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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은 교사의 기본적 권익 옹호, 민주교육 발전에의 기여, 참교육 실현을 목적으로 내걸고 있다. 주요 활동으로는 교사들의 근무조건 개선 및 조직 강화에 관한 활동, 교육환경 및 교육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 교육의 민주화와 자주성 확립을 위한 활동, 노동3권의 완전보장 등 교육관계법의 개정을 위한 활동, 참교육 실천 활동 등을 설정하고 있다. 결성 당시 정부는 전교조를 현행법을 위반한 불법단체로 규정해 교원조합의 결성을 무효화하고 관련교사를 구속·파면·해임 조치했다. 이 때문에 전교조는 본래의 목적과 관련된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한 정치활동에 주력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전교조는 1999년 국민정부시절 합법화 되었다.


고용노동부는 23일 전교조에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있는 규약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면서, 내달 23일까지 시정하지 않을 경우 노조설립을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인들은 제쳐놓고라도 학생들은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실체에 대한 인식조차 할 수 없다.‘전교조’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는 학생들이 더 많은 이 사회가 그것을 말해 준다. 네이버 ‘지식in’에 ‘전교조’를 써 넣으면 계속되는 질문들이 보인다. 교육의 현장에서 교육의 주체들을 최일선에서 마주하는 교사들의 인권과 민주 교육을 위한 노동조합으로 인식하고 있는 학생들은 전무할 정도이다. 우리는 왜 다수의 예비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보다 많은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안들에 대해서 이리도 무지할까.


[출처] http://media.daum.net


우리나라 국민들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불편하다고 불평을 하고 노동조합을 ‘집단이기주의’라고 비난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려고 애쓴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봉건 해체 과정에서 시민 계급이 형성되고, 이들이 자본을 축적하여 물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자본주의로 진행하여 시민적 권리 의식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쌓여 왔다. 노동자의 파업을 비난하지 말아야 결국 노동자인 나 자신, 우리의 권리도 지켜진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이런 현실은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식민 시대를 경험하고, 곧바로 자본주의로 편입되면서 그런 소중한 경험을 축적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또한 선진국에서 보편화 되어 있는 노동교육으로 노동법, 노동 운동, 노동조합 등을 외면한 채 교육을 통한 시민 권리 의식을 갖추기 위한 미래 세대를 위한 노력도 기회도 저버렸다. 대부분의 학생이 장차 노동자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학생인 아이들에게 ‘노동자’라는 말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이 받게 될 최저 임금을 최고 임금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이러한 무지에서 오는 시선들이 노동 운동에 대한 비뚤어진 의식을 갖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노동조합에 대해서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매스컴의 정보 전달이나 간접적인 사회 경험 등을 통해 오히려 노동조합은 뭔가 대단히 불순하거나 불온한 단체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의식을 그렇게 조율해온 음모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온 국민들은 ‘반조폭 정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반노동조합 정서’를 갖고 있다. ‘반정서’야 어디 이 것 뿐인가. 최근에는 국가 안보를 내세워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과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파렴치한 일들을 국가기관이 나서서 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진보'를 바라보는 편향된 '반정서'를 확대하여 급기야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도록 조장하고 있다. 


[취재파일] 이석기 내란음모 기소가 남긴 것들, 그리고 지켜볼 것들 관련 이미지

[출처] http://news.sbs.co.kr/


정보화 사회가 진행될수록 전문 직종, 고학력, 비생산직의 계층은 그 사회적 지위가 예전에 비해 더욱 상향되고 사회적 분포도는 더욱 넓어졌다. 다만, 그러한 계층 구성원의 가치관은 개인주의화되고 파편화되어 조직, 집단, 단체 등 공동체 개념을 거부한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는 노동 없이 살아갈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현존재의 생존과 직결되기에 누구도 ‘노동자가 아닐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수의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이 힘을 합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 그 역할을 해야 하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노동자들이 외면하도록 정부가 앞장선다는 것이다.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있는 규약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의도하고 있다는 이해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결국 해직된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이 외면하도록 합법화하여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 3권을 무력하게 만들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계급이 있고,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이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방향이 우리가 지향하는 역사의 진보인 것이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


