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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도청 강당에서 '제12회 식품안전의 날' 기념행사


지난 대선 때 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거론한 것으로 4대 사회악 척결에 끼어든 ‘불량식품근절’은 의외였다. '악(惡)’이라는 말이 불량식품에 덧붙여진다는 놀라움과 함께 대다수 시민들을 졸지에 악인으로 만들기도 한 공약이었다. 불량식품을 만드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이 늘 있었다는 의미이고, 나도 예외는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학교 앞 문구점에서 동전 한 개로 나의 입을 달콤하게 할 수 있었던 그 추억의 과자들이 전부 악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악을 추억하는 나를 악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왜?’라는 의문이 따라왔다. 이것이 ‘4대 악’에 들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해 낼 수 없었던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악인이었기에 몰랐던 것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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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누리당의 신의진 의원이 발의한 일명 ‘게임 중독법’이 우리 사회의 ‘4대 중독’이란 범주에 들어갔다. 마약, 술, 도박, 게임, 그렇게 규정되어진 상황에서 필자는 또 궁금해진다. 왜 3대는 아니고 5대는 아닐까? 생각하다 숫자 ‘4’가 지닌 우리 사회의 관습적 사고에 마주하게 되었다. 죽을 ‘死’를 연상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인가. 마치 ‘중독을 죽이자’라는 의미로 연상되는 것이 필자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어떤 말들이 사회구성원의 뇌를 조종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사회학습으로 각인되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회 담론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보수주의의 ‘엄격한 아버지’를 연상시키고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으며 내가 도덕적인 인간이 되려면 ‘악’에 맞서야만 한다. 이번에는 국회의원에 의해 졸지에 게임에 집중하고 과하게 노는 이들은 ‘중독자’가 되는 거다.


악에 맞서려면 강한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 그 도덕성을 준법정신으로 하여 악을 제거하기 위해 보복과 징벌의 법을 제정한다. 우리 사회에서 ‘중독’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의미로 쓰여 왔고, 그런 의미에서 ‘중독은 나쁘다’는 말이다. ‘게임중독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이 심각한 우(遇)를 범한 것은, 같은 문화 콘텐츠에 대한 형평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겠다. 심각한 중독 현상은 오히려 강력한 미디어 매체로 부상한 텔레비전이다. 굳이 4대 중독법을 만들어야 했다면 ‘TV중독법’이 먼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다. 우리에게 TV가 있는 저녁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일상이고, 그 중독은 한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를 지체시키는 독재자들에게 열렬했다. 시청자들을 우민화시키는데 급급한 불량방송을 송출하는 텔레비전이야말로 나쁜 것이기에 중독법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http://cafe.daum.net/ibims 


중독으로 인해 생기는 각종 문제들은 반드시 사회적·개인적 노력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허나 그 ‘중독’이란 말 앞에 어떤 말이 놓이는 가에 따라 그 의미도 긍정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아름다운 중독’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몰입’이다. 이 몰입은 자기 진화를 위한 발견의 시작이고, 그 효과를 굳이 따지자면 세상을 변화시켜 진보할 수 있었던 역동적인 힘이었다.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는 사회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에 개인들이 각자 몰입한다면 그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게 된다. 게임에 몰입하는 개인들이 모여 산업적 성과를 이루어낸 것처럼 사회·정치·교육 등 각 분야에 몰입한 개인들이 모여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율적 의미의 접근으로 강제할 ‘법 제정’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중독을 해결하려면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학업과 연결된 시간을 제외하면 아이들에게 남는 시간은 아주 적다. 즉 충분히 뛰어 놀 시간이, 저들끼리 모여서 놀고 떠들 시간이 없다는 것이, 게임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임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게임중독법’을 발의해서 타율과 강제로 막을 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누릴 자유로운 시간을 먼저 허락할 수 있는 교육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논다’라는 말이 구성원들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회 분위기에 ‘놀 수 있는 사회’로 변신하지 않는다면 ‘중독법’은 숱하게 발의되고 제정될 것이다. 과연 강제되는 법을 만들어 놓고 자율적인 준법정신을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법이 개인에게 휘두르는 힘은 보이지 않는 국가의 폭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회는 그만큼의 개인들이 감당할 책임의식이 뒤따른다. 자유는 스스로 책임질 것을 전제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 자유를 ‘법’으로 차단하겠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은 과연 그 흔하게 널린 ‘자유론’에 대한 수많은 인문학자들의 말에 몰입한 경험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인간이 우위를 정하는 부분은 지구의 그 어떤 종(種)도 접근하지 못한 문화적 도구 때문이라고 한다. 그 도구를 사용하는 자의 선택이 게임만은 아니다. 문화집중 현상을 모든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그 도구가 한 개인을 파멸로 몰아간다면 그 도구를 덜 사용할 수 있는 개인적인 노력이 우선일 것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 체험 환경은 이 사회의 몫이다. 이 사회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해 게임의 즐거움에만 빠지도록 한 것은 아닌지 사회적 성찰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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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http://movie.daum.net


감정노동을 엄밀히 정의하면 “업무상 요구되는 특정한 감정상태를 연출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일체의 감정관리 활동”이 직무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노동 유형이다. 그런 의미로 정치인도 일종의 ‘감정노동자’라 하겠다. 일반인과 달리 감정노동자로서의 일부 정치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노동을 뻔뻔하게 즐기는 능력을 갖게 되어 그것을 완력으로 이용까지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땅의 대부분의 감정노동자들은 고통에 신음하게 된다.


