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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과 자긍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시기에 아이들에게 자신을 마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학교생활과 사교육, 그 이외에는 개인들의 선택에 따라 작은 오락거리가 전부였습니다. 친구들과의 시간도 많이 가질 수 없는 한국사회는 참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책도, 운동도 할 수 없는 아이들부터 청소년, 거의 모든 세대가 저들만의 바쁨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왜 이리도 바쁜 거지? 문득, 떠오르는 질문에 정답은 물론 없어야 합니다. 세대별로 다르지만 꽤 타당한 이유는 있죠. 허나 그 이유들을 뒤로한 채 거부할 수도 있기는 합니다.

 

내가 머무는 이 사회는 어떤 곳인지 생각해보면 나라는 없고 만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리고 내 주변인들과 지인들,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을 나눌 수 있는 이들, 일과 관련된 이들도 있고요. 일이 삶을 위한 것인데 외롭고도 참으로 지독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한국인으로 나는 어떠한가. 당연히 누려야할 국가에 대한 그 느낌이, 그 절절한 마음이 없더라구요. 어떠신가요? 안타깝게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동안 조국에 대한 열렬함을 표출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포츠에서 활약하는 그 기간 동안을 빼면 자랑스러움이 없다 합니다. 작은 영웅들의 활약에서야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숲의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은 미처 알 수 없었던 내 나라, 대한민국을 다시 만나게 해 줍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지구상에서 탐험되지 않은 땅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세계 구석구석이 서구 팽창주의자들의 눈에 의해 샅샅이 탐지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는 서양에 의해 동양을 탐구하는 시기로 담론을 생산하는 쪽과 대상 간에 힘이 동등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주인과 노예같은 일방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이 저자의 말입니다. 한국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강자는 쓰는 자, 약자는 쓰이는 자로 말이지요. 나는 쓰이는 자일까요, 쓰는 자일까요. 쓰이기도 하고 쓰기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패권의 시대, 한국은 역사의 약자였죠. 구한국 조선은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에서 한때 흔적없이 지워진 나약한 종족이었던 것이지요. 한국은 부패해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때는 제국주의 시대였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패권적 논리에 부당한 게 너무 많아서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이 출판되었다고 스웨덴에서 유학을 하던 저자는 서문에서 밝힙니다. ‘민족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시민의식을 품어야 할 오늘날, 한 종족의 긍정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 아님을 전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 대에 놓여진 한국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은 오래 전부터 학습된 서구의 시각임을 말합니다.

 

그들의 편에서 개인들의 탐욕에 불을 붙여온 자들의 한국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왜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지녀야 했을 자긍심을 가질 수 없었을까요. 오래 전에도 진짜 한국인의 얼굴을 본 서양인들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영국 정치인 조지 커슨은 하얀 옷이 매우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어 배 위에서 바라보면 백조들의 무리같다고 하며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자벨라 버드 비숍은 서구인들 중에서 한국인을 가장 열심히 탐구하며 긍정적인 면들을 발견해내기도 했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야 아무려면 어떤가요. 중요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진짜 한국인의 모습이겠지요.

 

스웨덴의 신문기자 아손 그렘스트는 1904년 한국을 다녀가고 나서 한국인과 교류했던 그의 시선으로 강자 위주로 흘러가는 세상의 조류에 대해 탄식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구한말, 한국인의 지나친 호기심에는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며 한국인들의 태도를 자유롭고 품위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군요. 그 당시에 한국은 세상에서 티베트 다음으로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으며 고작 알려진 것은 백의흑모뿐이고, 나머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고 말합니다. 19세기말부터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은 거의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에 깃든 한국정신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던 것만은 확실한 듯 합니다.

