이 개인에 머물 수 없는 이유는 사회윤리의 자율성이 사라지기 때문이겠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그럴싸한 자기 합리화로 세상의 일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거나 갈등하지 않으려는 것, 회피이거나 외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있어야 당신도 있는 것이니 나를 지키는 일이 우선일 것이고 그 사이의 갈등은 나를 위한 해결이 우선되고는 하지. 하지만 여기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가는 것은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관에 따라 다른 해결 방법을 모색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이 아닐까.

 

하늘이 할 수 없는 조율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에 약간의 사랑을 담아보자.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벅차더라. 이 나라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하마. 열렬하게. 내가 이 나라에 사랑을 퍼붓기 시작하면 갈등을 풀어나갈 무언가를 위한 개인적인 움직임이 시작되겠지. 당신을 사랑하기로 했다면 당신을 위한 나의 몸짓은 지금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달라지겠지. 

 

이번 한가위 보름달에 소원을 살포시 전하는 마음을 다시 가지면 조금 나아지려나. 차가운 이성 앞에 따뜻한 감성이 먼저라면 나도 꼰대 소리 들으려나. 영화 <사도>에서 정조로 분한 소지섭이 너무 짧게 나온 것이 못내 아쉽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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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월의 겨울 방학 기간에 개인적으로 작은 도서관을 운영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책을 읽는 공간을 열었습니다. 2회는 독서지도와 NIE로 수다도 떨었습니다. 마무리되어 가기에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지요. 하지만 의외의 상황에 스스로 한 방 얻어맞아 띵해지고 말았죠. 충격이었습니다. 관리부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관리하지?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관리당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할 내 나름의 행동을 취했습니다. 일단 작은 상자를 입구에 두고 휴대전화기를 걷었습니다. 이 공간은 와이파이가 그야말로 빵빵하게 터지는 곳이지요. 그동안 그들은 책을 읽기보다는 스낵 컬처와 스마트폰 게임을 했습니다. 관리자가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함께 있을 때는 책에 빠져있는 모습이었죠.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라 빗대면 과한 것일까요.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 사회,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앞장서서 구성원들을 관리하고 그것이 마치 국가 안보를 국가 성장을 위한 것이라 여기도록 하고 있지요. 관리당한 기성세대들이 신세대들을 그렇게 관리하려 합니다. 청소년을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장래 대한민국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일부 십 대들의 모습을 너무 과대 해석하는 것이라고 부디 비판해주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과 관리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행하는 어른들의 관리 역할은 그들을 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의 교육은 사육으로 변질하여 버렸고 그 사육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다시 사회를 향해 화살을 쏩니다.

   

2008년 데니스 간젤 감독의 '디벨레(Die Welle)'

 

이 영화는 독일영화로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커 벌리 고등학교에서 교사 론 존스에 의해 행해진 실제 실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무정부주의 대신 독재에 관한 토론 수업을 진행하게 된 한 고교 교사가 독일 나치즘의 독재 정치가 현대 독일에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학생의 의견에 그 작동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교실 실험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같은 유니폼을 입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실험에 점점 동화된 학생들은 협동단결을 위한 단체를 결성해 그 목적에 맞지 않는 친구들을 지목하고 감시하며 배척하는 등 점점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개인주의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지만 공동체가 발휘할 수 있는 연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느끼는 겁니다. 독재는 어디에서건 가능합니다.

 

휴대 전화기를 걷지 않으면 자제할 수 없는 청소년들의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한국의 교육이 저지른 주입과 획일화를 마치 연대의식으로 몰아가는 전체주의의 영향력은 심각합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일상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청소년들은 '규율'획일화로 시작되는 '독재'의 가능성에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집단적 광기로 몰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애국심을 내세워 국민을 선동하려는 현 정부의 모습만큼 위험합니다.

 

이 영화에서 프로젝트 수업을 한 주간 진행한 후 벵어 선생이 말합니다.

 

첫 수업 시간에 질문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우리에게 독재가 가능할 것인지 물었다. 독재정치란 바로 이런 거다. 방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나, 너희?”

 

 

2008년 데니스 간젤 감독의 '디벨레(Die Welle)'

 

프로젝트 수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많은 청소년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디벨레'의 일원으로 평소에 경험할 수 없었던 연대의식과 그 힘의 파장을 마주하면서 전혀 다른 폭력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 이 실험 수업은 커다란 불행을 가져왔고 한 교사의 실험 정신조차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는가를 조심스레 되묻고 있습니다. 벵어 선생은 프로젝트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수업관리만 했기 때문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수업 진행 중 교사는 학습관리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의 1972년 신동아에 실린 글을 전환의 논리에서 읽었던 활자들이 너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1970년대의 풍경들이 하나둘 재현되고 있는 태극기가 휘날리는 거리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독재시대의 재현같습니다. 표준화된 시대에 주입된 대중매체를 통한 우민화를 위한 국가의 노력은 빛을 발휘한다는 리영희 선생의 말을 되뇝니다.

 

브라운관과 10인치의 유리창을 통해서 원거리로 조작되는 지배층의 의도는 자기 자신의 감각과 지각으로 이 사회의 실태를 꿰뚫고 살피려는 노력을 포기한 치매증 대중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한 듯하다.”

