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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3화 <충남 도민 인권 조례 폐지>

 

자유한국당 소속 충남도의원들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넘어 모든 지역민의 인권을 강조한

충남 인권조례를 폐지하려고 한다.

폐지안을 표결에 부치는 본회의가 2월 2일 열려 현재 폐지 되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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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에서 못 다한 이야기 <페미니즘은 예술 하기>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동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페미니즘은 예술 하기”라고요. 지금 이 마음을 담아 글의 제목을 만듭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살 수 있기에 더없이 멋진 일이 페미니즘 공부입니다. 호모 아르텍스가 되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와, 예술이다!”

 

이런 말을 하던 순간을 각자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지나쳐 왔던 그 많은 불평등과 차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 사회가 쌓아둔 채 거들떠보지도 않은 진실을 발견합니다. 대중문화로 반복된 획일화된 감각들은 아주 익숙합니다. 그 익숙함을 낯설게 만드는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저절로 내지르는 탄성이 그렇습니다.

 

2017년 12월 8일 한동대 ‘들꽃’에서 주최한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특히 주목한 점은 별 의식 없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개인을 향한 폭력입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권을 지나며 공동체에 골몰해 있었고 그 가능성으로 가까이 다가간 책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남기게 되는 경우를 보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알려줍니다. 내가 무엇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죠. ‘한동대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사건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 책의 기억을 꺼냅니다. 당시 책을 읽을 때는 크게 주목하지 못한 주인공들, 개개인에 내 마음이 다가가지 못했던 겁니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두 번째로 다가설 ‘폴리아모리’를 풀어갑니다. 이 용어에 집중하기로 한 것은 지난해 한 청년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에 답하기입니다. 내가 무척 아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와 인연은 20년 가까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1학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인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의 질문에 답을 글로 올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직도 나의 벗으로 동행중인 청년에게 건네는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열린책들. 상, 하 두 권인 이 책은 저자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가 수용소 생활 중 1863년 발표한 대표적인 사회·정치 소설입니다. '주인공들 베라 빠블로브나, 로뿌호푸, 끼르사나노프, 라흐메또프는 1840년대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새로운 도덕적 정열을 지닌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구시대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일치한다는 <합리적 에고이즘>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역자는 밝힙니다.

 

작품에서 인물들은 그 시대에서 접하기 힘든 ‘특별함’을 겸비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인물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그 특별함을 삶에 적용해 갈 수 있는 행운아들만이 누릴 수 있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행운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적잖이 행운아라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내게로 온 그 행운들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두의 ‘선’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특별함은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서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했기에 위대한 고전이라는 ‘스테디셀러’들의 힘은 역시 보편타당함을 지닐 수밖에 없구나 싶은 거죠. 그래서 우린 고전읽기를 멈추어선 안 되고 특히나 젊은 세대들에게 잔소리처럼 떠들 수밖에 없나 봅니다. 한국사회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보이는 원인은 책을 읽는 이들을 주변에서 찾기 힘든 것에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요. 부디 스스로 판단해 볼 일이겠지요.

 

소설에서 중심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유형들이기도 합니다. 그 인물들이 펼치는 대화는 개인의 삶과 결혼의 의미, 사랑과 자유, 가족과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공동의 선을 향한 이야기들로 그 방법론을 작가의 정신에 따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결혼은 형식에 맞추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내용에 있는 것인지를, 타자가 아닌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는지를 묻죠. 대부분 여성의 결혼은 그 시대의 사회 관습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지만 작가는 주인공 ‘베라’를 통해 주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합니다.

 

한 세기 반이 지난 우리 시대에도 베라와 같은 선택을 한다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남성도 포함된 것이지만, 주인공의 비중을 여성으로 잡은 것이 우선일 뿐, 그런 여성의 이상을 위해 그런 남성이 없었다면 가능하진 않았겠지요. 결국, 서로의 결이 맞아 이룰 결혼이 격식으로 전락한 결혼이었기에 낳게 된 혼란 같기도 합니다.

 

제정러시아시대가 지나고 볼셰비키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국가 소련이 성립되고 해체되고, 현재는 다시 러시아로 남은 일련의 역사적 흐름을 생각해 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개인의 선택과 투쟁은 참으로 지난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의 방향에서 각 개인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 소설이 그들의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점들을 우리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주인공 베라의 삶이 지나가는 과정에는 그녀의 선택과 그것이 가능하게 실현될 수 있었던 주변 인물인 두 남자의 존재를 주목해야 하거든요. 그들은 서로 친구이며 그녀의 두 남편이기도 하죠. "당신은 싫어요. 우리 헤어져요."라고 말할 권리를, 아내의 자유를 똑같이 인정한 두 남자의 선택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누구 하나의 선택만으로 시작되고 자신의 ‘선’을 향한 신념이 실현되는 사회는 어쩌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가능성은 여전히 남겨져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믿음’에 의해 남긴 실낱같은 빛에 스며듦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시작되어야만 하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는 겁니다.