 

내가 의식하지 않는 한국정신은 때로 서구인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거나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에 맞게 재단되어 왔던 것이지요. 한국인만의 정서를 저자는 외국에서 살면서 찾아냈다고 합니다. 왜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저 멀리 있는 스웨덴에서 가능했던 것일까요. 한국사회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나 하는 역사의 현장들을 따르다 보면 그 해답이 보입니다. 한국의 풍습과 잠재력 있는 문화, 다양한 감각에 뛰어들었던 것을 애써 막지 않았던 합리적 이상주의자들의 면모들이 있습니다. 이런 한국인의 기질들이 다시 살아날 그 때, 공동체를 위해 쓰이는 자로 나의 필요에 의해 쓰는 자로 살아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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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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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절대 하지 마! 과연 애정 어린 덕담일까. 정치는 사익 추구라는 생각으로 접근해 본다. 공익을 위한 정치는 이 나라에서 찾기 너무 어렵기에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선 잡기쯤으로 해 두려 한다. 정치는 뭔가? 그동안 막막하게 접근했던 시선을 현재 내 생각을 기준으로 해 본다. 나를 위해 정치를 한다고 말하니까 정치하게요? 하는 질문부터 정치인도 아니면서까지 다양한 말들이 들린다.

 

우선 를 위한 정치의 순서를 생각해 본다. 먼저 사회에서 이슈로 오르내리는 일들에서 스스로 분노 조절이 가능할 수 있는가이다. 불의에 들끓는 청춘도 아닌 시간대에 있는 인간에게 분노 조절이 안 된다는 의미는 일면 자기 분노조절 장애 같기만 하니까. 나이 들먹이며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으로 근거 있는 일에 분노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두 번째는 사회에서 덜 건드렸으면 하는 사생활 영역이다. 내가 무엇을 하건 내 자유 의지의 발동에서라면 그 책임도 내가 지겠다는 의미이다. 이 영역을 국가가 나서서 지나치게 법 조항으로 규정해버리면 개인의 자유권이 심하게 위축된다. 이 이유만으로도 나는 현 정부가 얼마나 시대 감각이 없는 집단인가를 주저 없이 따질 수밖에 없고 분노 조절에 심장이 벌떡거린다.

 

세 번째는 노동이다. 잘 누리며 살기 위해 일이 필요한데 그 일로 하여 내 삶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너무 부당하기에 그렇다. 내게 필요한 만큼 노동할 시간의 선택권이 당연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생존을 위해 일할 권리, 그 사회권은 자유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선 어림 반 푼도 없다. 나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 타인의 기득권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노동환경이다. 이 세 가지가 내가 정치를 하는 목적이다.

 

정치 문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면 회피하거나 그건 정치인이 알아서 할 문제라며 외면하곤 한다. 아마도 피차 모처럼 만나서 열 내며 얼굴 맞대고 지껄일 노력의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그동안 어떻게 잘 지냈느냐고 묻는다. 못 지냈어, 열 받아서. ?라고 묻는다. 정치 때문이라 응수하면 에이, 그러니까 참 피곤하게 살아, 하며 웃어준다. 마주하지 않고 옆에 앉아 있다면 오른팔 뒤꿈치로 명치를 때릴 수 있을 텐데.

 

궁금하다. 어째 정치는 없고 정치인만 동동 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중은 왜 대표 정치인에게 해바라기를 할까. 선거는 이기는 게 목표니까 인물론으로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 거라고 누군가 말해주던데 그게 영 석연치 않았다. 그렇게 해서 계파 갈등이 생기고 그것이 분열이란 말로 부정적인 프레임을 만드는데 싶었다.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고 정치인이라는 말에 오랫동안 주입된 한국사회의 학습효과 결과물의 하나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정치인에게 속지 않으면 될 것 같다. 그러려면 정치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들의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을 지키려면 더 열심히 고민하고 나를 대신할 인간을 선택하게 될 테니까. 정치 집단이라는 관계에만 집착하게 되면 비판이 사라지지 않을까. 비판 없는 정치는 단절이다. 새누리당의 일관된 모습의 집단주의는 비슷한 견해를 지닌 인맥으로 벽을 친다. 그 벽에 무력해지는 건 야당의 몫처럼 되어 버렸다.