[출처] http://www.jeonmin.co.kr


노동조합이 없다면 이 세상은 소수의 특권을 누리는 세력들만의 이해가 무자비하게 관철되는 심각한 불평등구조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특히나 전교조와 같은 노동조합은 다른 노동조합에 힘을 실어주는 그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나라의 미래 세대들을 위한 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해, 자신들이 소속돼 있는 교육계의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가장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전교조라는 공동체의 힘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지켜내야 한다. 전교조를 포함한 모든 노동조합은 지금까지 지난한 역사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사회의 특권세력이 노동조합을 혐오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가장 확실한 표적이 되고 있다. 이에 나는 전교조를 적극 지지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http://news.kukmin.tv/ 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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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밑에 열린 박근혜 대통령,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한길 대표의 3자 회담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회3자회담’이 별 내용도 결과도 없이 끝나는 것을 보며, 야당과 정국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야당의 장외투쟁을 거론하며 ‘국민적 저항’을 운운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이해가 안 된다.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민생을 거론하고 있지만 현재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급한 사안의 핵심을 회피하며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거나 자각능력이 부족해서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히려 광장의 소리와 야당의 행동들을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해석하며 이 사태를 공안정국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청와대의 의지만을 보여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확인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 나라에 작동되고 있는 ‘청와대 룰’이란 것이다.

 

 

[출처]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30510104604176&srchid=IIM%2Fnews%2F67626214%2F2f65476def26efc926a1632ec9dfdf30  

 

 

앤드루 바세비치는 ‘워싱턴 룰’에서 지난 60년간 미국의 군사정책과 실제 관행들을 관찰해 보고 국제평화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최소한 몇 가지 중요한 지속적인 요소들을 발견해 유지하기 위한 믿음으로 ‘성(聖)삼위일체’를 말했다. 첫째 미 군사력의 세계적 주둔, 둘째 이 군사력에 의한 세계적 힘의 투사, 셋째 현존하는, 또는 앞으로 예상되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세계적 개입주의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미국적 신조가 합해져서 하나는 목표를, 다른 하나는 실천을 규정하는데 이 두 가지가 그동안 미국의 세기를 통치하고 감시하기 위해 워싱턴이 시도해온 방식의 진수를 이룬다고 하며, 이 두 가지를 ‘워싱턴 룰’이라고 불렀다. 이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CIA(중앙정보부)’와 ‘SAC(전략공군사령부)’라는 조직을 만들어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으며, 그들 역시 미국 시민들을 비밀과 은폐로 몰상식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세비치가 말하는 ‘워싱턴’은 지리적 의미가 아니라 이러한 워싱턴 룰을 수호하고 집행하는 인물과 일련의 조직들로 행정, 입법, 사법부의 상층부를 비롯해 국가안보의 주요 구성원-국방부, 국무부, 그리고 최근 만들어진 국토안보부, 나아가 정보기관들과 연방 법집행기구들-이 포함된다. 또한 일부 싱크탱크와 이익단체들, 그리고 변호사, 로비스트, 해결사, 전직 관료, 예비역 군 장교 등 아직도 권력 핵심부와 끈이 닿는 사람들을 워싱턴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또한 거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 방위산업체와 대기업, TV방송국과 ‘뉴욕타임스’와 같은 고급신문들, 나아가 대외관계협의회나 하버드 대학 케네디행정대학원 같은 준학술 조직들도 포괄한다. 이들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워싱턴 룰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외는 없다고 이 책의 역자 또한 전한다.