 

‘공동체’에 대한 가치는 그 어느 때가 되면 반드시 열려야 할 세계라 믿고 있습니다. 베라의 선택은 두 번의 결혼으로 가능했어요. 사랑이 자신의 신념에 반할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이 물음에서 나는 그 해답을 이 소설 속의 여주인공 베라와 그의 남편 로뿌호프, 끼르사나노프를 떠올리며 만납니다. 두 남자는 베라의 갈등에 해답을 건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소설’에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가능성을 저자는 러시아의 사회에 이식시킬 수 있기를 부단하게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분명 러시아의 사회에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이 없죠. 볼셰비키 혁명에서 그 후 러시아는 레닌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으로 변화했으니 말입니다.

 

‘베라’는 비천한 집안의 예쁜 처녀이지만 자신의 환경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인간’이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것을 공동체와 나눌 것인가, 나의 것을 지킬 것인가에 ‘사회 지식인’의 선택이 있는 것이고,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죠.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나눔의 시작은 소수의 '위대한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기득권층의 변화를 기다리는 일보나 사회 다수의 개인이 삶의 변화를 위한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자연스러운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를 통한 ‘선’을 향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나아가는 시간에는 한 개인의 사랑과 신념에서 어떤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로써 ‘희망’이었거든요.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와 충돌하는 개인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작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그동안 놓쳤던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다시 기억해 내고 꿈꿀 수 있게 해 줍니다.

 

21세기에 살면서도 여전히 친일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한국사회입니다. 내 나라 지성의 역부족을 탓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현대를 살아가야 하는 남아진 자들의 선택에 의해 변화될 과제이겠지요. 한 개인으로 선택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의 시작은 가치 지향의 공감대로 형성된 자발적인 작은 공동체의 움직임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 믿음과 지속 가능한 행위들을 이 책을 읽으며 더 가다듬는 시간이었나 봅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것은 위대한 비밀이며 다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고.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기술 도 필요 없으며 오로지 순수한 마음과 정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의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그 이상의 비밀은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지금까지 글이 첫 번째입니다. 이제 시작할 글은 주인공 베라가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 ‘인간’이기를 원했던 것에 집중을 했습니다. 당시 나는 ‘폴리아모리’라는 용어를 몰랐습니다.

 

"폴리아모리(Polyamory)란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다자간(多者間) 사랑, 다자간 연애, 비독점적 다자 연애 등으로도 부른다. 폴리(Poly)는 ‘많은’이라는 뜻의 접두사이며 ‘아모리(Amory)’는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모르(Amor)’에서 온 말이다.

 

베라의 사랑이 가능했던 것은 남편의 보이지 않았던 배려였습니다. 나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로 단순하게 생각을 했던 거죠. 어차피 사랑은 개인이 선택하면서 만들어지는 관계이기에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레 도덕규범인 결혼제도를 의식합니다. 일부일처제가 전제되는 혼인제도에서 그 외 사랑은 법적으로는 허용하지 않죠.

 

사람이 살아가면서 법의 허용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법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허용범위가 달라지잖아요. 사실 양심의 문제로 해결해야 할 일이 일상에서는 더 많죠. 도덕적 해이가 넘치는 한국사회에서 법 때문에 개인이 추구하는 사랑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나는 폴리아모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내가 원하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런 나를 이해하거나 인정해주거나 배려라도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라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점도 지나칠 수는 없지요. 폴리아모리를 원하는 개인이 질 책임 문제인 겁니다. 문제가 된다는 것도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맡겨야지 사회에서 또는 집단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개인이 선택한 그 사랑이 사회를 와해한다거나 종교에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타자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한지요. 위험한 발상인가요? 내가 믿고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 사랑은 여러 형태로 가능합니다. 단 한 가지 유형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겁니다.

 

개인주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여전히 우리는 고착된 문화, 아비투스에서 빠져나오기를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문화가 자연스럽다고 이해되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흘러 당연시된 것은 아닐지요. 잘못된 문화라면 바꿔나가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류의 진보는 변화 가능성이지 고착은 아니니까요.

 

이번 한동대 사태는 교내 동아리가 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했다는 이유로 관련 교수와 학생들의 징계 절차에 착수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 개인의 사생활을 공공연하게 폭로한(학교 측은 폭로라고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의식이 없다고 봐야죠.) 것을 문제 삼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다수로 일반화되는 성 정체성과 소수로 일컬어지는 다른 성 정체성은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이블을 근거로 내거는 기독교 입장은 시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로 밖에는 볼 수가 없어요. 적어도 사랑을 떠벌이지는 말아야죠. 인간이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것을 싫어할 신이 있어야 하나요? 종교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나는 폴리아모리스트가 되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세 주인공으로 작가는 새로운 인류 모습을 찾았나 봅니다. 결혼하기 전에 그들이 한 세 가지 서약은 한국사회에서 하는 결혼 서약과는 다릅니다. 첫째, 사랑할 때 이외에는 각방을 쓴다. 둘째, 서로의 사생활을 방해하지 않는다. 셋째,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는다. 지난해 영화 <박 열>에서 동거 서약을 했던 연인, 후미코와 박열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공감했던 삶, 동료애는 가능합니다.