 

대체로 두 개의 프레임으로 가면 아주 쉽다. 오지선다형 시험이 쉽지 않은 것이 그렇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얼마나 산뜻한가. 확률도 높다. 자그마치 50%이다. 벼락치기로 절반의 행운을 늘 끌고 갈 재주만 있다면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제법 괜찮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니까. 그런데 정치는 시험 답안지처럼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지선다형쯤일 정당 선택 문제를 풀기 위해 나의 정치를 도와줄 정책과 책임감 있는 정당 찾는 일과 대의해 줄 국회의원을 이용해야만 가능하다. 내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투표는 지금을 바꾸는 것은 분명 아니다. 무엇이든 섣부른 기대와 너무 빠른 결과를 원한다면 다시 반복되는 정치 혐오와 냉소는 별 도움이 안 되며 오히려 원하지 않는 정치 환경을 제공해 주기도 하니까. 그동안 겪을 만큼 지나온 시간이 있으니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말의 힘은 사라졌다고 본다. 다만 그 말의 힘을 살리기 위한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아직도 진보와 보수가 균형을 이루는 정치판을 기대한다. 2016년 총선을 지나면서 지난 4년 간 국회의원으로 제 역할을 충실하게 해온 국회의원을 우선 선택했던 것일까? 나는 4선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부디 다음 총선에선 자발적으로 물러나서 젊은 정치인을 위한 아낌없는 노력을 해주었으면 한다. 자연스럽게 물갈이라는 말과 혁신이라는 말을 꺼내 들 필요도 없어진다. 그만큼 세대의 불협화음이라는 잡음이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국회의원 4번이면 충분한 기회의 시간이었고 그러고도 부족하다면 내 뒤에 서 있는 젊은 정치인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면 된다. 새로운 인재의 영입만이 부패하여 죽은 정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들의 역동성이 시스템의 고착화를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부평초 같은 민주주의를 걷어내고 생기 있는 건강한 묘목들을 정치판에 심을 노력이 요구되는 시대임을 모르지 않을 것 같다. 기성세대가 가르치기보다는 젊은 세대의 삶에서 배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에서 그 건강함은 위장이었고 땅속으로 들어가 불량한 뿌리 내림을 지금까지 키웠을 뿐이다. 그 썩은 뿌리를 캐내 버리고 새로운 뿌리 내림을 위한 자체 세력을 키우는 일과 텃밭을 내어주어 그 묘목을 지켜줄 바람막이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적어도 한 세대 이후에는 건강한 민주주의로 세대 간의 활기가 넘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는 그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시작이다. 나는 너무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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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는다.’ 한 사람이 곁에서 멀어질 때면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도 용감합니다. 너덜너덜해진 몸이 푹 꺼진 낡은 소파 위에 누워도 편안합니다. 월말이면 세 자리 수 통장이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일 또 내게 소용될 만큼은 가능하겠지 하는 느낌입니다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에 용감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 순간 닥칠 고난에 미리부터 염려하지 않는 낙천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내 주변에서 이런 나를 대책 없다고 해도 난 웃을 수 있습니다.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내리고 나면 온전하게 나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행히도 나는 그 전차에서 내려 정착한 지 오래되어 기억에도 없습니다. 욕망이 요구하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충분히 나를 위해 사용해왔기에 내게 남은 시간은 충분합니다. 삶은 큰 요동침 없이 슬그머니 나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으며 살아온 행운아이기에 겁날 것이 없어졌나 봅니다 

  인생에서 남은 시간 온전하게 나를 지켜내며 떠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욕망이라면 그렇다고 해야겠지만요. 그 욕망마저 없다면 살아있음이 지루하겠지요. 지금도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지낼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함을 잊지 않습니다.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고 만나고 싶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놓치지 않으며 살고 있습니다 

다 내어 주면 비어 있어서 평온해집니다. 원망도 미움도 분노도 내어 주면 사랑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한 모든 것들에서 배웁니다. 내가 만든 처음 그 마음들을 지켜낼 수 있도록 나의 벗들이 속삭입니다. 나를 견디게 해 준 벗들, 뒤죽박죽 쌓여있는 책들이 소리 내며 한 줄로 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이 남아 있지 않아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십 대에 먹은 그 마음을 지켜내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도 많았고 잡을 듯 놓친 순간도 있습니다. 첫걸음을 잘못 디뎌 길을 헤맨 적도 많았습니다. 선택 앞에서 치우친 마음으로 눈물로 지난 아침이 무건 두 눈꺼풀을 깨우기도 합니다. 자기 합리화도 넘칩니다. 쏟아 부은 열정에 지쳐 좌절도 했나 봅니다 

