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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6.27 무지개 행동은 인권 지키기
  2. 2015.06.27 무지개 행동 2
  3. 2015.06.26 파운딩포레스터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헌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헌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법치국가는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 나도 국가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긴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비영리 단체가 법인 설립 신청 과정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법무부는 한 쪽에 치우쳐진 인권을 다루는 법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정식 절차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재단 허가여부 6개월 미루다 지난 5월 3일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인권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법인 설립을 불허했다.

 

청소년기의 자아 정체성, 흔하게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없다. 아니 없었다. 12년의 기초 교육과정을 지나오면서 '성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들어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 보시라. 바꿔말하면 개개인을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교육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인생의 제3(생애 주기를 100세로 잡고 네 부분으로 나눈 것)에 들어서야 성 정체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십 대에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 여자 '전혜린'이 있었고 너무 이른 죽음으로 몇 권의 책만을 남기고 떠났기에 박제된 의식이었을 수도 있다.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에 굳이 이거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혼, , 통이다. 누군가의 책 제목 같지만 그 의미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 책은 사회 전반적인 것을 향한 것이니 말이다. 내게 '()'은 당신의 정신이다. '()'은 당신만의 것인 무엇이다. 개성일 수도 당신다운 것일 수도, 암튼 그건 당신의 몫이다. '()'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감이다.

 

 

 

 

인간을 여러 이름으로 나누는 일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LGBT'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은 맞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느낌, 마치 번갯불에 잠시 감전된 듯한 느낌을 만났을 때가 있다면 조금은 알 수 있으려나. 굳이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이 내 관심을 더 끌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3년 전 여름이었다. 초저녁무렵이었고 'PO PO'라는 이름의 그 곳에는 고양이가 무섭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고양이를 싫어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우연하게 '성 정체성'에 관한 궁금증을 찾아 가면서 나의 평소 습관이 나를 얼마나 안일하게 만들어 왔는가도 깨달았지. 내가 좀 더 활동적이고 폭 넓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인생 3기에 와서야 이 궁금증을 갖고 이리도 기웃기웃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지금까지야 성 소수자 인권을 위해 행동하는 단체에 후원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접적으로 열심히 알아가는 중이다. , 나에게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마주할 기회를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채 청년기를 지나왔다는 그 사실에 화가 난다. 자아정체성을 위한 그만큼의 노력이 성 정체성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런 생각들을 제대로 써보게 된 것은 지난 1월에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빵집에서 일어난 일인데 케이크를 주문한 사람이 빵집 주인에게 자신을 차별했다고 시작된 사건이다. 그가 원했던 케이크 위에 쓸 문구는 "Got hates gays"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종교를 믿건 그렇지 않건 이 문구를 쓸 자유도 있지만, 그 문구를 거부할 자유도 있다. 그것을 '차별'의 의미로 다가선다면 이해할 수가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신(GOD)은 선(Good)이다. 그걸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GOD LOVES EVERYONE!"

 

빵집 주인이 그의 주문을 거부한 이유이다. 과연, 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것이 차별인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미국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오는 516일 오후 2~8시 서울역 광장에서 ‘2015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아이다호 공동행동)을 개최한다. 전국 성소수자, 인권,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는 공동행동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517)을 기념해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경종을 울리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의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과 문화제를 연다.

 

2004년부터 시작된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은 세계 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분류(ICD)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1990517)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517일로 정하고, 현재 전 세계 130여 개국 주요 도시에서 아이다호를 기념한 다양한 캠페인과 액션을 펼치고 있다. 이제라도 당신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내가 왜 당신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면 안 되는 지를 말이다. 무지개 행동은 오로지 로서 살아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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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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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행동

Overdye*~ 2015. 6. 27. 00:08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헌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헌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법치국가는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 나도 국가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긴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비영리 단체가 법인 설립 신청 과정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법무부는 한 쪽에 치우쳐진 인권을 다루는 법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정식 절차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재단 허가여부 6개월 미루다 지난 5월 3일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인권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법인 설립을 불허했다.