 

결혼 4년째, 베라는 남편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끼르사노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마음을 남편에게 고백하자 자살을 위장하여 종적을 감추고 남은 두 사람은 결혼을 합니다. 세 가지 서약은 이번 결혼 생활에서도 유지되고요. 여기서 현실이 개입되기에 작가는 결혼을 위해 가짜 죽음을 만듭니다. 결혼제도에 변화가 온다면 이런 고통도 필요 없겠지요.

 

죽은 줄 알았던 로뿌호프가 비몬트라는 이름의 미국 사업가가 되어 돌아오고 베라의 친구인 까쩨리나와 결혼합니다. 이후 두 부부는 하나의 공동주택에서 사이좋게 살게 됩니다. 소설이죠. 네, 그렇습니다. 나는 이상적인 결혼을 위해서도 폴리아모리를 존중합니다.

 

폴리아모리스트라는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는 대안 결혼을 제시하며 그것으로 가능한 미래 공동체를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동료애로 결혼할 수 있는 시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자,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가?”로 이해해 가는 과정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압니다. 1996년 ‘된장녀’라는 말부터 이어진 2012년 메르스 사태에서 다시 온라인상에서 뜨거웠던 메갈리아 미러링과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까지 ‘혐오’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랑하기를 방해합니다.

 

“여러 사랑을 포용할 수 있다면 왜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해야 하나요?”

 

체르니셰프스끼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류인 나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면 더 좋은 일이잖아요. 비 독점 다자 연애는 어려운 사랑입니다. 나 혼자만 일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죠. 내 애인을 ‘비 독점’할 수 있으려면 애인이 다자 연애 하는 것을 수용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죠. 그 둘 다 ‘다자 연애’에만 방점이 찍히면 이별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 책에서 남편이 비 독점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이별로 가능해지는 ‘순간’일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할 필요가 없다면... 독점과 소유욕이 낳은 집착. 전통 결혼 규범과 비 독점과 비 소유, 움직이는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도 존중할 수 있다면 개인의 선택이 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란한 성이 아니라 소유욕을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반드시 폴리아모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 중 하나가 집착이잖아요.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로 살아갈 아름다운 동행이면 합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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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2화 <한동대 페미니즘 강연 관련 이야기>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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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1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못다한 이야기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소설가이며 1977년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자랐다. 열아홉에 미국으로 건너가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인종, 이민자, 여성에 대한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삼은 소설로 평단의 각광을 받으며 영미문학을 이끌 차세대 작가로 부상했다. 이 책의 원본이 된 TED강연은 유튜브에서 250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고, 팝스타 비욘세의 노래에 피처링되기도 했다. 스웨덴에서는 이 책을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 2학년에게 나눠주고 성평등 교육의 교재로 삼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만일 남자들만 계속해서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남자만 사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이 현실과 다르다고 알게 된 것은 십 대부터였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여자로 태어났지만 ‘나’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삶에서 선택은 문학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시몬 드 보봐르, 루이제 린저와 F. 사강,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으로 살았다.

 

내가 자연스럽게 여기던 것들은 현실에서 부자연스러웠고 “여자인 내가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 익숙하게 될 즈음 부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일은 나를 드러내는 일보다 더 쉬웠다. ‘나’를 숨긴다는 의미는 이십대까지는 ‘세상 모르고 산다’는 것을 표현하는 일이고 친구들에게 아나키스트라 불리는 것에 더 익숙한 시절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세상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일보다는 ‘나’를 지켜내는 일에 몰두했다. ‘나’로 산다는 것은 ‘홀로 주체’가 된다는 일이고 혼자서 거의 모든 선택을 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오히려 동성 친구에게서 ‘나’를 존중받는 일이 고단했던 기억이 많다. “왜 화장을 안 하니?” 결혼식 당일까지 무던히도 들었던 대표적인 말이다.

 

남들과 다른 내 삶을 좀 더 객관화할 수 있던 시기는 결혼 후 사회 활동을 하면서였다. 아, 어떻게 남편이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삶에 적응하며 살 수 있는 거지? 결혼하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니. 자주 떠오르는 물음이었다. 이제는 나로 살아가는데 필요했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의지를 발휘하며 산다. 21세기에 서 있는 나는 이제 그렇다. 나와 교류하는 사람들에서 자연스럽다.

 

“그들에게 나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나도 똑같은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일이지만, 때로는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픈 법입니다.

 

직장인으로 살아보지 못한 내가 겪는 분노이기도 하다. 지난해까지 ‘을’이라 지칭되는 집단이나 개인으로 서 있던 시절이 거의 없는 셈이다. 나는 노동의 가치를 다르게 인식하며 살았기에 나에게 노동은 놀이와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고 자유롭다. 이 점에서 늘 나는 겸손해진다. 얼마나 큰 행운이던가. 그 행운은 ‘나’로 살아온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한 준비된 자에게 온 행운이기도 하다.