지난 일주일 뉴스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다 열 개의 단어로 지난 30여 년 간의 시간을 지나면서 드러난 중국 사회를 말하던,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를 떠올렸다. 눈에 들어 오는 반복되는 단어들에  필자도 우후죽순 감정노동의 트라우마를 만나고 있다. 지난 1년을 되돌아 보며 한국을 말할 수 있는 열 개의 단어를 생각한다. 그 열 개의 단어는 는 또 하나의 단어 ‘사태’로 모아져 있었다.


단어 나열의 순서에는 하등의 의미가 없음을 전제하고 감정노동자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필자의 처지에서 내 주변을 떠돌며 결국에는 중증의 감정노동자로 만들어 온 우리의 현실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국가의 면적이나 인구로 비교하기 어려운 두 나라의 모습이지만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쉽게 발견된다. 국가의 정체성에 의문 부호가 붙는다.


위화는 중국에서 ‘홀유(忽悠)’의 의미는 맨 처음의 의미를 벗어나 점차 하나의 속어로 자리잡아 중국동북지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속어로서 ‘홀유’는 똑같은 발음의 ‘호유(胡誘)’ 즉 ‘어지럽게 잘못 인도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책에서 말한다. 이후 끊임없는 변이가 일어나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허풍과 선동, 종용의 의미를 갖고 허튼소리나 뜬소문, 사기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해학과 조롱, 근거 없는 날조와 투기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홀유는 중국어의 만능열쇠가 되어 관련된 단어의 말뜻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입만 열었다 하면 홀유를 하게 만들었다는데 한국에서 정부의 홀유는 ‘사태’가 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먼 계절로 갈 것도 없다. 지난 대선의 겨울부터 궤적을 돌아보면 NLL대화록 사태를 시작으로 진주의료원 사태, 국정원 사태,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난 시국선언 사태, 인터넷의 일베사태, 개성공단 사태, 해병대캠프 사태, 윤창중 사태, 밀양송전탑 사태, 국회의원 이석기 사태는 통진당사태로 이어졌고, 아직도 열거할 ‘사태’가 마치 유행처럼 줄을 잇는다.


전교조사태까지 생각하면 한 마디로 ‘민주주의 위기 사태’라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개인의 감정 노동은 극한까지 갈 수밖에 없는 거다.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세대를 초월하여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개인들의 자살사태는 무엇으로 표현해야 적절한가. 정부의 홀유는 개인의 영웅주의에서 시작되었기에 잠시의 현상으로 머물러서도 안 된다.


위화는 ‘홀유’라는 단어가 중국 사회의 윤리및 도덕성 결핍과 가치관의 혼란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 혼란 속에서 한 개인도 정부를 상대로 홀유하기 시작하고 그 사회는 홀유라는 언어유희에서 종국에는 홀유가 실제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면서 어느날 내가 속임수나 헛소문 같은 단어에 합리성이라는 외피를 입혀 놓은 홀유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출처] 정봉주와 미래권력들


한국의 매스컴에서 넘쳐나고 있는 도처에 퍼지는 가짜 뉴스의 등장과 이런 가짜 뉴스에 법률적 책임은 물론 도덕적 책임조차 지지 않아도 되는 현실, 정부가 국민을 우롱하는 사태에서 개인들의 감정 노동에서 발생하는 트라우마는 너무도 당연하다. 인터넷에서 어느 고등학생이 때늦은 1인 시국선언을 했다. 그 소년은 마지막에 “민주주의를 쉽게 내주지는 못하겠다. 내 미래를 도둑질 하지 말라”라며 끝을 맺었다.


기성세대로서 순간 가슴이 후끈해지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한 것은 현재에도 민주주의는 권력자들에 의해 충분히 짓이겨지고 있다. 그 고통에 신음하지만 한 개인들의 힘은 협동의 형태로 작은 공동체로 공감의 마음들이 모이고 있다. 그런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협동조합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그 가치를 후대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기에 결코 우리는 미래를 도난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은 http://news.kukmin.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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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북을 면치 못하는 우리 외교는 이번 유럽 순방에서도 여전한 듯하다. 외교의 중요성은 국익과 관련되었기에 중요함에도 그 효과적인 면에서 본다면 탐탁하게 여길 수가 없다. 대통령을 포함한 측근들의 행동들에서부터 드러나는 잡음들은 지난 미국 방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국내 언론들의 북소리만 시끄럽다.


