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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5일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의 정당해산심판안을 청구하고 정당활동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자, 같은 날 문재인 의원의 검찰 소환과 나란히 언론의 화두가 되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무오류의 논리를 펼치는 건 의식적으로 오류에 대한 면역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 확실한 근거가 존재할 때 우리는 오류가 없고, 논리적이라고 말을 한다. 정부가 하는 일이 논리적일 때 대중은 그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할 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부가 하는 일들이 오류에 둘러 쌓여진 채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기에 정부에 대한 신뢰감은 실종 중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정부의 ‘종북’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보수세력이 야권 전체를 싸잡아 ‘종북세력’으로 낙인찍고,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정치적 타격을 주곤 했다. 이런 식의 논리가 만연한 이유는 오히려 ‘분단국가 처지’를 빈틈없이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을 뒤집을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참이라고 믿을만한 타당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반박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애초에 그 가능성을 배제해 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 때도 있다. 그렇게 조작된 사건이라면 모든 증거가 한쪽에만 유리하도록 기우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해산심판 청구안을 꺼내든 정부의 의도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넘어 야권 전체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그간의 정부가 보여 온 국가주의를 내세워 편가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 본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욕을 충족시키려는 방법으로 너무 오래 써 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즉, 그동안 언론플레이, 포퓰리즘, 총체적인 관권선거 등에서 드러난 오류의 면역성에 기대고 있다 하겠다. 결국 뭔가를 설득력 있게 부정할 때 흔히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번 법무부의 성명은 ‘정의의 축소’로 보이게 하는 교묘한 말장난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관련사진


통합진보당원들이 5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긴급 기자회견



오류에 대한 면역력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음모론인데 증거들마저 사실상 음모론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가짜논리가 극성을 부리며 진행되고 있는 허울만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추락한 현실에서 국가안보에 관한한 우리 사회는 자신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가능성마저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생각이 경직됐을 공산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정부가 통진당의 해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기감을 조장하고 있다 하겠다. ‘조건부 진실’이라는 오류는 놀라운 주장들이 모호한 정의(定義)를 근거로 제기되곤 한다. 도대체 어디까지 달려갈 설국열차인가.


대의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라고 옳은 선택이라 할 수만은 없다. 다수결이 지닌 오류가 아니던가. 그런 오류들에 면역된 구성원들은 고질적으로 각인된 언어의 왜곡된 개념에 갇혀 ‘내 식대로 정의(定義)’를 내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철학자 앤서니 플루는 이런 식의 주장에 ‘진정한 스코틀랜드 사람의 오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문에 대문짝하게 난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를 보며 ‘진정한 스코틀랜드인이라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는 말로, 그럴듯한 이유가 되어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지난 대선까지 이어져온 야권연대의 한 축인 동시에 ‘종북’ 논란의 당사자인 탓에 통진당을 감싸면 마치 내가 유유상종이라고 생각되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급진적인 정책이나 발언에 ‘종북’이란 왜곡된 용어를 씌우는 가짜 논리들을 바로 잡을 의식적인 노력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나 뭐든 원하는 대로 정의하고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진실을 중시한다면, 정의(定義)가 공정한지 따져봐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의 다양성이 보장되어 정책의 차별화와 그에 따른 국민들의 소수 의견까지도 반영될 수 있을 때 사회구성원들의 보다 나은 삶이 마련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될 가능성이 깃드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RO라는 조직을 위험한 단체로 규정한 근거가 녹취록에 따른 것인데, 

        녹취록 상에 나타난 발언을 근거로 내란을 음모했다고 하는 것은 순환 논리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제발 ‘정치적’으로 ‘진화’ 좀 하자. 그러기 위해 다양성을 획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통진당이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해도 정당의 해체는 법무부가 나설 일은 아니다. 과오에 대한 사실 규명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정부는 스스로 가짜논리에 갇혀 여전히 대중에게 호소하는 오류까지 저지르고 있다. 단어의 의미가 상황의 ‘진실’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언어를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특정 용어의 의미를 엄격하게 규정할 때 이런 식의 억지 논리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고착된 ‘이념’은 이미 해체된 지 오래인 세계화로 열린 시대가 아닌가. 정부가 알아야 할 ‘진실’은 대중이 결코 아둔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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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시대의 '음서'가 현대에 되살아 나려 한다. 삼성자사고 개교의 소식에 더 큰 한숨과 한심한 정부에게  왜 그러니~ 하며, 목을 빼고 있는 다수의 민초에 속한 1인으로 몇 년 전 읽은 책을 부활시키며 곱씹고 있다. 부모가 잘나지 못하면 자식도 잘날 수 없다는 삼성판 '음서'는 다시 말해, 부모가 용기를 내면 자식도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겠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며 채워주고 잘못된 것들은 바로 잡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담긴 몇 해 전에 만난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학벌없는 사회)'를 떠올리는 시간이다.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들을 사유와 분석을 통해 쟁점화 하며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8명의 필진들이 쓴  이 책은 '학벌없는 사회'로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학교를 떠나라!" 진학을 앞두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어린 그들에게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말이다. 더우기 내 아이들에게도 건네기 어려운 말이다. 적어도 지금 이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학교 밖에서 만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기에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그 희망은 사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내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내용들이지만 과연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열릴 혼돈과 어지럼증은 어떤 마음의 변화를 오게 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만나는 시간 내내 '내 속에 웅크린 허무(dada)'를 불러내어 만났지만 내 생각이 크게 필자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삶으로 향한 전환을 건네는 것이고, 아주 특별한 기회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먼저, 돌을 막 지난 첫 아이의 '바람그리기'부터 시작된 그림에 대한 재능을 키우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일관성을 대학입학까지 유지했던 부모로서 삼성판 '음서'에 떠오르는 생각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다. 수요자의 거부만이 답이다. 허나 그 답을 낸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있겠다 정도일 것이리라.