 

책을 좋아해서 쌓아둔 책이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을 할 것이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책을 읽는 일이 일상이고 밥벌이다. 그 자격은 사회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다고 여기는 내 취미활동으로 기록되곤 하던 독서였다. 이 사소하다 여기는 취미로 내가 가장 아팠던 일은 꽤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의 분서갱유다. 직접 진시황제처럼 책을 불질러버린 사건은 아니여도 내게는 가장 큰 아픔이었다. 집안에 있는 책들을 아파트 현관문 밖으로 다 내던지시며 시집이나 가라는 말씀. 당시까지 아버지는 개방적인 분이셨고 미래지향이셨던 분이기에 상처가 컸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더럽고 치사해서 결혼 한다 내가. 후후. 아버지는 그 후 1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뜨셨다. 어머님의 위안은 이렇게 이어지곤 한다. 다 네 아버지가 떠날 때가 돼서 마음이 급해서 막내딸 손잡고 결혼식장에 들여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라고. 내 어머니도 당시에는 드물게 맞벌이를 하며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이런 일들은 현실에서 늘 덜그럭거리는 불협화음이다.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한 세상을, 스스로에게 좀 더 진실함으로써 좀 더 행복해진 남자들과 좀 더 행복해진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 부분이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슬그머니 넘어갔다. 이 문장을 서 너 번 소리 내어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굳이 남자와 여자들이란 말을 하지 않고 싶다. 성별 구분 자체가 너무 오랜 시간 편리하게 사용된 관념 덩어리이기에 모두가 더 행복해진 세상을 상상하면서 지금을 살아나고 싶다.

 

한국사회는 여자 남자로 성역할을 고정시켜서 모두가 힘들다. 남자는 남자라서 여자는 여자라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선택과 가치는 제쳐두고 사회에서 원하는 이름에 종속되곤 한다. 개인의 행복이 사회에서 무시되는 일이 너무 흔하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타인의 행복을 말할 수 있는가.

 

나부터 행복해지기. 내가 웃을 수 있어야 당신도 웃을 수 있지 않은가. 같이 웃고 같이 울 수 있으면 된다. 페미니즘이 그 시작으로 된다면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보다는 안으로 채워진 나의 가치와 공감으로 변화 가능성이 지속되고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야망을 품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돼. 그러면 남자가 기가 죽을 테니까.

 

남자의 기를 살리기 위해서 야망을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된다는 말은 여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다. 한국사회에서 아들, 특히 장남을 위한 희생이 미덕처럼 여기던 시절을 지나온 현재까지도 가족에서 딸, 굳이 장녀를 위한 희생은 거론되지 않는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란 말을 종종 들으며 성장한 기성세대로서 남아선호로 인한 편애는 어머니 교과서의 한 부분이다. 어머니 교과서 개정판은 은밀하게 희생을 강요한 사회에 맞서는 일의 하나로 강한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져 오기도 한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는 말이 가슴 한 편에서 메아리칠 때가 있지 않던가. 강한 어머니는 당당하게 불릴 수 있어야 했던 이 땅의 페미니스트였다.

 

“다리를 오므리렴. 몸을 가리렴.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여자로 태어난 것부터가 무슨 죄를 지은 것인 양 느끼게끔 만듭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남자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대체로 타인의 시선에 몸을 사리고 방어막을 두르기 시작하면 소통할 수 없는 사회로 이어진다. 결국, 불통에서 생산된 말들이 모여들면 한 더미의 쓰레기 처리장처럼 냄새를 풍긴다.

 

‘혐오’라는 말로 ‘충’이라는 말로 인간임을 스스로 내던지는 일을 거침없이 하기도 한다. 유전자의 다름으로 구분하기 전에 같은 사람으로서 조화를 이루는 일은 유토피아처럼 여긴다. 이 문장들은 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나와 당신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가슴을 후벼 팠으면 한다.

 

여자와 남자가 사회에서 어떤 상황으로 위치해 있는가는 모두에게 새로운 시선을 갖는 기회를 준다. 내가 선택할 기회조차 없는 상태에서 강제된 것이기에 여자, 남자라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 폭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인류가 진보한다는 것은 어느 한 편으로 집중되는 발전은 아니다. 그런 사회구조에서 만들어진 문화가 변화하려면 주체로 선 내가 주체인 당신과 동행하며 얻는 가능한 변화이다. 페미니즘 공부는 가능한 변화를 위한 첫 걸음으로 좋은 선택이다.

 

“바로 그 점이 문제의 일부입니다. 많은 남자들이 젠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 말입니다. 겉보기에는 사소한 상황들에서, 남자들이 나서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 내는 일을 겁내지 않아야 한다. 그래, 말은 쉽다. 젠더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전 세대가 각자 의식하고 있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한국사회에서 ‘성sex’이란 말은 겉으로 편하게 주고받거나 나를 드러내는 말로 자리 잡을 수 없다.

 

‘금기’가 넘치는 사회라고 할까. 19금. 일상에서 자주 보이는 표식이다. 그것은 어쩐지 대상을 더 강조하는 표식이 되어 19금을 넘나드는 것도 일상이라 할 만큼 진부하다. 형식에 그치는 사회제도를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사회제도를 그게 현실이니까 어쩌겠냐는 말로 대신한다. 원래 인생은 부조리해!?

