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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34건

  1. 2015.08.22 태극기 물결로 관리하는 애국심
  2. 2015.07.22 어탑을 원하시나이까, 왕의자살
  3. 2015.07.14 대통령이 달라졌어요!

 

2개월의 겨울 방학 기간에 개인적으로 작은 도서관을 운영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책을 읽는 공간을 열었습니다. 2회는 독서지도와 NIE로 수다도 떨었습니다. 마무리되어 가기에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지요. 하지만 의외의 상황에 스스로 한 방 얻어맞아 띵해지고 말았죠. 충격이었습니다. 관리부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관리하지?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관리당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할 내 나름의 행동을 취했습니다. 일단 작은 상자를 입구에 두고 휴대전화기를 걷었습니다. 이 공간은 와이파이가 그야말로 빵빵하게 터지는 곳이지요. 그동안 그들은 책을 읽기보다는 스낵 컬처와 스마트폰 게임을 했습니다. 관리자가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함께 있을 때는 책에 빠져있는 모습이었죠.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라 빗대면 과한 것일까요.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 사회,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앞장서서 구성원들을 관리하고 그것이 마치 국가 안보를 국가 성장을 위한 것이라 여기도록 하고 있지요. 관리당한 기성세대들이 신세대들을 그렇게 관리하려 합니다. 청소년을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장래 대한민국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일부 십 대들의 모습을 너무 과대 해석하는 것이라고 부디 비판해주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과 관리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행하는 어른들의 관리 역할은 그들을 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의 교육은 사육으로 변질하여 버렸고 그 사육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다시 사회를 향해 화살을 쏩니다.

   

2008년 데니스 간젤 감독의 '디벨레(Die Welle)'

 

이 영화는 독일영화로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커 벌리 고등학교에서 교사 론 존스에 의해 행해진 실제 실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무정부주의 대신 독재에 관한 토론 수업을 진행하게 된 한 고교 교사가 독일 나치즘의 독재 정치가 현대 독일에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학생의 의견에 그 작동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교실 실험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같은 유니폼을 입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실험에 점점 동화된 학생들은 협동단결을 위한 단체를 결성해 그 목적에 맞지 않는 친구들을 지목하고 감시하며 배척하는 등 점점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개인주의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지만 공동체가 발휘할 수 있는 연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느끼는 겁니다. 독재는 어디에서건 가능합니다.

 

휴대 전화기를 걷지 않으면 자제할 수 없는 청소년들의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한국의 교육이 저지른 주입과 획일화를 마치 연대의식으로 몰아가는 전체주의의 영향력은 심각합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일상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청소년들은 '규율'획일화로 시작되는 '독재'의 가능성에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집단적 광기로 몰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애국심을 내세워 국민을 선동하려는 현 정부의 모습만큼 위험합니다.

 

이 영화에서 프로젝트 수업을 한 주간 진행한 후 벵어 선생이 말합니다.

 

첫 수업 시간에 질문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우리에게 독재가 가능할 것인지 물었다. 독재정치란 바로 이런 거다. 방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나, 너희?”

 

 

2008년 데니스 간젤 감독의 '디벨레(Die Welle)'

 

프로젝트 수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많은 청소년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디벨레'의 일원으로 평소에 경험할 수 없었던 연대의식과 그 힘의 파장을 마주하면서 전혀 다른 폭력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 이 실험 수업은 커다란 불행을 가져왔고 한 교사의 실험 정신조차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는가를 조심스레 되묻고 있습니다. 벵어 선생은 프로젝트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수업관리만 했기 때문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수업 진행 중 교사는 학습관리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의 1972년 신동아에 실린 글을 전환의 논리에서 읽었던 활자들이 너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1970년대의 풍경들이 하나둘 재현되고 있는 태극기가 휘날리는 거리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독재시대의 재현같습니다. 표준화된 시대에 주입된 대중매체를 통한 우민화를 위한 국가의 노력은 빛을 발휘한다는 리영희 선생의 말을 되뇝니다.

 

브라운관과 10인치의 유리창을 통해서 원거리로 조작되는 지배층의 의도는 자기 자신의 감각과 지각으로 이 사회의 실태를 꿰뚫고 살피려는 노력을 포기한 치매증 대중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한 듯하다.”

 

감각 미디어에 혼이 빠져버린 신세대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진 그 오랜 습속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기성세대로서 만나는 통렬함입니다. 문자 미디어가 전해줄 이성과 사고와 멀어지게 의도한 이 사회의 필요조건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세대 간의 벽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태극기를 바라보는 것이 애국심을 흉내 내는 일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2015년으로 96돌을 맞은 3·1절의 거리는 정부의 태극기 달기 운동 분위기를 확산시킨 덕분인지 곳곳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물결입니다. 1970년대를 학창시절로 보낸 나는 서울시청 앞을 지날 때면 국기하강 식을 하는 동안 가던 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너무도 당연시되었던 의례는 그저 바쁜 걸음 멈추게 한 재수 없는 날의 기억으로 남았을 뿐입니다.

