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파운딩포레스터

Overdye*~ 2015. 6. 26. 10:24

사전적으로 ‘소수자’는 ‘적은 수의 사람’일 뿐이다. 허나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는 단지 그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다. 의미가 전복되는 경우는 넘친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 ‘소수자’라 하면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장애인, 성적소수자, 비혼모 등. 하지만 또 다른 소수자도 분명 있다. 청소년용으로 1등급, 분명 소수자이다. 대학생용으로 명문대, 직업별로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인 소수의 기득권자들까지. 그들도 분명 소수자이다. 그 다음은 너절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유추해 나갈 여지는 많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로 들어가 보기 위해 ‘소수자’로는 연관 검색어로 뜨지 않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를 통해 이어가려 한다.

 

 

▲ 2001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1. 과연 영화의 주인공은 소수자일까

 

2001년 개봉된 영화,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작품 <파인딩 포레스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소수자이다. 열여덟의 소년이 보여주는 농구와 문학적 재능, 은둔자로 살아가는 바로 50년 전 전설적인 데뷔소설을 발표한 후 모습을 감춰버린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

 

길거리 농구를 즐기는 고등학생 지멀 월러스와 그의 친구들은 동네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상한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호기심으로 지멀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하지만 뜻밖의 상황에 놓여져 가방을 놓고 나오고 그 집의 주인공 포레스터는 가방 속의 습작노트에서 평범함을 뛰어넘는 지멀의 수많은 글들을 발견한다.

 

다음 날 지멀은 그의 창문에 걸린 자신의 가방을 발견하지만 가방을 찾기 위해 아파트를 오르지는 못한다. 가방은 창 아래 길바닥으로 떨어지고 자신의 글들에 쓰여진 빨간색의 글씨를 발견하고 지멀은 포레스터를 다시 찾아가게 된다.

 

브롱스를 벗어나 스카우트되어 (지멀의 표현으로 콤마가 두 개인 상류층이 많은)사립고등학교의 농구 선수로 활약하게 되는 지멀은 그곳에서 낯선 자로 ‘소수자’이다. 이런 영화 속의 사회적 환경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게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실, 특목고와 자사고 등, 이미 고등학교에서 교육의 평등선은 사라졌다. 부모의 부(富)가 자식으로 대를 잇게 되는 ‘지배블록’이 굳건해 지고 있으니까. 최근에 언급되어 2014년에 개교를 앞둔 일명 ‘삼성고’라 불리는 자사고의 설립 과정과 개교에서 벌어질 기득권이라는 소수자가 누리는 시혜는 인권 침해라거나 생존 위협을 거론하는 ‘소수자’로서 만날 공포감은 결코 아니다.

 

지멀의 호기심으로 알게 된 은둔자 포레스터는 개인적인 상실의 아픔에서 스스로를 가두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저명한 작가로 그 또한 ‘소수자’이다. 그 둘의 만남은 서서히 진행되면서 때묻은 고전 서적들과 정적만이 가득했던 포레스터의 은둔지를 두 대의 타이프라이터의 소리와 웃음, 논쟁, 학문에의 열정으로 채워간다.

 

포레스터는 이 어린 소년을 따라 지난 40여 년 간 닫고 살아온 창 밖의 세상과 조금씩 조우하게 된다. 그 후 지멀은 포레스터에게 문학을 배우고 교감을 나누고, 포레스터는 지멀 덕분에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다.

 

 

▲ 지멀의 글쓰기를 위한 조언을 하는 포레스터

2. 소수자의 분류 기준은

 

이 영화에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답습되고 있는 많은 관습적 사고를 만났다. 소수자로 주류가 되는 인생들과 소수자이기에 비주류로 분류되는 삶은 어떤 기준이 있기에 가능하게 인식되어 왔던가에 주목하게 되었다.

 

주류와 비주류의 분류마저도 언제, 누가, 왜, 만들어 놓은 것인 지 출처는 분명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별 거부감 없이 사용되는 주입된 언어들로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위 1%의 부자들에게, 또는 1등급을 맞은 학생들에게 결코, 소수자라고 명명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다수에게 부정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소수자이기에 받아야 하는 부당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희생을 해야만 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빈번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의 소외는 공동체의 해체에 의해 야기되어 왔다. 기본 단위의 가족에서부터 친구, 직장, 학교 등의 공동체에서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음을 선택하고, 일상의 고통은 불편한 진실이 되어 암묵 속에 놓여져 있다.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지는 사회, 알 수 없는 공포에 자기를 추스르기 힘든 이 곳에서 나는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 참여연대,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공약파기 규탄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대선 당시 공약이 상당수 파기되거나 퇴행하고 있다며 애초 약속대로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뉴스1

3. 영화 속 인물과 대화

 

영화에서 포레스터는 지멀에게 묻고 답한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거지. 우린 이해가 안 되면 가정(假定)을 하게 된단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 개인이 놓인 사회적 환경에 의해 그를 판단해 버리는 오류를 아주 쉽게 저지른다. 오류의 면역력에 의해 진행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적 자아에 길들여지게 하고, 관계를 맺게 하여 그것만이 성공적인 삶인 것처럼 꾸며낸다는 것이다. 개인적 자아는 실종되어 ‘내가 누구지?’ 라는 끝없는 질문을 허공에 되뇌일 뿐.