 

사회 강자로 살아온 사람들이 나서서 부당하다고 외칠 이유는 넘친다. 이젠 그런 남자를 만들어야 하는 일부터 해야 하는 걸까? 이 점에서 ‘나’를 성찰해야 한다. 과연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역꾸역 해올 수 있던 것은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멈출 수 없었던 이유가 크다.

 

페미니즘 공부는 나를 지금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데 아주 훌륭한 근거였다. 자유인으로 누리는 삶은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확실하게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만 자유로운 세상을 나는 결코 원하지 않는다. 당신도 자유롭기를 바란다. 그래야 서로 신나게 놀 수 있지 않은가.

 

“문화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문화를 만듭니다. 만일 여자도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우리 문화에 없던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문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안체 슈룹 글과 파투 그림의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를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그림과 글로 비교적 쉽게 페미니즘 역사를 보여주는데 ‘하나의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로운 제안, 연구 결과, 그리고 지식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나누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문화는 사회에서 약자들을 배제해온 문화였기에 모든 사람을 품어 향유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고 그 시작은 내가 먼저 첫 걸음을 떼면서 형성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동행이다.

 

인류 역사에 일방적으로 내린 전 세계로 뻗친 뿌리를 흔들어야 한다. 모든 가부장제에 합류해 강한 협력을 조장한 자본주의에서 배제를 더 이상 참아낼 이유가 없다. 자본주의에서 외면당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숨죽이고 있지 않던가.

 

“그 순간 나는 친웨 아줌마의 성격에 모난 데가 전혀 없는 비결을 알아차렸다. 아줌마는 그것들을 몽땅 뭉개고 있었다. 아줌마는 무한한 아량의 바다였다.

 

남편이 나만큼 행복하길 원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은 성장하면서 자기 안에 쌓인 분노를 풀어내는 일이다. 길을 걷는 만행이었다. 그는 인도로 명상의 길을 떠났고 자기와 마주함에 온전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와 동행하는 여행자들로부터 ‘부처’라는 허무맹랑한 호칭이 내게 붙었다.

 

내가 충분히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에 남편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결과. 남편의 길 떠남이 가져다 준 것은 가족 부양의 책임이다. 당시 나는 충분한 능력이 사회 분위기와 맞아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결핍은 아이들에게서 생겼다. 두 어른의 결정만으로 세 아이들은 각각 아버지 부재라는 일상의 결핍에 힘든 성장기를 거쳐야 했다. 특히 남자 아이가 겪어야 했던 결핍은 한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자신과 다를 때 혼란을 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부모라는 말로 가해지는 사회폭력은 얼마나 이기적이던가.

 

친웨 아줌마처럼 나는 무한한 아량도, 타인에게 말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의 불행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몰랐고 그 스스로 찾아내주길 바란 이기심이 먼저였다. 물론 나는 관용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 이면에는 ‘나’의 공감과 만족, 지금 이대로 행복할 수 있는가에 달린 점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나를 위해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나를 위해 가장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게 한 관용으로 덮은 자기애와 비슷하다.

 

“왜 아줌마는 단정하게 반응해야만 존경받을 수 있었을까? 왜 아줌마는 모욕에 직면하여 세상에 대고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을까? 왜 아줌마의 완벽함은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에 달려 있었을까?

 

사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관리를 필요로 하는 고된 일이다. 외모지상주의에서 학벌주의 등 나를 에워싼 사회에서 요구하는 나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나는 인정하는 일부터 하면서 비로소 ‘나’로 살아가는 시간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힘은 아무리 둘러봐도 평생의 벗으로 늘 곁에 있어준 책이었다. 문학에서 만난 여성들의 목소리는 나를 자연스레 “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선택 가능하게 해 주었다. 이제, 비로소 ‘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치기를 바라면서 2018년을 열고 있다. 그대, 함께 가시려나... .

 

[덧붙임]

팟캐스트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를 송출하고 못내 아쉬운 점들을 후기로 정리해 보니 마음의 무게가 덜해진다. 평생 공부를 하면서 남은 삶을 잘 짓고 싶은 마음. 이 방송을 듣고 이 글을 읽는 이들 모두가 페미니즘 공부 효과를 같이 나눌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삶은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스스로 한 걸음 딛고 걸어가는 ‘선택’이 연속되는 낯섦과 두려움에서 이어지는 거였다. 나는 노마드의 삶을 즐기는 중인데 그 가운데 함께 나눌 페미니즘 공부로 새로운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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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01화. 방송

 

 

01화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고 공부합니다.

방송에 대한 의견은 overdye0714@gmail.com로 보내주시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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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 파일럿 방송입니다.

 

 

2018년 다시, 또 시작한 일상과 페미니즘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격주로 녹음 방송을 하고, 격주로 방송에서 못다한 이야기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배운 이야기를 글로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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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붐이 내게로 밀려왔던 몇 년 전 품었던 설렘으로 지금 서 있는 분명한 이유를 다시 생각하며 <가장자리>라는 협동조합으로 세상 읽기를 시작하는 아침이다.