 

감각 미디어에 혼이 빠져버린 신세대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진 그 오랜 습속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기성세대로서 만나는 통렬함입니다. 문자 미디어가 전해줄 이성과 사고와 멀어지게 의도한 이 사회의 필요조건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세대 간의 벽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태극기를 바라보는 것이 애국심을 흉내 내는 일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2015년으로 96돌을 맞은 3·1절의 거리는 정부의 태극기 달기 운동 분위기를 확산시킨 덕분인지 곳곳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물결입니다. 1970년대를 학창시절로 보낸 나는 서울시청 앞을 지날 때면 국기하강 식을 하는 동안 가던 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너무도 당연시되었던 의례는 그저 바쁜 걸음 멈추게 한 재수 없는 날의 기억으로 남았을 뿐입니다.

 

정부의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이 박근혜 대통령이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 국기하강 식 장면을 보고 애국심을 강조한 즈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올 한 해는 전국이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힐 것 같습니다. ‘디벨레물결이란 뜻의 독일어입니다. 한국사회를 뒤덮는 이 태극기의 물결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3.1만세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요. 다른 공동체를 배척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가져올 결과는 암울한 과거의 교훈으로 끝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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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다른 세계로 떠나기 전까지 추구할 수 있는 영혼의 탁월함을 향한 변화의 과정, 그 가능할 것만 같은 일의 한 사례로 위대한 영혼 ‘간디’를 생각해 본다. 필자에게 각인된 간디는 '물레를 돌리는 모습'의 간디이다. 그의 영혼이 고양되기까지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와의 편지 인연이 있었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톨스토이 사상의 중요한 키워드 '비폭력'이 킹 목사와 넬슨 만델라에게로 이어졌듯이 간디에게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절대시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각을 유지하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필요하다.

 

간디의 행적을 보면 흔히 알려져 있는 간디와는 다른 모습도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주장’했다거나, ‘제국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자국민 청년들에게 호소’하는 모습도 있다. 그러한 모습은 우리의 역사 속 ‘친일파 지식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지식인들이 보였던 치졸한 친일 부역과 현재 거대 정당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후대들에게 ‘마하트마 간디’라 불린다. 그는 적어도 후대에 남을 흠잡을 데 없는 위인이기 보다는 '모두'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를 뛰어 넘으려 노력했던 영혼의 탁월함을 지니려한 한 ‘인간’으로 남았다. 간디의 사유는 그 한계가 있지만 그는 결코 스스로 선택한 물레를 버리지 않았다.

 

만약, 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자신의 삶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혼의 탁월함을 위한 개인적인 각성과 노력을 했다면, 그가 말년에라도 자신의 온전한 삶을 위한 어떠한 행동으로라도 이 나라를 위해 실천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허나 그는 자신만의 현실에 머물고 떠났다. 여기에서 한 개인의 삶에 시선을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개인을 놓고 그를 나름대로 평가할 때, 그가 가진 배경이 어떤 배경인가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외면하거나 특히 사회에서 부여해온 기득권에 있어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 인생을 후대에서 조명할 때 '완벽함'이란 그야말로 플라톤의 이데아계에서 가능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만 인간의 부족함을 극복해 나가려는 개인의 노력이나 개인이 마주하는 하나의 계기 등이 작용될 때 그에 따른 '선택'에 의해 삶의 모습은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대의 위인들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을 선택하여 비판받는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현실에서 얻어지는 개인의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영혼이 지향하는 '모두'의 선을 향한 시간들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현재의 시간은 하필이면 미래가 아닌 과거로 향하고 있다. 거부하기에 벅찬 현재에서 내가 원해서 발 딛고 있는 땅이 아니라고 소리치며 내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간디를 등장시키며 어떻게든 이상한 나라의 구조를 이해해 보려고는 한다. 이 '잘못된 구조'를 '악'으로 놓는다면 이 구조를 만든 개인도 '악'인 것이다. 저절로 만들어져 뚝 떨어진 구조는 아닐테니 말이다. '악'의 개인이 집단을 이루고 정파에, 기득권에, 지도층에, 줄줄이 그럴싸한 수식어를 붙인 채 만든 '구조'인 것이다. 물론 그 개인의 '악'은 여러 유형의 '나쁜 쾌락'을 통해 자신만의 욕망을 담았을 뿐인 거다.

 

사실이 소설로 둔갑하고, 소설이 사실이 되는 요지경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정국에서 설흔의 ‘왕의 자살’을 읽은 터에 이야기의 배경 연대가 같은 김상규의 소설 ‘화담 서경석’까지 줄줄이 떠오른다. 조선의 역사에서 ‘인종’을 기억해 내기는 쉽지 않다. 영의정 윤인겸 등이 대행대왕의 묘호를 인종이라고 의정했는데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일컬어 인이라 했다고 ‘명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역사 관련 책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그의 재위 기간이 조선 역사에서 가장 긴 26년의 세자 시절과 가장 짧은 여덟 달의 왕좌를 지킨 병약한 임금으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설흔은 인종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상상력을 발휘했다. 물론 소설이 가진 허구성에서 그 당시의 배경을 다양하게 추론해 볼 수는 있지만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아닌 한 개인 ‘이호’의 선택을 주시했다. 이호는 개혁 세력의 피바람을 부른 사화(士禍)의 중심에 선 아버지 중종을 닮지 않기 위해 스스로 병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설이 왜 사실로 느껴지는지.

 

아마도 모든 근원은 '나'에게서 '모두'에게로 나아가려 할 때 그나마 인류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진보가 진행되었던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어탑을 원하는 영혼에게 ‘철학자의 돌’을 선물로 주고 싶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나와 너, 모두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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