 

청소년기의 자아 정체성, 흔하게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없다. 아니 없었다. 12년의 기초 교육과정을 지나오면서 '성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들어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 보시라. 바꿔말하면 개개인을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교육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인생의 제3(생애 주기를 100세로 잡고 네 부분으로 나눈 것)에 들어서야 성 정체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십 대에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 여자 '전혜린'이 있었고 너무 이른 죽음으로 몇 권의 책만을 남기고 떠났기에 박제된 의식이었을 수도 있다.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에 굳이 이거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혼, , 통이다. 누군가의 책 제목 같지만 그 의미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 책은 사회 전반적인 것을 향한 것이니 말이다. 내게 '()'은 당신의 정신이다. '()'은 당신만의 것인 무엇이다. 개성일 수도 당신다운 것일 수도, 암튼 그건 당신의 몫이다. '()'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감이다.

 

 

인간을 여러 이름으로 나누는 일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LGBT'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은 맞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느낌, 마치 번갯불에 잠시 감전된 듯한 느낌을 만났을 때가 있다면 조금은 알 수 있으려나. 굳이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이 내 관심을 더 끌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3년 전 여름이었다. 초저녁무렵이었고 'PO PO'라는 이름의 그 곳에는 고양이가 무섭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고양이를 싫어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우연하게 '성 정체성'에 관한 궁금증을 찾아 가면서 나의 평소 습관이 나를 얼마나 안일하게 만들어 왔는가도 깨달았지. 내가 좀 더 활동적이고 폭 넓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인생 3기에 와서야 이 궁금증을 갖고 이리도 기웃기웃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지금까지야 성 소수자 인권을 위해 행동하는 단체에 후원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접적으로 열심히 알아가는 중이다. , 나에게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마주할 기회를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채 청년기를 지나왔다는 그 사실에 화가 난다. 자아정체성을 위한 그만큼의 노력이 성 정체성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런 생각들을 제대로 써보게 된 것은 지난 1월에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빵집에서 일어난 일인데 케이크를 주문한 사람이 빵집 주인에게 자신을 차별했다고 시작된 사건이다. 그가 원했던 케이크 위에 쓸 문구는 "Got hates gays"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종교를 믿건 그렇지 않건 이 문구를 쓸 자유도 있지만, 그 문구를 거부할 자유도 있다. 그것을 '차별'의 의미로 다가선다면 이해할 수가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신(GOD)은 선(Good)이다. 그걸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덴버의 한 베이커리는 LGBT 권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빌 잭이라는 손님은 스스로가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기독교라는 자신의 종교 때문에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잭은 지난 3월 아주카 베이커리에서 성경 모양의 케익 두 개를 주문했다. 여기까지는 주인 마조리 실바에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잭은 이 케익에 "신은 동성애자를 증오한다"라는 문구 등의 반 동성애 문구를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두 남성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위에 크게 붉은 X자를 그려 달라고 요구했다. 실바는 KUSA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그의 차별적 행위를 거부했다고 해서, 나에게 오히려 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해요."라고 말했다. 결국 실바는 잭이 요구한 메시지를 케익에 새기는 것을 거절했다. "저는 그저 옳은 것을 위해 저항한 것 뿐이에요. 모든 차별과 증오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나은 곳이 될 지 상상해 보라구요! 저는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저항할 것이고, 저의 경험이 부당함을 마주한 다른 사람에게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GOD LOVES EVERYONE!"

빵집 주인이 그의 주문을 거부한 이유이다. 과연, 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것이 차별인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미국은

2015년 6월 26일로 세게사의 한 순간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오는 516일 오후 2~8시 서울역 광장에서 ‘2015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아이다호 공동행동)을 개최한다. 전국 성소수자, 인권,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는 공동행동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517)을 기념해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경종을 울리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의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과 문화제를 연다.