 

대통령 탄핵 인용 선고를 하루 남긴 오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4년을 협동조합 <가장자리> 조합원으로 있었다. 이젠 과거의 일로 되었다. 이사장으로 자리를 지켜낸 홍세화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희망을 품고 달려오던 시간이었다.

 

자주 만나거나 조합원으로 활동은 게으른 자의 변명으로 남았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가장자리에서 보내준 <말과 활>이란 잡지와 어느 때부턴가 잡지가 멈추고 책 한 권이 오기 시작했어도 변화를 감지하지는 못했다. 다음 카페 활동도 있었고 사유의 공간도 있다.

 

나는 마음만 있었다. 혼자서 책 읽고 조합비를 내는 것 말고는 협동조합을 위한 구체적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나마 변명으로 삼고 싶은 것은 꾸준한 책 읽기와 작은 모임을 하고 있다는 정도일 게다. 경제활동을 전제로 하는 협동조합이기에 가장자리가 추구하는 목적과는 결이 달랐다는 현실의 문제가 충분히 이해된다.

 

다행스럽게 홍세화 선생님은 그 마음을 지켜 임의단체인 <소박한 자유인>으로 전환을 했다.

 

<소박한 자유인>의 발기인 홍세화 선생님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소박한 자유인이기에 편지 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짓다라는 한국어 동사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습니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식의주가 모두 짓다의 목적어가 됩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 중 아무도 부족함이 없도록 잘 짓고 잘 나누어야겠지요.

 

제가 느닷없이 짓다라는 동사를 꺼낸 것은 우리 각 개인에게 주어진 과제가 나를 잘 짓는 데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 태어나 되돌릴 수 없는 나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는 결국 각자의 몫입니다. 긴장이 필요합니다. 그 증거로서 책과 함께 사는 것만한 게 없다고 믿습니다.

 

<소박한 자유인> 발기인 홍세화

 

내가 걸어오고 선택한 여러 갈래의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내가 가는 길은 늘 마음이 먼저 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할 사람이 늘 그리웠다. 사람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고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존재와 두루 관계를 갖고, 그들을 깊이 느낌으로써 삶에 참여하고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겠지. 아름다운 동행에는 우리가 수없이 있다.

 

경제 조건이 악화하고 정치가 불안해지고 절망적 분위기가 만연해지면 사회적 신뢰는 사라진다. 우리가 정서적으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어느새 우리는 이 사회를 잠식한 모든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사람보다는 효율을 앞세워 숨을 헐떡거린다. 이 노동의 가혹한 현실과 부정의를 물리칠 때 우리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할 이유가 사라진다.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신나게 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 나라의 말로 책을 읽고 수다를 떨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때 우린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영어 몰입 교육으로 음악 대신 영어 듣기 파일을 안 들어도 되고, 성형으로 동글납작한 얼굴을 깎아 낼 이유도 사라진다. 그저 나답게 생긴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도 될 세상이면 싶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내는 일. 우등과 열등 인간의 구분으로 진행되는 사회는 전체주의를 자각하는 일이 필요했다. 국가권력이 공인으로 자격 없는 이들의 손에 쥐어졌을 때 국민은 기만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는 그들에 손에 놀아나지 않을 공정한 언론이 필요하다. 공영방송의 역할을 바로 세우고 국민을 대의 하는 국회의 책임을 요구하며 너무도 당연한 알 권리가 보장되어야 했다.

 

Pay it for world*~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실천을 했던 나눔 운동,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마음들이 모여 협동조합이 탄생했지만, 지금까지 온갖 어려움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감의 벽은 참으로 높다. 이 땅에 사람을 향한 가치가 넘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함께 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 참여는 아름다운 동행이다. 그 동행을 가능하게 할 순간의 선택은 늘 내 몫이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과제, 나를 잘 짓는 데 있다.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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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치를 공부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행복한 시간으로 내 삶을 채우기 위한 거다. 그래서 가장 궁금한 것을 먼저 알아가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거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학습된 내 머릿속에 있는 기존의 생각들을 좀 벗어나서 차근차근 진행해 보는 일은 꽤 재미있다. 그래서 개념부터 정리해 보고 키워드를 설정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내며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일이기도 했다.

 

정치(政治)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하나는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전략적으로 활동하는 일로 풀어 놓았다. 정치는 이사회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인 거다.

 

사회 분야마다 전문가들이 있다. 그들의 책이나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 보면 떠오르는 물음들이 있다. 주변에서는 유독 정치와 관련된 책들도 말들도 조심스럽게 꺼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사상에 대해서까지 조심스러운 말에 끼어들어 가버린 것 같은데 이런 일들이 꽤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내재하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검열이 자연스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특히 정치는 이상하리만치 멀리 있다.

 

나의 시선을 끈 관심사는 선거 개표이다. 20121219일 대선이었다. 그때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선거 결과였다. 이 대선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은 그때까지만 해도 순전히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개인의 몰이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87항쟁 이후 한국적 민주주의는 그 명을 다했다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명박 정권을 지나오면서 선거를 통해 그 정권이 연장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5년을 겪고도 이런 대선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언론의 불공정함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진행된 것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것도 한몫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뜬구름 같다는 공자의 말에 위안으로 삼을까.