  지금도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속삭입니다. 너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 시를 가슴에 와락 품습니다. 돈이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용감한 녀석이니 그리 살라 합니다. 나와 상관없이 지나가는 이 세계가 있습니다. 나는 홀로 밥을 먹다가 갑자기 찾아온 급성 위경련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이런 날들이야 눈에 띄는 세계의 부재입니다만 나의 세계에서 비껴난 그들의 세계도 있으니 피장파장 아닐까 합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탁하고 습한 역겨움이 가득한 통로를 지나면서 느끼는 감정 같은 걸까 싶습니다. ‘라는 존재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데 마치 없는 장소처럼 여기지 않는 순간도 있습니다. 열린 문으로 나서면 될 것만 같은 세계는 내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이 적어질수록 나의 세계는 견고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열어 놓은 문으로 이름 모를 벌레 한 마리가 나를 약오르게 하고 그의 희롱에 대꾸를 하다가 처박아둔 에프킬라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 텅 비어 있어서 그 벌레는 여전히 내 주위를 유영합니다 

  아, 그래서 나는 이 세계에서 에프킬라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내일 슈퍼를 가면 사올 물품 목록에 써 둡니다. 이런 세계를 외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시인의 말처럼 비겁한 짓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이 세계를 떠났다가 다시 시간의 문을 열고 여행하는 시간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판타지와 이별할 수 없는 나는 시인 황성희에게 들려줍니다. 내가 시인이라면 판타지 안녕이 아니라 판타지 사랑이라 하겠다고요. 시인의 일상이 나의 일상을 닮았다는 생각에 詩集을 덮고 어루만집니다. 와 마음껏 놀아보니 시인이 된 듯합니다. 아무렴 어떨까요. 나를 위한 시는 늘 읊조릴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지요 뭐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 우리말보다 한자어가 더 기분 좋게 다가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읊조리며 살고 있습니다. 꼬박 하루를 지켜보면서 검푸른 새벽을 지나 여명까지.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 밤이면 애써 자려고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이 세계를 향해 느낄 수 없는 불감증일까 생각했습니다. 

일상의 감동 없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여전히 나와는 상관없이 잘 돌아간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만들어진 불감증입니다. 그것이 불면증으로 이어져 몇 시간의 수면이어도 눈 뜨면 다시 아침입니다. 오늘 잠들고 다시 오늘 일어납니다. 내일 잠들고 또 내일 일어나겠지요.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창밖의 반짝거림으로 거리에 나 앉은 느낌입니다. 고동색 블라인드를 내리고 작은 조명등을 켜고 눕습니다. 

  깊은 밤입니다. 감기려 하지 눈꺼풀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눈을 꼬옥 감습니다. 역시 잠이 오질 않습니다. 내일은 커피의 양을 줄여야 할까 봅니다. 그런데 내일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커피를 십 대부터 마셔서 내 몸은 카페인으로 인한 수면 거부는 아니야. 이 불면증은 내 일상과 같아서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굳이 밤이어야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니까요. 잠이 오면 잘 수 있는 너절하게 늘어난 내 시간 덕분에 약간의 수면에 대한 강박도 없습니다. 습관처럼 마시는 커피가 나에게는 생명수인 까닭에 오늘처럼 내일도 커피를 마실 겁니다. 내 몸이 본능처럼 그 향기를 구걸하니까요. 향기로운 아침이면 족한 또 하루의 시작이면 됩니다.

내게 비늘처럼 깔린 불감증은 일상의 평온이고 세계의 몰이해를 향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이 세계의 소음과 상관없이 나는 나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불감증과 불면증이 아닌 이 세계의 부정의와 몰상식, 합리주의와 이성에 너덜너덜한 채로. 작더라도 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가치를 지켜내고 싶은 마음 하나로 다시 시를 품습니다.