 

2004년부터 시작된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은 세계 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분류(ICD)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1990517)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517일로 정하고, 현재 전 세계 130여 개국 주요 도시에서 아이다호를 기념한 다양한 캠페인과 액션을 펼치고 있다. 이제라도 당신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내가 왜 당신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면 안 되는 지를 말이다. 무지개 행동은 오로지 로서 살아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이고 싶다.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아빠를 찾아 나서는 기웅.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성적 1등급의 우등생 용주와 학교 내 폭력서클의 우두머리가 된 일진짱 기웅이 선택한 방법은 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친구'였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절친했던 두 친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로 엇갈린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지요. 함께 중학교를 다닌 기택이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자, 기택을 감싸고 여전히 가까이 지내는 용주와 달리 기웅은 이들을 지켜보기만 하죠. 허나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선택한 기택의 제보로 용주는 학교에서 졸지에 추락하여 조롱거리가 됩니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용주의 엄마는 비혼모로 당당합니다. 아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기웅은 엄마와는 단절된 채 직장에서 해고되고 복직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갔다 와 숨어 살고 있는 아빠를 찾아 다니죠. 기웅의 모습과 다를 수 잇었던 용주의 내면에 쌓인 힘은 가정환경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지요.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다면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강제 전학을 시킵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한다면 상관없는 일이 되기도 하죠. 학교는 학생이 아니라 '서울대'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용주의 성정체성의 다름을 무시해 버리죠. 아주 쉽게.

 

"그런 거 다 상관없어. 서울대만 가!"

 

2014년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 학교 벽에 자신을 남기고 떠난 용주.

 

학교폭력이 왜 발생하게 되는 지, 아이들은 왜 서로를 깔아 뭉개며 싸워야 하는 지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 문제를 의식하게 됩니다.

친구가 성적보다 중요하냐며 다그치는 학교 선생님까지 세상의 비틀어진 잣대와 어른들의 왜곡된 시선을 십대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몸으로 은밀하게 제보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몸짓을 사회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거죠. 준비가 안 된 사회, 개인의 삶이 자유의지로 발휘되기 어려운 한국사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현실인 것일까요. 부디 많은 어른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가 19금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문제가 바로 어른들이 만들어낸 원인에 의해 나타나는 어두운 현상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기성세대의 은폐하고 싶은 욕구를 대변하는 것이라 여겨지더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교묘하게 금지하는 나라, 그래서 더욱 어둡기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제보자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를 향해 말을 겁니다. 그들의 말에, 행동에 귀 기울이고 어울릴 수 있는 이 사회의 성찰과 격려, 응원까지 너무도 간절합니다.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그들 스스로의 몸짓으로 제보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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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딩포레스터

Overdye*~ 2015. 6. 26. 10:24

사전적으로 ‘소수자’는 ‘적은 수의 사람’일 뿐이다. 허나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는 단지 그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다. 의미가 전복되는 경우는 넘친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 ‘소수자’라 하면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장애인, 성적소수자, 비혼모 등. 하지만 또 다른 소수자도 분명 있다. 청소년용으로 1등급, 분명 소수자이다. 대학생용으로 명문대, 직업별로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인 소수의 기득권자들까지. 그들도 분명 소수자이다. 그 다음은 너절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유추해 나갈 여지는 많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로 들어가 보기 위해 ‘소수자’로는 연관 검색어로 뜨지 않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를 통해 이어가려 한다.

 

 

▲ 2001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1. 과연 영화의 주인공은 소수자일까

 

2001년 개봉된 영화,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작품 <파인딩 포레스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소수자이다. 열여덟의 소년이 보여주는 농구와 문학적 재능, 은둔자로 살아가는 바로 50년 전 전설적인 데뷔소설을 발표한 후 모습을 감춰버린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

 

길거리 농구를 즐기는 고등학생 지멀 월러스와 그의 친구들은 동네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상한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호기심으로 지멀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하지만 뜻밖의 상황에 놓여져 가방을 놓고 나오고 그 집의 주인공 포레스터는 가방 속의 습작노트에서 평범함을 뛰어넘는 지멀의 수많은 글들을 발견한다.

 

다음 날 지멀은 그의 창문에 걸린 자신의 가방을 발견하지만 가방을 찾기 위해 아파트를 오르지는 못한다. 가방은 창 아래 길바닥으로 떨어지고 자신의 글들에 쓰여진 빨간색의 글씨를 발견하고 지멀은 포레스터를 다시 찾아가게 된다.