 

더 이상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 자각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거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소수자는 구분되어 지는데 합리적 이성을 강조한 ‘공리’와 ‘편견’이 근거로 자리 잡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하게 만들어 왔다.

 

브롱스라는 지역의 나쁜 환경에 놓인 소년의 문학적 재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선생은 결국 지멀의 글에 문제 제기(포레스터의 글 제목을 도입으로 쓴 것)를 하고 지멀은 글의 출처에 대한 해명을 요구 받는다. 즉 스스로 쓴 글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려 한다.

 

▲ 지멀의 문학적 재능을 시기하며 문제 제기를 하는 문학선생 크로포드

“자네에게 제안을 하겠네. 이젠 모든 걸 잊고 내년에는 학업계획이 좀 느슨하게 짜여질 거 야. 자네가 할 일은 이번 토너먼트에서 승리를 안겨다 주는 거지. 그것만 해 내면 내가 알 아서 하마.”

포레스터의 글을 인용한 것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없는 지멀이 마지막 농구시합에서 우승하는 것만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시합이 종료될 시간에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자유투를 얻은 지멀은(의도적인 듯) 실수로 득점을 하지 못했다.

지멀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위해 그들이 원하는 승리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인생에서 마주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은 행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지멀은 자신의 성공보다는 ‘우정’을 선택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킴으로

포레스터가 세상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친애의 힘이다. 그런 지멀을 돕기 위해 학교로 나온 포레스터는 지멀이 그에게 건넨 글을 읽는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친구를 돕기 위한 포레스터의 선택이었다.

“가족을 잃게 되면 가족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됩니다. 피를 나눈 가족만을 의미하는 게 아 니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말하기도 하죠.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면 그들에게 품었던 소망...마지막으로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라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소수자의 친애가, 우정이 거둔 승리는 타자들에게 전해질 진심으로 충분히 감동적이다. 나도 지멀의 글을 들으며 친애하는 ‘나의 지멀’에게 전하고 싶다.

“너를 잃고 나서 후회의 마음에 시달리기 보다는 너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킬 수 있어 야 한다는 거. 너를 지켜줄 수 있음으로 나도 살아날 수 있다는 거. 그렇기에 너는 내가 부를 이름으로 온전한 ‘너’로 있으면 되었다.”

▲ 포레스터와의 친애를 선택한 소년 지멀

4. 소수자인 나와 너의 세계

다수에 속하지 않는 의미로 일반화 될 수 없는 이들을 내 나름대로 소수자라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분명 소수자인 거 맞다. 나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기에 소수자로서 이 사회에서 제도와 무지와 편견으로 요구하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히 거부한다. 그래서 나는 함께 나누고 싶은 너의 희생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상황에 놓인 부분의 이해는 가능하겠지만. 그 부분으로 한 개인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보기에 ‘느껴주기’로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대신할 수 있었다고. 그 느낌을 나눌 수 있는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친애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영화 속에서 지멀과 포레스터의 교감이 ‘우정’이라는 친애의 사랑을 쌓을 수 있게 해 주었고, 각자 스스로의 삶에 당당하게 맞서 나아갈 힘을 서로에게 준 것처럼.

▲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시작, 포레스터의 화려한 외출

인간의 다양성에서 시작되는 삶의 모습들, 또한 사회의 각 분야에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분되어, 늘 소수자로서 받아야 하는 부당함들이 있다. 그것들은 ‘나’에게서 시작될 수 있었고 ‘너’로 하여 이어지기도 한다.

소수자라는 ‘구분’이 사라질 때 우린 비로소 ‘인간’으로서 대등해 질 수 있을 거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는 나이기도, 또 너이기도 하기에.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나기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분명 적어질 것이다.

중증 장애인의 1인 시위, 세대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자살이 넘치는 사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어린이들이 많은 사회, 기계와 벗삼아 놀아야 하는 청소년, 철탑 위로 올라간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너가 같은 성(性)이라는 이유로 모멸의 대상이 되는 사회, 너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넬 수 없는 내가 있다.

▲ 지멀을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온 포레스터, 아름다운 우정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글이 훨씬 나을 수 있다는 포레스터의 말을 옮기면서 웃고 있다.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꿈을 꾸는 것을 잊지 않도록, 내게는 주인공 포레스터와 그의 친구 지멀처럼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에 꿈을 꾸고 있는 친애하는 ‘너’가 있다는 것이기에.

그래서 나의 세계는 이렇게 작동될 수 있는 것이라고.

‘협동조합’이라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확산된 여러 현상들을 도처에서 발견한다. 내 주변을 돌아 보며 나와 교감할 수 있는 너를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어쩌면 내 옆에서 웃고 있는 너가 있었음을 발견해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을 기웃거리며 함께 공감하는 우리는 소수자이다. 이 사회의 구분에 의해 명명된 소수자들이 자유롭게 소리낼 수 있는 사회는 개인의 시작에서 가능하다. 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되돌아 보며 내 옆에 있는 너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을지라도 너가 함께이면 가능하지. 그렇다고 해 주시라.

Posted by 보랏빛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