 

 

이글은 [푸른비의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 https://brunch.co.kr/@overdye0714/149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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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앨버트 브룩스 감독의 영화 <영혼의 사랑 (Defending Your Life)>

 

죽음. 사후세계는 있을까?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일까. 그동안 살아왔던 세계와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우린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일까. 사후 세계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정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학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증명해야 가능한 말이 아닌가? 삶과 죽음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살면서 죽은 듯이 지날 수도 있겠고, 죽음을 연습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죽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연스런 나의 죽음이다. 모두의 죽음은 타자의 죽음으로 나에게는 아주 먼 듯한 느낌으로 바라보는 누군가의 죽음이다. 삶과 죽음 앞에서 내가 선택하는 것. 그것은 금지된 죽음’인 '자살'이 아닌가. 나는 평소에 내가 가진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고 나름대로 타자의 끄덕임을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나를 위해 공부를 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죽음에 관한 책들을 읽어 보고 사상가들이 펼친 죽음에 관한 고찰들에서 공통점을 찾아 본다. 아무도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를 논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유희일수 있다는 점은 기억해 두고 싶다.  여기서 과거의 현자들을 소환해 그들이 남긴 말을 꺼내보자.

                                                                                    

                                                                    공자 : '삶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 '충만한 낮의 생활도 수면의 기쁨을 주지만 인생은 죽음의 기쁨을 준다.'

 

 

 

소크라테스 :

나는 큰 기쁨을 가지고 내 갈 길을 가는 걸세. 나뿐만 아니라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고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쁜 마음으로 이 길을 갈 걸세.'

 

 

                                                                                        

장자 :

생사라는 자연의 도리에서 벗어나 진실을 거역하고 하늘로부터 받은 본분을 잊음이야. 옛날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을 도피한 벌'이라고 했다. 죽음은 그 때를 편안히 여기고 자연의 도리를 따라간다면 기쁨이나 슬픔 따위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걸세. 이런 경지를 옛날 사람들은 '하늘의 속박에서 벗어남'이라고 불렀네 

 

죽음과 함께 거론되는 것은 사후 세계에 관한 궁금증일 것이다.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만 두자. 어차피 종교는 내 삶이 고단할 때 약간의 위안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기에 단 한 번의 죽음을 종교적으로 해석한다는 엉뚱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 우주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기에 그만큼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 

최근에 영화를 한 편 보면서 생각이 미친 것이 있는데 사후 세계는 있다 해도 살아있는 자들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에 우리의 의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삶의 또 다른 방식'일 것이라는 생각에 머물기로 했다. ‘생과 사의 문제는 철저히 자신의 문제가 아닌가하는 관점에서 이 글도 내 공부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글일 뿐이다 

영화를 잠깐 소개해 보면 죽음은 나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죽음이 결코 두렵거나 불안하다는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앨버트 브룩스 감독의 ‘Defending Your Life(1991)’는 판타지이다. 어차피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재 살아있다면 오늘, 잘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것이니까. 내일은 죽은 자의 위치에 있을지 모르니. 

또 누군가는 나의 이런 말에 '자기만의 언어'로 떠드시는군, 하겠지. 그래, 죽음이건 삶이건 어차피 당신의 선택이고 나의 선택이었던 것 아니던가. '인간'임을 마지막 순간까지 놓아버리지 않는 노력을 할 수 있다면 현재 누리는 삶이 허무하지는 않을 테지. 당장 내 앞에 펼쳐질 좋은 세상은 아니더라도 그 언젠가는 조금 나아질 세상이라는 믿음은 갖고 살아도 되는 것 아닌가.

 

 

 

2016년이 되면서 내게 익숙한 얼굴이 다른 세계로 떠났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혼혈왕자인 스네이프 교수. 해리포터 시리즈가 끝나갈 때까지 가장 끌렸던 스네이프 교수가 내게는 이미 영화 배우 알란 릭맨의 죽음이 아닌 혼혈왕자의 죽음에 모든 퍼즐이 맞추어 있다. 현실 세계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죽음과는 무척 다르다. 영화에서 만나는 캐릭터의 죽음은 그 영화가 내 삶에 남아 그리움으로 느껴질 때까지 가능했다.     

 

[굳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읽은 책]

필리프 아리에스의 죽음의 역사셀리 케이컨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시니 & 허노의 죽음에 관하여』파드마삼바바 『티베트 사자의 서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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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박사, 위인·인물전에 실린 유일한 기업가를

아시나요?