 

정부의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이 박근혜 대통령이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 국기하강 식 장면을 보고 애국심을 강조한 즈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올 한 해는 전국이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힐 것 같습니다. ‘디벨레물결이란 뜻의 독일어입니다. 한국사회를 뒤덮는 이 태극기의 물결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3.1만세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요. 다른 공동체를 배척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가져올 결과는 암울한 과거의 교훈으로 끝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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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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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다른 세계로 떠나기 전까지 추구할 수 있는 영혼의 탁월함을 향한 변화의 과정, 그 가능할 것만 같은 일의 한 사례로 위대한 영혼 ‘간디’를 생각해 본다. 필자에게 각인된 간디는 '물레를 돌리는 모습'의 간디이다. 그의 영혼이 고양되기까지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와의 편지 인연이 있었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톨스토이 사상의 중요한 키워드 '비폭력'이 킹 목사와 넬슨 만델라에게로 이어졌듯이 간디에게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절대시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각을 유지하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필요하다.

 

간디의 행적을 보면 흔히 알려져 있는 간디와는 다른 모습도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주장’했다거나, ‘제국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자국민 청년들에게 호소’하는 모습도 있다. 그러한 모습은 우리의 역사 속 ‘친일파 지식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지식인들이 보였던 치졸한 친일 부역과 현재 거대 정당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후대들에게 ‘마하트마 간디’라 불린다. 그는 적어도 후대에 남을 흠잡을 데 없는 위인이기 보다는 '모두'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를 뛰어 넘으려 노력했던 영혼의 탁월함을 지니려한 한 ‘인간’으로 남았다. 간디의 사유는 그 한계가 있지만 그는 결코 스스로 선택한 물레를 버리지 않았다.

 

만약, 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자신의 삶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혼의 탁월함을 위한 개인적인 각성과 노력을 했다면, 그가 말년에라도 자신의 온전한 삶을 위한 어떠한 행동으로라도 이 나라를 위해 실천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허나 그는 자신만의 현실에 머물고 떠났다. 여기에서 한 개인의 삶에 시선을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개인을 놓고 그를 나름대로 평가할 때, 그가 가진 배경이 어떤 배경인가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외면하거나 특히 사회에서 부여해온 기득권에 있어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 인생을 후대에서 조명할 때 '완벽함'이란 그야말로 플라톤의 이데아계에서 가능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만 인간의 부족함을 극복해 나가려는 개인의 노력이나 개인이 마주하는 하나의 계기 등이 작용될 때 그에 따른 '선택'에 의해 삶의 모습은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대의 위인들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을 선택하여 비판받는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현실에서 얻어지는 개인의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영혼이 지향하는 '모두'의 선을 향한 시간들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현재의 시간은 하필이면 미래가 아닌 과거로 향하고 있다. 거부하기에 벅찬 현재에서 내가 원해서 발 딛고 있는 땅이 아니라고 소리치며 내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간디를 등장시키며 어떻게든 이상한 나라의 구조를 이해해 보려고는 한다. 이 '잘못된 구조'를 '악'으로 놓는다면 이 구조를 만든 개인도 '악'인 것이다. 저절로 만들어져 뚝 떨어진 구조는 아닐테니 말이다. '악'의 개인이 집단을 이루고 정파에, 기득권에, 지도층에, 줄줄이 그럴싸한 수식어를 붙인 채 만든 '구조'인 것이다. 물론 그 개인의 '악'은 여러 유형의 '나쁜 쾌락'을 통해 자신만의 욕망을 담았을 뿐인 거다.

 

사실이 소설로 둔갑하고, 소설이 사실이 되는 요지경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정국에서 설흔의 ‘왕의 자살’을 읽은 터에 이야기의 배경 연대가 같은 김상규의 소설 ‘화담 서경석’까지 줄줄이 떠오른다. 조선의 역사에서 ‘인종’을 기억해 내기는 쉽지 않다. 영의정 윤인겸 등이 대행대왕의 묘호를 인종이라고 의정했는데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일컬어 인이라 했다고 ‘명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역사 관련 책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그의 재위 기간이 조선 역사에서 가장 긴 26년의 세자 시절과 가장 짧은 여덟 달의 왕좌를 지킨 병약한 임금으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설흔은 인종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상상력을 발휘했다. 물론 소설이 가진 허구성에서 그 당시의 배경을 다양하게 추론해 볼 수는 있지만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아닌 한 개인 ‘이호’의 선택을 주시했다. 이호는 개혁 세력의 피바람을 부른 사화(士禍)의 중심에 선 아버지 중종을 닮지 않기 위해 스스로 병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설이 왜 사실로 느껴지는지.

