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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햇살이 너무 따갑다는 느낌으로 길을 걷습니다. 거리는 저들 나름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정오를 지난 시간에 하는 외출이 참으로 불편합니다. 내가 느끼는 세계와 거리에서 만나지는 세계는 너무 이질적입니다. 나는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자족의 풍요를 누리며 삽니다. 나의 풍요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으로 채워지지요. 크게 부족함을 못느끼며 살아갑니다. 이런 내게 낯설게도 존재의 위기감이 숨과 함께 내부에 차오릅니다. 늘 있었지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들이 나의 시선이 멈추기를 바라는 듯햇습니다.

 

 

 

▲ '삵 자연으로 돌아가다’ 서울동물원에서 태어난 멸종위기 2급 야생동물 '삵' 5마리가 21일 오후 경기도 안산 시화호 상류습지에서 자연으로 방사되고 있다. 2014.3.21/뉴스1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다시 빙 돌아서 겨우 도착한 그곳은 그 지역의 오래된 책방이었습니다. 그 책방 역시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채비를 하고 대형서점으로 변신 중이었습니다. 책방의 이름은 옛 것이지만 이미 그 모습은 없습니다. 내 주변에는 이런 변신이 일상처럼 일어납니다. 우리의 윤택한 삶은 사물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사물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책으로 가득찬 그 공간에서 이끌리는 시선이 멈춘 것, 내가 선택한 100쪽의 책 한 권입니다. '깊이에의 강요/파트리크 쥐스킨트'였습니다.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에 <깊이>가 무엇인지 구현하려다가 좌절하여 자살한 젊은 여류 화가의 이야기가 책의 내용 중에서 유독 시선을 끌었습니다. 소묘 화가로 재능있는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한 평론가의 비평을 신문에서 읽은 후,'깊이'라는 그 말의 의미를 찾다가 결국에는 자살을 하지요.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기에 그녀의 몸은 아주 멀리 날려가 전나무 숲에 떨어졌는데 즉사했습니다. 자살 사건. 한때 전도양양했고 미모도 뛰어난 그녀의 특이한 형태의 죽음은 대중지의 보도 가치에 따라 그간의 끔찍한 그녀의 삶이 드러났습니다.

 

깊이가 없다는 평론을 한 그는 이제, 그녀의 죽음을 평론합니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 번 충격적인 사건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녀의 끔찍한 삶은 그대의 상상력에 맡기려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시선이 말이 되어 어느 대상에 꽂힐 때,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한 국가의 수장이 한 말이 비수처럼 꽂힙니다. 그런 5월은 이 땅에 황망하게 떠도는 숱한 영혼들의 말들로 찾아옵니다.

 

국가의 야만에 의해 파괴되어야 했던 소중한 목숨들이 바람처럼 불어오는 달이기도 하지요. 5.16 군사쿠데타와 5.18 민주항쟁으로 스러져간 넋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보 대통령의 영혼이 광장에서 내 가슴을 향해 그리움을 담은 바람으로 넘치는 달입니다. 오늘의 광장에 더해진 세월호의 맑은 영혼들까지, 이 5월은 그렇게 우리들을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서게 하고 있습니다. 심리분석가 마거릿 말러가 첨단 기업들의 관행으로 ‘존재론적 불안정’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 전문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존재론적 불안정은 재앙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특정 상황에서 이렇다 할 개인적 이유 없이 걱정에 빠져든다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기업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유화된 국가는 국민을 이용해서 이윤을 추구하려 합니다. 재난을 이용해서 이윤을 취하려는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이윤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금수(禽獸)일 뿐입니다. 이것이 저들이 말하는 창조경제일지요.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할 주체인 정부는 희생의 시스템을 가동하는 허언들로 넘칩니다. 국가의 존재,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정치와 경제를 공간적으로 갈라놓은 고대 아테네인들은 민주주의의 미래를 예견한 듯합니다. 사람들이 돈벌이에 신경 쓰다보면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는 고전적인 명제를 생각하도록 하고 있네요. 플라톤이 국가는 경제에서 요구하는 필요와 탐욕이 아닌 정의에 근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현대 국가와 국민들이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유착되어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은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여전합니다. 정치도 소비의 한 형태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라면 소비자인 나는 단호하게 금수정부를 거부 하겠습니다. 나는 사람입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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