 

 

정파를 넘어서서 정치적 협력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과거 식민세력에 협력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아니면 그들이 이미 누려오던 기득권을 보호받은 집단으로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그 연결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다. 경제적 성장만 되면 친일도, 독재도, '무조건 친미'도 좋다는 암묵적 정서가 그들에게 시민의 권력을 일임해 주었다. 우리들도 한 몫을 거들었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이미 그 힘을 잃은 ‘제국주의’나 ‘이념’들이 아직도 거론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5년간을 돌아보며 내가 생각하는 청와대 룰은, 첫째 분단국가를 앞세운 국가안보를 위해 민주주의 원리는 무시할 수 있다. 둘째 국가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사회적 약자에 놓인 국민들의 희생은 당연하다. 셋째 정치협력 집단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국가기관은 권력의 비호에 적극 협조한다. 현재 이렇게 작동되는 정황들에서 나오는 개인의 지나친 억측일까.

 

 

대한민국의 정치협력자들은 너무 뻔뻔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의 직속기관인 국정원의 맹활약과 집권당이 보여 주는 국민 기만 행위들, 독립적인 국가기관들의 대통령 예속화를 위한 검찰 흔들기, 저널리즘이 실종된 공영방송의 허황된 보도들과 보수 언론들의 불공정한 보도 등이 그것이다. 어디 정치 뿐 이던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단절된 소통은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감을 전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사회가 진행되는 그 이면을 철저히 들여다 볼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롤즈(J. Rawls)의 정의론(正義論)을 다시 떠올려 보자. 롤즈의 주장에는 "원초적 상황(original position)이라고 불리는 가상적 상태"로부터 출발해 "앞으로 사회가 어떤 기본 질서를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이뤄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다. 사회적 원칙에 관한 논의는 자신이 처하게 될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게 정상이라는 설명이다.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의외로 많이 있다.

 

 

정의는 어느 계층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들을 알고 개인의 자각과 사회의 성찰을 통해 국기문란에 앞장 서고 있는 정부와 그에 협력하는 집단들을 향해 끊임없이 요구해야만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시민은 정치적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다. ‘워싱턴 룰’의 저자 바세비치는 ‘미국시민들이 시민정신의 빈곤화와 약화에 따라 집단적 책임보다는 개인적 선택을, 장기적 웰빙보다는 즉각적인 욕망의 충족을 더 중요시 한다’며 정부가 그렇게 하도록 “우리가 허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한다. 사회적으로 강자들의 심기를 거스리는 순간 개인은 두려움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의가 통하는 사회는 좌도 우도, 부자도 빈자도 없으며, 나의 이익이 곧 이 사회 공동체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국민 일반의 이익과 의사와 감정을 무시한 채 속속 드러나는 정부의 무능과 속임수, 안이한 자세와 편협한 시각으로 야기되는 판단, 문제제기에 대한 봉쇄와 왜곡과 탄압으로 인해 쌓인 국민들의 뒤틀린 감정은 쉽게 사그라질 것이 아님을 현 정부는 직시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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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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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는 두 개의 감정들이 서로 엇갈리며 나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모처럼 주말을 18세기 소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만난, 뒤늦게 찾아온 절절한 사랑과 상실의 아픔으로 인한 지독히 낭만적인 감성으로 벅찬 마음이었다. 다른 하나의 마음은 바로 쿠바를 떠나며 남겨둔 혁명가의 마음이었다. 그의 마음은, 그의 정의를 향한 사랑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정의 사회를 향한 체 게바라의 혁명정신은 이 땅의 오늘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마음의 요동침을 고스란히 마주 하는 시간이다.


이제 스물 다섯인 큰애가 존경하는 인물이 ‘체 게바라’이다. 자신도 혁명 정신으로 살아가고 싶다며 그의 평전과 시집을 내게로 건넸다. 내키실 때 읽어 보라며 씨익 작은 웃음을 흘리고 타국으로 떠나 공부를 하고 있게 된 지도 벌써 4년이다. 난 서가에 꽂혀 있는 짙붉은 표지와 그의 얼굴이 그려진 ‘체 게바라 평전’을 보면 애써 외면해 왔다. 사실은 겁이 났던 게다. 이 책을 읽으면 나는 심한 혼돈에 빠질 것이고 그의 삶과 죽음을 떠올리는 것으로만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책을 펼치고야 말았다.