 

브롱스를 벗어나 스카우트되어 (지멀의 표현으로 콤마가 두 개인 상류층이 많은)사립고등학교의 농구 선수로 활약하게 되는 지멀은 그곳에서 낯선 자로 ‘소수자’이다. 이런 영화 속의 사회적 환경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게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실, 특목고와 자사고 등, 이미 고등학교에서 교육의 평등선은 사라졌다. 부모의 부(富)가 자식으로 대를 잇게 되는 ‘지배블록’이 굳건해 지고 있으니까. 최근에 언급되어 2014년에 개교를 앞둔 일명 ‘삼성고’라 불리는 자사고의 설립 과정과 개교에서 벌어질 기득권이라는 소수자가 누리는 시혜는 인권 침해라거나 생존 위협을 거론하는 ‘소수자’로서 만날 공포감은 결코 아니다.

 

지멀의 호기심으로 알게 된 은둔자 포레스터는 개인적인 상실의 아픔에서 스스로를 가두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저명한 작가로 그 또한 ‘소수자’이다. 그 둘의 만남은 서서히 진행되면서 때묻은 고전 서적들과 정적만이 가득했던 포레스터의 은둔지를 두 대의 타이프라이터의 소리와 웃음, 논쟁, 학문에의 열정으로 채워간다.

 

포레스터는 이 어린 소년을 따라 지난 40여 년 간 닫고 살아온 창 밖의 세상과 조금씩 조우하게 된다. 그 후 지멀은 포레스터에게 문학을 배우고 교감을 나누고, 포레스터는 지멀 덕분에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다.

 

 

▲ 지멀의 글쓰기를 위한 조언을 하는 포레스터

2. 소수자의 분류 기준은

 

이 영화에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답습되고 있는 많은 관습적 사고를 만났다. 소수자로 주류가 되는 인생들과 소수자이기에 비주류로 분류되는 삶은 어떤 기준이 있기에 가능하게 인식되어 왔던가에 주목하게 되었다.

 

주류와 비주류의 분류마저도 언제, 누가, 왜, 만들어 놓은 것인 지 출처는 분명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별 거부감 없이 사용되는 주입된 언어들로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위 1%의 부자들에게, 또는 1등급을 맞은 학생들에게 결코, 소수자라고 명명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다수에게 부정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소수자이기에 받아야 하는 부당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희생을 해야만 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빈번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의 소외는 공동체의 해체에 의해 야기되어 왔다. 기본 단위의 가족에서부터 친구, 직장, 학교 등의 공동체에서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음을 선택하고, 일상의 고통은 불편한 진실이 되어 암묵 속에 놓여져 있다.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지는 사회, 알 수 없는 공포에 자기를 추스르기 힘든 이 곳에서 나는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 참여연대,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공약파기 규탄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대선 당시 공약이 상당수 파기되거나 퇴행하고 있다며 애초 약속대로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뉴스1

3. 영화 속 인물과 대화

 

영화에서 포레스터는 지멀에게 묻고 답한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거지. 우린 이해가 안 되면 가정(假定)을 하게 된단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 개인이 놓인 사회적 환경에 의해 그를 판단해 버리는 오류를 아주 쉽게 저지른다. 오류의 면역력에 의해 진행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적 자아에 길들여지게 하고, 관계를 맺게 하여 그것만이 성공적인 삶인 것처럼 꾸며낸다는 것이다. 개인적 자아는 실종되어 ‘내가 누구지?’ 라는 끝없는 질문을 허공에 되뇌일 뿐.

 

더 이상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 자각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거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소수자는 구분되어 지는데 합리적 이성을 강조한 ‘공리’와 ‘편견’이 근거로 자리 잡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하게 만들어 왔다.

 

브롱스라는 지역의 나쁜 환경에 놓인 소년의 문학적 재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선생은 결국 지멀의 글에 문제 제기(포레스터의 글 제목을 도입으로 쓴 것)를 하고 지멀은 글의 출처에 대한 해명을 요구 받는다. 즉 스스로 쓴 글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려 한다.

 

▲ 지멀의 문학적 재능을 시기하며 문제 제기를 하는 문학선생 크로포드

“자네에게 제안을 하겠네. 이젠 모든 걸 잊고 내년에는 학업계획이 좀 느슨하게 짜여질 거 야. 자네가 할 일은 이번 토너먼트에서 승리를 안겨다 주는 거지. 그것만 해 내면 내가 알 아서 하마.”