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수행중인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3일 첫 순방국인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국정원 대선 개입 항의 집회’와 관련해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다”며 참석자들을 협박하는 글을 써서 눈길을 끌어 주었다. 그의 행동은 국가를 위한 외교인지, 1인을 향한 애교인지 구분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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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시위 사진출처 : 경향신문


김 의원이 말한 파리 시위는 지난 2〜3일 대통령이 유럽 순방 첫 방문국인 프랑스를 찾은 때에 프랑스 거주 한국 교민들과 유학생 등이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에 항의해 벌인 시위다. ‘민주주의 파괴를 규탄하는 재불 한인’은 2일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 3일 팔레 루아얄 광장 등에서 국가기관의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촛불 시위를 열었다고 한다.


미국의 웹모바일 미디어 토픽스는 8일(현지시각) 김 의원이 시위 참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관련된 한국 언론 기사를 ‘토픽스 프랑스’에 링크했다니 과연 북소리가 날만도 하다. 일국의 국회의원이 제 스스로 알아서 민주주의 국가를 부정한 꼴이다. 국민을 대행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국민을 협박할 수 있는 나라로 알리고자 소리를 내었으니 말이다.


대통령의 이번 유럽 순방 컨셉은 문화산업 교류 및 창조경제 중심의 '세일즈 외교'라고 한다. 무엇을 세일즈한 것인지는 도통 알 수 없지만 국정원 등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입장을 "과거의 정치적 이슈"로 규정하며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태평하게 순방길에 오르는 뒷모습은 해외 관광을 위해 떠나는 여행객 같기만 하다.


대통령의 서유럽 방문소식은 국내 언론에게는 큰 뉴스로 연일 보도되었다. 대통령이 떠나기 전 프랑스 보수 일간지 '르피가로'와 인터뷰 한 내용이 대서특필 됐고, 영국국빈 방문 때의 성대한 환영식 장면은 주요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국내에 대서특필된 인터뷰 내용은 번역에서부터 그 의미를 달리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 영국 언론들은 대통령의 방문 소식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극소수의 언론만이 한국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언급했다는 거다.


프랑스의 일부 언론은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한국에서 일고 있는 국정원, 군의 선거개입 문제, 아버지의 그림자,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문 등을 다루기도 했지만 국내 언론에서 이와 관련된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한국을 출발하기 전에 BBC가 인터뷰를 했지만 이 기사는 BBC 월드로만 방송되고 영국인들을 위해 BBC에서는 방송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국내 언론사들이 권력에 부역하는 열띤 모습은 언제나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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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위 사진출처 http://blog.daum.net/rhekaeorn/3743


대통령의 해외방문은 국내 악재로 인한 지지율 하락을 상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여 한복입고, 정상들과 회담하는 모습이 집중 조명되면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서유럽 방문도 마찬가지여서 갤럽이 대통령의 해외방문 기간이던 11월 4일부터 7일 사이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전 주보다 지지율이 5%p 늘었고 부정적 평가는 4%p 줄었다고 발표했다.


정치가 몰락한 나라에 외교의 몰락 또한 당연지사이다. 실리도 자주도 없는 그동안의 우리 외교는 정부가 내거는 창조경제에는 턱없이 부족한 ‘눈치외교’ 답습의 구태일 뿐이다. 추상적인 ‘창조경제’가 국내에선 미사여구에 불과하니, 그야말로 ‘우물안 외교’에 머무는 수준이기에 한국외교의 근본 문제를 성찰할 기회를 필요로 한다 하겠다. 외교를 대외용이 아니라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지나쳐 국민으로서 기만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국내 언론의 대서특필되는 대통령 나들이가 국민을 기만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옛 성인들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제 한 몸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하는 정부가 외교를 내걸고 국익을 논하며 ‘세일즈’를 생색낸다는 것이 막힌 가슴을 더욱 갑갑하게 하고 있는 꼴이다. 민주당이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에 대한 특검을 요구하고 나섰고, 정국은 심상치 않은데도 언론을 통해 비춰진 정부의 모습만 보면 태평천하(太平天下) 같다.


필자는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 국민 여론을 정부정책 지지용으로 하기 위한 국내용 외교를 보면서 세계에 놓인 대한민국의 위상을 좌우할 수 있는 외교부와 그에 속한 외교관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국경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외교는 외교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국민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외교라고 생각하기에 피켓을 든 재외국인들의 모습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발견될 수 있음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서유럽 순방 중 유일한 국빈 방문은 영국뿐인 그런 대접을 받는 나라에 산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외교를 대통령 당선 후에 의례적으로 치루는 주변 국가들을 방문하는 모양새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보다 실질적인 외교부를 갖추고, 역량있는 외교관이 될 인재를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국가 간의 접촉으로 국내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 실질적인 국익에 힘쓸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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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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