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경상북도 도청 강당에서 '제12회 식품안전의 날' 기념행사


지난 대선 때 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거론한 것으로 4대 사회악 척결에 끼어든 ‘불량식품근절’은 의외였다. '악(惡)’이라는 말이 불량식품에 덧붙여진다는 놀라움과 함께 대다수 시민들을 졸지에 악인으로 만들기도 한 공약이었다. 불량식품을 만드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이 늘 있었다는 의미이고, 나도 예외는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학교 앞 문구점에서 동전 한 개로 나의 입을 달콤하게 할 수 있었던 그 추억의 과자들이 전부 악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악을 추억하는 나를 악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왜?’라는 의문이 따라왔다. 이것이 ‘4대 악’에 들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해 낼 수 없었던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악인이었기에 몰랐던 것인가 싶었다

.

이번에 새누리당의 신의진 의원이 발의한 일명 ‘게임 중독법’이 우리 사회의 ‘4대 중독’이란 범주에 들어갔다. 마약, 술, 도박, 게임, 그렇게 규정되어진 상황에서 필자는 또 궁금해진다. 왜 3대는 아니고 5대는 아닐까? 생각하다 숫자 ‘4’가 지닌 우리 사회의 관습적 사고에 마주하게 되었다. 죽을 ‘死’를 연상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인가. 마치 ‘중독을 죽이자’라는 의미로 연상되는 것이 필자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어떤 말들이 사회구성원의 뇌를 조종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사회학습으로 각인되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회 담론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보수주의의 ‘엄격한 아버지’를 연상시키고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으며 내가 도덕적인 인간이 되려면 ‘악’에 맞서야만 한다. 이번에는 국회의원에 의해 졸지에 게임에 집중하고 과하게 노는 이들은 ‘중독자’가 되는 거다.


악에 맞서려면 강한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 그 도덕성을 준법정신으로 하여 악을 제거하기 위해 보복과 징벌의 법을 제정한다. 우리 사회에서 ‘중독’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의미로 쓰여 왔고, 그런 의미에서 ‘중독은 나쁘다’는 말이다. ‘게임중독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이 심각한 우(遇)를 범한 것은, 같은 문화 콘텐츠에 대한 형평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겠다. 심각한 중독 현상은 오히려 강력한 미디어 매체로 부상한 텔레비전이다. 굳이 4대 중독법을 만들어야 했다면 ‘TV중독법’이 먼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다. 우리에게 TV가 있는 저녁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일상이고, 그 중독은 한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를 지체시키는 독재자들에게 열렬했다. 시청자들을 우민화시키는데 급급한 불량방송을 송출하는 텔레비전이야말로 나쁜 것이기에 중독법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http://cafe.daum.net/ibims 


중독으로 인해 생기는 각종 문제들은 반드시 사회적·개인적 노력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허나 그 ‘중독’이란 말 앞에 어떤 말이 놓이는 가에 따라 그 의미도 긍정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아름다운 중독’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몰입’이다. 이 몰입은 자기 진화를 위한 발견의 시작이고, 그 효과를 굳이 따지자면 세상을 변화시켜 진보할 수 있었던 역동적인 힘이었다.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는 사회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에 개인들이 각자 몰입한다면 그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게 된다. 게임에 몰입하는 개인들이 모여 산업적 성과를 이루어낸 것처럼 사회·정치·교육 등 각 분야에 몰입한 개인들이 모여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율적 의미의 접근으로 강제할 ‘법 제정’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중독을 해결하려면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학업과 연결된 시간을 제외하면 아이들에게 남는 시간은 아주 적다. 즉 충분히 뛰어 놀 시간이, 저들끼리 모여서 놀고 떠들 시간이 없다는 것이, 게임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임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게임중독법’을 발의해서 타율과 강제로 막을 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누릴 자유로운 시간을 먼저 허락할 수 있는 교육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논다’라는 말이 구성원들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회 분위기에 ‘놀 수 있는 사회’로 변신하지 않는다면 ‘중독법’은 숱하게 발의되고 제정될 것이다. 과연 강제되는 법을 만들어 놓고 자율적인 준법정신을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법이 개인에게 휘두르는 힘은 보이지 않는 국가의 폭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회는 그만큼의 개인들이 감당할 책임의식이 뒤따른다. 자유는 스스로 책임질 것을 전제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 자유를 ‘법’으로 차단하겠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은 과연 그 흔하게 널린 ‘자유론’에 대한 수많은 인문학자들의 말에 몰입한 경험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인간이 우위를 정하는 부분은 지구의 그 어떤 종(種)도 접근하지 못한 문화적 도구 때문이라고 한다. 그 도구를 사용하는 자의 선택이 게임만은 아니다. 문화집중 현상을 모든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그 도구가 한 개인을 파멸로 몰아간다면 그 도구를 덜 사용할 수 있는 개인적인 노력이 우선일 것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 체험 환경은 이 사회의 몫이다. 이 사회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해 게임의 즐거움에만 빠지도록 한 것은 아닌지 사회적 성찰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Posted by 보랏빛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