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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다른 세계로 떠나기 전까지 추구할 수 있는 영혼의 탁월함을 향한 변화의 과정, 그 가능할 것만 같은 일의 한 사례로 위대한 영혼 ‘간디’를 생각해 본다. 필자에게 각인된 간디는 '물레를 돌리는 모습'의 간디이다. 그의 영혼이 고양되기까지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와의 편지 인연이 있었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톨스토이 사상의 중요한 키워드 '비폭력'이 킹 목사와 넬슨 만델라에게로 이어졌듯이 간디에게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절대시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각을 유지하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필요하다.

 

간디의 행적을 보면 흔히 알려져 있는 간디와는 다른 모습도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주장’했다거나, ‘제국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자국민 청년들에게 호소’하는 모습도 있다. 그러한 모습은 우리의 역사 속 ‘친일파 지식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지식인들이 보였던 치졸한 친일 부역과 현재 거대 정당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후대들에게 ‘마하트마 간디’라 불린다. 그는 적어도 후대에 남을 흠잡을 데 없는 위인이기 보다는 '모두'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를 뛰어 넘으려 노력했던 영혼의 탁월함을 지니려한 한 ‘인간’으로 남았다. 간디의 사유는 그 한계가 있지만 그는 결코 스스로 선택한 물레를 버리지 않았다.

 

만약, 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자신의 삶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혼의 탁월함을 위한 개인적인 각성과 노력을 했다면, 그가 말년에라도 자신의 온전한 삶을 위한 어떠한 행동으로라도 이 나라를 위해 실천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허나 그는 자신만의 현실에 머물고 떠났다. 여기에서 한 개인의 삶에 시선을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개인을 놓고 그를 나름대로 평가할 때, 그가 가진 배경이 어떤 배경인가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외면하거나 특히 사회에서 부여해온 기득권에 있어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 인생을 후대에서 조명할 때 '완벽함'이란 그야말로 플라톤의 이데아계에서 가능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만 인간의 부족함을 극복해 나가려는 개인의 노력이나 개인이 마주하는 하나의 계기 등이 작용될 때 그에 따른 '선택'에 의해 삶의 모습은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대의 위인들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을 선택하여 비판받는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현실에서 얻어지는 개인의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영혼이 지향하는 '모두'의 선을 향한 시간들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현재의 시간은 하필이면 미래가 아닌 과거로 향하고 있다. 거부하기에 벅찬 현재에서 내가 원해서 발 딛고 있는 땅이 아니라고 소리치며 내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간디를 등장시키며 어떻게든 이상한 나라의 구조를 이해해 보려고는 한다. 이 '잘못된 구조'를 '악'으로 놓는다면 이 구조를 만든 개인도 '악'인 것이다. 저절로 만들어져 뚝 떨어진 구조는 아닐테니 말이다. '악'의 개인이 집단을 이루고 정파에, 기득권에, 지도층에, 줄줄이 그럴싸한 수식어를 붙인 채 만든 '구조'인 것이다. 물론 그 개인의 '악'은 여러 유형의 '나쁜 쾌락'을 통해 자신만의 욕망을 담았을 뿐인 거다.

 

사실이 소설로 둔갑하고, 소설이 사실이 되는 요지경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정국에서 설흔의 ‘왕의 자살’을 읽은 터에 이야기의 배경 연대가 같은 김상규의 소설 ‘화담 서경석’까지 줄줄이 떠오른다. 조선의 역사에서 ‘인종’을 기억해 내기는 쉽지 않다. 영의정 윤인겸 등이 대행대왕의 묘호를 인종이라고 의정했는데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일컬어 인이라 했다고 ‘명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역사 관련 책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그의 재위 기간이 조선 역사에서 가장 긴 26년의 세자 시절과 가장 짧은 여덟 달의 왕좌를 지킨 병약한 임금으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설흔은 인종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상상력을 발휘했다. 물론 소설이 가진 허구성에서 그 당시의 배경을 다양하게 추론해 볼 수는 있지만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아닌 한 개인 ‘이호’의 선택을 주시했다. 이호는 개혁 세력의 피바람을 부른 사화(士禍)의 중심에 선 아버지 중종을 닮지 않기 위해 스스로 병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설이 왜 사실로 느껴지는지.

 

아마도 모든 근원은 '나'에게서 '모두'에게로 나아가려 할 때 그나마 인류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진보가 진행되었던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어탑을 원하는 영혼에게 ‘철학자의 돌’을 선물로 주고 싶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나와 너, 모두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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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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