 

그렇게 현 정부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탄핵의 헌재 판결을 앞두고 특검이 진행 중이다. 여전히 언론은 그 모양으로 있고 가짜 뉴스들은 그칠 줄 모른다. 삼권 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은 박근혜 정부에서 상징적인 단어 블랙리스트로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은 고사 직전에 놓여 있다. 적어도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없어야 하기에 현재의 정치를 주시한다.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사회, 민주주의는 비틀거리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유일하게 평등한 11표로 다수의 유권자가 행사한 투표가 개표 과정에서 부정된다면 결과는 늘 같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겠다. 공정한 선거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선거 개표 과정이 투명하게 진행되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유권자의 다수가 선출한 대통령이니 다수결의 오류라 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더 있나. 문제는 투명성이 없어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과에 승복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는 점이기도 하다.

 

개인의 일이야 나 홀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이지만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널린 의문들은 사회 안에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 의문들을 무시하거나 왜곡해 버린다면 쌓인 물음표들은 결국, 이 사회를 둘러쌀 거대한 장벽이 되고 만다는 거다. 정치는 정치인만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정치가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바로 내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서 공생하는 것을 말하지 않던가.

 

정부가 현 사회의 제 문제들을 다루는 능력의 한계가 클수록 정치는 현실을 외면하는 개인들을 확산하는 시작이 된다. 내가 아무리 기를 써도 현재의 삶에서 나아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짙어질 때가 있다. 하루의 노동이 내일의 하루를 따라갈 수 없다면 그다음 날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내일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과연 노동은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일까.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존재로 머물 뿐이라면 인류는 이렇게 긴 여정을 이어오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선택한 삶의 첫울음은 아니었어도 내게 주어진 삶은 적어도 내가 운영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삶을 누리는데 이 사회가 방해꾼이 된다면 그것을 물리쳐야 하는 것 아닐까. 생존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므로 먹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으로 좋은 삶을 누릴 이유는 충분하다. 정치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내 삶을 내가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정치인 거다. 끊임없이 나를 낯설게 만나기 위함이다. 너무도 익숙해진 시간에 정치로 딴죽을 거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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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밖으로 발을 밀어 보니 차가운 방 안 공기가 살로 파고든다. 어마나. 다시 발을 끌어당겨 두 장의 담요 속을 탐색하며 두 발로 잡으려고 해도 도무지 잡히질 않는다. 에이,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따습게 품은 담요를 젖힌다.

 

어이구. 창가로 바짝 밀쳐져도 헤 웃는 얼굴의 연한 갈색의 곰돌이 크눌프의 너부데데한 궁둥이 밑에 숨어 있다. 연한 초록과 노란색이 엇갈려 보기에도 따듯한 느낌의 수면 양말. 가능하면 살살 움직여야 한다. 먼지가 풀썩거리는 게 싫으니까.

 

무언가 입속에 넣긴 해야 할 것 같다. 참으로 귀찮지만 계속 들리는 꾸르륵 소리가 그리 예민하지도 않은 신경 줄을 건드린다. 커피 필터가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가득 쌓여있다. . 12개군. 12잔을 마셨다. 블라인드 사이로 하얀 별 뽁뽁이가 드러나는 걸 보니 아직 낮이다.

 

새벽에 잠시 오줌이 마려워 일어났다가 뭣이든 밖의 소음을 막아줄 소리를 컴퓨터에서 찾다가 메일이 왔다는 알림 소리를 듣는다. 그래그래, 미리 설정해 놓기를 정말 잘했어. 크크크. 셜록 시즌 4가 드디어 업로드되었다는 은밀한 소식이었다. 아이 신나라.

 

메리의 죽음과 이어지는 에피소드의 두 번째였다. 왓슨과 셜록의 관계를 떠올린다. 메리는 삼각형을 잇는 한 점이었는데 그 점이 사라져 왓슨과 셜록은 직선이 된다. 그들의 관계는 메리가 남긴 영상으로 회복되어 가는 상태였다. 세심한 관찰과 논리적인 접근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셜록이 사랑스러운 것은 그만이 만드는 관계의 독특함에 있다.

 

너무 성급하지도 속단하지도 않을 인간의 관계에는 전제되는 것이 딱 하나. 시간이다. 관계를 이어 줄 시간을 넘나듦이다. 2016에서 숫자 하나를 바꾸어야 할 순간에 끓어오르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다른 세계에 있는 자들을 향한 아직 거두지 못한 눈 맞춤이다.

 

시간에 숨겨진 은밀함. 그것을 나누는 것이 관계였다. 더는 나눌 수 없을 때 관계는 끝이다. 예전에는 일방적인 공들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한쪽만이 공들이는 시간은 그 대상의 받아들임이 가능한 시간만큼만 유효한 관계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마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해도 관계의 대상이 주파수를 맞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기운이 이어주리라는 것은 분명 망상에 가깝다. 살아있는 것들에서는 그렇다. 생명이 사물로 전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주 명료하다.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 그대가 기억하는 것이 있다면 관계는 다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작은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니까. 피아 소야의 리베르 탱고, 한 곡만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순간이랄까. 안절부절못하던 마음을 이 곡만큼 잘 표현한 것은 적어도 내게는 없었다.