내게는 오로지 제 삶에서 '그림'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아이가 스물이 되자 자신의 진로에 스스로 딴지걸기를 해, 저 스스로가 더 힘들고 막막할 인문학을 선택해 다시 시작하기를 선언한 첫째의 삶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 즈음엔 대한민국 고3, 둘째의 갑작스런 진로 변화와 이탈, 저항에 동조하고 수포자로서 선택의 한계를 넘으려고 매진하며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딸의 모습에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의 시간이 있었다. 둘째에게 그림을 접고 인문학으로의 선택은 수학을 하지 않았던 수포자의 한이 반영되기에 서울에 있는 대학진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도움과 서울특별시를 탈출한 내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의 시간들이라 여겼던 것들이 아이들의 선택과는 다름을 알아차리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위한 선택에 우선적으로 대응을 해왔다. 그들의 미래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내가 서울특별시를 벗어난다는 두려움을 넘어서면서 찾아낸 자유로움으로 채워지는 삶들을 생각하고 아이들의 정서적인 독립선언으로 열릴 고단할 시간에 응원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둘째는 제 언니와는 다르게 동양미술을 선택해 진행하던 고교과정에서 그 뜨건 고3 수시 기간 중에 돌연 전공을 인문학으로 바꾸어 차악의 선택을 향했다. 저 스스로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기에 타인의 시선을 벗어던지고 원하는 학문의 길로 여행을 찾아가는 시간들에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결코 늦지않은 오히려 적절한 시기, 그러나 타자의 시선에선 결코 현명하지 못한 둘째의 <선언>은 한 인간으로서 성장한 모습이었기에 그동안의 시간들을 뒤돌아 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일이. 그렇게 해서 얻을 명문대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외면하고, 그녀에게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고통이었음을 생각하면 미리부터 짐짓 건넨 진로에 대한 방향 모색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만 그녀가 그 길로 나아갈 때 온전하게 스스로를 느끼지 못한다면 대학 4년 내내 스스로 고통과 우울, 외로움과의 지난한 투쟁으로 패배의 감정을 만나기도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까지도 경험한 후에야 그녀는 진정한 스스로의 얼굴을 만들어 낼테지만 말이다.

이런 우려함도 이제는 치루어 내어, 둘째는 대학 입학 후 반학기를 다니고, 2년 휴학의 시간을 치루어 내더니 자신의 재능을 재발견하고 복학을 했다. 그녀는 지금 한 학기 중 얻을 수 있는 학점을 취득하기 보단 스스로채우지 못한 시간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란 것은 늘 내 가까이에 있었고, 이 저속한 사회가 끼친 영향력에서 자유롭기만 하다면, 매일이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리라. 또래들보다 2년이 뒤늦었다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를 인정했기에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스스로를 만나며 작은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며 살아질 것이다. 내가 누리는 이만큼의 풍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시간이 빠를수록 살아있는 동안 느낄 수 있는 행복한 마음은 일상을 채워 줄 것이다. 그 시간들로 이루어질 많은 감동들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라 내가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에 있건 학교 밖에 있건, 공간의 의미는 우리의 영혼을 방해하지 않는다. 내가 놓인 이 사회가 나의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주된 원인일 뿐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만이 필요하다. 이것이 늘 나에게로 던지는 물음이었고, 이렇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내 주변과 나눌 수 있는 이 마음이면 되었다고, 마음만 부자인 내게 늘 다독여왔다. 둘째의 분투가 통하여지기를 응원하면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말했다. 탐욕을 버리고 나를 통한 너를 인식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간들이 계속 열려질 수 있기만을, 간절하게 열망하는 내 안의 힘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기만을, 한 개인의 용기있는 선택이 '딴지 걸기'라고 말이다.