 

아마도 모든 근원은 '나'에게서 '모두'에게로 나아가려 할 때 그나마 인류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진보가 진행되었던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어탑을 원하는 영혼에게 ‘철학자의 돌’을 선물로 주고 싶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나와 너, 모두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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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영화 <Dave>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의 일탈은 활력소가 됩니다. 그런 일탈로 세상을 바꿀 작은 시작의 순간이 내게 찾아온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의 주변 이야기가 뉴스를 차지하는 중에 이 영화는 의외의 기쁨과 모색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오늘로 455일을 넘어왔습니다. 그동안 진상 규명을 밝힐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대통령과 관련된 검색어는 점점 늘어납니다. 최근엔 현 정부의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재의결 되지 않아 국회법 개정안은 폐기됐어요. 현 정부에게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은 이미 훼손된 지 오래전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만 주시하고 있어야겠지요.

이영화에서 ‘데이브’는 볼티모어에서 직업 소개서를 운영하며 사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는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데서 즐거움을 찾지요. 그런 데이브에게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미국의 44대 대통령 빌 미첼과 똑같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돼지의 등에서 내린 데이브는 “자동차는 세보레죠.” 하며 대통령의 말과 행동을 흉내 냅니다. 데이브는 대통령을 연기하며 주변인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우리에게도 현 대통령과 관련되어 기억나는 관련 검색어만 채집해도 웬만한 소사전이 만들어질 수 있잖아요? 그 말들이 희망의 격언이 될 수 있다면 싶은데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을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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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영화 <Dave>

 

미첼 대통령은 볼티모어 방문 시 공식적인 행사에서 사적이고도 은밀한 시간을 가지려고 데이브를 잠시 내세우기로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공직자의 부정의 한 일들이 졸지에 ‘일탈’로 치부됐던 것처럼 대통령 개인의 일탈을 위해 자신을 똑 닮은 데이브를 대역으로 내세웁니다. 영화에서처럼 권선징악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불가능한 것 같은데 말이지요. 대통령은 뇌졸중으로 혼수상태가 되고, 데이브는 대통령의 역할로 그의 일탈이 시작됩니다.

 

미첼 대통령의 교활한 비서 실장 ‘밥’은 데이브에게 잠시 대통령 흉내만 내게 함으로써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유혹합니다. 애국심을 강조하며 데이브의 선량함을 이용해 대통령의 역할을 하게 하지요.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데 어쩐지 청와대와 관련된 입말들이 현실에서 넘치기에 예외성으로 유쾌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대통령의 역할을 대신하는 누군가가 있기는 했나? 하는 추측이 난무하던 지난해 이슈가 생각이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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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일보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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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영화 <Dave> 비서실장 밥이 대통령대신 법안 처리에 사인한다.

 

신영복 선생의 『담론』 중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은 그때 그곳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저자의 말은 ‘사실’이 ‘진실’이 될 수 없는 것을 다시 되새기게 합니다. 사실조차 개인의 편향된 시선에 따라 왜곡되기 일쑤인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무거운 일이던가요. 자기검열이 작동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가 두려운 사회, 시대를 뛰어넘기 어려운 정서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걸까 싶습니다.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들에 이러쿵저러쿵 춤을 추다가 제풀에 힘이 달려 그만 주저앉게 되고 말 것 같은 거지요.

 

이런 사회의 불안들은 삶을 절박하게 만들지 않던가요. 패배의 역사에는 서사가 꽤 낭만적으로 퍼집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패배를 치유할 자유로움과 창조성은 소멸했겠지요. 패배의 역사, 혁명이 글자로 박제된 지금, 저자는 ‘현실과 이상의 지혜로운 조화’를 담론으로 삼았습니다.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를 이룰 능력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분리된 힘이 아니라 유연함이며 이런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 하죠.

 

왜, 정치가 내 삶과 멀리 있어야 했지? 이 물음을 알아가는 과정의 시간에서 나는 또 다른 삶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내 머리가, 가슴이 생각하는 것들이 엉키다 보면 결국엔 내 세상 안으로 기어들어가 버리곤 하는데 그것은 나의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지독히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나를 다시 각성시키고 끄집어내 매번 기성세대의 나를 성찰하게 하는 청년들의 작은 웃음이, 눈빛이 늘 성가시게 하곤 합니다. 이제 나를 위해 민주주의가 자명성을 얻어야 한다는 거지요. 나의 자유를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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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구매자에게 신뢰 홍보비로 4천7백 만 불을 쓰고 있소.”