국민TV라디오방송의 <밀실에서 광장으로>에서 오늘 영훈국제중학교에 부정 입학을 한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의 아들이, 사실이 밝혀지자 결국 자퇴를 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떠오른 인물은 유일한 박사였다. 아이들과 책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떨 때면 거론되는, 내게는 무척 익숙한 인물이다. 유일한 박사는 조국의 근간을 세운 기업가이자, 행동하는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제시한 교육가이기도 하다.


그 이름도 유명한 삼성그룹이다. 삼성전자 부사장 이재용의 아들이 ‘비경제적 사회적 배려대상자 입학 전형’으로 합격했다는데, 순간 나에겐 ‘비경제적’이 아니라 ‘비경쟁적’으로 보여서 흠칫했다. ‘비경쟁적’이면 성적조작 없이도 1순위였을 것이기에 다시 기사를 보며 확인해 보니 잘못 읽었다는 것을 알고 혼자 웃고 말았다. 우리 사회에 일그러진 모습들이 거의 모든 분야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말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고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

위에 적힌 글들은 인간 존중을 사업의 기본철학으로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기업윤리로 사회적 책임을 다한 유일한 박사의 명언이다.


이 땅의 아이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 하고 이 나라에 기업의 윤리를 철저하게 보여주고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기업가 유일한을 잘 모른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다른 책들보다 강제적으로라도 읽히려고 하는 책들이 위인·인물전 시리즈일 것이다. 왜 그런가? 내 아이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꼼짝 못하고 생활 속에서 만나는 ‘삼성그룹’의 설립자 이병철의 이름은 결코 이 시리즈에 등장하지 못한다.


대학 진학 시 인문계열로 진로를 잡고 학과를 선택할 때 가장 많은 학생이 지원하는 곳이 경영학과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경제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온 지 정부수립부터 65년이다.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학습의 연장에서 넘치는 경영학도들의 활약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까지 경영 철학이나 기업가 정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무심했던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돈만 잘 버는 경영자의 모습이 이 사회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던가는 논하지 않는다.


유일한 박사의 가르침은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물려졌다. 아버지를 이어 기업을 이어받은 장녀 유재라 또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유일한 박사의 뜻을 이어갔다. 그리고 또 하나 유일한 박사의 이념이 이어지고 있는 곳, 바로 유한양행이다. 최근에 정년연장제로 노동계와 재야가 정년연장에 따른 임금조정을 둘러싸고 논란 중이다. 허나 이미 ‘유한킴벌리식 뉴패러다임’은 사회적 책임을 다 하고 있는 유일한 박사의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유일한 박사의 유품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 몇 가지와 양복 세 벌, 그리고 구두 두 켤레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고 한다. 이쯤에서 뉴스타파가 ICIJ와 ‘조세피난처 프로젝트’를 공동 취재한 결과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들의 명단 발표도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에서 실종된 기업의 윤리의식과 사회적 책임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기는 하다. 이번 영훈국제중학의 부정 입학은 빙산의 일각에도 못낀다.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고백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펴낸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에서 사제를 찾아가 행한 고해성사 이야기가 옛날이야기처럼 되어져 버린 우리의 현실도 생각해본다. 김용철 변호사를 보호하던 정의구현사제단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삼성공화국을 만든 것은 언론과 지식인, 모든 국민이 공범이다.” 5년 전의 이 말은 흔적도 없지만 난 그 공범들이 다시 힘을 합하면 괴물을 물리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건강한 사회는 어느 한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정경유착으로 나타나는 일들을 그저 멀거니 바라본 대한민국은 이제 달라져야만 할 때이다. 모든 세대들을 넘나들어 자기각성이 필요하다. 사회 문제가 나의 문제라는 의식의 전환은 필수이다. 사회적 성찰 없이는 불가능하며 적극적인 실천을 함께 해야만 한다. 그 시작이 나는 의식있는 지식인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공범이 되어 줄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방송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나의 이 수고는 순전히 개인적인 만족감에서 시작되었지만 내가 지닌 특유의 낙관주의는 분명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 믿고 있다. ‘선한 싸움’이란 꿈의 이름으로 행하는 싸움이며, 꿈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즉,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고, 나의 선의가 공공의 선으로 물들일 것이라는 희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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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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