포레스터의 글을 인용한 것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없는 지멀이 마지막 농구시합에서 우승하는 것만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시합이 종료될 시간에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자유투를 얻은 지멀은(의도적인 듯) 실수로 득점을 하지 못했다.

지멀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위해 그들이 원하는 승리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인생에서 마주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은 행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지멀은 자신의 성공보다는 ‘우정’을 선택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킴으로

포레스터가 세상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친애의 힘이다. 그런 지멀을 돕기 위해 학교로 나온 포레스터는 지멀이 그에게 건넨 글을 읽는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친구를 돕기 위한 포레스터의 선택이었다.

“가족을 잃게 되면 가족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됩니다. 피를 나눈 가족만을 의미하는 게 아 니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말하기도 하죠.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면 그들에게 품었던 소망...마지막으로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라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소수자의 친애가, 우정이 거둔 승리는 타자들에게 전해질 진심으로 충분히 감동적이다. 나도 지멀의 글을 들으며 친애하는 ‘나의 지멀’에게 전하고 싶다.

“너를 잃고 나서 후회의 마음에 시달리기 보다는 너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킬 수 있어 야 한다는 거. 너를 지켜줄 수 있음으로 나도 살아날 수 있다는 거. 그렇기에 너는 내가 부를 이름으로 온전한 ‘너’로 있으면 되었다.”

▲ 포레스터와의 친애를 선택한 소년 지멀

4. 소수자인 나와 너의 세계

다수에 속하지 않는 의미로 일반화 될 수 없는 이들을 내 나름대로 소수자라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분명 소수자인 거 맞다. 나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기에 소수자로서 이 사회에서 제도와 무지와 편견으로 요구하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히 거부한다. 그래서 나는 함께 나누고 싶은 너의 희생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상황에 놓인 부분의 이해는 가능하겠지만. 그 부분으로 한 개인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보기에 ‘느껴주기’로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대신할 수 있었다고. 그 느낌을 나눌 수 있는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친애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영화 속에서 지멀과 포레스터의 교감이 ‘우정’이라는 친애의 사랑을 쌓을 수 있게 해 주었고, 각자 스스로의 삶에 당당하게 맞서 나아갈 힘을 서로에게 준 것처럼.

▲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시작, 포레스터의 화려한 외출

인간의 다양성에서 시작되는 삶의 모습들, 또한 사회의 각 분야에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분되어, 늘 소수자로서 받아야 하는 부당함들이 있다. 그것들은 ‘나’에게서 시작될 수 있었고 ‘너’로 하여 이어지기도 한다.

소수자라는 ‘구분’이 사라질 때 우린 비로소 ‘인간’으로서 대등해 질 수 있을 거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는 나이기도, 또 너이기도 하기에.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나기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분명 적어질 것이다.

중증 장애인의 1인 시위, 세대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자살이 넘치는 사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어린이들이 많은 사회, 기계와 벗삼아 놀아야 하는 청소년, 철탑 위로 올라간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너가 같은 성(性)이라는 이유로 모멸의 대상이 되는 사회, 너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넬 수 없는 내가 있다.

▲ 지멀을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온 포레스터, 아름다운 우정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글이 훨씬 나을 수 있다는 포레스터의 말을 옮기면서 웃고 있다.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꿈을 꾸는 것을 잊지 않도록, 내게는 주인공 포레스터와 그의 친구 지멀처럼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에 꿈을 꾸고 있는 친애하는 ‘너’가 있다는 것이기에.

그래서 나의 세계는 이렇게 작동될 수 있는 것이라고.

‘협동조합’이라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확산된 여러 현상들을 도처에서 발견한다. 내 주변을 돌아 보며 나와 교감할 수 있는 너를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어쩌면 내 옆에서 웃고 있는 너가 있었음을 발견해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을 기웃거리며 함께 공감하는 우리는 소수자이다. 이 사회의 구분에 의해 명명된 소수자들이 자유롭게 소리낼 수 있는 사회는 개인의 시작에서 가능하다. 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되돌아 보며 내 옆에 있는 너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을지라도 너가 함께이면 가능하지. 그렇다고 해 주시라.

Posted by 보랏빛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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