“네, 자동차를 구매한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요.”

“차 산 사람의 신뢰감을 얻기 위해 아이한테 길에서 자게 하라 한다? 그럴 수 있소?”

“못 하죠. 그럴 수 없죠.”

 

대통령 미첼은 볼티모어 연설을 끝으로 그의 개인적 일탈이 그를 영원히 잠들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데이브에게 그 역할이 맡겨집니다. 대통령의 비서와 측근에 의해 움직이던 데이브에게 영부인은 하나의 계기를 주게 됩니다. 그녀가 원했던 “무주택자 법안”을 정부가 예산 부족으로 거부하면서, 문제를 의식하게 됩니다. 데이브는 정부 예산안을 검토하기 위해 친구의 도움으로 공부를 합니다. ‘사실’과 ‘진실’에 대해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무주택자 법안’을 살릴 예산안 재검토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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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 그렇겠지요, 뇌졸중으로 쓰러진 대통령 대신 데이브는 진실을 담아 기자회견을 합니다.

 

나는 오늘 아침 비서실장에게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 나라에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더는 못 참아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있는데 못 본 척 한 거죠. 그런데 이제는 점점 더 커져서 누구도 손을 못 대죠. 그뿐 아닙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이죠. 정말 비극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어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몰랐다면 시작할 일은 제가 제안하죠. 오늘부터 정부는 일을 원하는 시민에게 직업을 찾아줄 책임을 질 겁니다. 일자리 얻은 사람의 얼굴은 하늘을 날 것 같죠.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뜻있는 일을 한다는 기쁨을 한 사람씩 느끼게 되면 다른 문제의 해결도 불가능은 아닙니다.”

 

권위에서 나오는 힘이 권위주의로 둔갑, 권력을 악용하는 정치인들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데 전력 질주했던 무리가 벽을 쌓고 있습니다. 이미 해체된 이념을 들먹이며 국민을 호도합니다. 보수와 진보, 그 둘의 협력으로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말의 진정한 힘이 사라져 사람들을 혼동하게 합니다. 영화에서는 선한 인성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바른 정치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 집단 이기주의가 적다면 정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바람직한 파수꾼이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이 망국으로 가는 역사의 혼란한 시간을 멈추게 할 힘이 있어야 하고, 정치만큼이나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개인들도 그 책임을 함께 지고 가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키는 그의 평전에서 “하나의 일관된 전략이 없으면, 그 집단은 살 수도 없고 숨 쉴 수도 없다.”고 말하더군요. 전략은 적중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전략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한 명의 리더십이 작동될 수 없다면 진보의 결집이 필요하고 그것이 전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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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혁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총과 폭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혁명이란 사고의 전환이다. 유교나 기독교도 당시에는 혁명이었다.” (호세 무히카)

 

투쟁에는 후퇴할 시간이 있어야 하고 힘을 유지한다는 것은 후퇴했다가 다시 모으고 조직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지나간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하게 맞닥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호세 무히키의 말은 한국사회에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선거의 결과에 따른 치밀하고 비전의 아젠다를 재창출할 수 있는 전략가들이 힘을 합쳐야만 하겠지요. 계파의 늪에서 언제까지 허우적거리며 책임 전가를 하려는 것일까요. 현실의 벽 앞에 언제까지 무릎을 꿇고 국가의 미래를 팔아먹는 행태에 손가락질만 할 것인지 답답합니다.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키는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자신의 급여 대부분의 90%를 자선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지만 가장 존경받고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우루과이는 현재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평균성장률을 웃도는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퇴임 당시 무히카 대통령 지지율은 당선 때(52%)보다 훨씬 높은 65%였다는군요.

 

현대인들의 망각 속에서 공화국의 정신은 왜곡되고 붕괴하여 가고 있습니다. 공화국들은 봉건적 향수 때문인지 혹은 소비주의 문화 때문인지 ‘부유하게 살기’를 그들이 나아갈 방향으로 수용했고, 보통사람들의 삶과 꿈, 생활의 요구들을 외면해버렸습니다. 정부는 결국 자기 국민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호세 무히카)

 

호세 무히카 대통령의 2013년 9월 24일, 유엔 총회 연설의 내용은 ‘현실’에서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크고 절망스럽게 다가옵니다. 분명 동시대를 살고 있는데 정반대의 철학과 행동을 보여주는 대통령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국사회, 그 현실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그의 말대로 한 사회의 실패는 정치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정치가 실패하는 것은 삶을 부의 축적보다 우위에 두는 철학적 시야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새겨 봅니다.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영화 같은 상황을 바라기보다는 공정한 선거를 통해 데이브 같은 대통령으로 바꾸는 일이 더 현실적이겠죠.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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