세째는 학교를 버렸다. 의무교육을 마치기까지 진심으로 고마운 것은 별 사고없이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다. 아직도 내겐 숙제이다. 세째가 학교밖에서 제 방식으로 사회와 교류 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학교'의 의미를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적어도 어린 세대들에게 내 방식을 강요하거나 삶의 잘못된 모습들을 각인시키거나 하지는 않을 듯싶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학교'가 한 몫을 단단히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변화의 가능성은 늘 내게 달린 문제였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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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media.daum.net 

삼성의 노조 탄압을 규탄하는 집회가 서울 서초동 삼성 본사 건물 앞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증인채택을 놓고 여야가 충돌해 3시간 동안 국감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가 세 시간 뒤에 속개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도대체 한국에서 ‘재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 본다. 자료들을 다시 찾아 보니 재벌의 출생은 민족자본 부재의 시대에 잉태되고 성장해 왔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즈음 이병철, 정주영 등 오늘날 재벌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태어났다. 1920년대에 회사령이 철폐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회사는 설립 되었다. 하지만 이 회사들은 1937년 일본의 중일전쟁 도발로 조선이 병참기지화되면서 일본 독점자본이 대거 몰려오고, ‘중요산업통제법’이 실시되자 몰락해 갔다.

다시 말하면 해방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친일·부일을 통해 일제 독점자본의 하위파트너로 기생했을 뿐이다. 8.15 해방과 함께 친일·부일에 자유롭지 못한 거부들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튼튼한 정치적 동아줄을 잡고자 움직였고 정경유착의 시대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레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튼튼한 동아줄을 잡은 이들은 독점과 특혜로 어떤 정부이던 그들과의 유착에서 성장한 것이라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 물론 재벌은 196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지만, 1950년대에 이미 그 단초가 시작되었다. 독점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실수요가제 공급, 원조물자의 할당 및 판매와 관련된 상업, 안정적인 자금 공급처 역할을 하는 금융업이 자본계열화하여 하나의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 이병철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재벌의 역사는 계속 되었고 급속한 재벌의 성장은 곧 가혹한 노동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대자본가들의 저급한 생산력의 기초를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보완했고 노동임금은 노동량에 비추어 터무니 없었으니까 말이다. 1960년대에도 노동자들은 기아임금에 허덕였고, 그 시기에 청계광장에 홀로 있는 ‘전태일 열사’를 만들어 냈다. 1970년대는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항거한 ‘아름다운 청년’의 분신에도 나아진 것은 별로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 재벌 지배체제는 공고하게 확립되었고, 높은 생산성은 여전히 저임금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재벌기업 노동자들은 노동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재벌기업들은 비정규직 노동력을 활용해 고용의 유연성을 확대하고 신기술을 도입해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자 했는데, 1997년 경제 위기는 이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즉 재벌 중심으로 성장해 온 우리나라 경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인 것이다. 주기적 공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는 부분도 있지만 재벌기업의 고부채 구조와 금융자유화 요구가 큰 요인이었던 것이다. IMF의 구제금융으로 위기를 수습해야 했던 만큼 한국경제는 IMF의 신자유주의 요구에 따라 재편되어 갔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정리해고제를 도입하여 대량 실업을 초래했다.


[출처] http://imgv.search.daum.net/ 뉴시스

사회운동단체들이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여성 노동자의 권리 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 단체는 요구안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취임 이후 첫 세계여성의 날이라 의미가 각별하다"며 "여성노동자의 가치를

인정하고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촉구했다. (참으로 각별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노동의 역사가 현재에까지 이르렀다는 것, 최소한의 변화에 시선 맞추기를 거론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국가의 성장 속에서 더욱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를 보면서 보다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경제는 왜 성장해야 하고, 성장을 했다면 우리는 왜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인가. 노동자가 더 많은 나라, 국가의 성장에 더 많은 희생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왜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피켓을 들며 광장에서 삶의 현장들에서 목소리를 내고 결연하게 주먹을 쥐어야 하는 것인가.

노동현장에는 더 이상 취재를 하는 기자들을 찾아 보기 힘들어졌다는어느 사진가의 인터뷰를 듣고 우리의 시선은 무엇을 향해 맞추고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했다. 재벌들이 부리는 끝없는 욕망의 기차에 편승하는 이들의 탐욕은 이제 야만스럽기까지 하다. 한정된 자원과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노동의 가치는 저하될 수 없는 고귀함이어야 한다. 특히나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노동 없는 임금이 가능한 것인지 정부에게 묻는다.

직업의 다양성만큼이나 노동의 모습은 다르다. 그 다름의 노동에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과학의 진보와 함께 문명의 이기가 노동의 종말을 가져올 수 없듯이 노동이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핍박한 사회에서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노동자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면 한 국가의 장래는 요원하다. 노동현장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을 외면하고 있는 재벌과 그에 동조하는 정부는 노동자의 임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리인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http://news.kukmin.tv/ 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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