한 개인이 시대정신을 구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고 외면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모두가 체 게바라처럼 행동하는 혁명가가 될 수는 없다. 허나 표창원 교수의 말처럼 냉소주의를 버릴 수는 있는 거다. 아주 쉽게는 아고라 청원에 서명하는 일일 것이고, 당장 일어날 것은 아니라 해도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하다. 혼자의 힘으론 어렵지만 사실은 나부터 시작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 않던가. 모든 변화의 시작은 무모한 듯해도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기에 서명을 하는 일부터 했다.


광장에서 타오르는 촛불과 각계에서 소리 내고 있는 시국선언들, 일상에서 개인적 투쟁을 향한 기운의 전조들은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노래와 함께 가슴속으로 쌓여지고 있다. 온갖 상념들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표현할 수 없는 격한 마음과 함께 지난 밤을 엎치락 뒷치락하며 하얗게 지냈다. 여전히 작동되는 나의 이런 날 선 감성에 적잖이 스스로 놀라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꿈틀거림을 다시 확인하는 거였다. 언론의 직무유기로 나타나는 지(知)의 세계와 무지(無知), 두 개의 현실 세계의 부조화 속에서 낯설게 살아가고 있나 보다.


혁명이란 말이 주는 의미는 좀 전투적이긴 하다. 허나 내게 혁명이란 말은 아주 친숙한 말이다. 가끔씩 나른해지는 나를 발견하곤 할 때면 어김없이 이 생명력 넘치는 말을 내뱉고는 해 왔으니까 말이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책 이름이기도 하다. 그가 책으로 전해 준 것은 스스로가 일으키는 내 안의 혁명이었다. 휘청거리는 청춘의 시절부터 스스로를 다그치고 설레는 말, 그것은 ‘혁명’이란 말이었다. 그 말을 되뇌이면 참으로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오늘은 나와 함께 하는 너를 향해 혁명 정신을 말하고 싶어진다.


체 게바라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의 정신을 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로, 행동으로, 여전히 기억해 내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념을 초월하고 국수주의, 이기주의 같은 것이 없는 건강한 세상을 바랐다. 야만의 땅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아름다운 사람의 전형으로 휴머니스트일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나는 국정원게이트는 정의를 위한 휴머니스트 혁명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를 떠올리고 있다. 정의를 향한 결연한 의지는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강력한 욕구에서 발휘될 수 있다.


나에게 그는 야성을 잃지 않은 사자와 같은 모습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온화하다. 그의 야성이 깨어날 때 세상은 바람을 가르며 그에게 길을 내주게 될 것이라 믿는다. 우리에게 공동의 적은 누구일까.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는 적이 될 수 없기에 그렇다. 적으로서 마주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할 대상으로 진정한 삶을 향유할 수 있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서로 아껴주고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그 길을 가야 할 동행인이고 싶다. 우리 사회가 걸어 온 그 혼돈의 시간들에서 빠져 나와 체 게바라의 말을 전한다.


“인간은 태양을 향해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어야 한다. 태양은 인간을 불타오르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 준다. 고개를 숙인다면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삶의 참된 가치를 외면한 채 자본과 탐욕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들에게 체 게바라의 낮은 곳으로 향하는 혁명 정신을 오늘은 참으로 격하게 그러나 간절함을 담아 이야기 하고 싶다. 한 개인으로서 이 사회를 향한 사랑이 계속 될 수 있기를 나에게도 당부를 하며 남은 이 밤의 시간은 체 게바라의 시를 읊조리며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이 땅의 사람들이 지배 권력의 남용에 분노를 드러내는 다양한 모습들은 더 이상 우리 사회를 부정의로 몰아갈 수 없다는 결연함이다. 부당한 권력의 횡포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는 혁명정신의 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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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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