 

리듬을 따라가는 숨 막히는 몸짓과 허덕이는 마음의 흐름이 진정되는 순간은 리베르 탱고가 끝났을 때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이다. 숨 쉴 새도 없이 그 곡에 맞춰 숨가쁘게 시간을 마주한다. 그 시간을 뛰어 넘으려면 정지 버튼을 누르면 된다. 하지만 오늘은 내버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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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현악 4중주에 대해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비유했다. 1 바이올린은 언제나 화제를 제공하며 대화를 이끌어 가는 재치 있는 중년, 2 바이올린은 소극적이고 양보하는 친구, 비올라는 대화에 꽃을 피우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주는 여성, 그리고 첼로는 학식이 많으며 대화를 조정해 주는 중후한 신사라며 음악의 조화를 말했다. 음악에 깊은 조예가 없는 나도 귀로 들려오는 좋은 음악에 마음을 열게 되고, 그 안에서 내면의 조화를 도모하기도 한다. 이런 삶의 구석구석에서 찾아드는 조화로움에 우리는 감동의 시간을 만난다.

 

대화가 없는 나라에서 이 비유로 얻는 불편한 진실들의 불협화음은 삶을 참으로 고단하게 한다. 역설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오면서 선의의 왜곡과 이념의 틀을 끊임없이 곧추 세우려는 세력이 있다. 그들의 흑역사는 권력의 사유화로 얻어 챙긴 부의 축적이다. 1세기를 넘어 끄트머리의 사실들이 겨우 새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삼권 분립의 민주 공화국은 안타깝게도 분립보다는 통합으로 점철되어온 시기가 압도적으로 길었다. 독재를 미화해온 한국적 민주주의, 권력의 부역을 포장한 세계화의 신자유주의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을 시청광장에 서게 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그는 국가 에서 정의로운 국가를 주제로 삼았다. 유토피아 같은 국가를 구상한 이유는 당시의 아테네가 몰락과 타락의 과정으로 가고 있어 이를 극복해보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정치적 앎은 공동체 전체를 고려하는 앎으로서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동굴에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동굴이 아니다.

 

앞만 보도록 하여 동굴의 벽면에 비추는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방이 열려 눈에 보이는 미디어들로 벽을 만든 동굴이다. 플라톤은 동굴 안의 가시적 현상의 세계에서 동굴 밖,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실재의 세계를 향해 나서려는 험난한 노력을 요구한다. 정치적인 일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정하게 전해지고 있는 지를, 스마트폰 시대의 스마트한 개인들의 손에 들린 놀라운 기계가 정보의 공유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과연 그 기다림에 응답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볼 일이다. 그리고 그 정보들이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것인지를 따져 볼 일이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를 위한 이성적 판단이 요구되는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철인정치를 요구하지만 그 철인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교육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보고,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철인정치는 꿈꿀 수도 없도록 하는 불가능한 교육의 현장들이 우리의 현실을 말해 주고 있다. 신화는 우리에게 상징을 통해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시시포스의 바위를 다시 산 위로 올리려 하지 않는 것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온 인류의 나약함을 되물릴 수 없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나부터 시작해서 내 주변인들에게라도 함께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올려보자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내 앞에서 여전히 굳건하고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세계의 야만스러움과 탐욕에 순응한다면 내가 마주 하는 이 세계가 더 가속화될 것이고 인류의 적은 바로 내가 되는 것이다. 정상에서 굴러 내려오는 이 거대한 바위를 피하기에 급급한 개인의 나약함이 원인이 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공감과 나눔, 함께하는 협력만이 이 지속적인 악의로 넘치는 현실을 선의로 바꾸어 나갈 수 있으리라 본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이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인간의 선의를 믿고 정치하는 날이 열리게 될 것을, 반어적 표현을 직설로 바꿀 수 있는 사회로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제 우리의 국가는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더 열렬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국가 안에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는지도 끊임없이 되물을 일이다.

 

5년짜리 대통령을 내세워 역사의 발전을 되돌이표처럼 반복하고 있는 삶이라는 절규하는 음악에, 나의 나약함을 던져 버리고 너와 나의 조화가 감동적인 삶을 연주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시간이다. 5년짜리 정부로 토막 난 대한민국은 그래도 5천 년을 지탱해 왔다. 그것이 선이다.

 

물론 역사인식조차 갖추지 못한 지도자가 아니었기에 일어난 대한민국의 현실, 이제 5년을 채울 수도 없는 너덜너덜해진 국정 운영을 위해 박근혜 씨는 대통령 직을 내려놓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이 그나마의 선의일 것이다. 그 선택조차도 스스로 결단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결국 탄핵으로 그 자리를 떠나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시민은 동굴에서 나와 광장에 서 있다. 그 민의를 거역할 역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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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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